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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텔라의 첫경험
[13]
간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던 탓일까, 섹스 후 나른해진 기분으로 깜박 잠들었던 아리스텔라가 눈을 떴을 때는 해가 거의 떨어져가는 늦은 저녁이었다.
‘ 어쩜 좋아? 그대로 자 버렸나 봐. ’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다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와 아리스텔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통증이 느껴지는 허리를 살살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들기 전까지 자신을 안아주던 조슈아가 없다.
‘ 돌아간 건가? ’
옷차림을 확인하니 깨끗한 성의가 입혀져 있었다. 옷을 여미고 있는 것은 허리춤의 허리띠 하나뿐인데도, 성의는 마치 몸에 착 달라붙은 것처럼 빈틈없이 몸을 가리고 있었다.
아리스텔라는 손끝으로 옷깃을 잡아당겨 보았다. 조슈아가 건드렸을 때는 가볍게 벌어졌던 성의는 아리스텔라의 손으로 아무리 잡아당겨도 벗겨지기는커녕 늘어나지도 않았다.
‘ 신기하네. 여자의 손으로는 벗길 수 없다는 거, 정말이었구나. ’
겉보기에는 그저 하얀 옷일 뿐인데, 이렇게 확인하니 신성력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나서 아리스텔라는 옷깃을 매만졌다. 조슈아의 애무를 받는 중에 구겨졌던 성의는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펴진 상태였다.
“ 앗! 성녀님, 일어나셨네요? ”
언제쯤 일어나려나 싶어 상태를 살피러 온 크리스가 아리스텔라가 깨어난 것을 보고 안심한 듯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 크리스……. ”
“ 성녀님.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
손에 든 쟁반 위에는 몇 개의 그릇이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저녁식사인가 보다.
“ 막 깨어나서 입맛은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드세요. 신전 요리장이 특별히 성녀님을 위해 실력을 발휘했대요. ”
대미사 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규율 때문에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마을을 떠나 신전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내내 긴장해서 몇 입 먹지 못하고 식사를 물렸다. 이제야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자신을 위해 차려진 요리를 보니 배가 꼬르륵거렸다.
“ 잘 먹겠습니다. ”
끓인 지 좀 되었는지 식긴 했지만 여전히 따뜻한 수프, 빵과 샐러드. 그리고 초콜릿 조각 몇 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은 오랜만이다.
신전의 요리는 간을 거의 하지 않는데다 채식 위주로 꾸며져 담백한 식단이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아리스텔라는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다 비웠다.
“ 음~ 맛있어요. ”
후식인 초콜릿을 입안에 넣고 혀로 녹이면서 단맛을 즐기는 아리스텔라를 보고 크리스는 피식 웃었다.
체구도 작고 가느다랗고, 남자가 다가가기만 해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가만히 보면 그냥 평범한 소녀 같은데, 그녀의 몸에 무서운 재앙의 여신이 봉인되어 있다는 것이 크리스는 믿기질 않았다.
‘ 재앙의 여신이라고 해도 결국 여신이고, 이 신전의 주인이니까. 사실은 여신님도 좋은 분이 아닐까? 그분이 인간 세상에 재앙을 퍼뜨렸던 건 분명 인간들이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일 테니까. ’
조용하고 순진한 성녀의 몸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 음욕의 여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크리스는 그녀 안의 여신까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 성녀님이 쓰러지셔서, 낮에 난리가 났어요. ”
“ 네? 저 때문에요? ”
성녀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미사가 급히 마무리된 데다가, 성녀의 상태를 걱정한 크리스가 다급하게 조슈아를 찾아가는 것을 다른 사제들이 목격했다.
비록 조슈아가 아리스텔라를 어떻게 치료했는지 다른 이들은 알 길이 없었으나 미사 중에 성녀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사제들은 이를 불길하게 여겼으나 크리스는 혹 아리스텔라가 자책할까봐 걱정되어, 그 부분을 생략하고 말했다.
“ 아마 대신관님이 성녀님의 이상을 제일 먼저 눈치채셨을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미사 순서를 바꾼 데다 당신의 시종인 제게 제일 먼저 축복을 나누어주실 리 없으니까요. 미사가 끝나고 다시 방을 찾아오셨는데, 조슈아 신관님이 성녀님을 치료하는 중이라고 말씀드리니 그냥 돌아가시더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조슈아가 자신을 치료하는 내내 크리스는 밖에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대신관 히페리온도 방문했었다니.
‘ 소리가 새 나갔으면 어쩌지? ’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눈치를 살폈다.
“ 크리스, 저기……, 소리……. ”
“ 네? ”
“ 소, 소리를……, 들으, 셨나요……? ”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반응으로 보아 아무래도 소리를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성녀를 위해 준비된 방은 상당히 넓은데다 문은 두터웠다. 어지간한 소리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기에 크리스는 조슈아가 아리스텔라의 방안에서 어떤 ‘ 치료 ’를 행했는지 알지 못했다.
“ 소리라니, 혹시 절 부르셨어요? ”
“ 아, 아뇨! ”
아리스텔라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리스는 안도했다.
“ 다행이네요. 절 불렀는데 제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직무유기니까요. 성녀님 방의 문은 무척 두터워서 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저를 부르실 때는 침대 머리맡의 종을 울려달라고 부탁드린 거고요. ”
크리스의 설명에 아리스텔라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신음이 새어나가진 않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첫경험이었다.
아리스텔라는 이제까지 연애는커녕 짝사랑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성녀로서 신전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평생 처녀로 수절하며 지내게 되리라 생각했다. 남자를 어려워했던 아리스텔라는 그 점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방문한 조슈아에게 안기는 기분은 무척 짜릿했다. 처음 느끼는 쾌감에 들떠서, 안기는 내내 이상한 소리도 질렀던 것 같다. 잠들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상기하자 아리스텔라는 또다시 얼굴이 뜨거워졌다.
‘ 미쳤나 봐. 정숙해야 할 성녀의 몸으로, 처음 보는 사제님과 그런……. ’
죄를 회개해도 모자를 판에, 자신을 안아준 남자의 따스한 체온을 떠올리자 또다시 기분이 야릇해져서,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붕붕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 저기, 조슈아는……, 조슈아 신관님은, 돌아가셨나요? ”
“ 네. 성녀님의 상태가 회복되었으니 푹 주무시게 두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어요. ”
조슈아가 크리스에게 방안에서 그녀와 있었던 일을 말하지는 않은 것 같다. 상식적으로 남에게 말할 일이 아니긴 했지만, 그녀는 성녀였고 그는 신관이었으니까 혹 고해라도 하지 않았을까 내심 걱정했다.
성녀와 신관이 성관계를 가진 일이 알려진다면 문책을 면치 못할 것이다. 자신만 벌을 받는다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조슈아까지 벌을 받는 것은 싫었다. 어쩌면 조슈아를 데려온 크리스까지 연좌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비밀로 하는 것이 낫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 그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어야지. 미사 시간에 마주쳐도 태연한 척하려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어. ’
성녀로서 죄를 지은 것을 고백하고 반성해야 할 터인데도,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 방 안에서 일어난 일을 비밀로 하려 하는 자신의 태도에 마음이 켕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 식사를 가져다줘서 고마워요, 크리스. 내내 잤더니 잠이 안 오는데 잠시 바깥을 산책해도 될까요? ”
“ 산책이요? ”
신전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본래 재앙의 여신인 위그멘타르를 가두기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에 다른 신전처럼 신도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꾸어둔 아름다운 정원도 분수도 없었다.
물론 신전인 만큼 있어야 할 것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신전 내부를 사람 대신 골렘이 관리하다 보니 어디를 가든 살풍경한 점은 바뀌지 않았다.
새로운 성녀가 나타날 때까지 사제와 기사들이 모두 이곳에 갇혀 지내야 하는 만큼 저마다 마음에 들어 하는 휴식 공간 하나쯤은 있었지만, 밖에서 나고 자란 아리스텔라에게 크리스가 좋아하는 기도실 뒤의 작은 화단을 보여줬다간 시시하다며 실망할 것이다. 그녀가 구경할만한 곳이 없을까 고민하던 크리스는 신전 내부를 탐사하기로 했다.
“ 알겠습니다, 성녀님.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
“ 네? 시간이 늦었잖아요. 그냥 한 바퀴만 돌고 올 거예요. ”
“ 성녀님은 신전의 구조를 모르시잖아요? 저도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부는 모르지만, 바깥바람을 쐬는 장소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생각해 보니 아리스텔라는 내내 히페리온이나 크리스나 다른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동했다. 이 넓은 신전에서 길을 잃는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벌써 몇 번이나 실수를 했는데, 혼자서 행동하다가 또 사고가 일어나 폐를 끼쳐서야 성녀로서 다른 사제들을 볼 낯이 없다.
“ 네. 그럼 부탁할게요. ”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 제 손을 꼭 쥐자 크리스는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 나보다 작은 사제의 손을 잡았을 때는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왜 성녀님이 손을 잡아주시면 이렇게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걸까. ’
아리스텔라가 자신을 의지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기분 좋았다. 처음 시종이 되었을 때는 무섭고 불안해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성녀의 곁을 지키게 되어 행운이라고 여긴다.
“ 가요, 성녀님. ”
손안의 온기를 확인하듯 작은 손을 꼭 잡고서, 두 사람은 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