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마르티안만 참여한 점심 식사에는 수목학회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러 학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대부분은 백작 부부와 교류하기 위해 참석한 이들이었다.
갑자기 늘어난 참석자로 인해서 수목학회장 교수는 상당히 신이 나 있었다. 그는 마르티안의 옆에 앉아서 본인이 알고 있는 나무에 대한 지식을 떠들었다.
마르티안은 제법 많은 인맥들을 얻었다. 나중에 만날 때 서로 인사나 나눌만한 가벼운 인맥부터 목재판매와 같이 좀 더 실질적인 이익으로 연결된 인맥들도 있었다. 그 안에는 작위를 가진 다른 여자 귀족들과의 인맥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덕분에 그녀는 후원회 소모임이 가진 또 다른 의미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건 마르티안에게 의미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연애 상대를 구할 마음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는 저택에 있는 개 두 마리를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휴이가 자신의 주변을 통제하려 든다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화나지 않았다. 그냥 괘씸한 정도가 전부인 감정이었다.
어제 그토록 화가 치밀어 개의 뺨을 퉁퉁 부어오르게 했던 것에 비하면, 그 감정은 스쳐가는 바람만도 못한 가벼운 감정이었다. 그건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상한 격차였다.
‘어쨌든 많이 얌전해지긴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은 제멋대로 굴지도 못하고…….’
그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휴이는 그녀가 직접 나서면 그걸 막지는 못했으니까. 제멋대로 굴다가도 그녀가 그의 목줄을 잡으면 그대로 멈췄다. 그건 필사적인 인내였다.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많은 것들을 참았다. 자기 뜻대로 상황을 만들려고 하거나 통제하려는 습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버릇처럼 일을 저질렀지만 그녀가 대놓고 추궁하면 벌벌 떨면서도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확실히 조금 더 내 취향이 되기는 했지.’
미움을 받지 않으려 애쓰고, 주인의 심기 하나하나에 영향을 받고, 진심으로 겁을 먹는 태도. 그건 여지없이 그녀의 취향이었다.
백작가에서도 그녀는 휴이를 함부로 취급하고 몰아붙이면서 흥분할 때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휴이를 냉대하며 방치할 수 있었던 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흥분을 론에게 풀었다.
그건 마르티안이 만든 룰이었지만 동시에 그녀 역시 지켜야 하는 룰이었다. 재미로 인해 만든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룰이었으니까.
수도에 올라와서 휴이를 마음껏 몰아붙이고 가학을 일삼게 되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그 룰을 갑갑히 여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흥분이 일어나는 대로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 그건 이쪽에서 얻은 흥분을 제어해 다른 쪽에 풀 때와는 다른 자유로움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만든 룰을 깰 생각은 없었다. 휴이는 그녀가 목줄을 쥘 때는 얌전한 개였지만 순한 개는 아니었으니까. 이곳 후원회에서 그녀에게 달라붙는 사람들에게 백작처럼 굴며 짖어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는 바닥까지 짓뭉개져야 겨우 주제 파악을 하는 개였으니까.
식사는 티타임으로 이어졌고 모임은 상당히 오래 이어졌다.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라타자 하늘이 벌써 불그스름해져 있었다. 점심 식사를 지나서 티타임까지 함께 했으니, 벌써 시간이 저녁에 가까워진 것이다.
마르티안은 아침에 소파 밑에 묶어두었던 휴이를 떠올렸다. 개 꼬리가 달린 마개를 뒷구멍에 쑤셔 넣고는 물그릇 하나만을 달랑 놓아 주었다.
반성을 좀 하고 있어야 할 텐데. 마르티안은 가볍게 중얼댔다. 아침에 그를 두고 나올 때만 해도 휴이는 소파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껏 서럽다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휴이가 가지는 자기연민을 몹시 싫어했지만 풀이 잔뜩 죽은 표정은 제법 귀엽긴 했었다.
“주이, 흣, 주인님.”
마르티안이 들어오자마자 휴이는 그녀 쪽으로 다가오려다가 목줄에 가로막혀 멈췄다. 개목걸이에 연결된 줄은 길지 않아서 고작해야 소파를 중심으로 서너 걸음 기어 다니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는 마르티안이 방을 오갈 때마다 목줄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주인님.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몇 번 이어졌지만 마르티안은 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 식사를 했다. 침실에 묶여 있는 개에게는 아무런 음식도 주어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침실에 돌아와서도 그녀가 눈길도 주지 않자, 휴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소파 밑에 웅크렸다.
마르티안은 휴이가 지나치게 오래 조용해진 후에야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파 위에는 아침에 놓고 간 물그릇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오줌싸기는 싫었던 모양이네’
목줄은 짧았고 소파 근처를 배회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오줌을 싸려면 바닥에 싸야 했다. 휴이는 마르티안이 제 목줄을 쉽게 풀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물조차 거의 마시지 않았다. 더러운 것들을 질색하는 타입이니 오줌을 바닥에 싸고 그 위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게 끔찍하게 싫었을 것이다.
마르티안은 몸을 일으켜 소파 쪽으로 다가갔다. 휴이는 그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려 웅크린 채였다. 주인이 다가왔는데도 반길 생각 없는 개라니. 그녀는 휴이 엉덩이 사이로 늘어진 풍성한 꼬리를 손으로 잡아챘다.
“흐, 흐읍. 주이, 주인님. 흐윽…….”
놀라서 돌아보는 개의 몰골에 마르티안이 멈칫, 멈췄다.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었다. 눈가가 퉁퉁 부어있는 걸 보니 엎드려서 내내 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히자 휴이가 급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흐읍, 불쌍한 척,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흡, 흐으, 눈물이 나서……잘못, 했어요. 그칠, 흐으, 그칠게요.”
울음이 숨과 함께 훌쩍대며 넘어갔다. 그는 몸을 돌려 마르티안의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는데 꼬리를 잡아 챈 상태라 자세가 애매했다. 허둥거리는 모습에 그녀가 손을 놓자 그제야 자세를 제대로 하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잘 먹고 잘 큰 품종견은 그녀의 손에 의해 학대받아 온몸이 엉망이었다. 마르티안의 그의 목줄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뭐 때문에 울었어?”
비틀대며 그녀 쪽으로 다가온 휴이가 대답하길 머뭇댄다. 대답하기가 눈치 보이는 모양이었다. 대답해. 짧은 명령에 휴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주인님이 갔다 오시고, 나서 한 번도, 흐읍, 보지 않으셔서요. 흡, 끕, 이제는 싫어지신, 거 같아서, 버림받는 거 아닐까 하고…….”
꾸역꾸역 나오는 소리가 어이가 없다. 그녀는 휴이를 예쁘게 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버릴 생각도 없었다. 그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나오는 답이었다.
어젯밤 실컷 눈앞의 개를 다그치고 몰아붙여 놓고 오늘 갑자기 그를 버리겠다면서 이혼을 하는 건 정말 이상한 맥락이었으니까. 그럼에도 휴이는 이상할 정도로 긴장하며 울었다.
마르티안은 과도하게 불안해하며 훌쩍대는 개를 보다가 그가 왜 그렇게 구는지 깨달았다.
“아, 그래. 오늘 식사를 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듣긴 했지. 교육원의 후원회가 작위 있는 귀족들이 애인을 구해가는 자리라고 하던데? 소모임은 특히나 더 그렇고.”
휴이의 눈가로 다시 물기가 확 들어찼다. 네, 주인님. 그는 순순히 수긍했다. 마르티안은 크게 혀를 차며 말했다.
“매번 지겨울 정도로 멋대로 행동하네.”
휴이가 흐으, 하고 입술을 깨물며 헐떡였다. 그는 마르티안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새로운 누군가가 그녀에게 접근하고, 또 그녀가 상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런 상상들. 그래서 그 끝에는 휴이의 자리가 사라지거나 혹은 더 밀려나는 그런 것들을. 불안은 허무맹랑한 상상마저도 현실감이 있게 만들었다.
그는 제 불안을 어떻게든 가라앉히기 위해 마르티안이 제게 말을 걸어주길 바랐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온 이후로도 몇 시간이 넘게 방치되자 그는 더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어 울었다.
그마저도 불쌍한 척을 한다고 또 그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될 거 같아 혼자 웅크리고 우는 수밖에는 없었다.
“잘못했어요. 마, 말해야 했는데…….”
울음이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불안에 질려 우는 개를 보며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매번 절망 속에서 헤매며, 매번 더 겁에 질려가는 모습이,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다그치고 화를 내어 개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손을 뻗어 휴이의 뺨을 쓸었다.
눈물로 흠뻑 젖은 뺨은 계속 떨어지는 눈물로 새롭게 젖어서 묘하게 따듯했다.
“백작가에 돌아가면 정조대를 차고 지내.”
“네. 흐읍, 주인님. 그렇게 할게요.”
휴이는 울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수긍했다. 백작가에서 정조대를 하고 지낸다는 건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건 그녀가 그에게 서열을 일깨우는 방법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정조대를 찬 그를 완전히 무시하며 지내는 일이 많았고, 그는 늘 론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러운 몰골로 애원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다. 터질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뺨에 닿아있는 그 손이 그래도 위안을 주었다.
“돌아가면 얌전히 잘 참을게요. 시끄럽게 애원 안 하고 선배 말도, 잘 듣고 주제넘게 안 굴 테니까…… 주인님, 그러니까, 흐으, 더는 곁에 아무도 두지 마세요. 뭐든 할게요.”
주제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주제넘은 말이 쏟아졌다. 불안한 감정은 집착으로 쌓였지만 그건 해소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늘 마르티안이 누구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어제처럼 또 이름을 물어본 교육생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누구와 친분이 생겼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고 어떻게 웃었는지. 그는 그것들이 견디기 어렵게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휴이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마르티안의 오늘이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녀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질투가 일었다.
아니, 질투는 너무 가벼운 단어다. 그는 그들이 없어지길 바랐다. 그는 제 주인의 부스러기라도 나눠 갖고 싶지 않았다.
“흐읍, 주인님.”
그는 마르티안의 손을 핥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빨고 삼켰다. 이 손이 그대로 자신의 목구멍을 들쑤셔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넘은 생각은 그녀가 주는 고통 안에서는 자취를 감췄으니까. 그게 이 고통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혓바닥을 더듬으며 더 안쪽을 꾹 눌렀다. 휴이는 얌전히 입을 벌리고 그 손이 자신을 뒤흔들어 주길 기다렸다.
마르티안의 얼굴로 흥분이 옅게 깔렸다. 안도감. 휴이는 그것을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의 몸이 아직은 그녀의 흥분 거리라는 것이 일말의 안정을 준다.
그건 이 서럽고 메마른 자리에서 겨우 살아남는 정도의 아주 적은 안정감이었다. 그 안정감은 너무도 적었고, 그래서 더 견딜 수 없이 달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입안을 아무렇게나 더듬으며 유린하고는 이내 빠져나갔다. 휴이는 번들거리며 흘러내리는 것들을 채 닦지도 못하고, 그녀에게 매달렸다.
“여기서 구멍 벌리고 싶어요, 주인님. 흐읍, 벌리게 해주세요.”
그는 허벅지를 세워 상체를 들고는 마르티안의 허리를 팔로 감쌌다. 매번 자주 쓰던 앞보다는 뒤가 더 그녀의 흥미를 끌 테니까.
휴이는 그녀 앞에서는 매번 제자신을 아무렇게나 팔았다. 오래 쓰지 않았던 뒷구멍은 개 꼬리를 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지만, 마르티안의 흥분 아래에 있을 수 있다면 자신의 구멍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는 조금씩 몸을 숙이며 그녀의 가운 아래를 조금 파고들었다. 사타구니 사이에 입술을 대고는 살짝 비비자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그녀의 얼굴로 흥분의 기색이 짙어졌다. 휴이는 배운 대로 애원했다.
“흡, 선물 주세요. 잘 먹을 테니까, 주인님. 다리 벌리게, 흐읏, 해주세요.”
그가 하는 말들은 전부 달밤가의 남창들이 하는 말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흥분을 일으키려고 스스로 남창처럼 구는 휴이를 보았다.
그는 아직 길들지 않은 뒷구멍을 팔아먹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마르티안은 휴이의 목에 감긴 개목걸이를 풀어냈다. 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새로운 목걸이처럼 그어져 있었다.
그녀는 개를 일으켜 테이블에 엎드리게 했다. 엉덩이를 보이며 엎드린 채로 개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늘게 신음했다. 마르티안은 검게 멍든 엉덩이를 손으로 내리쳤다.
“선물, 네가 달라고 한 거야.”
“주인님. 잘, 흐읏, 먹을게요.”
그렇게 말하며 휴이가 허리를 살짝 흔들었다. 엉덩이로 늘어진 개 꼬리가 흔들린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뒤로 잡아채듯 당겼다.
흐으, 휴이가 급하게 신음을 뱉었다. 잡아당기는 힘이 계속 더해져서 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거칠게 벌어지는 구멍은 금세 붉게 변했다.
끄으, 끅. 그는 신음을 삼키며 아픔을 참기 위해 허리를 움직였다. 철썩하고 엉덩이로 손매가 다시 떨어졌다.
“이 정도도 못 버틸 거면서 무슨 선물을 바라. 구멍에 힘 안 풀어?”
“흐으, 흡, 주인님. 힘, 뺄게요. 흐으…….”
움찔거리던 엉덩이가 제 힘을 풀려 애썼다. 이내 구멍 안으로 박힌 마개가 거칠게 빠져나가고, 구멍에 밀어 넣었던 윤활제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르티안은 그 사이로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흐으으, 흐으. 휴이가 신음을 뱉으며 움찔댔다.
둥근 마개는 짧지만 두께는 제법 두꺼웠다. 덕분에 개의 구멍은 나름 풀려 있었지만 마르티안이 쓰는 모조 성기를 받기에는 아직도 빡빡하고 좁았다. 그녀는 손가락 세 개를 밀어 넣고는 그대로 퍽퍽 들쑤셨다.
“흐아, 흐아앙, 흐아!”
“제대로 벌려. 힘 풀고. 네가 애원한 거잖아.”
푹푹 들쑤실 때마다 그의 구멍이 엉망으로 마르티안의 손가락을 엉망으로 조였다. 내벽이 들러붙는다.
그녀는 긴장으로 굳어진 엉덩이를 힘껏 내리쳤다. 흐으, 흐아. 멍든 엉덩이가 파들파들 떨리며 힘이 풀릴 때마다 구멍이 조금씩 풀렸다. 그녀는 그때마다 손가락을 굽히고 벌리며 거칠게 안을 넓혔다.
“못 먹으면 구멍이 찢어지게 맞을 거야. 이렇게 찢어지든 저렇게 찢어지든, 네가 한 말에는 책임을 져야지.”
“흐으, 네, 흐읍, 네. 주인님.”
휴이는 울며 떨면서도 제 손을 뒤로 보내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을 물고 있는 질척한 구멍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애원하듯이 엉덩이를 조금 흔들었다. 더 쑤셔주세요. 선물, 흐읍, 선물 주세요. 주인님. 지나치게 천박한 꼴에 마르티안은 치미는 흥분을 제어하기 위해 얼굴을 찌푸렸다.
“개새끼가 남창 짓만 늘어서는.”
마르티안이 처박은 손가락을 굽혀 내벽을 문질렀다. 앞쪽의 두툼하게 부푼 곳을 손가락으로 짓누르듯이 문지르자 휴이가 허리를 움찔댄다. 고통이 한껏 들어차 있던 뒤로 미묘한 흥분이 겹쳐졌다. 내벽을 문지르는 손가락이 꼭 귀두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상한 감각은 자극적이면서도 수치스러웠다.
흐으, 흐으응, 흐으아. 신음은 울음만큼이나 요란했다. 마르티안은 그의 성기가 빳빳하게 선 것을 보고는 들쑤시던 손가락을 빼냈다.
“휴, 제대로 못 받아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어.”
“흐으, 구멍, 찢어져요. 구멍 맞아서……, 흐으……”
엉덩이를 스스로 벌린 채 그는 꾸역꾸역 답했다. 꼭 제 구멍을 찢어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마르티안은 헐떡이는 개를 두고는 침대 옆에 마련된 서랍을 열었다. 개를 괴롭힐만한 것들이 가득 들어 있는 서랍이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백작가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크기와 길이의 모조 성기를 찾아냈다. 벨트 앞뒤로 모조 성기가 붙어있는 도구는 깨끗한 새것이었다.
‘야해 빠져서는.’
서랍 안에 있는 것들은 휴이가 미리 마련해 둔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개 취급을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새롭게 산 것이다. 마르티안은 벨트를 차고는 윤활제 통을 손에 들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엎드린 개가 아무리 힘을 풀려고 한들 그녀가 찬 모조 성기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를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극심한 고통일 것이다.
마르티안은 흥분으로 아래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무지한 개의 뒤를 함부로 열고 내내 들쑤실 상상을 하며 느꼈던 것과 똑같은 흥분이었다. 가학을 위해 스스로 기어 들어오는 개는, 제 몸이 찢어진다고 해도 그녀 아래에 있으려 매달릴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극도의 흥분이 몰려왔다.
그녀는 제 앞으로 튀어나온 모조 성기에 윤활제를 쏟아붓듯 부었다.
“흐아아, 끄으, 주인, 흐으.”
뒤가 찢어지듯이 벌어졌다. 쏟아부은 윤활제가 아래로 질질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해어지는 느낌이었다.
휴이는 헐떡이며 몸을 비틀었다. 뒤에 주먹이라도 처박히면 이런 느낌이 들까. 내벽이 모조리 쓸리며 강제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벌어짐은 끝없이 이어졌다.
휴이는 몸을 구부리며 울었다. 엉덩이를 벌리고 있던 손은 어느새 테이블을 긁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가 터져나갈 거 같았다.
“힘 안 빼?”
엉덩이로 손매가 떨어졌다. 철썩하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그런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래가 온통 엉망이 되고 있었다. 긴장한 몸이 풀어지기도 전 자꾸만 더 처박히는 것이 몸을 강제로 가르는 것만 같았다. 주인님, 제발, 흐으, 천천히. 엉엉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마르티안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뒤로 잡아당겼다. 뒤로 젖혀진 목에서 컥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선물 달라며. 후으. 그럼 제대로 받아먹어야지. 무슨 요구 조건이 그렇게 많아. 내쫓기고 싶어?”
휴이가 머리를 틀어 잡힌 채로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주인님. 흐으.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끊임없이 쫓겨나고 방치된 경험으로 인해 반응은 본능처럼 튀어나왔다.
마르티안이 손을 놓고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그가 허겁지겁 손을 뒤로 보내 마르티안을 붙잡았다.
“머그, 게요. 끅, 흐어, 먹어요. 주인님. 잘못, 흡, 잘못했어요. 벌릴게요. 끄으으!”
마르티안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며 처박힌 것을 깊게 밀었다. 경련하듯 조여진 내벽이 강제로 갈라졌다.
빡빡한 저항감은 그대로 타고 내려와 마르티안의 안까지 전달된다. 그녀의 안에 있는 것이 눌리듯이 안으로 파고들자 가벼운 절정이 이어졌다. 그녀는 개의 허리를 움켜쥐고는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남창 새끼면 다 좋다고 받아먹어야지.”
들쑤실 때마다 조이고 푸는 게 엉망이다. 마르티안의 안을 자극하는 것도 그만큼 엉망으로 눌리고 밀렸다.
평소라면 개가 제 노릇을 못 한다며 제대로 조이고 풀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흥분은 이미 그녀의 머리끝까지 들어찬 상태였다. 끄윽, 흐윽. 그녀의 개는 처박힐 때마다 울면서 허리를 들썩였다.
마르티안이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움켜쥐었다.
“좋다고 받아먹으랬지. 누가 질질 짜래?”
숨을 죽이고 헐떡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휴이는 끅, 하고 숨을 삼키며 견디려 애썼지만 쑤셔질 때마다 눈물이 자꾸 줄줄 흘렀다.
흐으, 흐윽, 끄으. 신음과 울음을 참기 어렵게 되자 그는 자신의 손을 앞으로 가져와 입을 막았다. 테이블로 골반 앞쪽이 자꾸 부딪쳤지만 그런 아픔은 느낄 새조차 없었다.
“선물 받았으면, 후으, 감사 인사 해야지?”
그녀가 처박은 것을 쑥 뒤로 물렸다. 거의 끝까지 뽑아내자 아래에 깔려 있던 몸이 놀라서 긴장한다. 가혹한 대접에 익숙해진 개는 그녀가 멈춰주지 않을 거라는 게 당연한 것처럼 울었다. 주인님, 제발. 흐으. 제발. 그건 몹시 현명한 판단이긴 했다.
마르티안은 길게 빼낸 것을 거칠게 처박았다. 한번 길이 나서 그런지 처음 처박을 때보다는 더 수월하게 벌어졌다.
몇 번의 텀을 두고 멈추며 박혔던 것이, 쉴 틈 없이 한 번에 박히자 휴이가 테이블에 이마를 비비며 울었다.
구부러져서 테이블에 들뜨는 그의 등을 마르티안은 손을 올려 눌렀다. 땀에 젖어 미끈거리는 등으로 덜덜 떨리는 것이 더해진다. 고통에 질려 있던 모양이 그녀의 흥분을 일으켰다.
마르티안은 다시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끝까지 처박았다. 끄으, 흐아아! 우는 소리가 경직된 몸에서 흘러나왔다.
마르티안은 팽팽하게 벌어진 휴이의 뒷구멍을 손으로 문질렀다. 붉게 벌어진 곳은 찢어지지 않은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을 그의 엉덩이에 바짝 눌렀다.
“선물 받고, 입 씻는 버릇은 어디서 들였어?”
아래로 깔린 몸이 덜덜 떨었다. 고통에 잔뜩 질려서 휴이는 대답을 빨리하지도 못했다. 마르티안은 그대로 그의 안에 처박은 것을 더 깊게 짓눌렀다.
“제대로 감사 인사 안 하지?”
“하으, 끕, 선물 주셔서, 감사, 흐으, 흐어엉, 주인님, 흐어, 아프, 흐읍. 아파요. 잘못했어, 흐아!
내벽 안으로 두껍게 쑤셔 박혀있던 것이 반쯤 쑥 빠져나갔다. 휴이는 그저 울며 신음을 쏟아냈다. 몸이 덜덜 떨렸다. 주인님. 애원하는 목소리가 급하게 울렸지만 이내 퍽, 하고 구멍으로 모조 성기가 쑤셔박혔다.
가혹한 고통이 틈 없이 이어지자 머릿속이 멍청하게 녹아내린다. 주인님. 흐으, 주인님. 그는 몇 번이나 마르티안을 불렀다. 오직 그녀만이 이 고통을 멈춰줄 수 있었고 이 고통에서 그를 구해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뒤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쑥 빠져나갔다. 배를 두들기며 쑤셔대던 것이 사라지자 휴이는 미끄러지듯이 테이블 아래로 주저앉았다.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주저앉은 그를, 마르티안이 뒤에서 발로 툭 찼다.
“안 끝났으니까 일어나.”
“흐으, 흐윽, 주인님. 잘못했어요. 잘못, 흐어, 흐으…….”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도망치듯이 기었다. 고통에서 도망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마르티안은 벌벌 떨며 기어가는 휴이를 내버려 두었다. 벌어진 구멍은 벌겋게 부어서 윤활제로 번들거리며 젖어 있었다. 이대로는 한계 이상 몰아붙이게 될 거 같았다. 그녀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 흥분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눈앞의 개는 론과는 달리 매일 제 몫을 해내야 하는 귀족이었다.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가라앉혔을 때였다. 기어가던 휴이가 멈췄다. 그는 웅크리고 끅끅거리며 몇 번을 울더니 이내 허벅지를 세워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이내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잘못했어요. 흐으, 흐읍, 선물 다시, 주세요.”
벌겋게 부어오른, 번들대는 구멍이 다시 벌어졌다. 마르티안은 그 태도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았다. 그녀가 달밤가에서 그를 두고 가르친 태도였으니까.
도망친 건 커다란 잘못이었고, 거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버림받고 싶지 않고 내쫓기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든 그녀를 만족시켜야 했다.
그는 죽을 듯이 울면서도 엉덩이를 벌리고 흔들었다. 버림받을까봐 겁에 질려서 굴었던 달밤가에서의 모습 그대로. 마르티안은 흥분이 급격하게 치미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다가갔다.
“개새끼가 도망은 왜 쳐?”
“잘못, 흐으, 흡.”
마르티안은 딱딱한 바닥에 개를 엎드리게 한 채 그대로 들쑤셨다. 맨바닥은 남창이 다리를 벌리기에 몹시 잘 어울리는 장소였다. 그녀는 휴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그의 뒤를 마구 뒤엎었다.
휴이는 그녀가 허리짓을 할 때마다 울며 그녀를 불렀다. 내벽이 강제로 벌어지고 쑤셔지고 짓이겨졌다. 마르티안은 그가 아무리 애원해도 멈춰주지 않았다.
그는 한계까지 들쑤셔지면 도망치듯 앞으로 기어갔다가 정신이 들면 스스로 놀라 다시 울며 기어 들어왔다. 잘못했어요. 용서를 비는 얼굴은 눈물로 이미 범벅이었다.
“똑바로 못 하지.”
마르티안은 휴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뒤를 들쑤셨던 것을 그의 목에 처박았다. 숨이 막혀서 벌게지는 얼굴은 눈물로 젖고 퉁퉁 부어터진 상태였다.
그녀가 본 이래로 가장 못생긴 꼴이었지만 마르티안은 거기에서 아래가 끝없이 달아오르는 흥분을 느꼈다. 몇 번의 절정이 오간 상태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흥분이었다.
‘쓸데없이 예쁘기는.’
숨이 막혀 꺽끅대는 휴이를 보며 마르티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목에서 모조 성기를 뽑아주면 휴이는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꼴로 헐떡이며 콜록댔다. 질질 흐른 타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마르티안은 그의 고개를 들게 하고는 뺨을 후려쳤다.
“뒷구멍으로 못 물겠으면 목구멍으로라도 잘 물어야지. 입 벌려.”
“흐으, 흐읍, 흐…….”
번들거리는 모조 성기가 그의 뺨을 꾹꾹 찔렀다. 이내 그것들의 휴이의 뺨을 철썩이며 쳤다. 뺨을 맞을 때마다 타액이 묻어 늘어졌다.
헐떡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휴이는 맞으면서도 그저 움찔대기만 했다. 눈물이 고장 난 것처럼 뚝뚝 떨어졌다. 마르티안은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뒤로 밀었다. 으읏,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어앉은 몸이 뒤로 주저앉았다.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엉덩이 아래로 윤활제가 흘러나와 뚝뚝 떨어졌다. 마르티안은 웃었다.
“목구멍이 못 물면 다시 뒤로 물든가. 바닥에 누워서 허벅지 잡아. 구멍 보이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휴이가 주저앉은 채로 도망치듯 물러났다. 뚝뚝 떨어지는 윤활제가 자국을 남기며 그의 움직임만큼 이어졌다.
“주인님. 흐으, 잘못했어요. 입으로. 무, 물게……흐윽.”
마르티안은 그가 물러난 만큼 따라잡아 반쯤 선 성기를 발로 짓밟았다. 덜덜 떠는 것이 우습게도, 그의 배에는 한 차례 정액이 튀어 흐른 자국이 있었다. 죽을 듯이 몰아붙여지는 와중에 흥분해서 사정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발아래서 확연하게 단단해지는 휴이의 성기를 느끼며 픽 웃었다.
“뒤로 쑤셔져서 잘만 쌌네. 자세 잡아.”
“흐윽, 입으로 하, 할게요. 하고 싶, 하윽.”
“선물을 어디에 처박든지 내 마음이야. 너는 얌전히 감사하기나 해.”
휴이가 몇 번이나 그녀의 발길질에 헐떡이며 떨다가 울며 자세를 잡았다. 바닥에 누워 허벅지를 들어 올려 잡는 것조차, 시달린 몸으로 쉽지 않았다.
그는 몇 번 다리를 놓쳤다. 마르티안은 그때마다 가차 없이 그의 고환과 성기 아래를 짓뭉갰다. 아랫구멍이 헐어 부은 주제에 그는 좆이 밟혔다는 이유로 허리를 움찔대며 흥분했다.
“너는 정말 남창 짓이나 해야 했어.”
그랬다면 모두가 편했을 것이다. 타고난 성향은 이 짓거리를 당하며 매번 기뻐했을 테고 마르티안은 그를 마음껏 즐기며 마음을 주었을 테니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휴이의 구멍에 쑤셔 박았다. 엉엉 울며 헐떡이는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 * *
마르티안과 휴이가 다시 백작가로 돌아온 건 후원회가 끝나고도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일정이 밀린 건 휴이의 몸이 멀쩡하지 않아서였다. 후원회 마지막 날, 엉망으로 시달린 그는 거의 이틀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들쑤셔진 뒤는 따갑게 부풀어서 약을 바를 때마다 고생이었지만 휴이는 그런 것들이 좋았다. 마르티안은 자신에게 심하게 시달려 앓는 개를 불쌍히 여기는 편이었다.
수도의 저택에서, 휴이는 올곧게 그녀를 독점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한 침대에서 지내고, 그녀가 해주는 치료를 받고, 일을 하는 마르티안에게 다가가 살짝 달라붙어있는 것. 그것들을 백작가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은 개들 사이의 서열을 몹시도 중요시했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백작가에 도착하자 집사장과 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각자 백작과 백작 부인을 보필하는 이들이다. 마르티안은 마차에서 내려서 당연하다는 것처럼 론에게 다가갔다. 생각보다 일정이 늦어졌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휴이 쪽으로 가볍게 눈짓을 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다는 뜻이었다.
휴이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그녀가 론과 함께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수도에서 있던 시간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그건 약간의 서러움을 동반했다.
오래 앓았으면 좀 더 오래 그 꿈을 꾸었을 텐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옆으로 집사장이 다가왔다.
“후원회는 괜찮으셨습니까?”
“그래. 그쪽 학회에다가 기부금을 지급해.”
“현재 지급하고 있는 교육원 기부금에서 일부를 떼어 그쪽으로 보내는 것으로 할까요?
“아니 교육원 기부금과 따로 처리하고. 이 기회에 교육원 기부금도 더 올려. 그게 나중에 편할 거 같으니까.”
휴이는 이제 교육원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쪽에서 자신의 눈치를 더 많이 보길 바랐다. 그래야 그쪽의 인맥을 활용해서 마르티안이 수도로 올라가는 일들을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걸 위한 투자로써 기부금을 늘리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돈과 권력으로 사람을 활용하는 건 그에게는 숨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단지, 마르티안에게는 그런 것들을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휴이는 그녀에게 접근하던 귀족자제들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이를 갈았다.
“수도에 있는 가장 유명한 세공품점과 의상실을 섭외해서 주문을 넣어. 주문자는 나라는 걸 명확히 밝히고, 주문품에는 도안 자작의 이름과 작위를 새기게 하는 걸로. 가급적 수도에서 크게 소문이 날 만한 수준의 것으로 고르고.”
돈이 넘쳐난다는 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직접적으로 그녀의 주변을 제어할 수 없다고 해도 소문을 크게 만드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마르티안의 이름과 작위에 자신의 이름과 작위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길 바랐다. 그것만으로도 쪼그라드는 이들이 제법 많을 테니까.
집사장이 옆에서 물었다.
“선물의 이유가 따로 있으시다면 그걸 감안해서 주문을 넣겠습니다.”
선물에는 종류가 여러 가지인 법이었다. 축하를 위한 선물도 있었고 기념하기 위한 선물도 있었으며 때로는 수고한 대가로 지불되는 것도 있었다.
집사장은 자신이 알아봐야 하는 선물이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야 적합한 것을 고를 수 있었으니까.
휴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을 멈췄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유는 없는 거로 해. 그냥 선물하고 싶은 거라서, 하는 거라고. 그래야 쓸데없는 것들이 덜 붙지. 선물에 대한 비용은 결혼식에 샀던 예물비용 정도로 하고.”
집사는 황당함에 벌어지려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그냥 선물하고 싶어서 사는 선물이라고 하기엔 그가 말하는 예산이 지나치게 컸다. 평범한 귀족가의 몇 년 치 예산이었으니까. 그 정도 비용을 쓰려면 다각도로 검토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 선물을 이유가 없이 샀다고 하면 당장 떠들썩하게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그 선물의 이유와 목적은 거기에 있었다.
집사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으나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백작가에서 벌어들이는 부는 그에게서 온 것이었으니까.
‘점점 더 심각해지시는군.’
휴이 세블로아드가 가지는 유일한 비합리는 늘 이런 식이었다. 그가 비상식적으로 예민해지는 것도, 비합리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것도, 때론 몹시 무능하게 바닥을 기는 것도 그랬다.
집사장은 그 모든 것을 모르는 척하는 중이었다. 빠르면서도 조용하게 닫히는 문을 만들어야 하긴 했지만 어쨌든 요즘 백작가는 유례 없이 평화로웠으니까. 집사장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휴이와 마르티안은 해를 넘기며 몇 번을 더 수도에 올라갔다. 교육원에서 있는 학회에 참여하거나 혹은 마르티안과 연이 생긴 귀족들이 초대하는 경우였다.
두 사람은 수도에 올라갈 때면 매번 그 작은 저택에서 머물렀다. 수도에서 머무는 일정은 매번 실제 일이 있는 기간보다 사나흘에서 일주일 가까이 길어지곤 했다.
인맥이 그쪽으로 늘어나게 되면서 마르티안은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휴이의 집무실에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휴이는 공작가 저택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했고 또 그녀가 원하는 정보들을 빠르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는 수도 일정은 여러모로 편했다. 마르티안은 지나치게 적절한 일정들이 휴이의 입김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걸 짐작하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나쁘게 보면 주제넘는 간섭이었지만 좋게 보면 눈치 빠른 지원에 가까운 일들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수도에 올라갈 때마다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와 인맥을 얻었다.
“수도에서 초대장이 왔는데,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마르티안은 휴이가 내민 초대장을 살폈다.
그녀는 근래 흑두나무에 대한 것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열매를 맺으면서도 목재의 역할을 하는 몇 안 되는 나무로 관리는 까다로웠지만 잘 길러내면 열매로 인한 부수입까지 올릴 수 있었다. 휴이가 내민 초대장에는 흑두나무를 기르는 남부 백작가의 사교 파티가 포함되어 있었다.
영지는 남부였지만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이런 모임은 수도에 있는 개인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수도에 저택을 가졌다는 건 언제고 자랑할만한 일이었으니까. 영지 관리가 느슨해지는 초겨울이 되면 다들 수도에 올라와 연이은 모임과 연회를 즐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마르티안은 초대장에 쓰인 백작의 이름과 인장을 보았다. 벤 리블. 낯선 이름이었다.
“우리가 언제 이 사람과 만난 적이 있었나요? 못 들어본 이름인 거 같은데.”
“당신은 만난 적이 없을 거야. 나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 그쪽에서 초대장을 보낸 거고.”
마르티안의 미간이 약간 좁아졌다. 휴이의 개인적인 친분이란 결국 공작가와 연결된 친분이었으니까. 그녀는 아직도 공작가의 인맥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휴이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리블 가문이 여러모로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 같아서 가져온 거야. 그쪽 가문은 흑두나무 품종 개량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곳이라서 이야기할 것도 많을 거 같았고. 원하지 않으면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관심이 있을 거 같아서.”
눈치를 보며 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마르티안은 초대장을 툭툭 손으로 건드렸다. 여유로운 때 정보교류를 목적으로 수도에 올라가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너무 자주 이런 일정이 생기고 있긴 했다. 그녀는 휴이가 무엇을 위해 수도로 가려 하는 건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초대장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참석하는 거로 해요. 흑두나무에 대해서 관심이 생긴 상태였으니까.”
“그럼 바로 답장을 쓰도록 할게. 날짜에 맞춰 수도로 올라가야 하니까 수도 저택에도 연락을 넣어서…….”
날짜는 보름 후였고 시간이 그리 여유 있게 남은 건 아니었다. 수도의 저택에서도 백작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식자재를 비롯하여 상당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가 수도로 보낼 편지를 쓰기위해 종이를 꺼냈을 때였다. 마르티안이 말했다.
“이번에는 론을 같이 데려갈 생각이에요.”
그 말에 휴이가 몸을 굳혔다. 그는 마르티안이 한 말을 다시 곱씹고는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거긴, 이미 하인들이 충분한 곳이라서 굳이…….”
“상관없어요. 론은 개로 데려가는 거니까.”
그 말에 휴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결국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지금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더 이상 백작으로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으니까.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주인님. 제가 많이, 흐읍, 못 견뎌서 그런 거예요? 흐으, 흐윽, 이번에 가면 뭐든 잘 참을게요. 뭐든, 어떻게든 고칠 테니까…….”
금세 그의 눈가가 붉어졌다. 지금껏 수도를 오가는 동안 마르티안은 론을 데리고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백작가에서 보내는 비참하고 불행한 밤을 견디면서 수도로 올라가기만 기다렸다. 그 저택만이, 진짜 개로 쓰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공간마저 빼앗기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조차 그녀의 애첩과 같이 있어야 한다니.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저택에서까지 자기가 아닌 다른 개가 침대에 오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뭔가 잘못, 흡, 잘못한 거면 여기서 벌 받을게요. 선배 앞에서, 흐으, 흐윽, 다시 교육받아서 주제 파악 잘할 테니까, 흐읍, 주인님, 그러지 마세요.”
휴이는 마르티안이 갑자기 이렇게 구는 이유가 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개의 서열을 흐트러지는 걸 몹시 싫어했으니까. 그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몇 번이고 다시 생각하다가 이내 더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 얌전히 있으려고 노력한 기억밖에는 없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수도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면 몹시도 가혹하게 그를 굴렸다. 교육이라는 이름하에서, 그는 매번 론 앞에서 비참하게 바닥을 기고 그와 비교를 당하며 스스로 한심함을 두고 읊어야 했다.
가학은 그에게 상이었지만 마르티안은 그걸 알아서 가학만 주지 않았다. 그를 폄하하거나 굴욕을 주었고 때로는 끝없이 비참하게 만들며 그를 교육했다.
그건 의미가 명백한 교육이었다. 론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에게 개로 쓰인 시간들이 그리 대단한 의미가 아니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마르티안은 예민하게 개의 서열 문제를 신경 썼고 그래서 휴이가 스스로를 론보다 더 대단하게 여길까 봐 몹시 신경 썼다.
휴이는 그걸 참았다. 그는 일 년에 서너 번 주어지는 이런 일정이 너무나도 간절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밉보여서 이 일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휴이는 그 저택에서 마르티안과 보내는 시간들이 꿈처럼 좋았다. 그가 꿈꾸던 것들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여기서, 선배 아래에서 더 잘 따를게요. 주인님. 더 얌전하게, 흐으, 흐읍, 제발…….”
마르티안은 울며 애원하는 휴이를 내려 보았다. 펑펑 우느라 얼굴이 잔뜩 젖었다.
수도의 저택에서는, 그는 매번 그런 꼴로 마르티안 아래에서 울곤 했다. 가학적으로 몰아붙여지면서도 끝까지 흥분하고, 쫓겨날까 겁먹으며 남창처럼 구는 주제에도, 몹시도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약아빠진 개는 그녀 앞에서는 지나치게 길이 들어있어서 문제였다. 매번 그녀를, 극도의 흥분으로 밀어 넣곤 했으니까.
마르티안은 휴이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주제 파악이 된 거면 얌전히 있어야지. 론이 있건 없건 너는 론 아래니까.”
“알아요. 흐윽, 주인님. 알고 있으니까 선배 앞에서 얌전하게 있고, 주제넘게 않게 굴려고 계속…….”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울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는 서러움이 묻어나는 울음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마음이 점차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그렇게 우는 꼴이 예쁘다고 느껴졌으니까.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를 대한 이후, 그녀의 삶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마르티안은 휴이가 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건 이 관계에 대해 고삐를 죄는 행위였다. 몇 번의 수도행으로 인해 그 고삐는 여러모로 느슨해졌다.
그녀는 그걸 다시 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관계에도 문제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 * *
마르티안이 백작가로 다시 돌아온 이후로, 휴이는 론을 따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론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였다. 그는 론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개인지를 매일 확인해야 했고, 마르티안이 론을 대하는 걸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얼마나 초라한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그가 가진 서러움과 상처는 마르티안이 그에게 직접적으로 하는 말과 행동에 생겨났지만, 그녀가 론에게 하는 태도가 그와 완전히 다른 것을 보면서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럼에도 휴이는 론을 따로 불렀다.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는 집무실에 들어온 론을 보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하실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는 몸을 일으키고는 소파를 턱짓했다. 앉지. 론은 움직이지 않은 채 답했다.
“서서 듣겠습니다. 주인님이 오시기 전까지 목욕시중을 들 준비를 끝마쳐야 하는 상황이라서요. 죄송합니다, 백작님.”
휴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목욕 시중이라니, 백작가에서 마르티안의 목욕을 관리하는 하인들이 따로 있었다. 그러니 그가 말하는 목욕 시중이란 정말 목욕을 돕는 게 아니고 욕실에서 그녀의 장난감이 된다는 뜻이었다. 백작가에서 그녀의 일상을 선점하는 개는 론뿐이었으니까.
휴이는 반사적으로 뒤집히는 속을 애써 가라앉혔다.
“마르티안은 말을 타러 나갔다고 들었는데?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잖아.”
마르티안은 주에 두 번 이상은 말을 탔다. 운동을 겸해서 하는 승마는 그녀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였다. 백작가에는 좋은 말들이 많았고 영지 내에는 오래 달릴 수 있는 넓은 평지들도 제법 많았으니까.
휴이는 가급적 그런 시간을 함께하려 들었지만 근래에는 처리할 일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모두가 보름 후에 있을 수도 일정을 휴가처럼 보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얻어내는 기회인데. 휴이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었다.
“정말 안 앉을 건가?”
“서서 듣겠습니다.”
고집스러운 대꾸였다. 휴이는 다시 책상에 앉았다. 론은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 서서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휴이가 입을 열었다.
“보름 후에 수도로 올라가는 일정이 있다는 거 들었나?”
“네, 주인님께서 이번에는 같이 올라갈 거라고 하시더군요.”
“……그곳에는 하인이 부족하지 않아.”
“어차피 저는 개로 가는 거니까요.”
마르티안은 그에게 수도 일정 내내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알려주었다. 문이 닫히는 곳이라면 벌거벗고 있어야 하며, 그가 입을 수 있는 건 얇은 외투 하나 정도가 전부일 거라는 말이었다.
문이 닫히는 곳. 그는 마차 안에서부터 벌거벗고 개처럼 기게 될 것이다. 론은 그 마차에 휴이가 같이 타고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휴이는 론의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머뭇댔다. 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 일정, 수도 가는 건……. 양보해 주었으면 해.”
“양보라니요?”
“……따라오지 말아 달라고. 개의 자리니까 네가 양보하겠다고 하면 마르티안도 그렇게 해줄 거야. 네 말이라면 들어주겠다고 했으니까.”
마르티안은 늘 휴이에게 말했다. 개로 있고 싶으면 선배에게 양보를 받아오라고. 론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그녀 곁을 차지할 우선권이 론에게 있으니 그의 양보를 받아오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휴이는 끊어진 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불렀다. 론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백작님, 저는 양보할 마음이 없습니다.”
순간 휴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울컥 치미는 분노가 너무 크다. 마음을 진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이를 으득 물었다.
백작가에서 마르티안을 독점하는 개는 론이었다. 이곳에서 머무는 내내 그녀의 옆자리는 언제나 그의 것이었다. 휴이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 서성대다가 그의 좆이나 빠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 끔찍하고 비참한 자리를 견디면서 그는 겨우 여기까지 왔다. 수도 일정은 그가 겨우 만들어낸 개의 자리였다.
론은 그 자리마저도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휴이는 당장 론을 후려 패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여기에서 일을 벌였다간 마르티안은 더 이상 그를 개 취급하려 들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아끼는 애첩을 위해서, 그녀는 이전처럼 휴이를 방치할 게 분명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서러운 일이었다. 휴이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가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어.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해줄 거고. 수도 일정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으니까…….”
“제가 원하는 건 주인님 곁에 있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백작님께서 해주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양보할 이유도 없구요.”
그건 론이 매번 하는 대답이었다. 어떤 조건과 회유에도, 그는 개의 자리를 넘기지 않았다. 마르티안의 앞에서는 순하고 착하게 견디는 척했지만, 휴이가 보기에 그녀의 애첩은 지나치게 욕심이 많고 고집이 셌다. 이미 한껏 제 주인을 차지하고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개였다.
휴이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한번은, 양보해 줄 수 있지 않나? 너는 어차피 매일같이 마르티안의 손 아래 있으니까! 이 정도는 양보해도…….”
“제가 주인님 침대 위로 올라가는 건 주인님이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양보하지 않아서가 아니라요.”
“하, 그건 서열이 그렇게 되어 있어서…….”
“서열은.”
론은 잠시 말을 끊어내고는 휴이를 보았다.
“주인님이 얼마든지 바꿔도 그만인 일입니다. 애초부터 마음 가는 대로 만드신 룰이니까요.”
그러니 서열 따윈 핑계고 이건 그저 애정의 차이라고, 론은 침묵으로 뒷말을 드러냈다. 휴이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론은 그를 자극하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주인님이 예뻐하는 것까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예쁨을 받고 싶으신 거면 저를 부르는 게 아니라 주인님께 애원을 하시는 게 빠를 겁니다.”
“…….”
“아니면 다리를 벌리는 연습이라도 하시든지요. 백작님이 예전에 하셨던 말처럼, 이 자리는 다리를 벌려서 얻어내는 자리니까요.”
그건 일개 애첩이 할 수 있는 수준의 말이 아니었다. 휴이의 숨이 화와 분노로 점차 거칠어졌다. 론은 그것을 알면서도 그의 심기를 긁었다. 그건 마르티안이 절대 하지 말라고 했던 행동이었다.
마르티안은 그가 휴이와 갈등하는 것을 경계했으니까. 그녀는 론이 자신의 뒤에 숨어서 몸을 사리길 바랐다.
개의 서열, 그건 그녀가 론에게 만들어준 나름의 방어막이었다. 마르티안은 지나치리만큼 둘의 서열을 신경을 썼고 그만큼 휴이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론은 매번 그녀의 뒤에 숨어 보호받는 개였다. 보호. 론은 그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 보호야말로 그가 마르티안의 옆에서 매번 존재하게 된 이유였다.
휴이가 론을 노려보며 주먹을 틀어쥐었다가 크게 숨을 뱉어냈다. 그는 어떻게든 마르티안의 곁에서 개로 있고 싶었으니까. 겨우 얻어낸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
“……내가 뭘 하면 되겠어? 뭐든, 뭐든 하지.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그는 한껏 화를 죽인 채 말했다. 그녀의 애정을 얻어내기 위해 필사적인 건 그 역시 론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론은 그와 자신이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휴이는 마르티안의 남편이었고, 그녀가 낳은 아이의 아버지였으며, 그가 타고난 것들을 모두 매력적이었다.
그가 가진 것들은 앞으로도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었고 끝내는 마르티안의 마음을 허물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도 그는 이미 조금씩 그녀의 마음을 허물고 있었다.
론은 주먹을 꾹꾹 틀어쥐며 입을 열었다. 한껏 날선 마음이 그대로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애초에 주인님께서 백작님과의 일정에 대해 만족하셨다면 이렇게 저를 찾는 일이 없으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순간, 론의 옆으로 무언가가 퍽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유리로 만들어진 잉크병이었다. 사방으로 검은 잉크가 튀었다. 휴이가 더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집어던진 것이다.
물론 그는 론에게 제대로 된 위협은 하지 못했다. 던진 잉크병조차도 론의 위치에서 제법 떨어진 곳으로 던져졌으니까. 고작해야 론의 바지로 잉크가 튄 것이 전부였다.
론은 바지를 확인하고는 살짝 인상을 썼다. 잉크 얼룩은 한번 물들면 쉽게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바지를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백작님.”
“어딜 나가!”
휴이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가에는 그새 또 눈물이 맺혔다. 론은 감흥 없이 그것을 보았다.
그는 몹시 자주 울었고 화도 자주 냈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으니까. 론이 그를 무시한 채 몸을 돌리자 휴이가 벌떡 일어섰다. 쫓아와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였다.
차라리 맞아주는 게 나으려나. 론이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휴이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여기에 론을 왜 있는 거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요?”
차갑게 굳은 목소리였다. 마르티안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론은 이 순간 그녀가 돌아온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휴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마르티안을 보았다. 집무실 바닥은 잉크병이 깨져서 엉망진창이었고 론의 바지에는 잉크가 한껏 튀었다. 누가 보아도 상황이 뻔했다.
마르티안이 성큼성큼 걸어 휴이의 앞에 섰다. 옷차림은 승마복 차림 그대로였다.
“당신이 론을 불러서 할 이야기가 뭐가 있죠?”
“그게……, 흐읍, 수도에 올라가는 일정 관련해서, 부탁을 하느라고.”
“부탁? 이 상황은 부탁이 아니라 위협인 거 같은데?”
그녀는 바닥에 깨진 잉크병과 그 잔해를 눈짓했다. 휴이는 어떤 변명도 떠올리지 못했다. 마르티안의 표정은 점점 더 차갑게 굳었다.
“그게요, 주인님.” 그가 머뭇대며 말했을 때였다. 마르티안이 그대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거친 손찌검이었다. 휴이는 신음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고개 똑바로, 다시 해.”
휴이가 숨을 삼키고는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이어졌다. 뺨으로 손자국이 죽죽 그어졌다. 마르티안은 그의 뺨이 부풀다 못해 멍이 오르겠다 싶을 정도가 되었을 때 손을 멈췄다. 휴이는 당장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려 했지만 마르티안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한동안 내 집무실에 들어올 일 없게 해. 수도로 올라가는 일정도 모두 취소하고.”
휴이의 얼굴이 눈물로 일그러졌다. 마르티안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바로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론은 엎드려 우는 휴이를 한번 보고 그녀의 뒤를 따라 자리를 떴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목 끝까지 잠근 승마복이 답답해서 그녀는 윗 단추 몇 개를 끌러냈다. 그럼에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휴이가 또다시 제멋대로 굴었기 때문이다.
그가 백작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구는지는 알 바 아니었지만, 그녀가 자기 사람으로 데리고 있는 이들에게까지 이렇게 군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론에게 또 이딴 식으로 굴다니.’
그녀는 휴이에게 몇 번이나 서열에 대해 주지시켰다. 강박과 다름없게 굴었는데도 불구하고 휴이는 또다시 버릇대로 행동한 것이다. 마르티안은 수도에서 그를 개로 대한 것들이 문제였던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건 몹시도 짜증스러운 결론이었다.
“주인님.”
론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턱을 잡고는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혹시라도 맞은 곳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벗어. 그 말에 론이 옷을 벗었다. 얼기설기 그어진 매질 자국을 제외하고는 맞은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마르티안은 론에게서 손을 떼고 소파에 앉았다.
개는 얌전하게 다시 무릎을 꿇었다.
“론, 해야 할 말 있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이유까지 똑바로 말해.”
“주제넘게 백작님 앞에서 함부로 굴었습니다. 자리를 피하거나 더 얌전히 굴거나 해야 했는데…….”
모든 싸움은 쌍방이 버티기 때문에 생기기 마련이다. 소리가 나려면 손이 마주쳐야 하는 것처럼. 그건 휴이나 론, 둘 중 하나라도 얌전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거란 소리였다.
서로를 극심하게 견제하고 싫어하니 둘 사이가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런 갈등까지 일으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휴이에게보다 론에게 더 화가 났다.
“알면서도 또 이렇게 굴었다는 소리네. 론, 함부로 굴고 싶으면 내가 있을 때에 맞춰서 그렇게 굴라고 했을 텐데? 서열을 만든 게 무슨 의민지 몰라? 이대로 자작가로 돌아갈래?”
그녀는 언성을 높이며 론을 다그쳤다. 순하고 말을 잘 듣는 개는, 백작가로 다시 돌아온 이후부터는 한 번도 이런 일을 만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에 부응하듯 마르티안 역시 론을 보호하기 위해 몹시 애썼다. 더 예민하게 서열을 가르고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론은 다시 휴이의 앞에서 버텼다. 그게 화가 치밀었다.
“가서 맞을 거 가져와.”
론의 무릎을 걷어차며 그녀가 말했다.
론은 침대 위에서 엎드린 채로 맞았다. 두께가 있는 막대는 금세 그의 몸을 피멍으로 물들였다. 매는 엉덩이에서 허벅지로 이어졌다. 허벅지는 살이 약해서 엉덩이보다 더 빠르게 살이 터졌다.
흐으, 흡, 론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자세를 무너트렸지만 마르티안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맞을 거 각오하고 그렇게 굴었잖아? 제대로 자세 잡아.”
검붉게 부푼 엉덩이로 매가 다시 떨어졌다. 지나치게 맞은 엉덩이와 허벅지는 버티는 힘에도 덜덜 떨렸다. 론은 잘못했다고 빌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시트를 적셨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시트를 움켜쥔 손에 힘조차 잘 들어가지 않았다.
마르티안은 그를 일으켜 무릎을 꿇게 한 뒤, 앞 허벅지까지 피멍으로 물들인 후에야 매질을 멈췄다. 매로 맞은 건 하체가 전부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이 아예 안 맞은 건 아니었다.
몸을 앞으로 숙인다는 이유로 뺨을 얻어맞거나 유두 고리를 비틀렸다. 론은 한쪽만 붉게 부어오른 얼굴로 많이 울었다. 그의 등은 고통을 참느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론은 그녀가 매를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침대 시트에 닿는 살이 뜨겁고 아팠지만 그는 사실 이 매질이 멈추지 않길 바랐다.
이 정도로는 자신이 가진 주제넘은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된다. 론은 그녀가 내려놓은 매를 다시 들어 마르티안의 앞에 내려놓았다.
“벌을 더, 흐읏, 더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제넘게 굴지 못하게…….”
“론.”
“네, 주인, 흐읍, 흑, 주인님.”
론이 대답을 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그건 아파서 울던 것과는 다른 울음이었다. 마르티안은 그가 드러내는 불안을 읽었다. 애원은 지나치게 자학적이고 불안정했다. 그건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한 개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두 손을 뻗어 론의 뺨을 감쌌다. 눈물이 질척하게 흘러서 그녀의 손까지 적셨다.
“대체 뭐가 문제야?”
“흐으, 흡, 주인님.”
“내가 분명히 말했지.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난 너를 그냥 방치할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까 말해. 뭐야?”
론은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주저하는 얼굴에는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녀의 손이 잔뜩 젖은 론의 뺨을 쓸었다.
“론, 예쁘게 굴어야지.”
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르티안의 윗옷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떨린다. 하고 싶은 말들이 전부 주제넘는 것들이라 그것을 골라서 내뱉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론은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 안에 있는 감정들로 인해서 더는 견딜 수 없을 거 같아서.
“저는 이제……개로는 쓸모가 없어진 거 같아서, 그냥 백작님을 흐윽, 교육시키고, 제어하는 흐으, 흡, 그런 목줄 역할로 남는…….”
론은 쏟아지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말을 멈췄다. 마르티안은 이제 더는 백작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를 더 흥분시키는 개는 이제 백작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오래 몸을 맞춰온 론은, 그녀의 침대 위 행동을 모두 알았다. 흥분을 느낄 때는 어떤 표정을 짓는지, 뭘 원하는 건지, 참는 건지 아니면 식은 건지도.
론은 마르티안의 아래에서 개 취급을 받으며 다리를 벌렸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녀의 시선이 휴이에게 닿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건 전과는 달랐다. 전에는 그저 휴이를 확인하기 위한 시선이었다면 이제는 명백한 흥분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그에게 닿아 있다가 론에게로 옮겨졌다.
론은 자신이 움켜쥔 자리가, 손가락 사이로 점차 빠져나가고 있음을 매일 느꼈다. 유일무이하게 사랑받는 개가 되고 싶다. 그건 언제고 사라지지 않는 욕망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주제넘은 마음이었다.
“주인님. 흐읍, 죄송합니다. 더는 이런 생각 하지 못하도록, 조금만 더…….”
론은 매를 다시 내밀었다. 목줄이든 개든, 어차피 그는 마르티안의 마음에 따라 쓰임이 정해지면 존재였다. 거기에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게 오래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론은 자신의 이런 마음이 빨리 죽어 없어지길 바랐다. 이 순간, 자신의 뺨에 닿은 이 손끝 하나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의 욕망은 어떤 상황에도 질기게 살아남았다.
“론.”
마르티안은 한숨처럼 론을 불렀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 그녀를 올려본다. 개는 불쌍하게 떨고 있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그런 말은 할 수 없어서. 론이 하는 말들은 모두 주제넘은 소리였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욕망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론이 말하는 것처럼, 마르티안은 휴이를 제어하기 위해서 론을 침대 위에 올리고 유일한 개로 취급하고 있었으니까. 능숙한 개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휴이를 교육시키거나 벌을 주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론을 쓰는 건 때로는 의무나 다름없었다. 휴이를 제어하고 그리고 그녀 스스로를 제어하기 위한 의무.
마르티안은 그 태도가 론을 상처입히고 불안하게 만들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녀의 행동에는 론을 지킨다는 명목이 포함되어 있긴 했다. 휴이가 건드릴 수 없도록 관계를 명확하게 했어야 했으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여 론의 눈가에 짧게 입을 맞췄다.
“미안해.”
론의 눈가로 눈물이 흠뻑 쏟아졌다.
마르티안은 우는 개를 보며 비슷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달밤가에서 돌아온 후 백작과 결혼할 거라고 통보했던 날과 백작을 앞으로는 개로 쓸 거라고 했었던 날, 그리고 오늘. 론은 그때마다 괴로운 얼굴로 울었지만 결국은 끝내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을 택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개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건 어떤 연민이었다. 그녀가 백작가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론 덕분이었으니까. 결혼 이후나 임신 때에도, 그리고 자작가에 돌아가 자신의 딸을 방치하며 지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론에게 많은 것을 얻었다. 그건 욕망을 교환하며 지냈던 수많은 개에게서 얻어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애정이겠지. 너는 나를, 끝없이 사랑해 주었으니까.’
수많은 일을 겪고 나서야 마르티안은 자신이 그것을 먹고 버텼음을 알았다. 자신의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무너진 순간에도,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 삶을 대가처럼 지불하며 지냈을 때도, 원치 않은 임신으로 몸이 피폐하기 시들어 갔을 때도. 그녀는 론이 곁에 있어서 그가 주는 애정으로 견뎌냈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론.”
마르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몇 번을 다시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론이 좋아하는 위로이자 애정표현이었다. 론이 헐떡인다. 눈가가 붉어진 채로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불렀다.
불쌍한 개. 마르티안은 그런 론을 보며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만족감을 느꼈지만 동시에 애정을 느꼈다. 둥글고 따듯한 애정은 욕망과는 결이 달랐다.
“내가 너를 힘들게 만드는 거 알아.”
“주인님. 아니요. 흐읍, 아닙니다. 그냥 제가 자꾸, 흐윽, 주제넘게 되어서…….”
마르티안은 가만히 그의 젖은 머리카락들을 쓸어 올렸다. 미안해. 이어지는 말이 속삭이듯 떨어졌다. 첫 번째 미안하다는 말이 지난 일에 관한 거였다면 두 번째 말은 미래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녀는 론을 앞으로도 그렇게 쓸 테니까. 론이 개로 있겠다고 하는 동안에는 그녀는 늘 그를 목줄 삼아 휴이를 제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너보다 백작님을 더 아끼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도 나는 계속 너를 함부로 굴리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자꾸 마음을 쓰면 안 돼. 네가 개의 자리를 그만둔다면 더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론이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헐떡대며 우는 소리 가운데 아니라는 말이 간신히 섞였다. 마르티안은 그 한결같은 대답에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여 침대 맡에 기대어 앉았다. 론, 이리와. 그녀는 가볍게 두 팔을 벌렸다. 그는 울며 기어와 그녀의 위에 앉았다. 엉망이 된 엉덩이에 손을 대자 론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 떨렸다.
멍은 그 새 더 올라와서 그의 다리는 붉고 푸른 멍으로 엉망이었다. 마르티안은 천천히 론의 몸을 쓰다듬었다.
헐떡대던 울음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쳤다. 맞닿은 체온과 쓰다듬는 손길이 계속 이어져서 론은 자신의 불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고통과 불안을 알아주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가 그토록 견디는 것을 두고 미안하다고 해준 말이, 늘 불안하게 긴장한 채 있던 마음을 내려놓게 했다.
“주인님.”
그는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며 마르티안을 불렀다. 그녀의 시선이 부름에 응하듯 론에게 닿았다. 울컥,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을 참으며 론이 말했다.
“앞으로 수도에서 있는 일정은, 백작님께 양보하고 싶습니다.”
“양보?”
예상치 못한 말에 마르티안이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론은 지금까지 그녀의 곁에 있는 일에 대해 양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휴이가 이를 갈고 있다는 건 마르티안도 이미 아는 사실이었고. 그래서 그녀는 론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나서서 휴이를 개로 쓰곤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양보라니.
론은 몸을 숙여 그녀의 귀와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불안이 사라지고 나자 그는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는 마르티안이 휴이를 놓고 진심으로 흥분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그녀는 스스로 룰을 지키기 위해 그걸 억제하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지나친 억제는 분명 터지기 마련이다.
론은 그녀에게 룰에서 자유로울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자신과의 관계도 그 때문에 뒤틀리지 않을 테니까.
론은 자신을 쓰다듬는 손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네, 주인님. 그때에는 백작님과 지내시고 대신 돌아온 이후에…….”
론은 잠시 말을 머뭇댔다. 스스로 하는 말이 주제넘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지만 그는 스스로 숨 쉴 틈을 어떻게든 만들고 싶었다.
“저도 주인님하고만, 있는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둘만이 있는 시간. 론은 말하면서도 이것이 과한 조건이 아닐까를 몇 번이나 점검했다. 마르티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본다. 론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하룻밤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온전히 독점할 수 있는 하룻밤. 그게 있다면 어떻게든 나머지를 견딜 수 있을 거 같았다.
마르티안의 마음이 점점 더 누그러지고 끝내 그보다 백작을 더 아끼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그녀가 방금 한 말들이 거짓말이 되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그 하룻밤이 있다면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론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눈물을 뚝 떨어트렸다.
“자꾸 우네.”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봐.”
론이 얌전히 고개를 든다.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마르티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개였다면 이런 투정을 들어주지 않았을 테지만 론은 좀 달랐으니까. 욕심을 낼 줄 모르는 개는 늘 작은 것을 말하면서도 대단한 것을 욕심내는 것처럼 잔뜩 긴장하곤 했다.
그녀는 론의 엉덩이를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실컷 얻어맞은 곳이 잔뜩 열이 올라 뜨거웠다. 흣. 흡. 신음이 퍼진다. 마르티안은 론이 새삼 예쁘다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했다.
“하룻밤은 좀 짧잖아. 내가 수도에 가 있던 만큼 너와도 따로 있는 거로 하자. 괜찮지?”
으, 흐윽. 론은 대답도 못 하고 울었다. 또 울기는. 마르티안은 그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묵직한 무게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 * *
백작부부의 개인 저택에는 명백한 주기가 있었다. 그건 그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영지를 운영하며 백작의 측근으로 일하는 모두가 아는 주기였다.
이른바, 수도 일정 히스테리. 그건 백작부부가 수도에서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 시작되는, 백작의 예민함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일주일에서 열흘간 이어지는 그 히스테리는, 주치의 말에 따르면 임산부의 예민함보다 더 심한 짜증이라고 했다.
보통 수도에서 있는 일정은 일주일에서 열흘이다. 백작은 그 시간을 모두 비우기 위해 일을 미리 당겨서 하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주변의 측근들은 백작 부부가 수도로 가는 일정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그 이후 한 달치의 일정을 새롭게 점검해야 했다.
세반 영지는 나날이 더 커져서 이제는 대륙 간의 무역이 이뤄지는 매우 큰 시장이 들어선 상황이었다. 일은 매일 쏟아졌고 그 와중에 열흘의 일정을 비우는 건 모두가 죽어나는 일이었다.
백작은 눈에 불을 켜고 일을 했기 때문에 일정 이전에는 차라리 상황이 나았다. 최악은 일정이 끝나고 백작 부부가 돌아온 이후였다. 그가 없는 사이에 돌발적으로 생기는 수많은 일 처리가 밀려 있음에도, 그의 측근들은 히스테리 기간에는 백작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전에는 백작 부인께서 같이 있어서 좀 덜한 거 같더니 요즘에는 정말 죽을 맛이야.”
세무 담당 관리인이 집사장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는 공작가에서 차출된 하급귀족으로 교육원을 졸업한 후 상당한 실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늘 오전에 백작의 집무실에 들렀다. 모두가 몸을 사린다는 히스테리 기간이었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당장 보고하지 않으면 처리가 늦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백작이 내던진 펜꽂이가 자신의 옆에서 처참하게 부서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래도 맞지는 않았으니 다행이었지만.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당장 다음 주에 대규모 상단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백작님께서 저렇게 예민하시니. 대체 일 진행을 어떻게 하라는 건가? 정말이지 내 맘이 죽겠구만.”
집사장은 계속되는 하소연을 흘려들으며 지금 새 펜꽂이를 가져다 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나중에 가져다 두는 게 좋을지를 가늠했다. 오늘 가져다 놓아도 내일쯤이면 다시 박살 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집사장은 새로 주문했던 물품들이 몇 개 남아있는지를 되짚어 보다가 관리인의 말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사장은 매끄러운 말로 그를 위로했다.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이틀 후에는 상황이 나아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면 다시 괜찮아지시니까요.”
“아무리 여독이 덜 풀려서 예민해지는 거라지만……. 어휴, 조마조마해서 살 수가 없구만. 백작 부부께서 수도에 올라간단 이야기를 들으면 긴장부터 된다니까. 집사장은 안 그런가?”
“별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일 처리는 완벽하게 하시니까요.”
“너무 완벽해서 문제야. 급한 일을 처리할 때는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많은 서류처리를 어떻게 전부 할 수 있느냐며 죽는 소리를 하고는, 그는 자신이 일하는 방으로 사라졌다. 집사장은 하인을 시켜 그 방으로 질 좋은 디저트와 차를 들이게 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할 때는 그런 것들이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법이었다.
백작 부부가 수도에서 돌아온 지 9일째다. 이번 수도 일정은 열흘이었으니 백작 부인의 집무실은 아직 닫혀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수도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면 그 날짜만큼 칩거했다.
여독으로 인한 휴식이 이유였지만 단순히 그 이유라고 하기에는 그 칩거가 집무실을 닫아거는 수준이었다. 분리불안이 있는 아이처럼 구는 백작마저도 그동안은 부인의 집무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그건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는 부인의 집무실이 열리기를 애가 닳듯 기다렸으니까. 백작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잠을 못 자서 붉어진 눈가는 그때마다 우는 것처럼 떨렸다.
그건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집사장은 그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을 했다. 이전처럼 울며 기어 다니는 것보다는 그 모습이 훨씬 나았으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이런 히스테리 정도야 얼마든지 수용 가능했다. 게다가 이 기간은 고작해야 일 년에 서너 번, 길어야 열흘이면 그쳤다. 사람들은 그의 예민함이 나날이 심해진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집사장은 이 정도 분위기만 유지된다면 더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휴이는 새벽같이 몸단장을 시작했다. 마르티안의 집무실이 열리는 날이자 그녀와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그는 거울 안 모습을 예민하게 점검하며 몇 번이고 다시 지시했다.
주변의 하인들과 담당자는 잔뜩 긴장한 채로 휴이의 손짓 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말처럼, 히스테리 기간 중 그가 가장 예민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
“너무 꾸민 거 같지는 않게 해. 간단한 점심 식사니까 가능한 자연스럽게.”
새벽부터 온갖 관리를 받으면서 담당자들을 들들 볶아댄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담당자들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며 가능한 그 조건을 맞추고자 애썼다.
그는 십여 벌의 옷을 입었다가 벗었고 삼십 개가 넘어가는 장신구를 골랐다가 내려놓았으며, 머리 모양을 십수 번 다시 가다듬었다.
그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세팅을 반복하며 이것저것 고심했다. 새벽부터 아침을 건너뛰고 이어지는 준비는 모두를 힘겹게 했지만 그들은 참았다. 어쨌든 오늘은, 히스테리가 끝나는 날이었으니까. 그의 지독한 예민함은 백작 부인과 함께하고 나면 씻은 듯 사라졌다.
그의 히스테리는 본인이 여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백작 부인이 피곤하다며 두문불출해서 생기는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휴이의 관리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개인 하인들, 집사장 정도였다. 물론 깊은 진실을 아는 건 집사장이 유일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문제의 해결이었다. 곧 괴로움이 끝난다는 사실만이 백작가 사람들을 버티게 했다. 이 아침이 지나고 나면 이제 곧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건 백작가 내의 사람들 모두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평화였다.
마르티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 론과 함께 목욕을 했다. 집무실에 딸려 있는 넓은 욕실에는 남자 열댓 명 정도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욕탕이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욕탕은 조각으로 꾸며져 있는 건 물론이고 테두리마저 넓어서 하인이 올라가 각종 시중을 들기에도 편하게 되어있었다. 그녀는 백작가에 있는 시설 중 이 욕실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기분 좋아.”
마르티안은 자신의 머리를 감겨주는 론의 손길을 느끼며 가볍게 중얼거렸다. 느긋한 날이 이제 끝났다는 게 새삼 아쉬웠다.
수도에서의 시간은 뇌까지 진탕 치는 흥분의 감각들로 채워졌지만, 론과 함께 있는 시간은 완전히 달랐다. 그녀는 론과 함께 있을 때면 더는 가학에 집중하지 않았다. 함께 목욕을 했고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었다.
물론 때때로 론을 희롱하거나 수치스러운 꼴을 만들기도 했고, 그의 앞이나 뒤를 쑤시면서 울게 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그건 들끓는 흥분으로 인해 시작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수도에서 모든 가학을 쏟아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상대가 론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마음이 여유로워진다는 건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그를 희롱하고 괴롭히면서도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자주 해주었다. 론은 때로는 울었고 때로는 다리를 벌렸다. 그녀는 익숙한 개와 익숙한 즐거움을 즐겼다.
‘그냥 이렇게 놀고 먹으면서 지내면 좋을 텐데.’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물을 튕겼다.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헹궈내는 손길이 이어진다. 론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짜내고는 수건을 덮어 다시 물기를 제거했다.
마르티안은 머리 감기가 끝났음을 알고는 몸을 일으켰다. 찰랑이는 물소리와 함께 그녀는 탕에서 나왔다. 몸으로 물이 뚝뚝 떨어져 흘러내렸다. 론이 새 수건을 들고 와서 그녀의 몸에 흘러내리는 물을 전부 닦아냈다. 손끝 하나와 발끝 하나까지 시중이 이어졌다.
“가운을 가져오겠습니다, 주인님.”
론은 그녀에게 가운을 입혀주고는 무릎을 꿇어 가운 매듭까지 꼼꼼히 묶었다. 마르티안은 그저 론이 하는 것을 보았다.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는 이런 식의 시중은, 사실 그녀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녀는 시중을 기다리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론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깔끔하게 모든 게 정리되자 그녀가 손을 뻗어 론의 뺨을 툭 건드렸다.
“즐거웠어?”
론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네, 주인님. 그의 얼굴은 멍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마르티안은 몸을 굽혀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래, 고생했어.”
론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몸으로 흔적이 남지 않은 건 아쉬웠지만, 그는 이제 그것으로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마르티안은 그에게 독점적인 시간들을 주었으니까. 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해서, 쓸모없는 불안으로 그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안정된 마음은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마르티안의 가운 자락을 붙잡고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줄 수 있는 것. 그리고 감사하게 받아야 할 것. 이 시간에는 그런 것들이 모두 있었다. 그러니 그에 맞춰서 할 것들을 하고 또 감사해하면 되었다. 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무척 넓다는 생각을 했다.
마르티안이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마르티안은 론을 두고 욕실을 나왔다. 바깥에는 이미 열댓 명의 하인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백작 부인으로서 관리를 받아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하인들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말리며 만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피부결을 정리한다. 몇 명은 오늘 입을 옷을 가지고 들어오고 또 한쪽에서는 장신구가 든 보석함을 열어 보였다. 마르티안은 귀찮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옷과 보석을 골랐다.
적당히 옷을 갖춰 입고 나자 제인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에 익숙하고 능숙해졌다. 마르티안의 곁에서 빠르게 일을 처리할 줄 아는 개인 하인. 제인은 이제 세탁실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어졌다.
“그동안 자작가에서 온 서류들입니다. 예산 관련 숫자들은 일차적으로 검토했구요. 가장 급한 부분은 자작가의 숲 관리 관련해서 새로운 전문 관리인을 고용하는 부분인데, 엘 도안님 추천은…….”
그녀는 마르티안 앞으로 온 서류들을 우선 순위에 따라 보고했다. 마르티안은 자신을 꾸며주는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그때그때 지시할 것들을 말했다.
여러모로 부산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그 부산함 속에서 확연한 현실감을 느꼈다. 그녀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몹시 바쁘게 이어지는 삶이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빛이 점차 강해진다. 그림자가 짧게 줄어들었을 즈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점심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내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딱 시간을 맞춰 휴이가 나타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모습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외향은 백작 자체인 모습으로, 그는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급하게 다가왔다. 기다렸어요. 휴이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조금은 울음기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는 어떤 교육보다도 이 방치를 더 견디기 어려워했다.
마르티안은 가볍게 주의를 주듯 ‘휴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지금 그들은 백작 부부였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둘의 시중을 들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었다. 휴이는 조금 서럽단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다시 표정을 고쳤다. 둘을 나란히 걸어서 식당으로 내려갔다.
백작가 저택으로 드디어 평화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