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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된 신전
[4] 폐쇄된 신전
로이드가 성녀의 막사를 나오자, 보초를 서고 있던 병사가 그에게 경례를 했다.
“ 로이드 기사단장님. 성녀님은 괜찮으신 건가요? ”
“ 그래. 악몽을 꾸신 것 같더구나. ”
“ 악몽, 입니까……. ”
말끝을 흐리는 보초병의 태도에 로이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 왜 그러지? ”
“ 그, 막사 안에서 들리는 성녀님의 목소리가……너무나도……. ”
“ 이자크. ”
“ 죄, 죄송합니다! ”
로이드의 말에 이자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건장한 로이드보다 한 뼘이 작은 젊은 기사 이자크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을 뿐인 신참이었다. 검은 더벅머리를 푹 수그린 이자크의 얼굴은 귀 끝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남자뿐인 기사단. 그것도 금욕하여 색을 멀리 해야 하는 성기사단에 몸담고 있는 그가 젊은 처녀의 신음소리를 듣고 야릇한 상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로이드는 성녀를 모시는 신전의 기사단장으로서 젊은 남자의 자연스러운 본능을 묵인해줄 수는 없었다.
“ 성녀님이시다. 우리가 평생을 모셔야 할 분께 불온한 언행을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
로이드는 조용히 이자크를 나무랐다.
“ 예……. 알겠습니다. ”
이자크는 겁에 질린 듯이 경비용 창을 꽉 쥐며 대답했다.
20대와 30대 초중반의 젊은 기사들로 이루어진 위그멘타르 신전 성기사단은 17대 성녀의 탄생을 맞이하여 구성원이 전원 교체되었다. 로이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신전의 기사단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새로운 성녀가 탄생하면 젊은 남자들로 신전 구성원을 바꿔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었다.
그것은 신전의 성기사뿐 아니라 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다른 신전은 주축이 되는 이―가령 대신관―가 바뀐다고 해서 밑의 사제들까지 싹 물갈이 되는 일이 없었으나,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만은 예외였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그 몸에 봉인하는 성녀가 탄생하면, 그녀의 탄생에 맞춰 신전의 사제와 기사들도 젊은이들로 교체된다. 그들은 평생 위그멘타르의 신전에 갇혀, 성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다가 성녀가 죽거나 다음 대의 성녀가 탄생하면 그제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기실 성녀가 죽기 전에는 새로운 성녀가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성녀와 함께 늙어죽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로이드는 그 점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성녀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부분은 분명히 기밀사항이었으나, 신관과 기사들을 전부 신전에 가두고 성녀와 함께 늙어가게 하는 것만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비록 사전에 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그를 따르는 기사들과, 그를 기다리는 신전의 사제들 모두 아직 경험이 적어 여신 위그멘타르를 모시기에 미숙한 자들이었다.
몇 명 정도는 베테랑이 있는 편이 그들이 폐쇄적인 신전 생활에 적응하기 편할 터인데 어째서 매번 성녀의 탄생에 맞춰 신전의 인선을 초심자인 젊은이들로 갈아치우는가.
남자를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성녀의 곁에 의지할 여자시종 하나 없다는 것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은 금녀(禁女) 구역이었다. 성녀만이 여신의 현신이므로 예외였다. 그녀를 가르치는 신관, 호위하는 기사는 물론이고 그녀의 수발을 드는 시종조차 전원이 남자였다.
‘ 어째서일까. ’
로이드는 성녀가 잠들어 있는 천막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사실 로이드는 처음 성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귀족 출신의 신전 성기사인 그가 신관의 명을 받고 움직이는 심부름꾼 역할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한 아리스텔라의 아버지, 알베르트의 급보를 받고도 일부러 속도를 늦춰서 천천히 도착했다.
이런 시골 촌구석에서 성녀가 탄생할 리 없다. 분명 무언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헛걸음을 하게 되리라 생각하면서 구시렁거리며 말을 몰았다.
그래서 성령석이 빛나며 그녀가 끌려간 방향을 가리켰을 때 아차 싶었다. 그는 성녀가 진짜였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로이드는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 성령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기사단을 이끌었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모시는 성녀는 처녀여야만 했다.
신전에 정식 성녀로 봉해지기 전에 순결을 잃은 성녀는 여신의 분노를 산다고 했다. 작게는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는 것부터 크게는 아예 걸어 다니는 재액 덩어리가 되어 주위에 전염병을 퍼뜨렸다.
애초에 위그멘타르가 재앙의 화신으로 돌변하여 대륙의 인구를 1/10로 줄여버린 대 기근과 전염병을 퍼뜨린 것도, 당시의 인간들이 너무나도 간악하고 잔인하며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이었다.
폭주하는 여신 위그멘타르를 잠재우기 위해, 생명과 평화의 신 헤시우스는 그들의 교황 호르메티오프를 통해 여신의 분노를 잠재우고 대재앙을 피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갓 성인이 된 인간 처녀의 몸에 여신을 봉인할 테니, 그녀를 폐쇄된 신전에 감금하여 평생 내보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한 헤시우스의 신전과는 달리, 한번 들어가면 일평생 나올 수 없다는 위그멘타르의 신전이 만들어졌다.
‘ 저분은 평생을 신전에 갇혀 지내셔야 한다. ’
로이드는 성녀의 처지를 딱하고 불쌍하다고는 생각한 적 없었다. 그러나 무뢰배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를 뻔한 그녀의 가녀린 모습을 보고 처음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자들의 손자국이 난 새하얀 피부. 헝클어진 물빛의 긴 머리카락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보라색의 눈동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불렀을 때의 벅차오르는 감정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 어째서 신께서는 저 여린 분에게 가혹한 시련을 준 것일까. ’
인간인 로이드로서는 신의 그 거룩한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연약하고 순진한 아리스텔라에게 재앙의 여신을 봉인하는 책임을 지우는 일은 너무나도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그 가련하고 연약한 성녀를 보필하는 것이 성기사인 자신의 역할이다. 그것만은 명확했다.
‘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성녀님. ’
로이드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세차게 뛰는 자신의 고동에 맹세했다. 이 심장이 뛰는 한, 몸과 마음을 바쳐 그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자신이 지키겠다고.
◇ ◆ ◇ ◆ ◇
여신 위그멘타르의 신전. 신관들은 회의실에 모여 앉아 새로운 성녀를 어떻게 모실지 의견을 주고받았다.
기사단과 마찬가지로 이번 17대 성녀의 탄생과 함께 신전의 신관과 사제들 또한 새로이 뽑혀 들어온 젊은이들이었던지라 토론 분위기는 활발했다.
젊은 신관들에게 노숙한 신관과 같은 노련함은 없었으나 대신 그들은 그만큼 생각이 깨어 있고 발상이 자유로웠다. 평민 출신의 성녀를 받아들이는 데에 거부감이 비교적 덜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물론, 어디에나 예외는 있었지만.
“ 성녀님은 사제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서민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신전 생활에 적응하기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성녀를 공표하는 대미사를 제외하고는 당분간 이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
“ 신전 예법을 가르칠 선생을 시종으로 붙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
“ 이제 갓 성년이 되셨다 들었습니다. 가족과도 떨어져 신전에 계셔야 하니 비교적 나이가 비슷한 또래를 시종으로 두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
“ 성녀님의 또래라. 그렇다면 수습 사제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편이 좋겠군요. ”
“ 이번 인선에 들어온 수습 사제 가운데 적당한 이가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지요. ”
짧은 검은 머리의 신관 아론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상석에 앉아있던 대신관 히페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 히페리온 대신관님. 성녀님께서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붉은 머리의 평사제, 노엘의 말에 히페리온과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을 나오자 흰 사제복의 평사제와 그 뒤로 수습사제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신전의 성문 쪽에는 기사단의 부단장, 케인의 지휘 하에 기사들이 열을 맞추어 대기하고 있다.
“ 조슈아 신관이 안 보이는군. 어디에 있지? ”
히페리온의 물음에 노엘이 당황한 듯 고개를 떨구었다.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관을 부르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부르러 보낸 사제에게 알았다 대답만 해놓고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마치 저가 죄를 지은 듯 창백한 얼굴로 가만히 손을 떠는 노엘을 보호하듯이 아론이 앞에 나섰다.
“ 또 방에 틀어박혀 연구 중이겠지요. 지금은 부르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
“ 성녀님을 처음 뵙는 자리인데 신관 중에 결원이 있어서야, 면이 살지 않는군. ”
아무리 재앙의 여신이라고는 하나 여신을 모시는 신전. 그 주인인 성녀를 맞이하는 중요한 자리에 수습사제도 평사제도 아닌 신관이 결석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어차피 신전 방문이 처음인 성녀야 저를 마중 나온 사제들의 얼굴은커녕 그 수가 몇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조슈아가 빠진 것을 눈치챌 리가 없었으나, 고지식한 히페리온은 명분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성녀가 도착했다는데, 이제 와서 조슈아를 데려오라며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도 모양이 좋지 않았다.
히페리온은 속으로 후에 조슈아를 방문해 오늘 실책을 따져 묻기로 하고, 자신들이 모셔야 할 새로운 성녀를 맞이하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