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19화 (19/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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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마음

[19]

―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은빛의 검이 부딪쳤다. 빠른 속도로 파고드는 로이드의 검을, 부단장 케인은 노련한 솜씨로 막아냈다.

“ 로이드 기사단장. 초조함에 여유를 잃으신 것 같군요. 아무리 재빠르다 한들 빈틈이 많은 검은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줄 뿐입니다. ”

“ 읏……! ”

분명 검술 실력은 단장인 로이드 쪽이 한 수 위였으나, 귀족 출신으로 정규훈련을 받아 실전경험 없이 바로 성기사가 된 로이드와는 달리, 케인은 전장에서 구르며 실전경험을 쌓아온 전사였다.

단 몇 합으로 승패를 가르는 정규 시합에서는 로이드에게 패배했지만, 실전을 표방한 대련에서는 케인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궁지에 몰려도 살 길을 찾아내는 냉정함, 상대에 따라 다른 전법을 구사하는 유연한 판단력은 때로 순수한 검술 실력보다도 대련의 승패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법이었다.

“ 대련 중에 한눈을 팔지 마십시오! ”

케인의 검이 로이드의 검을 받아치자, 로이드는 검을 놓쳐버렸다. 붕 소리를 내며 날아간 은색의 검은 연무장의 바닥에 푹 꽂혔다.

“ 후우……. ”

“ 사제들에게 가로막힌 것이 어지간히 분하셨던 모양이군요. ”

“ ……음, 뭐. ”

로이드는 작게 혀를 차고는 바닥에 꽂힌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그가 고개를 털자 땀에 젖은 은발이 흔들리며 달빛을 반사했다. 깊은 자주색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밤늦은 시각, 성녀를 보필하던 금발의 수습사제가 다리를 다쳐 다른 사제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것을 보고 로이드는 깜짝 놀랐다.

성녀의 시종이 다쳤다니. 혹 성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첫날 이 신전으로 아리스텔라를 데려온 이후, 쭉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로이드는 마음이 급해져 수습사제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금발의 수습사제는 동그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로이드의 시선을 피하다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자신 때문에 성녀님이 위험에 처했던 거라고 고백했다. 그 말을 들은 로이드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 성녀님이, 위험에……! ’

폐쇄된 신전은 이 신성제국의 그 어느 장소보다도 안전한 곳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이 신전 안에서 성녀가 다쳤다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지하실에서 촉수괴물의 습격을 받았다고는 하나 사실 아리스텔라는 다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리스텔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모르는 크리스는 아리스텔라가 괴물에게 붙잡혀 능욕을 당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고, 그저 무서운 괴물을 만나 겁을 먹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리라 생각해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수상한 괴물을 만난 정도로 겁을 먹을 리 없는 용맹한 성기사 로이드는 말을 아끼는 크리스의 반응을 보고 아리스텔라가 크게 다친 거라고 오해했다. 성녀가 다치지 않고서야, 수습사제가 저렇게 죄책감에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눈물을 보일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크리스가 말을 아끼는 바람에 로이드는 오해하여 크게 분노했고, 성녀의 상태를 보기 위해 그녀의 방으로 가려 했으나 사제들에게 가로막혔다.

대신관이 성녀를 구해내고 그녀를 무사히 방으로 옮겼으니, 사건이 마무리되어 기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게다가 이 늦은 밤중에 성녀의 방에 기사를 들여보내는 것이 부당하다 판단한 탓이기도 했다.

‘ 왜 성녀님의 상태를 보게 해주지 않는 거지? ’

한밤중에 여자의 방에 찾아가는 것이 당연히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것을 귀족 출신인 로이드가 모를 리 없었으나, 성녀가 다쳤다는 생각에 냉정함을 잃은 로이드는 머릿속에서 상식을 지워버리고 저를 가로막는 사제들을 원망했다.

힘으로라도 사제들을 밀어내고 성녀의 방으로 향할 기세인 로이드를 부단장인 케인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몸싸움으로 번졌을 것이다. 케인은 자긍심 강하고 기사도를 중시하는 로이드가 어째서 이토록 냉정을 잃고 초조해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로이드가 기사단을 이끌고 성녀를 찾으러 나섰을 때, 신전에 남아 이곳을 지키던 케인은 그저 멀리서 지나가는 성녀를 한번 보았을 뿐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성기사의 역할은 신전의 사제를 보호하는 것이나 폐쇄된 신전에 불온한 무리가 쳐들어올 리 없으니 실상 기사의 역할은 경비를 서면서 신전 내부를 관리하고, 큰 의식이 있을 때 보여주기 식의 경비를 서는 것이 전부였다.

말이 기사지, 실제로 이곳에서 기사다운 공적을 올리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기사들은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 기사로 발탁되는 일을 꺼려했고, 이 폐쇄된 신전을 < 영원한 감옥 >이라 불렀다.

“ 성녀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대신관께서는 높은 수준의 신성 마법을 구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지간한 상처는 신성력으로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

“ 성녀님께서 정말 무사하시다면, 어째서 모습을 보게 해주지 않는 거지? ”

약간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을 뿐 신성 마법은 쓸 수 없는 케인과는 달리 로이드는 사제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제법 괜찮은 수준의 신성 마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성녀의 치료에 자신도 힘을 보탤 수 있을 터인데, 어째서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는가.

로이드는 저로부터 성녀를 숨기려는 듯이 막아서는 사제들을 의심했지만, 케인이 보기에 사제들이 로이드를 막는 것은 타당했다.

아무리 로이드가 신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제의 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이 늦은 밤에 성녀의 방에 무장한 기사를 들여보낼 수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사제와 기사는 서로 사이가 나쁘다. 자신들이 성녀를 보필할 수 있는데 기사의 힘을 빌리려 할 리가 없다.

“ 신전 근무가 지루하여 몸이 근질근질하니 딴 생각이 나시는 게지요. 내일은 전원을 소집하여 대련이라도 하면 어떨까요. ”

자존심이 상해서 냉정을 잃은 로이드에게 현실을 직시하라고 훈계한들 들을 리가 없으니 케인은 적당히 말을 돌렸다. 로이드는 케인의 말을 건성으로 흘려들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똑똑.

연무장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로이드와 케인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 문가에 서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대신관 히페리온이었다.

“ 히페리온 대신관. 이 시각에 연무장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

로이드의 목소리에는 다소 날카로움이 묻어나왔으나, 히페리온은 신경 쓰지 않고 로이드와 케인을 번갈아 보았다.

“ 로이드 기사단장, 케인 부단장. 성녀님의 일로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

“ 성녀님의 일이요? ”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던 로이드의 눈이 크게 떠지며 곧바로 그에게 달려들 듯이 물었다.

히페리온도 신관치고는 장신이라고 하나 거구의 기사인 로이드나 케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두 기사를 올려다보는 히페리온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경계심도 없었다.

“ 소식을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녀님의 시종을 맡겼던 수습사제가 다리를 다쳐 시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

“ 예. 알고 있습니다. ”

“ 그래서 성녀님의 시중을 들, 새 시종이 필요합니다. ”

히페리온의 말에 로이드와 케인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 ◇

아침햇살이 환하게 방안을 비출 무렵에야 아리스텔라는 힘겹게 눈을 떴다. 허리가 저릿하고 온몸이 뻐근했다. 어젯밤 조슈아와 관계한 것 때문일까, 허리가 아파서 잠을 설친 듯했다.

아무리 음욕의 여신을 봉인한 몸이라고는 하나 그녀의 몸은 겨우 이틀 전 처음으로 남자를 알았을 뿐이다. 아리스텔라가 기억하지 못할 뿐 몸은 어제 하루 사이에 세 번이나 남자를 받아들였으니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신전의 공기는 청정하게 기분을 정화해줄 뿐 아니라 약간의 치유효과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는 격렬한 정사 후의 통증을 잠재울 수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 아리스텔라는 머리맡의 종을 흔들었다. 짤랑짤랑. 맑은 소리가 울리면서 대롱을 타고 소리가 흘러 떨어졌다.

‘ 아, 참. 크리스가 다리를 다쳐서 새로운 시종을 보낸다고 대신관님이 그러셨지. ’

뒤늦게 히페리온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옷은 조슈아가 입혀주어 성의가 빈틈없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야겠다 싶어 급하게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기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눈가가 조금 부어 있었다.

‘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

조슈아와 두 번이나 관계를 가지고, 그가 다정하게 자신을 안아준 것을 의무가 아닌 호감이라 착각했다. 섹스는 사랑하는 연인 간에만 하는 것이라 생각한 아리스텔라는 그를 특별하게 생각했지만, 조슈아는 원해서 그녀를 안은 것이 아니었다.

성녀를 섬기는 신관이기에, 몸이 달아서 참지 못하는 그녀의 욕구를 풀어준 것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아리스텔라에게 앞으로 성욕이 들끓으면 다른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말할 리가 없었다.

아리스텔라가 조슈아를 생각하는 마음이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차여버렸으니까.

정사의 후유증과 감정의 동요로 정신도 몸도 지친 상태였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로가 남아있다는 것은 아리스텔라의 기분을 저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제 기분이 울적하다고 그것을 티낼 수는 없다. 오늘도 새벽 기도를 나가지 못하고 쿨쿨 잠만 자지 않았나. 정오 미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야겠다고 다짐한 아리스텔라는 손바닥으로 뺨을 찰싹찰싹 두드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어깨를 떨었다. 제가 종을 울려 시종을 불러놓고 놀라는 것도 우습지만, 방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의 커다란 그림자를 보자 무심코 어깨를 움츠리며 이불로 몸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 저기, 누구……세요? ”

침대를 둘러싼 커튼 때문에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거구에 갑주를 두른 인영은 흡사 기사의 모습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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