0020 / 0219 ----------------------------------------------
기사와 성녀
[20] 기사와 성녀
“ 성녀님. ”
위엄 있는 굵은 저음에 아리스텔라는 흠칫거리며 커튼을 걷었다. 자신의 방에 들어온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깨에 닿는 길이의 금발을 하나로 묶은, 푸른 눈동자의 남자였다. 로이드와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신전의 성기사인 듯했다.
“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기사단의 부단장, 케인이라고 합니다. ”
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로이드와 비슷한 정도의 덩치에, 나이는 그보다 위로 보였다. 30대 중반쯤일까. 그래도 젊은 나이지만 20대가 많은 파릇파릇한 신전 사제들과 성기사들 사이에서는 제법 연륜이 있어 보이는 원숙한 기사였다.
“ 저, 저기……, 저는 시종을 불렀는데요……. ”
“ 전날 대신관께서 성녀님이 위험에 처하실 뻔한 것을 이유로, 당분간 사제가 아닌 기사에게 성녀님을 호위하라 명하셨습니다. ”
새로운 시종을 보낸다더니, 설마 기사를 보낸 건가?
가뜩이나 남자를 어려워하는 아리스텔라는 소년도 아니고 원숙한 기사가 자신의 시종을 맡는다는 것이 어색하고 부끄러웠으나 이미 전날 어마어마한 광역 민폐를 끼치고 다녔기에 차마 시종을 바꿔달라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 크리스와 비슷한 금발인데, 인상은 전혀 달라. ’
아리스텔라는 이불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리며 케인의 얼굴을 살폈다. 케인은 저를 경계하는 듯한 성녀의 모습이 흡사 야생에서 인간을 보고 경계하며 수풀 속으로 숨어드는 토끼와 같다고 생각했다.
‘ 이분이 성녀님인가. ’
처음에는 멀리서 스쳐 지나간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 성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앙의 여신을 몸에 봉인한 성녀라기에 요녀나 악녀의 모습을 상상했건만, 침대에서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자신의 눈치를 보며 수그러드는 성녀는 몹시 작고 연약해 보였다.
‘ ……난처하군. ’
전장에서 검을 잡고 적을 무찌르거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젊은 기사들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일은 자신 있어도, 이렇게 작고 연약한 소녀 같은 여인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노련한 케인도 알지 못했다.
대신관 히페리온은 신전 밖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케인이라면 여성에도 익숙하리라 여겨 그를 시종에 임명한 것이지만, 케인은 이렇게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생물을 돌보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그런 케인이 시종 임무를 수락한 것은 로이드에게 성녀의 시종을 맡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처음 히페리온이 새로운 시종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을 때 먼저 자원한 것은 로이드였다. 그러나 이미 로이드는 한번 성녀가 다쳤다는 말에―사실 다쳤다고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이성을 잃고 사제들과 몸싸움을 하려 했던 전적이 있었다.
성녀를 가까이서 보필해야 하는 시종이 쉬이 냉정을 잃는다면 일의 우선순위를 망각하고 큰 실수를 할지도 모른다.
귀족이라는 자긍심은 강해도, 아니 그러기 때문에야말로 더욱 고고했던 로이드가 어째서 성녀의 일에 이토록 흥분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를 성녀의 곁에 두어선 안 될 것 같았다.
히페리온이 케인에게 성녀의 시종으로 일할 생각이 있는가를 물었을 때 곧바로 수락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 성녀님을 부탁합니다, 케인 부단장. >
케인은 포탄이나 화살비가 쏟아지는 전장도 아니고 결계로 완벽하게 보호되는 이 신전 안에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기사에게 직접 성녀를 호위하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기사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존재였다. 소년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기사로 살아온 케인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치워두고 묵묵히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연약한 성녀를 겁먹게 하지 않고 시중을 들 수 있을지 난감한 심정으로 성녀를 바라보는 케인의 눈빛을, 어제 민폐를 끼치고 다닌 자신을 힐난하는 거라 여긴 아리스텔라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 나를 싫어하나 봐. 내가 어제 실수한 일이 기사들에게도 알려진 걸까? ’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해가 밝게 빛나고 있다. 새벽 기도는 벌써 끝난 지 오래일 테니 정오 미사라도 참석해야 했다. 누구도 그녀에게 미사에 나오라 말하지 않았지만 성녀라는 여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식충이처럼 지낼 수는 없었다.
‘ 미사에 참석하려면 서둘러 준비해야 해. ’
대미사 전에는 금식이라기에 따랐으나, 일반 미사 전에도 금식을 해야 하는 걸까. 아리스텔라는 어제 저녁 한 끼밖에 먹지 못했다. 그마저도 밤새 남자와 몸을 섞느라 지친 상태였기에 체력을 보충할 음식이 필요했다.
케인이 자기를 무섭게 노려보는데도─물론 케인은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지만─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 그, 저기……. ”
“ 케인입니다, 성녀님. ”
“ 케인……. 저, 아침을 먹을 수 있을까요? ”
로이드의 말로는 마을에서 신전으로 오는 내내 속이 거북하다며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던데, 과연 그녀도 인간인 이상 언제까지고 굶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전장이 아니니 식량을 아낄 필요도 없었다. 케인은 곧 수긍하고는 요리장에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게 했다.
히페리온과 조슈아가 서로 다른 이유로 신신당부를 한 탓에, 요리장은 빈속에 먹어도 쉽게 체하지 않으면서 체력을 회복시킬 요리를 구상하느라 몹시 애를 먹었으나, 이는 아리스텔라도 케인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침식사로 나온 것은 부드러운 빵과 따뜻한 오트밀,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놓은 제철과일이었다.
“ 잘 먹겠습니다. ”
케인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식사를 하는 아리스텔라를 보고 마치 사육장의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기분이 되었다.
저렇게 작은데도 입이 있어서 음식을 씹고 삼키는구나. 빵을 엄청 작게 뜯어먹는구나. 그럼 과일도 더 작게 잘라야 하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리스텔라가 반쯤 먹고는 상을 물렸다.
“ 더 드시지 않는 겁니까? ”
“ 이제 괜찮아요. ”
케인이 바라보는 시선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라고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일단 허기를 채웠으니 정오 미사는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텔라가 어색하게 웃어보이자, 케인은 상을 물리고 그녀의 미사 준비를 돕기로 했다.
“ 그럼 목욕 준비를 돕겠습니다. 성녀님, 이리로. ”
“ 아읏, 잠깐……! ”
케인이 아리스텔라의 허리띠에 손을 대자, 그녀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모르는 남자가, 그것도 덩치가 배 이상 차이가 나는 덩치 큰 기사가 옷을 벗겨주는 상황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입은 채로 욕실에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어제는 옷을 입고 목욕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아론이 욕조 안까지 함께 들어와 그녀의 몸을 직접 문질러 씻겨 주었다. 또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으니 얌전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 아론도 케인도 전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잖아. 어쩌면 이 사람들을 남자로 의식하고 부끄러워하는 건 나에게 성녀로서의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
대미사 준비를 하던 때도 그랬다. 아론은 아리스텔라의 몸을 만지며 목욕 시중을 들면서도 무척 침착했다. 그 손길에 부끄러워하던 것도 아리스텔라였고 흥분해서 참지 못하고 신음했던 것도 아리스텔라였다.
‘ 어쩌면 성녀의 옷을 벗기고 목욕 시중을 드는 것 정도는, 색을 멀리해야 하는 사제나 성기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지도 몰라. ’
섹시함이라고는 찾아볼 수조차 없는, 소녀처럼 가녀리기만 한 아리스텔라의 알몸 따위 그들 앞에서는 통나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게 부끄러웠던 기분도 조금 가라앉았다.
“ 부탁할게요, 케인. ”
여전히 가슴은 두근거렸으나 부끄럽다며 언제까지고 피해서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만 난처해질 뿐이다. 아리스텔라는 크게 심호흡하고 케인의 앞으로 다가가 바로 섰다.
“ 그럼 성녀님의 옷을 벗기겠습니다. ”
“ 네. ”
케인은 조심스럽게 아리스텔라의 옷깃을 벌리고, 허리띠를 푼 다음 소매를 벗겨 냈다.
“ 읏……! ”
거칠거칠한 남자의 손끝이 맨살을 스치는 감촉에 아리스텔라는 작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아리스텔라의 몸을 감싸던 성의가 바닥에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남자 앞에서 전라가 된 아리스텔라는 민망함에 가슴을 가리며 몸을 살짝 돌렸다.
“ 이, 이제 씻으면 되는 거죠? 얼른 씻고 올게요……. ”
“ 모시겠습니다. ”
케인이 성큼 욕실 안으로 발을 옮기자 아리스텔라는 기겁해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 케, 케인? ”
아리스텔라를 따라 들어온 케인은 욕실 문을 닫고, 아리스텔라를 돌아보았다.
“ 대신관님께서 성녀님이 겪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성의는 성녀님의 몸을 보호하는 옷이기에 옷을 입은 채로는 물에 들어가도 가라앉지 않지만, 지금 성녀님은 알몸이십니다. 넓은 욕조에서 발을 헛디뎌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
“ 네? 아, 그, 그렇지만……! ”
남자와 함께 목욕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 앞에서 알몸이 되었는데, 설마 따라 들어올 줄이야!
============================ 작품 후기 ============================
선작과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합니다.
s데스엔젤s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등장하는 남주 후보는 10명 이내입니다.
각각의 비중은 비슷하게 맞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