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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아리스텔라
[2]
로이드와 신전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산을 내려온 아리스텔라가 집에 도착한 것은 날이 밝고도 한참 지난 후였다.
“ 아리스텔라! ”
“ 누나! ”
아리스텔라는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뛰어오는 어머니와 동생 프란시스를 보자마자 왈칵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떨어져 있던 것은 겨우 하루가 채 되지 않는 시간인데,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그녀에겐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었다.
아리스텔라는 그리운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 고맙습니다, 기사님. 제 딸을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 아닙니다. 늦지 않게 성녀님을 구해내서 다행이었습니다. 조금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수난을 겪지 않으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
은발의 기사 로이드는 아리스텔라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하며 허리를 굽혔다. 체격이 건장하고 온몸에 갑주를 두르고 있어 무서워 보였지만, 풍기는 인상은 상당히 귀족적이었다.
성기사라면 신전 소속의 기사인 걸까. 간밤에 모르는 사내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던 아리스텔라로서는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거는 일이 어려웠으나, 도움을 받은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인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거머쥐고 로이드에게 고개를 숙였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드 기사님. 그런데, 저……, 왜 저를 <성녀님>이라고 부르시는 건가요? ”
아리스텔라는 아까부터 머릿속에 차오르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로이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열 명이 넘는 신전 기사들이 아리스텔라를 구하러 왔다.
일부는 아리스텔라의 가족이 다른 빚쟁이나 불한당에게 해코지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전 소속의 기사들이 어째서 자신들을 감싼단 말인가.
어쩌면 이것도 아버지가 저지른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아버지, 알베르트를 흘긋 바라보았다.
“ 아리스텔라. 네게 소식을 전해주려던 차에 갑자기 그자들이 들이닥쳤지 뭐냐. 내가 신관님께 미리 도움을 청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일을 치를 뻔했다. ”
“ 무슨 소식이요……? ”
“ 아리스텔라. 네가 17대 성녀라는 신탁이 내려왔단다. 여신 위그멘타르를 모시는 몸이 된 게야. ”
“ ……네? ”
아리스텔라가 그 몸에 여신을 모시는 성녀라니, 이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아리스텔라는 아버지 알베르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알베르트는 그녀를 자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로이드에게 소개했다.
“ 어떻습니까, 로이드 기사단장. 저의 사랑스러운 딸이 성녀가 맞지요? ”
“ 성령석이 반응했으니 틀림없습니다. ”
“ 그렇다면 예의 그 약속도……. ”
“ 예. 알베르트, 당신이 진 백만 골드의 빚에 성녀님의 신변보호를 위해 지급되는 백만 골드를 더해, 총 2백만 골드를 신전에서 지불하겠습니다. ”
“ 네? 2백만 골드요? ”
엄청난 액수를 듣고 아리스텔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2백만 골드라니!
4인 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100골드였다. 제 아비가 도박으로 진 빚이 천 골드도 만 골드도 아닌, 무려 백만 골드라는 기절초풍할 금액인 것도 놀라웠지만, 신전에서 그 두 배의 금액을 지불한다는 것은 더 놀라웠다.
“ 잠깐만요. 저는 성녀가 아니― ”
“ 오, 아리스텔라. 나의 사랑스러운 딸! ”
아리스텔라의 말을 가로막으며 알베르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는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데다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역한 냄새가 났다. 붉게 충혈이 된 눈알을 가늘게 하고 웃는 아버지의 얼굴은 그녀가 기억하던 것과 달리 낯설고 소름끼쳤다.
“ 성녀가 되면 신전에서 살 수 있단다. 평생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신관들을 이끌고 가장 존경받는 자리에 올라서는 거란다. 이 얼마나 영광된 일이란 말이냐! ”
“ 저는 사제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
“ 오, 아리스텔라. 아버지의 말을 들으렴. 언제까지 이런 시골에서 시간을 낭비할 셈이니? 설마 이대로 양이나 치고 감자나 캐다가 촌부에게 시집갈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
알베르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하게 아리스텔라를 타일렀다. 하지만 그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일렁이고 있었다.
2백만 골드.
영지의 소작농인 자신들은 평생을 일해도 쥐어볼 수조차 없는 돈이다.
그 거금을, 단지 성령석이 그녀에게 반응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전에서는 지급하겠다고 했다.
가족을 돌볼 책임을 내팽개치고 떠났다가 거액의 빚을 지고 돌아온 아버지가 이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집으로 돌아온 것 자체가 아리스텔라가 성녀라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다. 만약 신탁이 그녀를 가리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절대로 집으로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려 어머니와 동생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을 책임질 생각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텔라가 성녀가 되어 신전에 가기를 거부한다면, 아버지가 진 백만 골드의 빚은 누가 갚는단 말인가.
그녀가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이다.
이대로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가거나 또다시 팔려가 귀족의 성노예가 되거나 사창가의 창부가 될지도 모른다.
“ 로이드 기사단장님. ”
“ 예, 성녀님. ”
“ 제가……, 제가 성녀가 된다면, 정말로 신전에서 2백만 골드를 저희 가족에게 그냥 주는 건가요?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
“ 물론입니다. 성녀님의 안위를 위해서는 가족 분들의 동의와 협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전에서는 그에 따른 비용의 지불을 아끼지 않겠다는 대신관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
그리 오래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평생 신전 가까이에는 가본 적조차 없는 아리스텔라였다. 갑자기 성녀가 되어 신전에서 살라니, 억지에도 정도가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족들이 빚더미에 앉아 고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그녀 스스로도 더는 평범한 인생을 살 수 없게 되었으리라는 것을 안다. 여기서 그녀 한 사람만 희생한다면, 어머니와 남동생은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신전으로 가겠어요. ”
“ 오, 아리스텔라! 잘 생각했단다, 나의 현명한 딸아. ”
“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로이드 기사단장님. ”
“ 무엇입니까? ”
“ 백만 골드는 아버지가 진 빚을 갚는 데 쓰겠어요. 하지만 나머지 백만 골드는, 저희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서만 써주세요. ”
“ 아리스텔라? ”
알베르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아리스텔라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받는 것이 두렵지 않았다. 성녀가 되면 가족과의 연도 끊어내야 하는데, 아버지의 노여움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이미 아리스텔라에겐, 자신과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한 망나니 아버지에 대한 애정 따위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리스텔라는 자신의 어깨를 안으려 하는 알베르트의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 어머니와 프란시스가 살 집을 마련하고, 시중을 들 하인을 고용하겠어요. 그리고 호위도 필요합니다. 이 고약한 도박중독자가 더는 접근하지 못하도록. ”
“ 아리스텔라! ”
“ 알겠습니다, 성녀님. ”
알베르트가 소리를 높였지만, 로이드가 눈짓하자 기사들이 강제로 그를 아리스텔라로부터 떼어놓았다. 기사들에게 양 팔을 붙들려 문 밖으로 쫓겨나는 알베르트를 보는 아리스텔라는 착잡한 심정이었다.
“ 그밖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신지요? ”
“ 동생을 학교에 보내고 싶어요. 그리고,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이 불편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
“ 예. 주치의와 재산 관리인을 붙여 드리지요. ”
그의 대답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아리스텔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어머니와 동생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 아리스텔라……. ”
“ 괜찮을 거예요, 엄마. 신전은 안전한 곳이잖아요? 평생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는데, 뭐가 대수겠어요. ”
아리스텔라는 애써 밝은 척 웃어 보이며 어머니와 동생을 끌어안았다. 신전에 들어가면 더는 가족을 만날 수 없다. 그녀가 죽거나 다음 대 성녀가 나타나지 않는 한 평생을 그곳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프란시스가 성장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 안타까웠지만, 아리스텔라는 내색하지 않고 프란시스의 손을 꼭 잡았다.
“ 프란시스. 네가 엄마를 돌봐드려야 해. 알았지? ”
“ 으, 응……. ”
“ 누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 해. 약속이야. ”
“ 응. 약속할게! ”
프란시스는 결심했다는 듯이 입술을 꾹 다물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린 동생과 어머니를 두고 떠나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적어도 이로서 어머니와 남동생은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아리스텔라는 프란시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 가요, 로이드 기사단장님. ”
“ <로이드>라고 부르십시오, 성녀님. ”
“ ……알았어요, 로이드. ”
“ 모시겠습니다. ”
로이드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길을 비켰다. 그들이 물러선 자리에는 신관만이 탈 수 있다는 백금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 타시지요, 성녀님. ”
로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마차에 올라선 아리스텔라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니와 동생 프란시스를 향해 웃어보였다.
“ 아리스텔라! ”
“ 누나! ”
두 사람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눈물이 차올라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리스텔라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마차 안에 들어서자 로이드가 문을 닫았다.
“ 출발한다! ”
백마에 올라탄 로이드가 외치자, 멈춰 있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성녀를 태운 마차는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신전으로 향했다.
17대 성녀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들의 노래가 이어졌다. 성녀의 모습을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로 거리가 북적거렸으나, 그들은 아리스텔라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마차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아리스텔라는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