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6화 (6/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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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신전

[6]

“ 사제복은 성의(聖衣)라서, 금녀구역인 이 신전의 성의는 남자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입고 벗을 수가 없습니다! ”

“ 뭐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창백하게 질려서 소리를 높였다.

남자가 옆에서 얼쩡거리며 시중을 드는 것도 불편한데, 무려 옷을 직접 갈아입힌다니!

“ 저기, 설마 속옷도……? ”

“ 네에……. ”

크리스의 대답에 아리스텔라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려 보이는 외모라고 해서 조금은 마음을 놓고 있었지만, 남자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맨몸을 보는 상황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곳에 오기 전, 아버지의 빚을 갚으라며 들이닥친 무뢰배들에게 강제로 유린당한 경험이 있는 아리스텔라로서는 더욱 그러했다.

“ 그, 그……. 대신관님께 부탁해서, 성의가 아니라 그냥 다른 평범한 옷을 입으면 안 될까요……? ”

“ 성녀님. 그건 안 됩니다. 이 성의는 성녀님께서 밖에 계실 때 입은 세속의 기운을 정화하고 신성력을 보존하는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

“ 하, 하지만 남자가 제 옷을 갈아입히다니, 그것도 속옷까지……. ”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이유로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리스텔라는 성녀가 되어 신전에 들어와 살면서 절식이나 고행 등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고난이 닥칠 줄이야!

이곳이 금녀의 구역이라는 것을 로이드에게 들었을 때조차도, 설마 착의와 탈의는 물론이고 목욕 시중까지 제 스스로 하지 못하고 남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 저기, 크리스. 제가……. 아, 아직 낯설고 어색해서 그러는데요……. 하다못해 눈을 가리고 갈아입혀주시면 안 되나요? ”

“ 그건, 곤란한데요……. ”

“ 흐윽……! ”

아리스텔라는 너무 민망하고 난처해서 어깨를 떨며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면서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고 생각한 크리스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수습했다.

“ 아,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

시종의 역할은 성녀를 보필하는 것. 명령에는 따르는 것이 제일 원칙이었다.

대신관 히페리온은 성녀에게 성의를 입히라고 명령했지만, 눈을 뜬 채로 갈아입혀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명령을 일일이 내리는 것 자체가 불필요한 일이었으나 어쨌거나 크리스는 명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게다가 어릴 적에 신전에 들어와 남자들 틈에서 자란 크리스로서도 여자의 알몸을 볼 마음의 준비는 아직 되지 않았다.

“ 그, 그럼 눈을 가리겠습니다. ”

“ 네, 부탁할게요……, 크리스. ”

크리스는 성의를 감쌌던 천으로 눈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아리스텔라의 가슴에 손을 뻗었다.

“ 이제……. 먼저, 입고 계신 옷을 벗기겠습니다……. ”

단추를 풀기 위해 아리스텔라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몇 번인가 단추를 풀려다 옷자락을 놓친 크리스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침을 꼴깍 삼키고 힘 있게 아리스텔라의 옷깃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으려고 했는데.

─물컹

“ 꺄아악! ”

“ 히익? ”

두 남녀의 비명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 어, 어, 어딜 만지는 거예요! ”

“ 제, 제, 제가 어딜 만진 건데요? ”

아리스텔라는 후다닥 가슴을 가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났지만, 눈을 가리고 있는 크리스는 방금 제 손에 잡혔던 보드랍고 말캉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워 했다.

무심코 그 감촉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크리스를 보고 아리스텔라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 지, 지금 입은 옷은 제가 버, 벗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호, 혼자서 벗을게요. ”

“ 그, 그래 주시겠, 습니까……? ”

아리스텔라는 떨리는 손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제 옷인데도 몇 번이나 단추를 푸는 손이 미끄러져 옷을 벗는 것이 힘겨웠다. 아무리 눈을 가리고 있다지만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는 경험은 어릴 적 이후로 처음이라 부끄럽고 민망해서 진정할 수가 없었다.

재킷과 볼레로를 벗고, 벨트를 풀자 치마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단추를 풀어 블라우스를 벗었다.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고 드로워즈를 벗어내자 아리스텔라는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아리스텔라는 벗은 옷을 선반에 올린 뒤, 크게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크리스에게 제 상태를 알렸다.

“ 다, 다 벗었어요……. ”

“ 예, 그럼……. ”

아리스텔라는 뻣뻣하게 굳은 상태였으나, 눈을 가린 크리스로서는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알 수 없었다. 크리스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성의를 펼쳐 아리스텔라의 어깨에 감쌌다.

‘ 성녀님의 어깨는 작고 동그랗구나. ’

남자인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것이야 당연하지만, 아리스텔라의 몸은 옷을 걸쳤을 때 보았던 것보다도 더욱 작고 가녀렸다. 손에 닿는 보드랍고 매끈한 살결이 기분 좋아서, 크리스는 그녀의 피부를 옷자락이 가리는 것이 내심 아쉬워졌다.

“ 하읏……! ”

크리스의 손끝이 가슴을 스치자, 아리스텔라가 몸을 바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 서, 성녀님? 왜 그러시나요? ”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른 입혀주세요……! ”

크리스가 또다시 제 가슴을 움켜쥘 기세였기에 아리스텔라는 다급하게 외쳤다. 공중에 멈춘 손이 부자연스럽게 배회하다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았다. 단추도 버클도 없는 성의는 크리스가 옷자락을 잡아당겨 여며주자 마치 자석으로 붙인 것처럼 딱 여며졌다.

‘ 아……. ’

그녀에게서 나던 달콤한 살내음이 옷깃을 여미자 희미해진 것을 느끼고 크리스는 또다시 아쉬워했다.

작고 가녀린 아리스텔라의 몸. 보드라운 피부와 달콤한 냄새가 여자를 모르는 소년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 크리스……? 왜 그래요? ”

“ 아, 아닙니다! ”

아리스텔라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핫 하고 정신을 차린 크리스는 고개를 털고 정신을 바로잡았다. 아까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분투한 크리스는 무사히 아리스텔라의 옷을 성의로 갈아입혔다.

“ 다 되었습니다. ”

성의라고는 해도 성녀를 위해 마련한 의상이었다. 노출이 없도록 깃을 세워 목까지 덮은 디자인이었으나 새하얀 성의는 그녀의 몸 라인을 완벽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 옷을 여미고 있는 것은 작은 장식이 달린 허리띠 하나뿐이었다. 옷에 단추나 매듭이 없는 것에 당황하며 아리스텔라는 혹시라도 몸을 움직이다가 옷깃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다.

“ 고……, 고맙습니다. 이제 눈 가린 거 푸셔도 돼요, 크리스. ”

아리스텔라는 혹시라도 옷깃이 벌어져 가슴이 보일까 봐 손끝으로 옷자락을 누르며 크리스에게 눈가리개를 풀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 와아……. ”

눈가리개를 풀자마자 보이는 아리스텔라의 모습에 크리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추레한 시골 촌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을 때도 아름다웠지만, 새하얀 성의를 입은 아리스텔라는 고고하면서도 우아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성녀가 여신의 현신이라는 것을 반신반의했던 크리스는 성의를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한방에 납득했다.

“ 잘 어울리십니다, 성녀님. ”

옷차림 하나만으로도 사람이 이렇게 달라 보이는구나, 감격한 크리스는 아리스텔라를 칭찬했다.

“ 그래요? 이런 옷은 처음이라 좀 어색한데……. ”

“ 앞으로 익숙해지실 겁니다. ”

목까지 덮은 옷이 익숙해지는 게 먼저일지, 남자가 옷을 갈아입혀주는 일에 적응하는 것이 먼저일지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았으나 아리스텔라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웃어 보였다.

“ 잘 때도 이걸 입고 자나요? ”

“ 예. 성력으로 지어진 옷이기에 불편하지 않으실 겁니다. ”

“ 그렇군요……. ”

“ 그럼 피곤하실 텐데 이만 쉬세요, 성녀님. 내일 아침 대미사 준비를 도우러 오겠습니다. 혹시 그 전에 저를 부르실 일이 있다면 침대 맡의 종을 울려주세요. 언제든 달려오겠습니다. ”

침대 맡의 종이라. 자다가 실수로 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아리스텔라는 생각했다.

아리스텔라가 크리스에게 인사하고 침대에 눕자, 크리스는 자리를 정리하고 방의 불을 껐다.

“ 안녕히 주무세요, 성녀님. ”

문을 닫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어두운 방안에 혼자 남겨졌다는 기분이 들자 아리스텔라는 맘이 싱숭생숭했다.

‘ 낯선 곳에 와서 그런 걸 거야. 푹 자고 내일부터는 빨리 신전 생활에 적응해야지. ’

아리스텔라는 마음을 추스르며 눈을 감았다.

불규칙하던 호흡이 정돈되고 아리스텔라가 깊이 잠들자, 그녀 안에 봉인되어 있던 탐욕의 여신이 깨어났다.

◇ ◆ ◇ ◆ ◇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 여신 위그멘타르는 자신의 몸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 이것이 이번에 내가 얻게 된 몸인가……. ”

가녀린 체격에 아담한 가슴. 머리는 길고 피부는 부드러웠다. 어두워서 거울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어차피 여신인 그녀에게 인간 여자의 얼굴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 이런 갑갑한 옷으로 나를 감싸두고, 뭘 하려는 건지……. ”

위그멘타르는 목까지 덮은 긴 성의를 벗으려 했으나, 아무리 잡아당겨도 그녀의 몸을 감싼 옷자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역시, 아까 들었던 대로 남자가 벗겨주지 않으면 벗을 수 없는 건가……. ”

성녀는 자신의 안에 갇힌 여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지만, 여신은 성녀의 안에 갇혀 있을 때에도 그녀의 기억을 전부 읽어 들일 수 있었다.

위그멘타르는 살짝 고개를 흔들고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신성력으로 방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텅 빈 복도를 간간히 작은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자신을 봉인한 ‘ 제물 ’인 성녀는 매번 다른 여자지만, 어차피 자신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신전은 늘 같은 구조였다.

몸이 익숙하지 않아 생각만큼 빨리 걸을 수 없는 것을 제외하면 이 신전 안에서 그녀가 돌아다니지 못할 곳은 없었다.

“ 시간이 늦었으니 기사들은 자고 있을 테고……기도실에는 깨어있는 사제가 있겠지. ”

위그멘타르는 사제들의 기도실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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