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금된 성녀와 비밀의 밤-5화 (5/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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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신전

[5]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몇 겹이나 되는 결계로 엄중하게 보호받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는 문지기와 보초병은 대부분 사람이 아닌 마법으로 만든 골렘이었고, 성기사들은 그 골렘에게 경비를 설 구역을 지정하고 인간의 섬세한 판단이 필요한 대미사의 경비와 신전에 드나드는 물품의 검비만을 맡았다.

신전 청소와 가사 전반 또한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요정들이 대신했다. 이 신전에 사람이라고는 다섯 명의 신관과 십 수 명의 평사제, 그리고 십 수 명의 수습사제와 30여 명의 성기사, 그 밖의 신전관리인 몇 명뿐이었고, 그들은 전원 젊은 남성이었다.

위그멘타르는 흔히 생명과 평화의 신 헤시우스의 짝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탐욕과 재앙의 여신이며 또한 여자를 몹시 싫어하는 질투의 여신이기도 했다.

그런 여신을 어째서 굳이 여인의 몸에 봉인해야만 하는지는, 성기사인 로이드는 물론 이곳에 들어온 신관들조차 아직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 로이드. 이곳에 여자는 저 하나뿐인 건가요? ”

“ 그렇습니다, 성녀님.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금녀의 구역이니까요. ”

로이드는 자상하게 웃으며 아리스텔라의 질문에 대답했다.

처음 그의 건장한 체구와 기사 특유의 엄격하고 진중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던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의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에 점차 경계를 늦춰가고 있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도개교를 건너 골렘이 경비를 서는 신전의 성문을 지나자, 싱그러운 향기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초목의 향기와는 다른, 마음속까지 깨끗하게 하는 듯한 시원한 향기. 아리스텔라는 그것이 이 신전의 결계를 구성하는 성분이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제가 이 신전의 관리자 히페리온입니다. ”

신전에 도착하자 아리스텔라를 마중 나온 신전 사제들이 문 앞에 모여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서 있는 긴 검은 머리의 남자가 이 신전의 최고 관리자인 듯했다.

‘ 아직 젊어 보이는데 이런 커다란 신전의 대신관이라니……, 굉장히 유능한 사람인가 보구나. ’

거구인 로이드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대신관 히페리온 또한 장신의 미남자였다.

밤하늘을 닮은 검푸른 장발이 폭포처럼 흘러 떨어지고, 반듯한 이마에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섬세한 생김새의 남자였다. 마른 듯하면서도 벌어진 어깨에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와, 짙은 눈썹 아래서 강렬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는 곱상한 그의 얼굴에 남성미를 더해주었다.

바람에 가볍게 펄럭이는 흰 사제복에 두드러지는 남성적인 윤곽에 아리스텔라는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 아리스텔라입니다. ”

두 뺨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하는 아리스텔라와는 달리, 히페리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내심 혀를 찼다.

정중한 태도로 성녀를 맞이했으나 사실 그는 그녀를 꺼리고 있었다.

위그멘타르를 봉인한 성녀는 이 신전의 주인이며 자신들이 섬겨야 할 신 그 자체였으나, 결국은 재앙의 여신을 봉인하는 산 제물에 불과했다.

제물이 사라지면 새로운 제물을 물색해야 하니 신관으로서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셈이었지만 개인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히페리온이 살짝 옆으로 비켜서자 그의 뒤에 서있던 신관과 평사제들이 아리스텔라에세 인사를 올렸다. 아리스텔라는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일제히 인사를 받는 것이 처음이라 당황하였으나 따라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

“ 성녀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제가……. ”

“ 아닙니다. 로이드 기사단장의 일은 성녀님을 이곳으로 모셔오는 것까지. 이 뒤는 우리 신관들에게 맡겨 주시지요. ”

로이드가 아리스텔라를 방으로 안내하려 했으나 히페리온이 가로막았다. 위그멘타르의 신전에서 앞으로 반평생 이상을 함께 지내야 하는 처지는 같았으나, 로이드는 성녀와 신관들의 호위를 맡는 기사였고 히페리온은 여신의 현신인 성녀를 보필하는 신관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은 같을 수 없었다.

이는 또한 신전의 기사가 사제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사제가 기사를 얕잡아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사와 사제의 사이가 나쁜 것을 모르는 아리스텔라는 신전에서는 대신관 히페리온의 말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판단했다.

“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로이드. ”

“ 성녀님……. ”

“ 히페리온 대신관님. 저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

“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

아리스텔라는 로이드에게 인사하고 히페리온을 따라갔다. 성녀를 배웅하기 위해 사제들이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로이드는 흰 성의를 입은 사제 무리 사이로 비치는 아리스텔라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 ◇

“ 이 방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

아리스텔라에게 제공된 방은 그녀의 집 전체를 합친 것보다도 커다란, 넓고 깨끗한 방이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로 꾸며진 방안은 사용감이 없어 살풍경할지언정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에 상상했던 성직자다운 청렴하고 비좁고 낡은 기도실 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 이 넓은 방을 제가 혼자 쓰는 건가요? ”

“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

아리스텔라의 목소리에 실린 놀라움과 떨림을 다른 의미로 해석한 히페리온이 사제를 시켜 새로운 방을 준비하려 하자, 아리스텔라는 깜짝 놀라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 아, 아니에요! 너무 멋있어요. ”

“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잠시 후에 시중을 들 시종을 보내겠습니다. ”

히페리온은 아리스텔라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갔다. 그를 따르던 다른 사제들도 아리스텔라에게 다시 한 번 인사를 마치고 대신관을 따라갔다.

고급스럽게 꾸며진 넓은 방 안에는 아리스텔라 혼자 남았다.

‘ 조용하네……. ’

낯선 공간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 이상했다. 이곳에 오기 전,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처우에 아리스텔라는 조금 당황했다.

밖에서 나고 자라 사제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그녀에게 설교가 쏟아지리라 생각하여 잔뜩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 자신을 안내한 대신관 히페리온의 태도는 형식적이나 몹시 간결했다.

살가운 환영은 아닐지언정 신속하게 자리가 정리되고 저 홀로 남겨진 지금의 상황이 예상 밖이라 아리스텔라는 기분이 조금 멍했다.

이제 자신은 성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혹은 다음 대 성녀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신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족과도 만날 수 없다. 아리스텔라는 의기소침해져서 짐을 푸는 것도 잊고 방안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때였다.

“ 저기……. 성녀님? ”

문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아리스텔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진, 아리스텔라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소년이 문가에 서있었다.

“ 안녕하세요, 성녀님. 제가 앞으로 성녀님을 시중들게 될 수습사제 크리스토퍼입니다. 크리스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

아리스텔라의 시중을 들게 된 시종 크리스토퍼는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수습사제였다. 연하라고는 해도 동년배의 남자답게 큰 키에 늘씬한 체형이었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은 천사처럼 사랑스러웠고, 찰랑거리는 결 좋은 금발은 저녁 햇살을 받아 짙은 황금빛으로 반짝거렸다.

“ 네, 네에……. 잘 부탁드려요, 크리스. ”

아리스텔라의 인사를 받은 크리스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 재앙의 여신 ’을 몸에 봉인한 성녀의 신전에 처음 배속되었을 때, 크리스는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수습사제라고는 해도 신전에 몸을 담고 있는 사제로서 교황청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나.

아무리 신을 섬기는 일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지만 폐쇄적인 위그멘타르의 신전에서 한평생 지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대신관 히페리온에게 성녀의 시종으로서 그녀의 수발을 들라는 명령을 받고 잔뜩 긴장한 채로 들어온 크리스는 아리스텔라의 시골 처녀답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와 순진해 보이는 표정에 깜짝 놀랐다.

수습사제로서 신전에 들어올 때 교육을 받았다고는 해도 크리스는 아직 어린 사제였다. 여자를 만나본 것 자체가 손에 꼽힐 정도인 크리스에게 처음으로 대면하는 성녀의 모습은 놀라움과 충격이었다.

‘ 내가 이런 분의 시종이 된다니. ’

크리스는 한 발 물러나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제가 모셔야 할 성녀이자 여신의 현신이라고는 하나 여자의 곁에 딱 붙어서 수발을 들라는 명령은 곤혹스럽기만 했다.

크리스가 아리스텔라에게 가까이 오려 하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아리스텔라도 조금 긴장했다.

신전 성기사인 로이드도 그 커다란 체구와 무장 때문에 무서웠지만, 그는 신전에 오기까지 아리스텔라의 호위를 맡는 것뿐으로 바로 곁에 달라붙어 있던 것은 아니기에 그나마 경계를 늦출 수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시종이다. 아무리 얼굴이 앳되어 보여서 기사나 다른 사제를 대할 때만큼의 긴장감은 없다고 해도, 남자인 크리스가 온종일 바로 곁에서 시중을 든다니 당혹스러웠다.

‘ 시종이라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내내 곁에서 수발을 드는 사람을 말하는 거지? 그런데 남자가 내 시종이라니……. ’

남자라고는 자기 아버지와 남동생밖에 본 적이 없는 아리스텔라로서는 낯선 남자가 자기를 시중든다는 것이 무섭고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 저기 성녀님, 그럼……. ”

“ 네에? ”

긴장하고 있던 아리스텔라는 크리스의 말에 무심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갑자기 큰 소리를 내자 크리스도 당황해서 어깨를 움찔거리며 한발 물러났다,

“ 지금 입고 계신 옷을 벗고 사제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하는데요……. ”

“ 아, 네! 거기 두고 가시면 갈아입을게요! ”

“ 아니, 저기……. ”

크리스는 우물쭈물하다가 두 눈을 꼭 감고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 사제복은 성의(聖衣)라서, 금녀구역인 이 신전의 성의는 남자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입고 벗을 수가 없습니다! ”

“ 뭐라고요? ”

아리스텔라는 창백하게 질려서 소리를 높였다.

남자가 옆에서 얼쩡거리며 시중을 드는 것도 불편한데, 무려 옷을 직접 갈아입힌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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