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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리는 마음
[18] 엇갈리는 마음
이것은 꿈일까. 그렇지 않으면 현실일까. 꿈이라 여기고 싶었으나 그녀를 안고 있는 팔의 온기가 너무 생생했다.
“ 조슈아……, 맞지요? 나……. ”
아리스텔라가 눈을 깜박이자 눈가에 가득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몸이 달아서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로 의식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설마 자신은 이 한밤중에 뛰쳐나와 조슈아를 찾아왔다는 말인가.
“ 흐윽……! 미안해요……. ”
광역 민폐에 이어 정욕에 미친 여자라니. 이런 성녀를 보필해야 하는 사제와 기사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비밀을 가져야 하는 조슈아는 또 어떻게 자신을 대할까.
아리스텔라는 지금 상황이 너무 무섭고 슬퍼서 훌쩍훌쩍 울었다.
“ 울지 마세요, 성녀님. ”
“ 어, 어쩌면 좋아요……. 내가, 두 번이나 당신에게……. ”
여신이었을 때의 기억이 없는 건지,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와 관계한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그 전에 누군가와 있었을 첫 경험도.
그렇다면 아리스텔라는 자신과 관계한 두 번의 경험밖에 기억에 없을 것이다. 조슈아는 곤혹스러웠다. 하필이면 그녀가 기억하는 두 번의 섹스 상대가 같은 남자라니. 이래서야 오해를 받아도 어쩔 수 없다.
“ 괜찮습니다, 성녀님.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
“ 흑, 흐윽……. ”
“ 자아, 여기 누우시고……. 뒤처리를 하고, 방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 히끅. ……네에……. ”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두 번이나 섹스를 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는지, 아리스텔라는 부끄러움도 잊고 조슈아가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워 다리를 벌렸다. 그녀의 음부에서 흘러내리는 자신의 정액을 보며 조슈아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나, 이제 어쩌죠……? ”
“ 꿈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성녀님. ”
“ 신을 모시는 성녀가 거짓말을 하고, 신관인 당신과……. ”
“ 이곳의 신은 당신입니다. 당신은 여신 위그멘타르의 현신이니까요. ”
조슈아는 머릿속에서 그녀와 여신을 다른 존재라고 분리하고 있었으나 아리스텔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아리스텔라는 아직 정리가 되지 않는 듯했지만 조슈아의 차분한 말에 조금 안정되었는지, 훌쩍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뒤처리를 마치고,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바래다주기 위해 방을 나섰다.
◇ ◆ ◇ ◆ ◇
차가운 밤바람이 뺨에 닿았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들어 바람이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밤하늘에 떠있는 은색의 달이 지상을 비추고 있다.
‘ 밤은 이토록 고요하고 어두운데 달님은 밤하늘에 홀로 떠있는 것이 무섭지 않은 걸까. ’
아리스텔라는 원래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폭력배들에게 납치를 당하고, 어두운 지하실에서 괴물에게 공격을 받고 나니 어두운 공간에 홀로 버려지는 것이 무서웠다. 당연히 안전하리라 믿었던 신성한 신전이 그녀의 생각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그랬다.
불안해진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조슈아는 아리스텔라를 흘깃 돌아보았다가, 싱긋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저 옷깃을 잡고 따라가는 것뿐인데, 누군가 그녀의 곁에 있어준다는 것만으로 가슴 속의 불안이 누그러진다.
‘ 아니, < 누군가 >가 아니지. ’
비록 성녀와 신관으로서 남에게 말 못할 죄를 범해버린 두 사람이었지만, 조슈아와 아리스텔라는 비밀을 공유하게 된 사이였다. 게다가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와 나누었던 두 번의 섹스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슈아를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특별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리스텔라가 자랐던 마을은 작은 마을이라 소문이 빨랐다. 어느 집 아들과 어느 집 딸이 연애를 하면 다음날 온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 연애에는 관심이 없는 아리스텔라의 귀에도 소문은 들어왔다. 마을 처녀와 총각들은 자유롭게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 만약 내가 성녀가 아니었고, 조슈아가 신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연인이 되었을까. ’
혼전순결이 중요시되는 환경은 아니었으나, 남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는 아리스텔라는 사랑을 한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지 못했다. 조슈아는 그녀에게 다정하고 상냥했으며, 그와 몸을 맞추는 행위는 무척 기분 좋았다.
어쩌면 이것이 사랑이 아닐까.
연인이 아닌 남자와의 섹스에서도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아리스텔라는 홀로 결론을 내렸다.
“ 조슈아.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요? ”
“ 동쪽 탑에서 남쪽 탑으로 이어지는 회랑입니다. 동쪽 탑이 사제들의 구역, 서쪽 탑이 기사들의 구역이지요. ”
“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면 사제분들과 기사분들은 평소에 마주칠 일이 별로 없겠네요. ”
“ 예. 그렇습니다. ”
이 폐쇄된 신전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평생을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하는데 서로 가까이 살면서 교류하면 좋은 거 아닌가. 사제와 기사의 사이가 나쁜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나중에 모두와 친해지면 다 함께 모여 파티라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저쪽에는 아직도 불빛이 보이네요? ”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사들의 연무장이다. 이런 야심한 시각에 연무장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는 건 밤 산책을 자주 하는 조슈아에게도 처음이었다.
“ 이 회랑 너머는 기사들의 구역입니다. 저쪽은 연무장이고요.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니 누군가 대련이라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
“ 이런 야심한 시각에요? 기사님들도 힘드시겠다……. ”
아리스텔라의 말에 조슈아는 크리스를 치료하면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성녀가 지하실에서 사고를 당한 일로 기사단장 로이드와 사제들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고 했는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에게 로이드의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직접 본 것도 아닌 일로 그녀를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 ◆ ◇ ◆ ◇
성녀의 방에 도착한 조슈아는 그녀를 방 안에 들여보내고 곧바로 돌아가려 했지만, 아리스텔라는 돌아서는 그를 붙잡았다.
“ 조슈아, 저기…….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줄 수 있나요? ”
낮에도 그는 그녀와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았으니 이번에도 침묵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죄의식에 내내 가슴이 켕겼던 아리스텔라는 조슈아에게 확답을 듣고 싶었다.
“ 성녀님이 원하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
“ 미안해요. 신관인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게 해서……. ”
“ 저는 당신의 종이니까요. ”
성녀를 모시는 사제의 제일 의무는 그녀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신전 안에서는, 성녀의 의사가 사제의 계율보다 더 상위에 있었다. 조슈아가 성녀와의 일을 히페리온에게 숨기면서도 죄책감을 갖지 않은 것도 그 이유 덕분이었다. ‘ 성녀를 위해서 ’라는 명분은 참으로 편리한 변명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성녀님. 혹시 다음에도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
“ 다,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일 없을 거예요! ”
욕망에 미쳐서 이성을 잃고 남자에게 달려가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두 번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아리스텔라는 소리를 높이며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조슈아는 아리스텔라의 어깨를 감싸며 눈높이를 맞추고 나직이 말했다.
“ 성녀님.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그저 억눌러 참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
“ 네? 그렇지만……. ”
“ 사람에게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막으려 하면 괴로울 뿐이죠. 앞으로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참지 마시고, 주위에 도움을 청하세요. ”
도움을 청하라니. 말이 도움을 청하는 것이지 결국 성욕이 들끓으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남자를 침대로 끌어들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 아리스텔라는 조슈아가 자신에게 왜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조, 조슈아는……? ”
“ 예? ”
왜 조슈아를 부르라고 하지 않고,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하는 것인가. 아리스텔라는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 조슈아는 내가 욕구를 풀기 위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함께 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
첫 번째도, 두 번째도, 그녀가 기억하는 섹스는 모두 조슈아와 함께였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을 안아주고 비밀을 지켜준 조슈아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성녀와 신관이기에 연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몸을 섞고 비밀을 공유하면서 서로에게 조금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아리스텔라는 가슴이 아파왔다.
‘ 난 정말 바보야. 그때 분명 조슈아는 ‘ 치료 ’라고 말했는데. 혼자서 착각해놓고 그에게 섭섭해 하는 것은 적반하장이지. 내가 성녀라서, 조슈아는 어쩔 수 없이 내 요구에 따른 것뿐일 테니까. ’
자신을 따르는 사람이 책무를 다한 것을 호감으로 착각하여 사심을 품다니, 음란한 것도 모자라 욕심 많고 어리석기까지 한 자신의 모습에 아리스텔라는 환멸을 느꼈다. 이런 여자가 성녀라니. 지금 당장 신전에서 쫓겨나 화형대에 오르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정도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아리스텔라는 힘들게 웃어 보였다.
“ 앞으로는 조슈아가 말하는 대로 하겠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 성녀님. ”
“ 시간이 늦었으니까 어서 돌아가세요. 조슈아는 내일 새벽 기도에도 참석해야 하잖아요? ”
여인의 몸에 대해서는 해박해도 여인의 감정은 공부하지 못했던 조슈아는 아리스텔라가 어째서 갑자기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 혼란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는 것이 좋을까 망설였으나, 혹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아리스텔라가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에, 조슈아는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왔다.
‘ 여성의 심리는 정말 헤아리기 어렵구나. ’
성녀의 침전을 떠나 사제들의 숙소로 돌아오면서, 조슈아는 날이 밝으면 도서관에 가서 여성의 심리를 분석한 책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