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21 (21/2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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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개월에 한 번씩, 자작가에 머물 때면 휴이는 저녁마다 사라졌다. 엘 도안은 그가 식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걸 내심 기뻐했지만 집사는 밖으로 나도는 휴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신경을 쓰는 것도 아니어서 자작가의 일상은 별다를 것 없이 이어졌다.

마르티안 역시 휴이가 어떻게 굴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휴이는 늘 달밤가에 있었다. 관리자에게 그곳의 룰을 배우고, 속을 비우고, 거기 남창들이 입는 옷을 입은 채 마르티안이 오길 기다렸다. 진짜 남창인 것처럼.

그건 많은 것을 내포한 말이었다. 그가 진짜 남창일 수는 없었으니까. 사실 그는 얼마든지, 언제든지 달밤가를 망하게 만들 수 있을 사람이었다. 그가 가진 재력과 지위는 그만큼 대단했으니까.

하지만 마르티안은 그가 진짜 남창처럼 굴기 원했다. 그녀는 휴이가 남창 취급을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겠다는 마음으로 그 촌극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휴이를 불러 달밤가의 룰과 서열을 제대로 따르는지를 계속 확인했고, 작은 잘못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 그건 지금껏 파트너를 대할 때와도 다르고, 남창을 대할 때와도 다른, 가혹하고 까다로운 태도였다.

어쨌든 휴이는 계속 남창 짓을 계속 이어갔다. 그걸 버티고 나면 마르티안이 그를 침대에 올려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달밤가에 와서 늘 휴이만 상대하는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다른 사람을 부르기도 했고 때로는 마지막에만 그를 불러 그의 성기만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건 개로 대해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취급이었다.

“쓸데없이 울어서 흥이 떨어지네. 내보내고 다른 애를 불러와.”

마르티안은 휴이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그대로 쫓아냈다. 휴이는 차라리 벌을 받겠다고 애원하던 매달렸지만 이내 그게 쓸모없는 애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벌을 주며 교육시키는 건 개에게만 해주는 일이었고, 그는 더 이상 개가 아니었다. 남창은 그저 사고파는 상품일 뿐이다.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달밤가의 룰에 따라 벌을 받았고 그의 자리는 금세 다른 남창으로 채워졌다.

휴이는 점점 더 불안에 시달렸다. 달밤가에서 그녀의 곁에 있게 될 때조차 불안과 괴로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가학에 굶주린 몸은 마르티안이 해주는 가혹한 행위에 흥분하며 기뻐했지만, 결핍으로 비어있는 마음은 매번 더 부서졌다.

휴이는 자신이 아직도 버림받은 상태라는 것을 매번 더 깨달아야만 했다.

“차라리 남창으로 태어나지 그랬어. 그럼 매일 다리나 벌리며 살았을 텐데.”

달밤가를 서성이며 마르티안을 기다릴 때마다 그는 그녀가 했던 말들을 곱씹곤 했다. 남창으로 태어났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더 수월하게 그녀의 개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휴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달밤가에 머물렀다.

손님이지만 남창인 손님. 그 기이한 역할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그에 대한 소문은 평범하게 나고 있었다. 백작 부부가 드디어 애정이 떨어진 모양인지 각자 창관을 드나든다더라, 요란하게 결혼하더니 결국에는 남들과 다 똑같이 변한 거라는 그런 소문들이었다.

휴이는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남들과 다 똑같은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테니까.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멈출 수가 없었다.

* * *

휴이는 이른 저녁부터 달밤가에 도착해 속을 비우고 준비된 속옷을 입었다. 속옷은 앞을 가리는 천이 너무 작아서 성기가 옆으로 흘러내리듯 튀어나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대로 고정되지 않아서 휴이는 흘러내린 모양새를 포기했다. 의도적으로 천박한 꼴이 되길 바라고 만들어진 속옷 같았으니까.

그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에 놓인 것을 보았다. 풍성한 털 꼬리가 달려 있는, 뒤를 막아주는 용도의 구멍마개였다.

관리자는 그것을 테이블에 놓으며 이 마개가 이곳에 있는 마개 중 꼬리털이 제일 예쁘고 풍성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건 일종의 공치사였다. 마르티안이 휴이를 선택하도록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휴이는 윤활제를 마개에 충분히 바르고는 뒷구멍에 밀어 넣었다.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마개를 삼키자 묵직한 이물감이 안쪽을 메웠다. 관장을 하는 거나 뒤를 벌리는 일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그는 거울을 보며 마개에 달린 꼬리가 어떤 모양인지 확인했다. 엉덩이 사이로 튀어나와 오금에서 흔들리는 꼬리는 관리자의 말처럼 제법 괜찮아 보였다.

그는 목줄을 차고는 마르티안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휴이가 달밤가에 올 때면 관리자는 마르티안이 머무는 층과 그 아래층까지 완전히 비웠다. 백작 부부 중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백작이 남창처럼 군다는 소문이 나서 정말 큰일이었으니까. 관리자는 혹시나 공작가가 개입하게 될까 봐 철저히 경계하면서 동시에 백작이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백작은 여러모로 미쳐있었는데 특히 마르티안과 관련된 일에 더더욱 그랬다. 그녀가 다른 남창을 고를 때면 그의 눈빛은 누군가를 죽일 것처럼 변했고, 그녀가 자신을 내쫓기라도 하면 복도에서 내내 울며 시끄럽게 굴었다.

‘그렇게 미친놈인 줄 내가 알았나. 아이고오…….’

관리자는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며, 삼 개월에 한 번씩 피골이 말라붙는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관리자는 마차에서 내리는 마르티안을 확인하고는 급하게 다가갔다.

“마르티안 님. 이번에는 제발, 제발 좀 배려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뭘 배려해?”

“아시잖습니까. 엔간하면 백작님 좀 쫓아내지 마시고 다른 남창도 부르지 마시구요. 제가 정말 죽겠습니다. 매번 두 분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지…….”

“대신 돈을 쏟아지게 받고 있잖아. 마음은 좀 불편해도 그 정도면 된 거 아니야?”

“돈을 쏟아지게 받다니요. 두 분 오시는 동안 여기 건물의 반은 비운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그게 얼마나 큰 손해고…….”

“누가 비우래?”

관리자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손으로 퍽퍽 두들겼다. 둘이 돌아가며 사람 피를 말리는 걸 보면 부부는 부부인 모양이었다. 관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래도요. 그게 소문나서 좋을 일은 아니잖습니까. 또 제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으니까……. 마르티안 님, 제가 마르티안 님을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예?”

“오늘따라 엄청 달라붙네. 백작 눈치 보려니 죽겠어?”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솔직히 여기 애들이 안 죽어 나가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서 일부러 돈벌이 안 되는 애들로만 들여보내고 있잖아?”

그 말에 관리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실제로 마르티안의 방에 들여보내는 남창들은 대부분 뒤로 밀려난 애들이었으니까.

손님들에게 자꾸 실수를 한다거나, 자주 문제를 일으키거나, 혹은 나이가 너무 들어서 값어치가 떨어지는 애들. 한마디로 백작의 손에 사라져도 달밤가에 큰 손해가 없을 애들이었다.

그리고 마르티안은 그걸 알면서도 적당히 눈감고 넘어가는 중이었다. 그녀 역시 관리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휴이를 적당히 봐주면서 대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백작에게 교육이나 잘 시켜. 실수 안 하고 잘못 안 하게. 그럼 쫓겨날 일이 뭐가 있어?”

“아니, 제가 어떻게 교육을 시킵니까? 애초에, 애초에……남창이 아닌데요.”

관리자가 억울해 죽겠다는 투로 말했다. 그는 휴이가 이 모든 짓거리를 그만두길 매번 빌고 빌었지만 그는 일 년이 넘게 이 상황을 이어가고 있었다. 삼 개월에 한 번씩 이 연극을 하게 될 때마다 관리자의 머리카락은 한 움큼씩 빠졌다.

그는 이내 자신이 한 노력들을 주절주절 입에 올렸다.

“그래도 백작님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데요. 보시니 아시잖습니까? 제가 그, 뭐야, 관련된 책자도 만들어서 주었고 나름 상담도 하면서 얼마나,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마르티안은 방으로 걸으며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백작은 매번 더 남창다워졌지만 아직도 쫓겨날 때는 얌전하질 못했다. 복도에 주저앉아 시끄럽게 우는 건 백작가에서 하는 짓과 다름없어서 그녀는 그때마다 문을 열어놓고 다른 남창을 침대에 올렸다.

그가 쫓겨나는 이유는 대부분 사소한 일이었다. 뒤를 함부로 쑤시다가 휴이가 견디지 못하고 앞으로 기어가면 그걸로 트집 잡았고 매질에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두고 쫓아냈으며, 때로는 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늦게 했다는 이유로, 질질 짜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내쫓았다.

덕분에 휴이는 점점 더 얌전해졌다. 의식하지 못해서 나오는 작은 행동에도, 혹시 그게 쫓겨나는 이유가 될까 봐 늘 긴장하고 겁을 먹었으니까.

“……확실히, 취향이긴 해.”

그가 잔뜩 긴장해서 겁을 먹을 때마다 그녀는 희열과 흥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약아빠진 태도를 짓이기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를 남창처럼 굴리는 것이 그 자체로 만족스러울 때가 많아졌다.

그건 물리적인 가학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창이 된 휴이는 매번 더 불안해하고 더 긴장한 채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으니까.

방으로 들어서자 휴이가 꼬리를 단 채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님이 오길 기다리며 대기하는 모양 그대로였다. 그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등을 굽혀 인사했다.

관리자가 함께 따라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창은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 이곳의 룰이었으니까. 그는 자신이 이렇게 굴지 않으면, 마르티안이 곧바로 쫓아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휴이는 엎드린 채로 입을 열었다.

“……저를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족하실 수 있게 잘하겠습니다.”

마르티안이 그를 지나쳐 소파에 앉는다. 뒤따라 황급히 걷는 건 관리자가 분명했다. 휴이는 엎드린 몸을 일으켜 소파 쪽을 보았다. 고개는 들었지만 시선은 아래로. 그건 그가 버림받고 쫓겨나며 배운 남창다운 자세였다. 마르티안은 함부로 시선을 맞추었다는 이유로도 내쫓기도 했으니까.

가능한 거슬리지 않도록 얌전히 있는 것. 휴이는 꼼짝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관리자가 이만 나가보겠다고 말하는 게 들렸다. 문이 다시 닫혔다.

“꼬리를 달고 왔으면 보여야지.”

그 말에 휴이가 몸을 뒤로 돌리고는 엉덩이를 들었다. 엉덩이 사이로 풍성한 꼬리가 늘어졌다. 머리카락 색과 어울리는 금갈색의 풍성한 털이었다. 꼬리의 끝부분은 갈색으로 점차 짙어져서 진짜 동물의 꼬리털처럼 생겼다. 여러모로 보기에 좋았다.

마르티안이 늘어진 꼬리를 잡아챘다. 흐윽 하고 휴이가 신음을 뱉어냈다. 안에 들어있는 마개가 잡아당겨지자 구멍이 반사적으로 꾹 조여지며 마개를 꽉 물었다. 그녀느 잡은 꼬리를 위로 툭툭 잡아당기며 말했다.

“진짜 꼬리 같네?”

“아, 흐으……흐읏, 감사합니다.”

휴이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마개가 뒤로 탁탁 당겨지며 구멍 안을 치는 느낌이 이어졌다. 마개를 넣기 전에 윤활제를 가득 밀어 넣은 터라 안쪽이 지나치게 미끈거렸다. 휴이가 엉덩이에 꾹 힘을 주었다.

“힘 풀어봐.”

마르티안이 그의 가랑이 사이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휴이가 끕 소리를 내며 몸을 굳혔다. 고환과 성기를 차이는 건 고통이 몹시 컸으니까. 바짝 긴장한 몸이 구멍을 조이자 마르티안이 다시 발길질을 했다. 힘 풀라고 했는데? 그녀의 말투가 조금 굳어진다. 턱턱 걷어차는 발길질이 이어졌다.

“흐윽, 네, 할게, 흡! 할게요. 흐으! 하윽!”

휴이는 맨바닥을 손으로 긁었다. 차는 강도가 점점 강해져서 이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몰려왔다. 등이 굽어지고 허벅지가 떨렸다. 끅끅대는 소리에도 걷어차는 발길이 이어졌다. 빨리 힘을 빼야 하는데 고통 때문에 자꾸 구멍이 조여졌다.

흐으, 흐으으. 이상한 신음을 뱉으며 그는 이마를 바닥에 문질렀다. 이대로 또 쫓겨나게 될까 봐 무섭다. 시키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는 허리를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구멍에 힘을 풀려고 했지만, 오가는 자극과 고통이 그걸 계속해서 방해했다.

“뭐해, 힘 풀라니까? 말 듣기 싫어?”

다시 아래가 걷어차였다. 휴이는 끅끅대며 울기 시작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그는 팔을 뒤로 보내 스스로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자꾸 조이는 구멍을 어떻게든 벌어지게 해야 했다. 아니, 벌리려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했다. 쫓겨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순간 마르티안이 그의 아래를 크게 걷어찼다. 퍽 소리가 날 정도여서 휴이는 소리도 못 지르고 이마를 바닥에 댄 채 등을 구부렸다. 흐아, 흐으, 흐윽……. 뒤늦게 신음과 함께 눈물이 쏟아졌지만 자세를 무너트릴 수는 없었다. 그럼 분명 쫒겨날 테니까.

휴이는 엉덩이를 올린 채 얻어맞기 좋게 벌린 허벅지를 어떻게든 버텨냈다.

“관리자가 나름 남창 교육을 시키긴 하나 봐.”

주저앉기라도 하면 주제에 손님을 거절하는 거냐고 쫓아내려고 했더니, 그걸 알고는 어떻게든 버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휴이가 보이는 거부에 대해서 용서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그게 고의건 혹은 실수건 상관없이 그대로 내쫓아 버렸다.

마르티안이 다시 그의 꼬리를 잡아채어 당겼다. 고통으로 잔뜩 긴장한 몸은 들어있는 것을 꽉 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짜증을 실어 말했다.

“힘 빼라는 소리가 안 들려?”

“긴장해서, 흐으, 흐윽, 긴장해서요. 다시 힘 뺄게요.”

휴이는 헐떡이면서 그렇게 말했다. 손님이 원하면 상황이 어떻든 해야 하는 법이었다. 발로 고환을 걷어차였다는 건 아무 변명거리도 되지 못했다. 그는 허겁지겁 엉덩이를 쥔 손에 힘을 주어서 더 벌리려 애썼다. 구멍이 그 힘으로 벌어지길 바라면서. 그는 고통으로 긴장하는 몸을 잘 제어하지 못했으니까.

“흐으, 힘 풀 수 있어요 흐읍,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이대로 쫓겨날 거 같다는 생각 때문에 몸이 더 긴장한다. 차라리 거칠게 잡아당겨 꼬리를 빼주면 좋을 텐데 마르티안은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꼬리를 위로 잡아채듯 당겼다. 휴이는 울음을 삼키며 어떻게든 몸에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뱉어내는 기색이 필사적이었지만 마르티안은 다시 그의 아래를 툭 걷어찼다. 끄윽 하고 뱉어진 신음 뒤로 울음이 다시 터졌다. 이대로는 쫓겨날 테니까. 그의 불안은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확신이나 다름없었다.

마르티안은 우는 휴이를 보다가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침대로 기어가.”

휴이가 이해를 못 한 채 끕, 하고 숨을 들이켰다.

“뭐해? 침대로 기어가라고. 아니면 그냥 쫓겨날래?”

“아니, 아니요. 흐으. 흡. 갈게요.”

그가 급하게 고갯짓을 하고는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르티안은 그 뒤를 따르며 뒤에서 툭툭 그 엉덩이와 고환을 걷어찼다. 네발로 기는 모양새에 꼬리까지 달려있으니 정말 커다란 개처럼 느껴졌다. 물론 엉덩이를 걷어차이며 좆을 바짝 세우는 개는 없겠지만.

마르티안은 잡고 있던 꼬리를 툭 놓자, 풍성한 털이 그의 가랑이 사이로 늘어졌다. 간지럽고 부드럽게 감기는 털들이 자극적이었는지 휴이가 옅은 신음을 뱉으며 움찔 굳었다.

“뭐해, 빨리 기어와.”

그녀는 휴이를 지나쳐 먼저 침대에 올라갔다. 휴이는 뻣뻣한 모양새로 조금씩 기었다.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그는 움찔하고 멈췄다. 발기한 상태에서 꼬리가 뒤로 흔들리며 스치는 것이 자극적이었다. 함부로 싸지르게 될까봐 그는 가능한 느리게 머뭇대며 기었다.

휴이는 한참 걸려 겨우 침대까지 기어왔다. 발기한 성기는 앞부분이 조금 젖어 있었다. 그는 울어서 빨개진 눈으로 그녀의 발에 입을 맞췄다. 그건 애원의 몸짓이었다.

“……마개 선물해 주세요, 흐으, 함부로 싸지 못하게 앞을 막아주세요.”

휴이는 이곳의 룰에 대해 거의 다 배운 상태였다. 요도 마개나 정조대 같은 것들은 선물로 받으면 손님이 빼라고 하지 않는 이상 뺄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함부로 싸서 쫓겨나는 것보다 요도가 막힌 채 고통을 견디는 것이 나았다.

쫓겨난 상태로 복도를 서성이는 건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으니까. 차라리 제대로 사정하지 못한 채로 울며 바닥을 기는 것이 나았다. 다행스럽게도 마르티안은 관대하게 마개를 선물로 주는 걸 허락했다.

“가져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휴이는 침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얌전히 기다렸다. 구멍에 꼬리를 박은 채로 앉아 있자 풍성한 꼬리털이 자꾸 살을 간지럽혔다.

그는 구멍이 움찔대는 것을 느꼈다. 내벽이 움찔대며 틀어막고 있는 것을 조였고 그때마다 묘한 감각이 이어졌다.

휴이는 입술을 깨물며 얌전히 있으려 애썼지만 흥분한 몸이 당장 싸기라도 할 것처럼 움찔 떨렸다. 오래 참지 못할 거 같아서 그는 고개를 돌려 마르티안을 찾았다. 그녀는 한쪽에 놓인 서랍을 열고 요도 막대를 고르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라면 건드리지 않은 채로 쌀 것 같다. 그건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흥분을 줄여보기 위해 노력했다. 입술을 짓씹고 허벅지를 긁었지만 흥분은 쉽게 죽지 않았다.

천박하게 흥분하는 몸은 스스로 제어가 되질 않는다는 점에서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흐, 흐으…….”

쫓겨나고 싶지 않다. 그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마르티안은 그가 흥분이나 고통 때문에 우는 것들은 내버려 둬도, 감정에 휩싸여 우는 건 봐주지 않았으니까. 이유도 없이 질질 짜는 건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는 불안감을 누르며 마르티안을 기다렸다.

달각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느긋하게 고르는 소리였다. 휴이는 괴롭다고 생각하며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뒤의 구멍마저 흥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되어서야 마르티안이 돌아왔다. 그녀는 굴곡지고 두꺼워 보이는 요도 마개를 침대 위로 툭 던졌다.

“입에 물고 기다리고 있어.”

휴이는 엎드려서 요도 마개를 입으로 물었다. 두껍긴 했지만 고무로 되어있어서 생각보다는 더 말랑거리는 재질이었다. 혹시라도 잇자국이 나진 않을까 싶어서 그는 가능한 살짝 물었다. 손님이 준 선물은 소중히 다루어야 했다.

마르티안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는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몸을 따라 가볍게 흘러내리는 실크 가운은 일개 창관에서 하룻밤용으로 내줄 수 있는 수준의 가운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은 건 백작가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으니까. 달밤가에서 대여해 주는 이 방조차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을 꾸민 장식품들은 놀랍도록 비싼 것들이었고 이곳에 있는 침구나 가구들도 백작가의 수준이었으니까. 도구 서랍에는 그녀의 취향을 반영한, 고급스럽게 꾸며진 정갈한 도구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원래 그곳에 놓인 것들은 전부 대여용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것들은 다른 손님들과 공유되지 않을 것이다. 휴이는 이 방을 독점하고 관리하는 데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있었으니까.

‘……남창 짓을 하느라 그 돈을 쓴다고는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녀는 이 관계가 휴이를 더 목마르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개가 되고 싶어서 안달 난 눈은 남창의 자리에 있으면서 더 간절해졌으니까. 이 관계는, 치자면 소금물과 같은 관계였다. 학대를 맛보고 그녀의 아래에서 기어 다녔지만 그가 원하는 개의 자리는 결코 주어지지 않았다.

백작가에 돌아가면, 그녀는 론을 개로 쓰며 시간을 보냈다. 휴이는 그것을 보며 매번 더 심하게 울었다. 이곳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주인님.’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뱉으면서.

그건 정말이지 지겨운 구애였다. 이미 끝나버린 관계를 곱씹는 어리석은 구애. 그의 절망을 살피는 일은 지겨웠지만 나쁘진 않았다. 그 자체로 올라오는 가학적인 만족감이 있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침대 베개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하게 누웠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쿠션의 느낌과 침구의 감촉이 더없이 익숙하다. 그녀가 휴이에게 손짓했다.

“내 위로 올라와서 앉아.”

요도 마개를 입에 문 채로 휴이가 그녀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퉁퉁 부어서 달아올라 있는 유두가 피부 위로 유독 눈에 띈다. 그에게 남아있는 자국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예쁘고 천박하고 사람을 흥분시켰다.

마르티안은 손을 내밀어 요도 막대를 받고는 그 끝으로 휴이의 유두를 꾹 눌렀다. 짓이겨 누르고 긁어내리자 유두는 금세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막대로 딱딱해진 유두를 후려쳤다. 흐읍! 휴이가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달아오른 그의 아래가 움찔움찔 떨린다. 그녀가 손을 뻗어 부푼 살덩이를 비틀어 쥐고는 그대로 아래로 잡아당겼다.

“흐아! 흐, 흐으! 흐으응.”

그의 몸이 잡아당기는 쪽으로 주줌주춤 내려왔다. 버티다 못해서 조금씩 몸을 기울이는 식이다. 그마저도 눈치를 보며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전처럼 아픈 걸 피하기 위해 몸을 급하게 기울이고, 마르티안에게 달라붙어 끙끙대는 태도는 이제 없어졌다. 그게 쫓겨날 일이라는 걸 배운 덕분이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유두를 틀어쥐고 아래로 당기면서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내리쳤다.

“누가 몸을 구부리래?”

“흐으, 자, 잘못……, 흐윽.”

손찌검이 두어 번 더 이어졌다. 휴이는 구부려진 몸을 펴려고 했다. 유두가 뜯겨나가는 것처럼 아팠지만 쫓겨나고 싶진 않았으니가. 끄윽, 흐윽. 그가 울며 등을 바로 펴자 유두가 늘어나다가 툭 하고 그녀의 손끝에서 빠져나갔다. 살 안쪽까지 파고드는 타는 자극이 이어졌다.

그가 헐떡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아파도 직접 손을 댈 수는 없었다.

“지금 도망간 거야?”

마르티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휴이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냥 드, 등을 펴서 자세 바로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변명이 급히 튀어나갔다. 그가 여기서 쫓겨난 이유 대부분이 도망치려고 했다는 거였으니까. 도망치고 거부했다는 게 버림받는 이유였다. 휴이는 겁을 집어먹은 채로 스스로 가슴을 쥐어 마르티안의 앞에 내밀었다.

“다시, 다시 할게요. 기회를 주시면 다시 해서, 흐윽…….”

겁먹은 얼굴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쫓아내지 마세요. 그 말이 차마 나오질 않아서 그는 숨을 삼켰다. 헐떡대는 그를 보던 마르티안이 다시 손을 올렸다. 휴이가 움찔 굳는다. 쫓겨날 때는 머리채를 움켜쥐인 채로 그대로 내팽개쳐졌으니까.

다행스럽게도, 그녀의 손은 다시 그의 유두를 짓이겨 잡아챘다.

“흐으으! 흐읍, 끄……, 감사, 흐아! 흐으! 감사합니다.”

그는 마르티안의 손에서 자신의 유두가 빠지지 않도록 애를 썼다. 물론 잡혀있는 상태로 등을 바로 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노력했다. 늘어난 살덩이는 한계까지 붉어졌고 유두 안쪽으로 찌르는 통증이 이어졌다.

“뭐해? 자세 똑바로 하라고 했잖아?”

“……흐으, 하, 하려고……. 흡, 으아!”

마르티안이 쥐고 있던 것을 비벼 뭉갰다. 휴이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상체를 조금 비틀었지만 그만큼 살덩이가 비틀려 고통만 더 심해졌다. 끄윽, 흐으으……. 고통 때문에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마르티안이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자세 하나도 제대로 못 잡네.”

“흐, 흐으……. 잘못, 했어요. 다시, 흐으, 흐읍!”

뭉개고 비트는 손짓에 숨 하나 제대로 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멈춰달라는 애원조차 하기 어렵다. 이곳은 창관이었고 그는 이곳에 남창으로 있었으니까. 손님은 그의 몸을 가지고 뭐든 할 수 있었다.

마르티안이 순간 괴롭히던 것을 놓았다. 피가 갑자기 통하면서 뭉개졌던 유두가 고통스럽게 찌릿거리며 저렸다. 휴이가 시트를 움켜쥐며 아픔을 견뎌냈다. 손으로라도 문지르고 싶었지만 허락을 받지는 못했으니까.

“자세.”

그녀의 말에 휴이가 반사적으로 등을 폈다. 눈물이 아직 마르질 않아서 앞이 흐릿했다. 그가 눈을 깜박여서 눈물을 떨구어 냈을 때였다. 아래로 후려치는 통증이 일었다.

“아파 죽겠는 척하더니…….”

마르티안은 흥분한 그의 성기를 후려쳤다. 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흥분하면 큰일이었다. 비참하다거나 수치스럽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허락 없이 함부로 사정하면 쫓겨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가학에 들뜬 몸은 늘 제어가 되지 않았으니까. 참으려 해도 참기 어려웠고 흥분하지 않으려 해도 흥분했다. 마르티안이 주는 가학은 그의 온몸을 들뜨게 했다. 그는 다시 애원했다.

“흐읏, 서, 선물……. 빨리, 흡, 넣어 주세요. 흐으……감사하게 여기고, 흐읏, 잘하고 있을 테니까……. 흐으! 흐아읍!”

그녀가 휴이의 꼬리털을 옆으로 잡아당겼다. 잡아당길 때마다 안에 박힌 마개가 툭툭 걸렸다. 휴이는 몸을 움찔대며 헐떡였다. 잔뜩 흥분한 성기가 몸보다 더 움찔댄다. 귀두는 이미 푹 젖어서 번들댄다. 오래 참지 못할 꼴이었다.

흐, 제발. 그가 다시 선물을 달라고 애원했다.

“그래, 선물 줘야지.”

마르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휴이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흐으응, 신음이 흘러나오며 그의 허리가 움찔 튀었다. 그녀는 막대를 들어 요도 구멍에 맞췄다. 막대의 두께가 두꺼워서 벌어진 요도구를 완전히 가렸다.

휴이는 자신의 아래를 보며 긴장한 신음을 뱉어냈지만, 그의 성기는 더욱 흥분해서는 당장 싸기라도 할 기세였다. 마르티안이 막대의 끝으로 요도 구멍을 가볍게 헤집었다. 흐으, 하윽……. 휴이의 허리가 움찔 움직였다.

“제발, 흐으, 제발요. 빨리…….”

그는 애원했다. 잔뜩 흥분한 몸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함부로 싸서 쫓겨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손이 빨리 앞을 막아주지 않아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점점 더 천박해졌다.

쑤셔 박아주세요. 선물 받고 싶어요. 제발. 박힌 채로 얌전히 있겠다고 말하며 그는 어느 순간 울기 시작했다.

마르티안은 그제야 막대를 밀어 넣었다. 두꺼운 막대는 처음부터 빠듯하게 구멍 안을 벌리고 늘렸다. 흐으, 흐읏, 흐으윽. 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헐떡대는 숨이 커진다. 마르티안이 밀어 넣는 것을 멈추고는 그의 뺨을 두들겼다.

“뭐 하는 거야? 선물 달라더니 감사 인사도 안하고. 마음에 안 들어? 그만둘까?”

“아니, 아니에요. 흐윽……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휴이는 울던 얼굴을 펴서 억지로 웃었다. 남창에게는 호불호라는 게 있을 수 없었으니까. 손님이 주는 것이면 뭐든 좋아해야 했다.

그는 억지로 벌어지는 아래의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가 스스로 놀라서 다시 웃었다. 요도구가 억지로 벌어지며 긁히듯이 그어졌지만 어쨌든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선물을 주어서 감사하단 소리뿐이었다.

마르티안은 조금 더 거칠게 막대를 밀어 넣었다. 끅, 흐으아, 휴이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굴곡지고 두꺼운 막대는 말랑거리는 재질임에도 고통스러웠다.

성기 안쪽으로 터질 듯이 채워지는 감각과 우둘투둘한 굴곡마다 비벼지는 자극이 한계까지 치달았다.

“흐으……흐윽, 흐으……”

휴이는 더 이상 표정 관리조차 하지 못한 채 흐느꼈다. 고통에 허덕이는 와중에도 흥분은 죽지 않았고 움찔대며 긴장할 때마다 뒷구멍에 힘이 들어가며 박혀있는 마개를 거세게 조였다.

앞, 뒤로 잔뜩 채워지고 박힌다는 생각이 들자 흥분은 더 크게 치밀었다.

“남창 주제에 혼자 즐기기는. 버릇없게.”

마르티안이 밀어 넣던 요도 막대를 다시 쭉 뽑아냈다. 흐으으! 휴이가 입술을 깨물며 감각을 참아냈다. 굴곡진 것들이 요도 안을 자극하며 한 번에 빠졌다가 곧바로 다시 밀고 들어왔다. 질질 젖어 있던 요도 입구로 쿠퍼액이 질퍽대며 흘렀다.

끝까지 들어온 막대는 내벽 안을 짓누르다가 다시 반쯤 빠져나갔다. 우둘우둘한 모양대로 요도구 안 내벽이 문질러졌다. 성기가 찢어질 것처럼 아팠고 앞이 터질 것 같았다.

휴이는 신음을 내지르며 울었다. 흐어, 흐으, 흐으아. 감각은 고통스럽고 자극적이었다. 마르티안은 밭게 들쑤시던 것을 다시 끝까지 푹 처박았다.

“입이 있으면 감사 인사나 해. 시끄럽게 굴지 말고.”

휴이가 신음을 급하게 삼키고는 끅끅 숨을 들이켰다.

“흐, 흐으, 감사합니다. 선물 주셔서……. 끄윽, 흐으…….”

마르티안은 요도 막대를 거의 끝까지 빼낸 상태로, 입구 부분에 대고 빙글 돌렸다. 내벽을 둥글게 긋는 자극이 이어졌다. 소리를 참지 못할 거 같아서 휴이는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끅. 끄으. 흡. 아랫배가 아프고 허리가 덜덜 떨렸다. 문제는 고통에 흥분하는 몸이었다. 그의 성기는 곧 쌀 것만 같았다.

안돼, 흐으, 안돼. 제발. 그는 스스로 막은 입으로 중얼댔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이 괴로웠고, 이 와중에도 제대로 앞을 막아주지 않고 그를 괴롭히기만 하는 마르티안이 야속했다. 그 손을 붙잡아 막고 싶었지만 남창이 손님이 하는 걸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휴이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고는 필사적으로 부탁했다.

“흐윽, 제발요, 선물 주신 거 다 넣어주세요. 흐으, 흐아읍, 여기 빨리 박아서 못 싸게……, 제발, 흐읍, 흐아으…….”

마르티안은 그의 성기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혹하게 굴어도 휴이의 몸은 더 흥분하고 또 사정했으니까. 그의 몸은 오래 참은 탓인지 이전보다 훨씬 더 민감했고 극도의 가학에도 잘 죽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어떤 남창도 이런 몸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녀는 손을 움직여 질척하게 젖은 귀두를 몇 번 훑었다. 고통이 아닌 자극이 닿자 잔뜩 긴장한 몸이 퍼드득 떨렸다. 휴이가 고개를 흔들면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흐, 아, 안돼……. 흐으, 흐윽…….”

신음이 미묘하게 거칠어진다. 마르티안은 그때쯤이 되어서야 요도 막대를 느릿하게 밀어 넣었다. 막대가 반쯤 박혔을 때였다. 처박힌 막대 사이로 정액이 질질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요도 막대를 다시 빼냈다.

흐아, 하으. 흐읍. 휴이가 성기를 손으로 움켜쥐어 막으려 했지만 쏟아지는 정액은 손 사이로 질질 흘러내릴 뿐이었다. 정액이 마르티안의 몸과 시트를 더럽혔다. 그는 희게 질린 얼굴로 급하게 몸을 굽혔다.

“빨리 치울게요. 깨끗하게 치, 치워서……”

휴이가 그녀의 몸에 튄 것들을 핥기 시작했다. 사정으로 인한 흥분이나 혹은 자극적인 여운은 느낄 새조차 없다.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손님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싸버렸다. 휴이는 울음을 삼키며 자신이 싼 것을 혀로 핥았다.

이대로 쫓겨날 거라는 게 분명해서 휴이는 튄 것들을 깨끗하게 치운 뒤에도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눈물이 자꾸 떨어졌다. 이내 마르티안이 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고개를 들게 했다.

“선물을 달라고 하더니 이게 뭐야. 필요도 없었잖아? 어?”

뺨을 후려치는 손이 이어졌다. 철썩 소리가 나도록 얻어맞으며 휴이는 계속 울었다. 흥분을 참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고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늘 말하는 것처럼 그의 몸은 남창보다 못한 몸이었다. 스스로 흥분해서 싸지르기나 할 뿐이지 상대를 만족시키는 능력 따위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매번 쫓겨나고 버림받으면서 남창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다. 그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우는 것과 애원뿐이었다. 마르티안은 그걸 늘 한심하게 여겼는데도 이 순간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잘못했어요. 흐으,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시면…….”

“기회? 선물 하나 제대로 못 받는 주제에 무슨 기회야?”

마르티안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옆으로 끌어내렸다. 그녀의 위에 올라앉은 채였던 휴이는 쫓겨나기 싫어서 어떻게든 버티려 애썼다.

“얌전히 못 굴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휴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그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남창 취급에 길든 개는 그저 울었다. 이런 식으로 내쫓기는 것도 이제 당연해서 휴이는 애원하거나 매달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르티안은 이대로 그를 쫓아내려고 생각했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희고 깨끗해진 몸이 그녀의 구미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휴이를 한껏 가혹하게 굴려도 백작가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삼 개월마다 그의 몸은 다시 깨끗해졌다. 지금 그의 몸 역시 마찬가지였다. 희게 깔린 눈밭, 그런 눈밭을 보면 누구든 발자국을 남기고 싶기 마련이다. 휴이의 몸은 그런 마음을 자극했다.

이런 식으로 굴면 버릇이 나빠질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그녀는 그런 생각도 지웠다. 그녀 앞에 있는 건 남창이었고 그녀의 욕망을 풀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 * *

마르티안은 자작가에 머물 때마다 몹시 바빴다. 밀려 있는 일도 상당히 많았고, 와중에 엘 도안을 가르쳐야 했으며 와중에 달밤가를 오가기까지 했으니까. 그녀는 삼 개월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애썼고 그 결과 백작가로 돌아올 때면 한껏 지친 상태가 되곤 했다.

마르티안은 백작가로 돌아오면 보통 일주일은 푹 쉬었다. 체력을 보충하고 몸 관리에 집중하면 피곤한 몸 상태도 점차 나아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아무리 쉬어도 몸 상태가 잘 회복되지 않았다. 크게 아프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유달리 나른하고 졸린 느낌이 심했다.

‘영지에 갔다 온 지가 한 달 반이 지났는데 왜 이렇게 피곤한 거지.’

그녀는 몸을 일으키다가 약한 어지러움이 느끼고는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다. 쉬고 있는데도 몸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의사를 불러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을 때였다.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지고 론이 아침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건 그녀가 늘 먹는 대로 차려진 식사였다. 그런데도 음식 냄새가 너무 역하고 참을 수가 없다. 고기 누린내는 특히나 더 역했다. 마르티안은 일어서려다가 이내 구역질을 했다. 론이 놀라서 그녀에게 달려왔다.

“주인님!”

우욱, 흑, 욱. 구역질이 이어졌다. 음식 냄새가 역해서 속이 계속 뒤집혔다. 마르티안은 론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음식부터 치우라고 말했다. 그가 급하게 음식을 치우고 창문을 열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계속해서 속을 게웠다. 론이 밖으로 나가서 주치의를 불러오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더는 나오는 것이 없는데도 속이 계속 뒤집혔다. 목 안이 다 헐어 붓는 것 같다. 구역질은 음식 냄새가 다 빠지고 난 뒤에야 겨우 멈췄다.

마르티안은 론의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때마침 백작가의 주치의가 급하게 들어왔다. 뛰어서 올라왔는지 그의 이마로 땀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주치의는 마르티안을 살피며 여러 가지를 물었다. 몇몇 질문에서는 약간 심각해졌고 어느 부분에서는 질문이 멈췄다. 이내 그가 다시 물었다.

“혹시, 이번 달에는 생리를 하셨습니까?”

“아니, 아직이야. 몸이 계속 피곤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이 늦어지는 거 같은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주치의는 잠시 머뭇대듯 서 있더니 숨을 몰아쉬듯 말을 뱉었다.

“임신을 하신 것 같습니다.”

“임신이라니? 그럴 만한 일이 없었는데 무슨 소리야.”

마르티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휴이와 마지막으로 관계한 건 지난 생리를 하기 직전이었으니까. 달밤가에서 그를 남창처럼 굴리며 관계를 가졌던 그 때였다. 그 뒤로는 백작가로 돌아와서는 몸이 힘들고 피곤해서 잠자리를 아예 갖지 않은 상태였다.

“의무적으로 갖는 관계도 몸이 좋지 않아 그냥 넘겼어. 그런데 임신이라고?”

“……혹시, 마지막 관계가 언제였습니까?”

“자작가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있었는데 생리 직전이었어. 보통은 가능성이 없는 때 아닌가? 그 기간에 관계해서 임신이 된 적이 없었는데.”

“자작가에 머물었던 때라면……시간이 상당히 지났군요. 한달 반 전인데…….”

주치의가 날짜를 확인하더니 다시 말했다.

“제가 보기엔 그때 관계로 임신이 된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 보이시는 증상은 임신이 되고 시간이 좀 지나야 시작되는 증상이라서요.”

구역질과 식욕 저하 등의 증상은 임신 직후가 아닌 꽤 시간이 지나야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나른함이나 피곤함이 이어지는 정도라서 눈치 채기 힘들었지만 이쯤 되면 확연히 증상이 나타나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생리를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고 시기적으로도 맞았다.

그는 마르티안에게 차근히 설명했다.

“임신 시기라는 게 워낙 상황이나 몸 상태에 따라 급변하기도 하니까요. 생리 직전이라고 해서 임신이 꼭 안 되는 건 아니구요. 피임 도구를 쓰시지 않으셨다면 아마 그때 임신이 되신 걸 겁니다.”

마르티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의사가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상황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아이를 쉽게 갖지 못하는 도안 가문의 핏줄이었고 실제로도 의무적으로 가진 관계로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니까.

임신 확률이 가장 높은 날짜에 관계를 맺어도 임신이 된 적이 없다는 건, 어지간한 노력 가지고는 후계가 생기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휴이와의 사이에서 임신이 될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주치의가 헛기침을 큼큼 했다.

“아무튼 두고 보면 확실해질 일이긴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확실한 거 같습니다. 임신이란 게 여러모로 몸을 힘들게 하는 일이라서, 계속 몸이 피곤한 것도 그 때문인 거 같구요. 아무튼 앞으로 챙겨야 할 게 많을 테니 제가 매일 와서 진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역질은, 아마 두세 달 이어질 확률이 큽니다. 가능한 역겹지 않은 거로 골라서 드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일단 음식에서 고기는 전부 제외해. 너무 역겨웠으니까.”

주치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기에는 냄새에 민감해지는 산모들이 많았다.

“가능한 냄새가 덜 나는 종류로 올리라고 전해 놓겠습니다, 아, 드시는 차 종류도 조금 제한이 필요합니다.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차들은 좋지 않아서요. 피곤함이 심할 테니 애초에 업무량을 줄이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피곤하거나 졸릴 때는 그냥 잠을 청하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가려야 하는 것들과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주치의는 줄줄 이어 말했다. 마르티안은 피곤함을 느끼고는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일단 좀 쉬고 싶은데?”

“아, 알겠습니다. 어차피 매일 들를 테니 궁금한 것이 있으시면 그때그때 물어보시면 됩니다.”

주치의는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마르티안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었다. 하녀들은 침구를 다시 정리하고 더러운 것들을 치운 다음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 물러났다. 그녀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가만히 있는데도 묘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임신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조만간 이 결혼 생활이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결혼 후 삼 년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는 건 사실 심각한 문제였다. 후계를 세우지 못한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게 휴이의 탓이든 마르티안의 탓이든 혹은 의무처럼 행하는 드문 관계 탓이었든 간에 원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은 아이가 없다는 결과만이 중요했으니까.

그녀는 조만간 공작가 쪽에서 이혼을 압박해올 것이라 예상했다. 그쪽은 이 결혼에 대해 애초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으니까. 후사 없는 결혼은 이혼 이야기를 꺼내기 아주 좋은 핑계거리였다.

‘……갑자기 임신이라니.’

그녀는 달밤가에서 했던 관계를 떠올렸다. 휴이를 학대하고 몰아붙이면서 가졌던 관계는 즉흥적이고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그 관계에 한껏 몰두하면서도 임신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했다. 피임이니 다른 것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마르티안은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몇 번을 반복해온 같은 종류의 실수였으니까. 흥분과 자극에 못 이겨서 일어나는 실수. 휴이를 만났을 때도 그랬고, 그를 개로 길들이는 과정 중에도 그랬으며, 감정을 이기지 못해 이 결혼을 선택했던 순간에도 그랬다.

“주인님.”

부르는 소리에 흘러가던 상념이 깨졌다. 마르티안이 시선을 돌렸다. 론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힘들어 보이셔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는 마르티안의 기분에 예민했다. 비록 눈치 있게 행동하지는 못해도 그녀의 감정을 읽는 건 할 줄 알았으니까. 지금도 그녀의 기분이 엉망인 걸 눈치채고 어떻게든 위로하려는 것이다. 그런 론의 모습은 그녀가 익히 알던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뺨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익숙한 상대가 곁에 있다는 게 이 순간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괜찮아.”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론이 고개를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이내 그가 혀로 손바닥을 살짝 핥았다. 야하기보다는 간지러운 느낌이다. 그녀는 가볍게 웃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손바닥을 핥는 감각은 계속 이어졌다.

진짜 개를 기르면 이런 기분일까. 그렇다면 몇 마리 기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나른한 감각이 이어지고 이내 잠이 쏟아졌다.

마르티안이 임신했단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임신한 아이는 막대한 권력을 쥐게 될 아이였으니까. 백작위와 자작위를 보장받을 것이고, 향후에는 공작가의 후계자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유명해졌다.

그러나 정작 마르티안은 자신의 아이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음식은 냄새도 맡기 어려웠고 삼킬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지럼증은 계속 이어져서 헛구역질과 구토를 반복했다. 눈가로 실핏줄이 터지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울렁거림이 반복되는 감각은 아주 끔찍했다. 때로는 물만 마셔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비스킷과 특정한 과일 몇 개였다. 그것들은 삼킬 수는 있다는 면에서 먹을 수 있다로 분류되긴 했지만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양은 몹시 적었다. 두 입만 먹어도 많이 먹는 수준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최악의 컨디션에 마르티안은 몹시 예민해졌다. 그건 그녀 스스로도 처음 겪는 예민함이었다.

단순한 짜증을 넘어서서 감정은 폭주하는 것처럼 일렁였다. 서러움, 억울함, 짜증, 우울 수많은 감정들이 이어졌고 눈물도 제어되질 않았다. 가장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때는 휴이와 마주할 때였다.

“당장 나가요! 보기 싫으니까!”

그녀는 대놓고 휴이를 쫓아냈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를 보면 화가 치밀었다. 그건 기이할 정도로 거칠어진 억울함과 짜증이었다.

이 모든 상황의 시발점이 휴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결혼도, 임신을 가져온 남창 짓거리도.

물론 그건 과한 책임 전가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게 그의 탓인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마르티안이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 역시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를 보기가 싫었다.

마르티안은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한심함을 찾아냈고 휴이를 마주하면 그에게 모든 감정을 쏟아냈다. 작은 일에도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울었다. 감정은 엉망진창이었고 그런 엉망진창인 스스로를 마주한다는 게 때로는 너무 괴로웠다.

결국 주치의가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지는 서로 보지 않는 게 좋겠다는 조언이었다. 임신 후 삼 개월까지는 유산할 위험이 높았고, 임산부는 안정을 취하고 쉬는 것들이 매우 필요했으니까. 그의 조언은 몹시 정당한, 필요한 조언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언 이후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휴이가 매일같이 그를 불러 들들 볶았기 때문이었다. 질문은 매일같이 이어졌다.

오늘은 마르티안이 괜찮아 보였는지, 상태는 어떤지, 건강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는지, 대체 언제쯤 괜찮아지는지 등등. 질문은 매일 집요하게 반복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예민해졌다.

주치의는 마르티안의 임신이 빨리 안정기에 들어서길 누구보다 간절하게 빌었다. 그리고 삼 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들어서자 몹시 기뻐하며 휴이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백작님, 이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정기에 들어섰으니까요. 앞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없을 거고…….”

직접 찾아가도 된다는 말을 돌려서 하고 있는데, 휴이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안정기? 아직도 음식을 못 먹는 상태던데……그걸 보고도 안정기라고 말하는 건가?”

“예? 아아, 그게 안정기라는 건 아기를 중심으로 보는 거라서 그렇습니다. 초기에는 유산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어느 정도 지나면 안정적이 되어서요. 백작 부인께선 그 시기를 지난 상황이니 어쨌든 안정적인 임신 상태에 들어섰고…….”

“내가 지금 그게 궁금해서 되물은 거 같았나? 그딴 단어 설명이 궁금해서?”

신경질적인 물음에 주치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근래 들어 그는 분노조절장애라도 앓는 사람 같았으니까.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욕부터 얻어먹기 쉬웠다.

“언제쯤 제대로 먹을 수 있는 거지?! 분명 두 달 정도 후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했던 거 같은데?”

그 물음을 듣고 나서야 주치의는 그의 짜증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달았다. 마르티안이 아직도 구역질을 하며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그런 구역질은 임신 후 삼 개월이 지나면 줄어든다. 안정기에 들어서는 때와 비슷한 시기였다. 그때부터는 다시 입맛이 돌고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아지기 마련이어서 임산부들이 부쩍 살찌는 때도 이때였다.

문제는 마르티안의 입덧은 그보다 조금 더 가고 있는 중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일주일 쯤 더.

‘증상이 기간 맞춰 딱 끝나는 것도 아닌데…….’

주치의는 매우 억울했지만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보는 백작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죄송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는 소리를 입에 올렸다. 순간 펜대가 날아오는 것을 보며 주치의는 옆으로 펄쩍 뛰어 피했다. 휴이가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소리만 할 거지?! 똑같은 소리만 할 거면 그만 나가!”

뭔가를 집어던지는 손버릇은 예전보다 더 심해졌다. 주치의는 방에서 나오면서 언젠가 한 번은 이 손버릇에 대해 백작 부인에게 이르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 * *

제인은 마르티안의 임신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맡게 되었다. 자작가에서 오는 서류들을 정리해서 마르티안에게 읽어주는 일이었다.

헛구역질이 진정되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마르티안은 제인을 불러 서류를 읽게 하고 사인을 대리하게 했다. 글쓰기와 읽기를 열심히 공부한 상황이라 제인은 몇몇 복잡한 서류를 제외하고는 문제없이 일을 해냈다.

그럼에도 제인은 늘 바짝 긴장한 채 일했다. 평가받는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작가에서 도착한 서류들 미리 소리 내어 읽으면서 가능한 더듬지 않도록 연습했고 서류 내의 내용도 가급적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매번 두 시간 가까이 떠들어야 하는 제인을 위해 론은 커다란 컵에 물을 가득 따라주곤 했다.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마르티안이 아직도 음식 냄새를 맡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녀는 누운 채로 제인이 읽어주는 내용을 듣다가 제인에게 말했다.

“돌아갈 때 론에게 디저트 받아가.”

“네?”

“여기서는 뭘 내줄 수는 없으니까 나중에 따로 받아가라고.”

“아, 아니에요. 그러시지 않아도…….”

“제인, 내가 말씨름할 기운이 없어.”

마르티안이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더는 토 달지 말라는 뜻이었다. 마르티안의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냉정해 보여서 제인은 조금 주눅이 들었다. 마르티안이 다시 말했다.

“방금 읽은 서류는 숫자 부분만 네가 검토하고 바로 자작가로 보내. 다른 서류들과 같이 넣어서.”

“그, 그냥요? 보내기 전에 최종 확인은 어떻게…….”

“뭘 또 확인해. 네가 그런 쪽으로 확인 잘하니까 그 부분은 네가 마무리해서 보내.”

“하, 하지만……혹시라도, 제가 틀리면, 어, 어쩌죠?”

제인이 소심하게 되물었다. 이곳저곳에서 욕을 먹고 거절당했던 기억들이 깊게 남아있는 탓에 그녀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의심이 많았다.

마르티안은 한 소리 하려다 말았다. 피곤하기도 피곤했고, 어쨌든 제인은 여태까지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굳이 이런 것으로 뭐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일단 해서 보내. 문제가 있으면 자작가에서 다시 연락이 올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자작가에서도 마르티안이 임신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일 처리가 미비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하고 그만큼 좀 더 신경 써서 일 처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마르티안의 말에도 제인은 쉽게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한 달 가까이를 이런 식으로 일 해놓고는 이제 와서 뭐가 저렇게 걱정인지 모를 일이었다.

“괜찮을 거니까 그냥 해. 사안이 아주 중요한 것도 아니고 혹시 문제가 생겨도 다 수습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 말에 제인이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뱉는 목소리가 제법 씩씩하다. 물론 이래 놓고도 방으로 돌아가서 잔뜩 긴장한 채 수도 없이 서류를 보고 또 볼 게 뻔했다. 마르티안이 다시 말했다.

“제인, 검토를 하라고 했다고 쓸데없이 계속 확인하는 건 하지 마. 그러다가 밤새면 내일 일할 때 지장이 생기니까. 알았어?”

제인이 머뭇대며 알겠다며 대답했다. 그녀는 못 미더워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제인은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늘 넘쳐났지만 그래서 쓸데없이 과하게 시간을 들일 때가 많았다.

성실했지만 소심하고, 재능이 있어도 답답한 구석이 있다. 사람을 곁에 두고 가르치는 일은 여러모로 마음같이 되질 않았다.

나중에 후계교육을 하게 되면 이런 기분이겠지. 마르티안은 그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직 너무 먼 이야기였으니까. 그보다는 곧 끝나리라고 말했던 구역질이 아직도 이어지는 중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그녀는 매일 비스킷 하나로 하루를 연명하는 중이었다. 울렁거림에 가까운 기분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주치의에게 짜증을 내는 것도 지쳤다. 그녀는 그냥 최소한의 것들만을 하고 지냈다.

배 속의 아이는 분명 까탈스러운 성격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리 없으니까. 아마 자기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지. 마르티안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피곤함을 더 느끼고는 한숨을 뱉어냈다. 그녀가 제인에게 이만 나가보라고 말했다.

* * *

마르티안은 주치의가 예상했던 것보다 한 달 넘게 헛구역질을 계속했다. 덕분에 백작가의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휴이의 성격이 완전히 파탄 난 게 아니냐는 소리가 수군대며 돌았다.

그는 집무실에 처박혀 수도 없는 서류를 처리했는데 덕분에 고용인 모두가 그 속도에 맞추느라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예민한지 서류의 오탈자 하나에도 불같이 짜증을 내며 사람들을 들들 볶았다.

마르티안의 헛구역질이 멈췄을 때 백작가의 모두가 들떴다. 그들은 임산부보다 더 예민한 백작이 나아지기를 빌었지만 안타깝게도 백작 부부의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백작님. 조만간 공작님께서 방문하시겠다고 서안을 보내오셨습니다. 이미 한 번 거절을 하셨으니 이번에도 거절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모로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시니…….”

집사장의 말을 들으며 휴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결혼한 이후로 지금껏 큰 왕래 없이 지냈지만 아이가 생겼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공작은 완벽주의자적 성향이 짙었고 그만큼 계획과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공작위를 물려받을 첫 손주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실제로도 공작은 마르티안의 임신이 알려진 직후에 이미 보러 오겠다는 연락을 했었다. 그때 휴이는 마르티안의 건강 상태를 이유로 그 요청을 거절했다.

“아버지께 필요한 정보는 꼬박꼬박 들어가는 모양이지.”

그는 보던 서류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마르티안의 상태가 좋아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다시 연락이 왔다. 그건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공작가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백작가의 핵심인력 중 공작가에서 보낸 사람들의 비율을 줄이고 있긴 했지만 아직도 대다수가 공작가의 사람들이었다. 그쪽에서 보낸 사람들만큼 일에 대한 숙련도와 능력을 가진 인재가 부족한 탓이었다.

저택의 체계를 유지하는 큰 축이 아직 그쪽에 기대고 있으니 말이 흘러나오는 것도 쉬웠다. 집사장이 죄송하다는 말을 꺼냈다. 휴이는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말했다.

“일단 알겠다고 답을 보내. 아버지가 머무르는 동안은 내 일정은 전부 미루고. 그 정도 여유는 될 테니까.”

지난 몇 달동안 그는 일에만 매달리며 살았다. 쓸데없이 많은 일을 처리한 덕분에 현재의 업무량은 그만큼 줄었다. 어차피 한번은 치러야 하는 일이라면 여유가 있을 때 치르는 것이 나았다. 바쁜 시기에 공작가에서 방문하게 되면 마르티안이 단독으로 응대를 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

집사장이 알겠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공작 부부는 그로부터 보름 뒤에 백작가를 방문했다. 함께 온 하인들만 서른 명이 넘었고, 커다란 짐마차 석 대가 따라 들어왔다. 마르티안은 공작 부부를 맞으며 예전에 휴이가 자작가에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그게 나름 간략하게 챙긴 거긴 했구나.’

이제 와서 이런 차이가 놀라울 건 없었지만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임신을 한 이후로 그녀의 기분은 늘 엉망이었으니까. 기분 좋게 시간을 보낸 게 손에 꼽았다.

휴이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는 머뭇거리며 손을 잡았다. 마르티안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으나 일단 참았다. 공식적인 상황이었고 어쨌든 공작 부부의 앞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공식적인 상황마다 큰 문제 없이 그림 같은 관계를 꾸며내곤 했다.

별것 아닌 연기. 마르티안은 지금껏 그게 힘들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휴이를 괴롭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상대를 향한 가학과 복수는, 그녀가 이곳에서 지내는 원동력이었다.

그 순간 마르티안은 자신이 그때와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 별것 아닌 연기가 참기 힘들었다. 타오르던 감정이 잿더미처럼 식어버렸기 때문일까. 이런 연기를 참고 버티는 힘마저 바닥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상황을 다 망쳐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르티안은 모든 인내를 끌어 모아 이 상황을 버텼다.

휴이가 먼저 나서서 공작부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두분 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르티안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공작은 오랜만이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붙였지만 그의 옆에 선 공작부인은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몸이 약했고 오랜 마차 여행을 싫어했다. 괜찮나? 공작이 자신의 부인을 걱정하며 말했다.

“두통이 있어요. 이래서 마차는 오래 타기가 싫었는데…….”

“들어가서 쉬면 괜찮아질 거야.”

공작은 자신의 부인을 가볍게 달랬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휴이를 보며 말했다.

“너희도 어지간하면 수도에 저택 하나를 두는 게 어떠니? 너무 멀리서 살고 있으니 오가기가 힘들구나. 이런 땅이야 관리인을 두고 관리하면 될 텐데…….”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늘 탐탁지 않게 여겼다. 휴이가 살짝 말을 돌렸다.

“폐하께서 주신 영지를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더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상업지이기도 하구요.”

“방치하라는 게 아니야. 적당히 오가면 될 일이지. 여기에 있는 게 답답하지도 않아? 사교모임도 수도에 훨씬 많은데 네 젊은 나이가 아깝구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결혼한 사람에게 나이가 아깝다는 건 이혼과 재혼을 가정한 소리였다. 마르티안이 임신을 했으니 이혼이고 재혼이고 전부 힘들게 되었지만 그래서 더 아쉬움이 컸다.

공작부인은 그런 마음을 적나라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 타인의 눈치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열여덟에 공작부인의 자리에 올라 삼십 년을 그 위치에서 지냈다.

상황을 정리한 건 오히려 공작이었다. 그는 제 부인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그녀를 달랬다.

“많이 피곤한 거 같은데, 대화는 천천히 해도 되니까 이만 들어가.”

“그래야겠어요. 아직도 어지러워서…….”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휴이가 집사장에게 눈짓을 하자 안내를 맡은 이들이 재빠르게 그들의 곁으로 움직였다.

공작 부부가 자리를 뜨자 마르티안은 휴이의 손을 바로 떼어냈다. 이성은 아주 간신히 남아있었다. 얼마나 참기가 어려웠던지 이전에는 이런 역할극을 어떻게 참아왔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녀가 몸을 돌리려는 순간 휴이가 다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몸은 좀 괜찮아? 먹는 건 많이 나아졌다고 들었어. 오랜만에 나온 걸 텐데…….”

그는 마르티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임신 이후부터는 거의 보질 못했으니까. 이런 식으로 함께 한 적이 까마득하다. 의사의 말로는 구역질이 끝났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무시했다. 집무실로 찾아가도 마찬가지다. 그건 노골적으로 이어지는 냉대였다.

그럼에도 휴이는 지금의 낮이고 외부라는 것에 희망을 걸었다.

“……괜찮으면, 같이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때?”

지금은 공식적인 상황이었고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도 다정하게 굴어주었다. 그게 거짓 다정함이라고 해도 그는 그거에라도 기대서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다.

“주치의 말로는 적절하게 움직이는 게 몸에 더 좋다고 하더라고.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마르티안이 그가 붙잡은 곳을 손으로 툭 털어냈다.

“그 부분은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마르티안. 나는…….”

“귀찮고 피곤해서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백작님.”

지나치게 노골적인 거절에 주변 하인들이 시선을 내렸다. 귀찮게 한다니. 그건 제3자가 듣기에도 민망하고 당황스러운 표현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임신 전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니까.

하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로 머뭇댔다. 오랜 구역질과 임신이 여러모로 괴로웠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휴이는 그게 임신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의 마르티안은 밤에 보이는 모습과 똑같았으니까. 공작 부부 앞에서는 예의를 차렸지만 그게 전부였던 것이다.

휴이는 자신이 가진 자리가 훨씬 더 작아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너무 비좁아서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자리. 눈물이 울컥 비집고 올라온다. 마음이 나락까지 떨어졌다. 그녀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저녁 식사 때 뵙죠.”

* * *

저녁 식사는 공작 부부와 함께 하는 자리였다. 요리사는 백작의 뜻에 따라 공작 부부의 입맛에 맞는 요리들을 내면서 임신한 백작 부인을 위한 요리를 따로 만들었다.

소화에 부담이 없고 기력을 보충해주는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르티안은 씹을 게 별로 없는 음식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음식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도 기운이 빠졌을 테니까.

공작 부부는 교본에서 볼 것 같은 우아한 몸짓으로 식사를 이어갔다. 요리에 대한 칭찬과 어울리는 술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고 가벼운 담소도 구색에 맞게 들어갔다. 휴이는 매번 먼저 나서서 공작 부부의 질문에 대답했다.

대부분의 질문은 임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르티안의 건강과 임신한 아이의 상태, 임신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등등. 휴이의 설명은 하나같이 자세했고 어떤 것들은 마르티안조차 모르던 내용이었다. 공작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들으면 널 이곳의 주치의라고 생각하겠구나. 전부 보고받고 있는 거니?”

“……첫 아이니까요.”

휴이는 살짝 머뭇대며 답했다. 변명이라는 것이 확연해서 공작부인은 이번에야말로 진짜 한숨을 내쉬었다.

최고의 자리에서만 서성대던 이들은 원래 한 번쯤은 외도를 하기 마련이다. 휴이가 이 결혼을 밀어붙였을 때, 공작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열병을 겪는구나 싶었다.

크게 반대하지 않은 건 그게 한번 지나갈 열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식고 이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 그 뒤에는 다시 그가 머무르던 곳으로 돌아오면 그만이었으니까. 휴이가 가진 것들은 차고 넘쳤고 아이가 없는 이혼 경력쯤이야 별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이제 끝났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그래, 첫 아이다 보니 걱정이 크겠구나. 나도 너를 낳을 땐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나는 몸이 작은데 네가 커서 잘못하면 죽는단 이야기를 들었거든.”

그녀는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잠시 말을 멈췄다. 그녀는 몸이 약했고 휴이를 낳으려고 목숨을 걸었다. 하혈이 몹시 심해서 사경을 헤맸고 태어난 아이를 바로 안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널 낳았어. 출산은 산모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거든. 네 부인도 첫 아이니까 조심해야 할 거야.”

그 말에 휴이가 멈칫한다. 공작부인에 비해 마르티안은 훨씬 건강했지만 그래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낳겠다고 제 주인을 잃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훨씬 딱딱해졌다.

“주치의가 매일 보고 있으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확신을 하는구나?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부인.”

공작이 가볍게 자신의 아내를 말렸다. 공작 부인은 마르티안과 휴이를 번갈아 보고는 말했다.

“후계가 중요하단 건 둘 다 알고 있을 텐데 너무 안일하게 구는구나.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들 아이를 낳으려면 때론 목숨도 걸어야 하는 법인데…….”

“아이는 또 낳으면 됩니다.”

휴이가 말을 막으며 대답했다. 공작 부인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어렵게 임신을 한 거면 아이가 소중한 줄 알아야지.”

휴이는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공작 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사실상 후계조차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첫 아이니 하는 말이 핑계였던 것처럼 그는 그저 자신의 부인만이 중요한 것이다. 한 번쯤 겪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열병이 아니라.

공작 부인이 입을 다물자 옆에 앉아 있던 공작이 나섰다.

“여행 직후라 여러모로 피곤하군. 식사는 이쯤에서 적당히 마무리했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휴이가 가볍게 손짓하자 식탁에 놓인 음식들이 치워졌다. 후식으로는 가벼운 과일과 치즈 그리고 단맛이 있는 로제 와인이었다. 그건 공작 부부가 흔히 즐기는 것들이었다. 공작은 치즈를 한입 먹고는 그대로 냅킨에 뱉어냈다. 만족할 만한 풍미가 아니었다. 분위기가 순간 굳었다.

하인 하나가 다가와 그의 앞에 놓인 접시를 가져갔고 휴이는 미비한 음식에 대해 사과를 했다. 어쨌든 손님이 만족하지 못한 접대는 주인이 책임져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가 다시 음식을 내오라고 하려 했을 때였다. 공작이 입을 열었다.

“다시 내올 필요는 없어. 어차피 식사는 거의 마쳤고 할 이야기를 전하고 마치는 것으로 하지.”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마르티안을 보았다. 그녀는 결혼식 때보다 훨씬 더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그건 단순히 신체적인 피곤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식사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오래가긴 어려워 보이는군.’

공작은 속으로 혀를 찼다. 후계가 생긴 마당에도 두 사람의 사이는 처음보다 더 나빠진 것 같았다. 그는 이 결혼이 이혼으로 이어졌다면 더 평탄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는 마르티안을 좋게 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나쁘게 보지도 않았다.

그건 휴이가 누굴 데려오든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공작가의 지위와 배경은 너무 거대해서 배우자의 부족함 따위에는 전혀 영향 받지 않았다. 공고한 지위는 그만큼 강력한 법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난다고 한들 그 공고함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가 신경 쓰는 부분은 그 공고함과 관련된 일 뿐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곧 낳게 될 후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조금 이른가 싶긴 하지만 어차피 필요한 일이니까.”

그 말에 휴이가 마르티안의 눈치부터 살폈다. 공작 부인은 기분이 상해서 인상을 찌푸렸지만 공작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부부 사이가 아주 좋다거나 소원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매우 소소한 일이었고 공작은 그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고 싶은 것은 후계 교육이었다. 그건 사적인 일들과는 달리 명백하게 공적인 일이었다. 그는 휴이에게 했던 교육들을 떠올렸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관련된 교육을 받았다. 공작가의 체계를 습득해서 관리하는 일은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으니까.

그건 마르티안이 낳게 될 아이도 겪어야 할 일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교육은 공작가에서 담당하지. 향후 공작위에 오를 것을 생각하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는 게 필요할 테니까. 백작가 체계는 공작가와 비슷하니 후에 백작가를 물려받을 때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르티안이 얼굴을 찌푸렸다. 후계 교육이라니. 공작은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마치 자신의 아이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시죠? 아이의 교육을 공작가에서 담당한다니…….”

게다가 그건, 마르티안이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자작위에 대해서는 아예 배제한 말이었다. 첫째는 부모의 작위를 이어받을 우선권을 가진다. 부모가 모두 작위가 있는 경우에는 두 작위를 한 번에 물려받았다. 즉, 아이는 자작가의 후계자이기도 한 것이다. 마르티안은 말을 이어나갔다.

“공작위는 아직 먼 이야기이고 이 아이가 먼저 받게 될 건 백작위와 자작위입니다. 그에 대한 교육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아이를 교육할 권한은 부모에게 있을 텐데요.”

“글쎄? 작위를 받게 되는 순서보다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가장 큰 지위가 뭔지를 봐야하는 것 아닌가? 그 아이는 공작가를 물려받을 텐데, 공작가를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으려면 오랜 교육이 필요하니까.”

“……제 아이가 공작가만 물려받는 게 아닐텐데요.”

“그 교육을 받고 나면 백작가의 관리 역시 수월할 거야. 이곳의 체계는 공작가와 흡사하니까.”

마르티안은 감정을 참지 못하고 울컥 말을 뱉어냈다.

“도안 자작가는 이곳과 흡사하지 않습니다.”

“아, 자작가?”

공작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되묻더니 이내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아아, 그 부분도 있었지. 하지만 공작가의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어차피 우선순위를 이쪽에 두어야 할 텐데? 공작가의 규모는 적당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거든.”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동일하다.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서 우선순위에 두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합리적인 업무 방식이라는 건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였고 우선순위의 선정이었다.

자작가의 업무보다는 백작가의 업무가 그리고 백작가의 업무보다는 공작가의 업무가 더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거대할 거라는 건 누구라도 판단할 수 있었다.

마르티안은 공작의 말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했다.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감정적으로는 조금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아이를 임신한 건 그녀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 번째 존재는 그녀가 되어야 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아이에게 자작가에 대한 교육 역시 병행할 수 있어야 했다. 공작가의 교육이 우선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그 모든 감정은 공작의 다음 질문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공작가 교육을 배제했다가 혹시나 아이가 갑자기 공작위를 받게 되기라도 하면? 그때엔 어쩔 거지?”

그건 마르티안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물음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슬픔 가운데 가문을 떠맡게 되었던 그때를. 공작은 그녀의 과거를 알고 그걸 기반으로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아니 그건 설득이라기보다는 강압에 가까웠다.

“물론 드문 일이긴 하지. 나와 휴이가 모두 사망했다는 소리니까. 하지만 모든 일은 설마로 시작하고,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면 이미 늦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작가의 자산은 직계를 제외하고는 전체 규모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어있어. 담당 관리인들은 각자 자신의 것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지. 그 막대한 자금의 흐름을 교육 없이 떠맡아서 파악한다는 게 가능할 거 같은가? 영지 관리는? 부딪치며 배우려 하기에는 규모가 지나치게 커. 실수 한 번에 막대한 책임이 오가지.”

마르티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공작이 말한 지점은 다분히 현실적이었으니까. 그녀 역시 자작가를 갑자기 떠맡게 되어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걸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도안 영지가 크지 않은 규모였고, 오래 이어진 체계가 남아있는 덕분이었다. 늙은 집사는 그녀의 부모만큼이나 영지의 관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규모는 자작가와는 완전히 달랐다. 막대한 자산과 지위는 양날의 칼과도 같아서 걸맞은 자격이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찌르기 마련이었다. 거대한 작위는 그만큼의 거대한 무게였다. 공작은 그것을 내세우며 가볍게 웃었다.

“나는 내 핏줄이 그런 고생은 안 했으면 하는군.”

* * *

후계에 대한 권한 행사, 마르티안은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환경에서는 그런 개념들이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부모가 자식을 교육하는 게 당연했고, 훈육은 애정을 바탕으로 진행되다가 때가 되면 가문에 관련된 내용으로 넘어갔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당연함이 너무나도 안일했음을 깨달았다.

공작이 한 말들은 반박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르티안은 이 결혼으로 인해 자신의 미래가 뒤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 그걸 체감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임신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제 배 안을 차지한 아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도망이라고 쳤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작게 중얼댔다. 그건 의미 없는 상상이었다. 부른 배를 하고 어딘가로 도망을 치다니. 그래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자작가가 전부였고 거기로 가는 건 애초에 ‘도망침’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굴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고작해야 휴이가 느낄 고통과 괴로움이 전부일 것이다.

‘그런 짓을 또 할 순 없지.’

상대를 괴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거는 건 결혼으로 족했다. 복수나 화풀이를 위해서, 상대가 울며 애원하는 꼴을 보기 위해서, 혹은 그가 끝없이 시달리며 괴롭기를 바란다는 이유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팔아버렸다.

백작과의 결혼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주어졌지만 사실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것들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순간 배 안으로 경직되는 감각이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입술을 깨물며 소파에 앉은 채 몸을 굽혔다. 흔하게 일어나는 배 뭉침이었다. 흐윽. 흐. 그녀가 가볍게 신음을 뱉어내자 론이 눈치를 채고는 급하게 다가왔다.

주인님. 들리는 부름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녀는 습관처럼 대답했지만 순간적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쥐가 나는 것 같은 감각이 배와 옆구리를 오간다. 고작 그런 것에도, 그녀의 감정은 분노와 우울,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약해진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감정을, 생각을,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

론이 급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주인님, 일단 빨리 누우셔서…….”

그녀는 소파에 누웠다. 뻐근한 감각은 좀 더 고통스럽게 깊어졌다. 슬프지 않은데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르티안은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애썼다. 그건 생각을 제어하는 것이기도 했다.

눈물이 쏟아지는 대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이런 고통은 더 심해지곤 했으니까. 엉망인 감정은 모든 방향으로 엉켜있어서 차라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게 가장 빨랐다.

마르티안은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뻐근하게 깊어지던 감각이 점차 흐려진다. 몸 상태는 다시 괜찮아졌지만 그녀는 조금 더 누워 있었다. 잔뜩 젖은 눈가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론이 젖은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냈다. 마르티안이 말했다.

“임신이 이렇게 힘든 일인지는 몰랐어. 내 삶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도 생각 못 했고.”

그건 우울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론은 그녀의 뺨과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에 입을 열었다.

“제가 필요하신 거라면 언제든 쓰셔도 됩니다. 화나시거나 기분 상하는 일이 있다면, 저를 부르셔서 혼내셔도 됩니다.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화풀이를 하라고 말하는 그 모습은 그녀가 늘 보아왔던 론의 태도였다.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게 없는, 똑같은 모습. 론이야 말로 엉망이 된 상황 속에서 온전히 남아있는 과거의 것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론, 여기 앉아.”

그녀가 자신의 옆을 손으로 툭 치며 말했다. 론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그대로 몸을 기울여 론에게 기댔다. 몸이 닿는 부분마다 체온이 이어진다. 따듯하고 안온한 감각이었다. 마르티안은 그 감각을 느끼며 한참을 기댔다.

“……이런 게 좋은 이유가 있었네.”

마르티안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장난인 줄 알았더니. 그녀는 스스로가 매우 지쳐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은 늘 엉망이었고 일상은 분노와 짜증이 아니면 무기력과 우울로 가라앉았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그런 적이 없어서 그녀는 자신의 상태가 몹시 괴로웠다. 괴로우면서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때로는 그냥 자꾸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더 깊게 론에게 기댔다.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티안은 그제야, 론이 잔뜩 긴장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수도 없이 다리를 벌리고 구멍 안쪽까지 내보인 주제에 이런 것에는 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자. 다른 건 필요 없으니까.”

그녀는 지금껏 론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성향에 아주 충실한 사람이었고, 개를 곁에 두는 이유는 자극과 흥분을 얻기 위해서였으니까. 그러니 론에게 이런 것을 바라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녀는 론에게 기댄 채로 말했다.

“주치의 말로는, 임신을 하면 성욕이 사라진대.”

물론 성욕만 사라진 건 아니었다. 우울과 무기력은 삶의 모든 감각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즐겨했던 것 중 그 무엇도 그때만큼의 감각을 가져다주진 못했으니까.

그때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뒤틀렸음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달라졌고 더는 돌이킬 수 없어졌다. 원치 않는 변화로 가득 찬 삶은 그 자체로 고역이었다.

마르티안은 론에게 기대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었다. 고작 기대어 있는 것이 전부인데도 두근대는 소리는 여전히 컸다. 론은 이런 것에 기뻐하고 설레어했으니까. 백작가로 넘어와 온갖 꼴을 당하고 구르면서도, 그는 이전과 똑같았다.

모든 것이 다 뒤틀리고 바뀌었지만 그래도 남아있는 것이 있긴 있었다. 그녀는 론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얽으며 가볍게 웃었다.

“네가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변하지 않는 것에서 위로가 찾아온다. 론이 붉어진 얼굴로 감사하단 소리를 했다. 그의 얼굴로 넘쳐나는 감정들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그게 위로였다.

* * *

출산이 가까워지자 미르티안의 배는 순식간에 커졌다. 그렇다고 해서 몸무게가 엄청나게 는 것은 아니었다. 배가 튀어나온 것을 제외하고는 살이 거의 붙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입덧이 끝나고도 먹는 양이 크게 늘지 않아서 빠져버린 살은 그대로였다.

식사는 제멋대로 이루어졌다. 중간중간 과일 같은 것을 먹기도 했고, 더 식욕이 돌면 빵이나 수프, 고기같은 것도 먹긴 했지만 그런 날은 일주일에 사흘도 채 되지 않았다.

먹는 양은 늘지 않았는데 배가 확 커지자 짧게 하던 산책도 힘에 부쳤다. 주치의는 그녀에게 영양제를 챙겨 주었지만 그것 가지고는 살이 붙을 리 없었다.

어쨌든 배가 커지니 여러모로 더 괴롭다. 두통이 생기거나 몸이 불편하게 저리고 욱신거리는 날도 잦아졌다. 그녀는 피곤한 상태로 그저 누워 있었고 식욕은 더 떨어졌다.

“원래 임신 마지막 달이 좀 괴롭습니다. 그래도 위험한 수준의 몸무게는 아니고 또 아이도 건강한 상태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않으셔도 될 겁니다.”

주치의는 매일 그녀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마르티안은 그 소리가 지겹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그녀의 몸이 괜찮지 않은데 아이가 괜찮으니 괜찮다는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그녀는 제 배에 품은 아이가 조금도 기대되지 않았다. 아이는 그녀의 배에서 크고 있지만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 아이는 세블로아드 공작가의 아이였다.

마르티안은 공작이 와서 했던 말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배 속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자작위에 대한 계승권도 가져갈 것이다. 그게 꼭 공작가의 핏줄에게 자신의 가문을 빼앗기는 것 같았다.

아니, 뺐긴 것이다. 마르티안은 아이에게 자신의 가문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공작가 핏줄에게 그녀의 가문을 뺏길 순 없었다. 그녀는 이 아이의 옆을 지키다가 그 아이가 열다섯이 되었을 때 자작위를 포기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작위를 선택하거나 거절할 수 있는 나이는 열다섯부터였으니까.

‘그때에는 후계자가 더 낳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그땐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더는 신경쓸 것 없이 이혼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물론 그때에는 그녀 역시 아이를 더 낳을 나이는 아닐 것이다.

마르티안은 엘 도안이 보냈던 편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아이를 보내겠다고 했던 편지, 마르티안은 거기에 기대게 된 스스로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기댈 건 그런 것밖에는 없었다. 한심한 일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출산 예정일이 언제라고 했지?”

“예정일은 이달 25일 정도일 겁니다. 일주일 정도는 앞서거나 밀리거나 할 수 있구요.”

“가능한 앞서서 왔으면 좋겠는데…….”

배에서 아이가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 자라나는 생명은 짐이자 족쇄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주치의가 날짜는 금방 지나가는 법이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마르티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치의는 삭막한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고는 물었다.

“혹시 백작님과는 자주 보십니까? 여기 오신다거나 혹은 식사를 따로 같이하신다거나…….”

마르티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매일 여기 오가면서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왜? 백작님 쪽에서 무슨 언질이라도 있었어?”

“아……. 아니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두 분이 처음 부모가 되시는 거니까요. 아무래도 첫 아이다 보니 부모가 서로 좋은 교감을 하면 그게 아이에게 좋다고도 해서. 혹시나 싶어서…….”

주치의는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휴이가 상황을 봐달라고 해서 말을 꺼낸 게 사실이었지만 이제 와 그걸 들킬 순 없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자신의 남편을 몹시 피곤해하고, 싫어하며, 귀찮아했다. 그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는 휴이가 관심을 두는 것조차 질색할 정도였다.

주치의는 괜한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며 쓸데없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마르티안이 그의 말을 끊어냈다.

“교감은 무슨 교감이야. 백작님이 그런 걸 원하시는 거면 아이를 낳고 난 뒤에, 아이와 따로 하시라고 전해. 배 속에서 애가 나오면 그땐 나도 신경 쓸 일 없을 테니까.”

그건 지나치게 냉정한 말투였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만 냉정한 게 아니라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냉정했다. 주치의는 슬쩍 시선을 내리면서 날 선 분위기를 모른 척했다. 임산부가 자신의 아이를 싫어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흔하다고 해서 괜찮은 거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주치의는 이런 구도에 진저리가 날 만큼 시달린 상태였다. 그는 그냥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나가봐.”

마르티안이 그렇게 말하자 주치의는 도망칠 수 있다는 것에 반색하며 인사를 꾸벅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마르티안의 집무실을 나섰을 때였다. 집사장이 그에게 다가왔다.

“백작님께서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빌어먹을. 주치의는 속으로 욕을 뱉고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집사장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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