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불려온 하녀는 키가 작고 평범한 소녀였다. 통통한 뺨과 곱슬거리는 단발이 잘 어울렸다. 마르티안은 그녀를 소파에 앉게 했다. 론이 차를 다시 내오겠다며 한쪽으로 사라졌다.
“이름이 제인, 맞아?”
“네, 맞습니다.”
“근래에 이곳으로 왔다고 들었는데?”
“네, 네.”
제인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마르티안은 자작가에서 막 일을 시작하던 하녀들을 떠올렸다. 나이가 많지 않은 이들은 대부분 미숙해서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렇게 윗사람을 마주 대하게 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제인의 손이 긴장으로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다.
물어보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 불렀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겁먹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티안은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풀었다.
“그럼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겠네.”
“네, 백작가에 온 지는 일 년이 조금 넘었고, 여기 저택에서 일한 지는 이제 서, 석 달, 정도 되었습니다.”
“석 달이면 이제 막 적응하는 중이겠고, 지금은 어디에서 일하고 있어?”
“세탁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친해진 사람들은 있고?”
그녀가 말하자 제인이 잠시 머뭇대다가 작게 네라고 대답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녀와 비슷한 말단이라고 해도 보통 그녀보다 나이대가 서너 살은 많았다. 처음에는 냉랭한 태도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석 달을 지내고 나자 몇몇 사람들과는 사이가 좀 가까워졌다.
그렇다고 아주 허물없이 구는 정도는 아니었고 서로 간단한 부탁을 주고받고, 밥을 같이 먹으며 일상대화 정도를 나누는 사이였다. 제인은 혹시라도 누구와 친하냐고 물을까 싶어서 개중 가장 성격이 좋은 사람의 이름을 속으로 한번 중얼거렸다.
“최근에 대청소를 했지?”
“네, 에리나, 네? 대청소요?”
“에리나?”
“아, 그, 그러니까 제가 치, 친하게 지내는……. 그, 물어보실 줄 알고, 긴장해서…….”
제인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말했다. 마르티안은 웃었다. 그녀의 앞에 앉아 있는 하녀는 확실히 어렸다. 분위기를 풀기 위한 가벼운 질문을 듣고는 다음 질문까지 진지하게 생각한 것 자체가, 아직은 순진하다는 것을 드러냈으니까. 제인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마르티안의 눈치를 보았다. 표정으로 감정이 다 드러났다.
마르티안은 이 아이가 대서재에 숨어든 사람이 맞을까를 가늠하며 다시 물었다.
“대청소 때 네가 대서재를 담당했다고 들었어.”
“네? 대, 대서재실이요. 그게 원래는 저 같은 신입은 꼭대기 층에 배정이 안 되는데요. 그, 제가 글을 조금 읽을 줄 알아서, 서고, 서고를 정리했습니다.”
제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떨린다. 그녀는 떨리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애썼지만 도리어 목소리가 삑 하고 튀었다. 당장 울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참으며 말을 맺고 나자 그녀의 앞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제인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흐읍, 긴장을 해서…….”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였다. 마르티안은 다시 웃었다. 그 밤에 대서재에 숨어들어 온 사람이 누구였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그녀가 한참이나 웃자, 잔뜩 겁먹은 얼굴이 주춤주춤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론이 새로 끓인 차를 들고 나왔다.
흰 꽃이 그려진 푸른 찻잔이 제인의 앞으로 놓였다. 찻잔의 가장자리는 얇은 금박이 둘러 있었다. 장식품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예쁜 잔이었다. 담겨있는 차에서 향긋한 내가 올라왔다. 제인은 자신이 이걸 마셔도 되는 건지, 찻잔을 들었다가 혹시라도 놓치면 어떻게 되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눈치를 살폈다.
마르티안이 그녀에게 말했다.
“마셔. 맛이 괜찮을 거야. 쿠키도 좀 먹고.”
“네, 네.”
그녀는 반사적으로 대답하고는 찻잔을 손으로 들었다. 혹시라도 떨어트릴까 봐 두 손으로 받쳐서 들자 손바닥으로 따듯한 기운이 들어찼다. 그것이 잔뜩 긴장한 마음을 아주 조금 누그러트렸다. 제인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괜찮았다. 아직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제인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상큼한 단 향과는 달리 단맛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씁쓸한 맛이었다. 씁쓸하고 진한, 따듯한 차를 마시고 나니 조금 더 마음이 풀어진다. 그녀가 힐끔 앞을 보았다.
마르티안이 쿠키를 하나 들어 먹는 것이 보였다. 제인은 살짝 눈치를 보고는 똑같이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다.
“어, 어어?”
쿠키는 깜짝 놀랄 맛이었다. 쌉싸름한 단맛을 가진 초코 쿠키와 덩어리진 달큼한 치즈의 조합이 말도 안 나오게 맛있었고, 입 안에서 사라지듯 풀어지는 식감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에 남은 쿠키를 보았다. 어떻게 이런 맛이 있을 수 있지? 그건 주방에서 한 번씩 내어주던 부러진 쿠키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었다.
이걸 다 먹어도 되는 걸까. 분위기를 살피느라 그녀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더 먹고 싶으면 말해. 남은 쿠키는 따로 챙겨 줄 테니까.”
“예? 따로 주신다구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지는 몰랐는데? 론, 가서 오늘 올라온 쿠키를 따로 챙겨와.”
그녀의 말에 론이 고개를 숙이고는 한쪽으로 사라졌다. 제인은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녀는 지금껏 론과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었지만 어쨌든 백작 부인보다야 백작 부인의 개인 하인이 그녀에겐 더 가깝고 편하게 느껴졌다.
나만 두고 가지 말지. 제인은 속으로 중얼대며 시선을 내렸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응접실에는 백작 부인과 그녀뿐이었다.
백작 부인과의 독대라니. 아무 일이 없어도 긴장할 마당에 지금은 켕기는 게 많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숨을 천천히 쉬려고 몇 번 노력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이번에도 마르티안이었다.
“디저트가 늘 남아서 곤란했는데 여러모로 다행이야.”
“네? 아,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마르티안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느긋해서 제인은 다시 긴장을 풀었다. 분위기를 보아서는 취조하려는 것 같진 않았으니까. 물론 어색하고 긴장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아서 그녀는 계속 론이 사라진 쪽을 여러 번 힐끔거렸다. 마르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를 부른 건 궁금한 게 있어서야.”
“네? 아, 네. 뭐든, 제가 아는 게 있다면 대답하겠습니다.”
제법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이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그녀의 말투가 조금 차분해졌다. 마르티안은 확인하고 싶던 것을 다시 물었다.
“대청소가 있고 난 뒤에 내가 대서재 문이 열린 걸 봤거든?”
“……대서재요?”
제인은 간신히 평온을 가장한 채 되물었지만 심장은 당장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어 허벅지 옆으로 내렸다. 손끝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게, 그, 대청소 이후에 급하게 정리를 하고 나오느라 문을 아, 안 닫고 나온 거 같아요. 무거운 걸 나르고 치우느라고 피곤, 해서…….”
“단순히 열려 있었던 게 아니라 열려 있다가 닫혔거든. 아마도, 그 안에 누가 있던 거 같았는데.”
“그, 그럴 리가요! 꼭대기 층은 관리장님께서 워, 워낙에 경고를 하셔서, 저녁부터는 아무도 올라오지 않거든요. 그러, 니까 그때 대서재에 사람이, 있을 리가, 어, 없어요. 문이 열렸다가 닫힌 건, 부, 분명 그냥 열려 있던 문이 우연히 닫혀서…….”
횡설수설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제인 자신이 엉망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로 멈출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고, 의심받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엉망인 설명은 그런 욕망의 결과물이었지만 사실상 최악의 선택이었다.
마르티안은 손을 들어 제인의 말을 막았다. 안타깝게도, 그녀 앞에 있는 어린 하녀는 연기에 소질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횡설수설하는 말 중에 이미 스스로가 범인이라는 걸 드러낸 상태였다.
“제인, 나는 대서재 문이 열려 있다고는 했지만 그게 밤이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는데.”
“아, 그, 그게……. 저는…….”
“그날 대서제실이 있던 거, 네가 맞지?”
그녀의 질문은 사실상 확언이나 다름없었다. 제인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론은 작은 종이 상자에 쿠키를 종류별로 챙겼다. 원칙대로라면 백작 부부의 다과에 올라오는 쿠키들은 하인들은 전혀 손댈 수 없다. 음식들이 남아서 버리게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일개 하녀에게 주는 게 좋은 걸까. 그는 차 끓이는 법을 배우면서 경험했던 이곳에서의 텃세와 괴롭힘을 떠올렸다.
‘좋을 거 같지 않은데…….’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종이 상자를 들고 다시 응접실로 나섰다.
“흐으으, 흐어엉, 제가, 자, 잘못했어요.”
론은 시끄러운 울음소리에 당황했다. 아까 올라온 하녀가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울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마르티안은 그저 한숨만 쉬고 있다. 표정이 몹시도 지쳐 보여서 론은 급하게 마르티안에게 다가갔다.
“주인님, 이게 무슨…….”
“아, 론 잘 왔어. 얘 좀 달래봐. 대화를 전혀 못 하겠어.”
하녀는 그 소리에 끅끅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가가 붉다 못해 이미 부어올랐다. 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일으켰다. 하녀는 당장 쫓겨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흔들면서 일어나지 않으려 애썼다.
“흐윽, 용서, 흐으으, 용서해 주세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부모님이, 흐윽, 흐어…….”
“이런 식으로 굴면 안 됩니다. 일어나서 앉아요. 자작님께서는 화내시는 게 아니고 단지…….”
“저는, 흐윽, 진짜 펜던트만 가져오려고, 흐으윽, 돌아가신 부모님. 흐읍, 초상화가 그거밖에 없어서, 흐어엉.”
제인은 울며 자기 말만 반복했다. 론이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녀를 일으켰다. 억지로 힘을 주어 당기자 끌려오긴 끌려온다. 문제는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소리였다.
마르티안은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울음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죽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당장 쫓아내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고 말을 듣지 않으니 머리가 다 아팠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끝없이 우는 하녀를 론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 애 진정시키고 나면 안쪽으로 데려와.”
마르티안은 안쪽에 마련된 작은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자작가에서 가져온 여러 책자와 서류부터 백작가에서 맡고 있는 그녀의 업무에 대한 자료들까지 수많은 것들이 쌓여있었다.
그녀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 안에서 보냈다. 이것저것 귀찮은 관리들을 제외하면 백작가에서의 일정은 몹시 단조로웠다. 마르티안은 이곳에서 론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따로 곁에 두지 않았다.
백작가의 인력들은 대부분 세블로아드 공작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었다. 백작 부부의 사택을 관리하는 인력은 특히 더 그랬다. 귀족가에서 오래 일한 이들은 그 가문의 분위기와 방식에 완전히 물들어 있기 마련이어서 어떤 문화를 형성하는 법이었다. 위계질서에 따라 틈 없이 움직이는 태도는 공작가의 문화였고 마르티안은 그게 몹시 갑갑했다.
공작가 출신의 하녀를 거부하고 외부에서 일하던 하녀를 데려오게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자작가 사람들을 이곳으로 들여와서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공작가 출신을 늘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마르티안은 자신의 태도가 유치한 어깃장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결혼생활이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고 이런 상황들에 대해 예상 못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결혼생활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 삶이, 때때로 몹시 불만족스러웠다. 매일 밤 그녀에게 매달리며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백작이 그녀의 취향에 그린 듯이 들어맞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돌리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관계의 대가는 쌍방이 치러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은 조금 피곤하단 생각을 하며 책상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론이 하녀와 함께 서재로 들어왔다.
어린 하녀는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긴 했지만 더는 소리를 치거나 울지 않았다.
“아, 이제 괜찮은 거야?”
“……죄송, 합니다.”
하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앞으로 모은 손이 아직 바들바들 떨린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토록 겁을 먹는 하녀가 이제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개 취급을 하며 굴렸던 상대들이야 그녀가 워낙 괴롭혀서 매번 겁먹고 긴장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하녀에게는 그저 다과를 대접하고 좋게 좋게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마르티안은 가능한 부드럽게 말했다.
“진정이 된 거 같아서 다행이야. 울다가 쓰러지는 줄 알았거든.”
“제, 제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너무 긴장을 해서, 모르고 함부로 행동했습니다. 백작가의 다른 저택으로라도 갈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정말, 이, 잊지 않고…….”
제인은 저도 모르게 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두려움이 가라앉고 나자 속상한 마음이 너무 컸다. 마르티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나가게? 왜?”
“규, 규칙을 어겼으니까요.”
“아, 규칙.”
그녀는 픽 웃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그 규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냥 모른 척해 줄게.”
“예?”
“대신 내 곁에서 일하는 거야. 편하게 옆에 둘 사람이 하나는 더 있어야 할 거 같거든.”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사실상 승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백작 부부 바로 옆에서 머무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혹시나 나중에 이곳에서 잘린다고 해도 그 이력만으로도 곧바로 다른 귀족가에서 다시 일할 수 있을 만큼. 제인은 너무 놀라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끅, 시중을 드는 거는 더 오래 일한, 끕, 사람들이…….”
“사람을 고르는 건 내 권한이야.”
“아, 잘못, 끕, 제가 주제, 끕, 넘었습니다.”
그녀가 딸꾹질을 하며 어깨를 들썩인다. 진지하게 용서를 빌고 잘못을 말하는 순간에도 자꾸 딸꾹질이 나오며 그녀를 괴롭힌다. 죄송, 끕, 합니다. 끕. 그녀는 점점 더 긴장하고 겁을 먹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을 보며 마르티안이 한숨을 뱉어내고는 론에게 손짓을 했다. 일단은 이만 내보내라는 뜻이었다.
* * *
마르티안은 새롭게 곁에 두게 된 제인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심했다. 머리를 만지는 일이나 옷 시중을 드는 일 같은 다양한 자리들이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이지 그녀는 그런 일에 잘 적응을 못 했다. 아마도 텃세가 있는 거겠지. 그녀는 론의 경우를 떠올리다가 끙 하고 한숨을 뱉었다.
론이야 제 살길을 찾아서 버텼다고 하지만 제인은 아직 너무 어렸다. 어린 하녀는 실패를 반복할 때마다 눈에 띄게 풀이 죽어 온갖 눈치를 보았으니까. 그건 생각보다 마음이 불편한 광경이었다. 놀랍게도, 많이, 불쌍했다.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못 해서……. 죄송합니다.”
제인은 론이 내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중얼댔다. 눈을 반짝대며 먹던 디저트도 손을 대지 않는다. 마르티안은 이 상황이 조금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론에게 턱짓을 했다. 대신 위로하라는 뜻이었다. 그가 제인에게 말을 걸었다.
“차 맛이 어떻습니까?”
“예? 아, 맛있어요.”
“다행입니다. 오늘은 맛있지 않은가 싶어 걱정했거든요.”
“설마요. 여기서 주신 차는 언제나 맛있었는데요. 오늘도요. 아……. 제가 너무 풀이 죽어 있었죠. 죄송합니다.”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라……. 자작님도 저도 걱정이 되는 것뿐입니다. 쿠키도 먹어요. 단것을 같이 먹으면 훨씬 더 기운이 날 겁니다.”
그 말에 제인이 쿠키에 손을 뻗었다. 여지없이 혀에 녹아드는 맛이었다. 그녀는 우울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쿠키 맛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자꾸 자신이 했던 실수들과 들었던 질책이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이 금세 다시 어두워졌다.
론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지금 그녀가 겪고 있는 상황이 어떤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백작가의 사람들, 특히 공작가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기술을 넘겨주는 것을 몹시 싫어했고 또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직접적으로 박대하진 않아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바보로 만들며 괴롭혔다. 말로 하는 위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론은 완전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국경에서 살았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장사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아, 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도시에서 살았어요. 부모님이 작은 가게를 하셨거든요.”
“장사? 국경 도시라면 그래도 제법 컸을 텐데?”
마르티안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제인은 머뭇대며 답했다.
“아, 제가 살던 곳은 아주 크진 않았는데 그래도 상인들이 제법 많이 오갔거든요. 그때 살던 곳이 이층집이라서 아래층이 가게고 위층은 저희 집이었어요. 부모님 방이랑 저랑 동생들 방, 이렇게 방이 두 개였는데, 여관에 방이 다 차서 떠도는 사람들이 생기면 저희 방을 빌려주기도 했어요. 다음날이면 나름 용돈을 받았구요.”
그리 대단한 용돈은 아니었는데도 그때에는 그게 큰돈처럼 느껴졌었다. 제인은 가볍게 웃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지만 즐거운 추억들은 또 즐거운 추억이었다. 처음에는 떠올리면 울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게 많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웃을 수 있는 추억이란 때론 큰 힘이었다.
제인은 조금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가게에서 이것저것 잡다한 걸 다 팔았는데 여관들을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물품들 가져다주는 일을 많이 했어요. 말먹이를 정말 많이 팔았어요. 여관에서는 손님들에게 말먹이를 주로 팔았거든요. 쉬는 사람마다 말을 메어놓고 먹이니까요. 그때 장부도 따로 관리했어요. 말먹이는 계속 가져다주는데 그렇다고 돈을 그때그때 주진 않아서요. 덕분에 글 읽는 법이랑 숫자 계산하는 걸 배웠구요. 어렵긴 했는데 그게 돈이라고 생각하니까 또 재밌더라구요.”
그녀의 부모는 매일 밤 장부를 정리하고 들어온 돈을 묶음으로 구분했다. 열 개씩 묶음으로 해놓으면 금액에 맞춰 돈을 꺼내기가 아주 편했고, 남은 돈을 확인하기도 좋았다. 제인은 부모님을 도우면서 장부에 계산된 돈이 실제로 정리되어있는 돈과 딱 맞아 들어가는 걸 즐기곤 했다.
마르티안이 되물었다.
“장부를 썼다고? 표를 볼 줄 알아?”
“표요? 아, 집에서 쓴 건 그냥 되게 간단한 거라서……. 그, 한쪽에는 날짜를 쓰고 한쪽에는 여관 이름이랑 가져간 물품이랑 금액 같은 걸 써뒀거든요. 한 달마다 정리해서 돈 받아서 그거만큼 빼고.”
그녀는 머뭇대면서도 연방 설명을 이어갔다. 그녀에게 이것들은 추억이기도 했으니까. 제인은 테이블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어가면서 그때 작성했던 장부에 대해 설명했다.
뭔가를 만들거나 꾸미는 재주는 없었지만 돈 계산은 제법 했었다. 한참 이야기하던 제인은 자신이 혼자 떠들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움츠렸다.
“제가 또 흥분해서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했나 봐요.”
“아니야. 덕분에 네가 할 수 있는 게 뭔지 알았으니까.”
“네?”
“내일부터 내 옆에서 장부 검토하는 법하고 표 보는 법을 배워.”
“네에?”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게 가능하냐는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보통 그런 일들은 하녀에게 시키지는 않았으니까. 장부 검토와 표 보는 법이라니, 자신이 했던 장부는 정말 단순한 수준이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글 읽는 것도 좀 서툴고 숫자도 그냥 뻔한 장부 관리였는데요. 괜히 폐를 끼치게 되면…….”
“그거야 어떻게든 해내야지.”
마르티안은 칼 같이 답했다. 그녀가 제인과 얽히게 된 건 그저 운이었지만 이제는 기회였다. 그녀는 어린 하녀가 이 순간을 기회로 만들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오래 곁에 둘 수 있을 테니까.
공작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마르티안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계속 곁에 두기 위해서는 그녀 스스로 본인의 자리를 찾아내야만 했다.
“이것마저도 못하면 다시 세탁실 하녀로 돌아가야 할 테니까.”
그 말에 제인이 움찔 긴장했다. 백작 부인의 집무실에 드나들게 되면서 세탁실 사람들과는 멀어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갑자기 백작 부인의 눈에 들면서 주변 사람들의 분위기가 싸해진 상황이었다. 돌아가면 분명 괴롭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눈물이 찔끔 맺혔다.
옆에서 보던 론이 나서서 위로를 했다.
“너무 긴장하고 겁먹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예전에 숫자를 써본 경험이 있으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제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이 기회가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으니까. 약한 소리를 해봤자 나아지는 것은 없다. 무조건 해내야 해. 그녀는 속으로 몇 번을 중얼거리고는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그날의 티타임은 제인의 앞으로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 가볍게 살피면서 끝이 났다. 그녀는 어떻게든 내용을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뒤로 갈수록 무슨 용어인지 단어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 물들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버텼다.
론은 제인을 배웅하며 그녀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기 위해 몇 마디 더 말을 건넸다. 잘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마르티안이 직접 제안을 한 거라는, 뻔한 이야기였다. 제인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제법 잘 챙기네?”
“아, 주인님.”
“내가 그 애한테서 가능성을 보았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그녀가 픽 웃으며 물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도를 함부로 짐작해 말하는 건 상당히 큰 실수였지만, 그것에 화가 나기보다는 의외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론이 누군가를 위로하고 신경 쓰는 걸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내 마르티안은 론이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그 애가 편견이 없긴 했지.’
이방인이라면 질색하며 구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제인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위로하고 챙겨주면 고마워하고, 조언을 하면 진지하게 들었다. 그건 론이 태어나 처음 겪는 태도였을 것이다. 마르티안은 지금까지 론이 겪어왔던 것을 생각하다가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평범한 상대와의 평범한 삶. 론 역시 그런 걸 바랄 테니까. 아예 그런 걸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일단 알게 되면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었다. 그건 마르티안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뒤틀린 결혼 생활을 하면서 종종, 아서 우드와 결혼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하곤 했다.
“주인님.”
론이 그녀를 불렀다. 그는 어느새 마르티안의 앞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제가 주제넘게 함부로 말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아니야. 저 아이가 괜찮긴 하지. 네가 이방인인데도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론은 그녀의 말뜻을 가늠하기 위해 잠시 머뭇댔다. 함부로 주인의 속내를 가늠하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확실한 것처럼 말한 상황이었다. 혼날 만한 상황에서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뜬금없었다. 아니면 제인이 그렇게 대해주니, 이런 식으로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냐고 추궁하는 걸까. 그가 머뭇대는 사이에 마르티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만약에 너를 받아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떡할래?”
“예?”
“평범하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하면, 어떡하고 싶어?”
“무슨 뜻이신 건지 제가 이해를 잘 못 했습니다. 결혼이라니…….”
“네가 이방인인 거 상관 안 하는 애들도 있을 거 아니야. 애첩 노릇 했다는 것도 괜찮다고 하는 애들도 있을 테고. 그런 애들이 너보고 평범하게 같이 살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지 않아?”
론은 애초에 애첩의 삶을 원하던 것 아니었으니까. 마르티안이 아니었다면 굳이 다리를 벌리면서 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평범하게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한 번쯤은 꿈꾼 적이 있지 않았을까. 론을 받아주고 애정을 나눠줄 대상이 있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백작이 돈을 잔뜩 퍼주고 하루빨리 내보내려 들 거 같긴 하지만…….’
마르티안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론이 일어나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의 손에는 매질 도구가 들려 있었다. 마르티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주제넘게 굴지 않겠습니다. 벌을 받고 나서…….”
“론,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을 뿐이야. 너를 혼내려고 한 게 아니라.”
그녀는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자신의 말이 화가 나서 하는 소리로 들리지 않도록. 이내 손을 뻗어 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겼다. 부드럽게 손에 감기는 촉감이 여지없이 좋았지만, 드러난 론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더 경직되어 있었다.
“제인 앞에서……다리를 벌리면 될까요?”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론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음에, 개로 있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면 그렇게 있겠습니다. 주인님.”
그건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고지식한 개가 상황을 자학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다시 말했다.
“혼내자고 물어보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 말 그대로, 평범하게 살고 싶냐는…….”
“주인님, 저는 이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론이 마르티안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그건 처음 보는 태도였다. 마르티안의 미간이 좁아지는 것을 보며 론은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자신이 잘못한 일로 실컷 혼나는 게 나았다. 그녀가 말한 내용에 비하면.
그는 입을 열어 자신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백했다.
“아까 행동은 제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제가 예전에 겪었던 것이 떠올라서, 조금 불쌍하다고 느껴서, 저도 모르게 함부로 굴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벌주시면 됩니다. 주인님.”
그의 말에도 마르티안은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은 불안을 키웠다. 마르티안이 갑자기 평범한 삶을 운운한 것 자체가, 사실은 그에게 질려서 이런 식으로 버리려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가 매일 하는 이런 행동들을 보면서 어떻게 평범함을 말할 수 있는 건지, 그는 처음으로 마르티안의 말에 불만을 품었다.
집무실의 모든 문을 열어놓은 채 보란 듯이 끌려다니면서 그녀 아래에서 다리를 벌리는 게 그의 일이었다. 그의 자리였고 그의 위치였고 제 주제였다. 론은 이 모든 게 자신이 너무 개처럼 굴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으니까.
“다음에는 주제넘지 못하도록, 그 아이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개처럼 굴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주인님. 제발…….”
론은 진심으로 애원했다. 벌을 받고, 교육을 받고 싶었다. 제인이 자신의 꼴에 놀라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그 뒤로 말 한마디 섞지 않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길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마르티안이 다시는 자신을 이렇게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님.”
론은 마르티안의 바짓자락을 손으로 쥐었다.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아서 불안함이 점점 더 커졌다. 정말로 버리려 했던 걸까. 그래서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론은 결국 떨어지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우는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떨어지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마르티안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론. 등 세우고 자세 바로 해.”
론이 엎드린 상체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새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는 꼴이었다. 마르티안은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면 그녀가 진짜 그을 버리려 한 줄 알 것 같았다. 근래 그녀의 침대에 올라오는 개는 사실상 론뿐인데도.
마르티안이 그의 젖은 뺨을 손으로 훑어냈다.
“제인 앞에서 다리를 벌리겠다고?”
“네, 주인님.”
“앞으로 내가 직접 그 애를 교육하기로 했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주라고? 넌 제인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며. 그런 걸 보고 내 옆에서 배우는 게 제대로 될 거 같아? 그럼 안 되지.”
그녀는 가볍게 론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를 그렇게 취급할 마음이 애초에 없기도 했지만 그 어린 하녀를 제대로 가르쳐 보고 싶었다. 얼마나 배울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속셈을 잘하는 인력은 언제 어디서든 쓸모가 있었고 그 자체로도 상당히 고급 인력이었다.
“론, 앞서나가지 마. 얌전하게 굴고.”
그 말에 론이 울음을 삼켰다. 잔뜩 불안해하는 얼굴은 그 와중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론에게 손짓해서 자신의 위로 올라오게 했다. 론이 마주 보는 상태로 그녀의 허벅지 위에 올라와 앉자, 마르티안은 곧장 손을 뻗어 그의 엉덩이를 꾹 움켜쥐었다. 흐으, 흐읍. 론은 아픔을 참으며 울음을 삼켰다.
“흐읍, 주인님. 그럼, 자작가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벽을 보고 서 있을 수 있게라도……흡.”
마르티안의 손이 그의 엉덩이골로 쑥 들어왔다. 허리와 골 사이를 가볍게 긁어내는 자극이 이어졌다. 론은 허벅지를 세워 그녀에게 더 바짝 붙고는 소파의 등받이를 손으로 잡았다. 그녀가 더 편하게 만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엉덩이골 윗부분을 지분대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며 부어있는 구멍을 지분댔다.
“여기에다가 유리로 된 모조 성기를 처박고?”
“흐읏, 네, 주인님.”
유리로 만들어진 모조 성기는 쉽게 깨지는 재질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무거웠고 쉽게 미끄러졌다. 론은 윤활제를 바르고 복도에 서 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두터운 모양새였지만 조금만 힘이 풀려도 금세 밀려 나가 바닥으로 떨어지곤 했다.
“카펫이 안 깔린 곳에다가 세워야겠네. 그래야 소리가 잘 들리지.”
고무나 나무로 된 것에 비해 유리로 된 건 소리가 크고 높았다. 카펫이 깔려있지 않은 곳에 떨어트리면 높고 요란한 소리가 퍼져서, 굳이 그쪽을 보지 않아도 무언가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론은 그때 자신이 겪었던 수치와 비참함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게 그의 판단을 바꾸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것들은 이전만큼 그를 괴롭게 만들지는 못했다. 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라고 대답했다.
* * *
다행인지 불행인지 론이 벌거벗고 개처럼 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르티안이 제인을 가르치는 일에 너무 푹 빠진 탓이었다. 제인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숫자에 강했고 표를 읽는 것에도 금방 적응했다.
지식이 많지 않아서 보고서를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나열된 숫자의 흐름을 읽고 도표에서 잘못된 숫자와 계산을 찾아냈다. 그건 놀라운 재능이었다. 마르티안은 새로운 취미생활을 발견한 것처럼 가르치는 일에 빠져들었다.
물론 제인의 빠른 습득력은 단순히 재능만으로 가능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마르티안이 교육하며 내준 서류들을 닳아빠질 때까지 보고 또 보았고, 읽고 쓰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 잠이 들기 직전까지 필사를 했다. 매일 공부하고 매일 물어볼 것들을 정리했다.
“어제 알려주신 부분들 검토한 것들인데요. 이 부분이, 조금 이상한 거 같아서…….”
제인은 매번 긴장하긴 했지만 이전에 비한다면 태도부터가 달랐다. 마르티안이 해주는 칭찬들은 그녀의 자신감을 북돋웠고 매번 나오는 맛있는 다과는 그녀의 긴장을 누그러트렸다. 좋은 것을 배우고 칭찬을 듣고 맛있는 것을 먹고. 제인은 배우는 일에 점점 더 능숙해졌다.
마르티안은 어린 하녀가 몹시 예뻤다. 굳이 론을 가져다 세우고 수치를 주어서 눈앞의 하녀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르티안은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재깍재깍 받아들이는 하녀가 몹시도 만족스러웠다.
아이를 낳아 후계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그녀는 제인을 보며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마르티안이 하는 일은 여전히 많았다. 제인의 습득능력이 빠르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아직은 초보수준이었으니까. 그녀는 자작가와 백작가를 아우르는 수많은 서류를 검토하며 지냈다. 그나마 편하게 검토하는 내용은 매번 정기적으로 있는 일정들에 관한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백작 부부의 자작가 방문이었다. 마르티안과 휴이는 백작가에서 주로 지냈지만 삼 개월마다 한 번씩, 열흘 정도 시간을 내어 자작가에 머물렀다. 백작가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도안가문 역시 직접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
‘집사는 그 나이 먹었으면 좀 쉬어도 될 텐데.’
자작가의 집사는 백작부부의 방문을 두 달 전부터 준비했다. 저택을 새롭게 보수하고 꾸미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건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주방에서 쓰는 식재료 비용도 확연히 커지곤 했다. 주방장인 한나는 이름만 들었던 음식 재료와 향신료들을 듬뿍 구입해 온갖 요리를 만들어 내곤 했다. 이즈음 자작가에서 보내오는 서류의 대부분은 그와 관련된 비용 내역이었다.
마르티안은 이런 집사의 노력이 가끔 안쓰러웠다. 공작가에서 주도한 결혼식을 이후로, 집사는 백작가의 수준과 비슷하게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은 백작가에서 그녀에게 지급하는 품위 유지 비용과 개인생활비를 떠올렸다. 온전히 사생활을 위해 주어지는 그 돈이, 그녀가 자작가를 관리하기 위해 쓰던 돈보다 컸다. 그러니 이건 애초에 좁혀질 수 없는 격차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집사가 보낸 비용집행 문서에 모두 사인을 했다.
‘뭐, 이렇게 해서 집사 마음이 편하다면 된 거지.’
늙은 집사는 눈물이 많아졌다. 열흘씩 머무르다가 떠나는 날에는 꼭 눈가가 벌게져 있었다.
마르티안은 그런 집사에게 눈물이 많아진 걸 보니 늙긴 늙었다고 농담을 건네곤 했지만 마음은 매번 편치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라도 집사가 뭔가를 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는다면 다행인 것이다.
마르티안은 비용 서류를 정리하고는 자작가에서 가서 처리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날짜를 확인했다. 일자별로 확인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나면 그걸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또 한 움큼 나왔다. 일과 일의 연속선상에서 일정을 확인하던 그녀는 이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의무적인 부부 관계. 그날이 오늘이었다.
저택의 최상층 가장 안쪽에는 백작 부부를 위한 침실이 있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한 곳이었지만 평소에는 백작 부부 중 누구도 그곳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주로 지내면서 그곳에서 잠이 들었고, 휴이 역시 자신의 공간에서만 지냈으니까.
그건 두 사람의 부부 관계가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었다. 결혼한 지 이 년밖에 되지 않은 부부가 관계가 드물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의무적으로 하는 관계는 건조하고 메마른 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아이 소식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한 번도 부각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아이가 없길 바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세블로아드 공작부부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이 결혼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이 결혼을 반대하지 않은 것은 이 관계가 금방 끝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타는 감정은 길게 지속되기 어려운 법이었으니까. 이삼 년만 지나도 이혼이야기가 나오기 쉬웠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지.”
백작가의 집사장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세블로아드 공작가에서는 격주로 한 번씩 그에게 서안을 보냈다. 주로 묻는 것은 백작부인의 임신여부였다. 아이가 없어야 이혼 할 때 후계 문제로 잡음이 없으니까.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때부터는 이혼이 여러모로 번거로웠다. 이혼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가 태어날 때의 부모는 끝까지 부모였다. 부모가 이혼을 해도, 부모가 가진 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계승권은 아이에게 남아있다는 뜻이다.
자작위와 백작위를 기본으로 가지고 향후 공작위까지 물려받게 될 일 순위 계승자.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는 그 모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이혼으로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된다고 해도 아이는 여전히 일 순위 계승자였고, 그건 각자가 다른 사람과 재혼해서 또다른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이유가 있든, 두 번째로 낳은 아이는 처음 낳은 아이에 비해 후계가 밀렸다. 귀족들 사이의 결혼과 이혼이 몹시 신중하게 이뤄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의 이혼은 여러모로 복잡했고 각자가 작위를 가진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공작가에서는 그것을 경계하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그냥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분명,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진 않겠지만…….’
집사장은 멍으로 물들어 있던 백작의 가슴과 몸을 떠올렸다. 그 멍은 집요하게 반복되어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거뭇한 착색은 유륜 주변으로 둥그렇게 형성되어 있었다.
집사장은 백작의 시중과 관리를 맡은 하인들의 수당을 올려주고는 혹시라도 허튼소리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의해야 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가 주의하고 관리해야 하는 범주는 점점 더 늘어나는 중이었다. 백작이 복도에 꿇어앉아 울며 애원하고 온갖 행태를 보일 때마다 집사장은 하인들 단속을 더더욱 철저히 했다.
어떤 곳에서는 벙어리인 하인을 구해다가 쓰기도 한다지만 백작가 저택에서 필요로 하는 건 힘쓰는 일이나 하는 무식한 평민들이 아니었다. 능숙하고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익숙하게 이곳에 녹아드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내부적으로 사람을 기르긴 해야 하는데……. 지금은 공작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공작가에서 보내주는 인력들은 꾸준했다. 능숙하고 숙련된 기술을 가졌으며 저택의 문화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 그들은 백작가의 수준을 빠르게 높이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그게 또 한계였다.
이곳은 공작가가 아닌 백작가였으니까. 백작가가 공작가의 문화와 체계를 모방한다는 건 그렇다고 해도 공작가의 영향력이 계속 남아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복도 한쪽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백작 부인이 데려온 이방인 하인이었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드러내며 미간을 찌푸렸으나 하인은 그런 기색 따윈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사장님, 백작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 * *
휴이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옷 시중을 받으며 오늘 걸칠 장신구들을 골랐다. 온몸에 화려함을 휘두른 모양새였지만 외모가 그에 못지않게 화려해서 그런 것들이 과해 보이지는 않았다.
휴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상태로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머리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머리, 다시 해.”
그 말에 머리 모양을 만져주는 하인이 발 받침을 가지고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옷을 다 차려입은 상황에서는 다시 자리에 앉지 않았다. 최대한 잡아놓은 모양새가 조금이라도 틀어지는 것이 싫었다.
하인은 발받침을 딛고 올라가 그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이마를 살짝 가린 앞머리를 조금 더 옆으로 넘기고는 머리가 너무 가라앉지 않게 조심조심 아래를 건드렸다. 휴이는 거울 속의 모양을 지켜보다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엉망인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백작님.”
하인은 그저 용서를 구했다. 어차피 오늘은 뭘 어떻게 해도 백작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날이었다. 백작은 자신의 부인과 만나는 날마다 극도로 예민하게 굴었고 모든 것을 다 불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머리 손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머리를 말리고 모양을 잡은 이후로 벌써 여섯 번째 반복되는 손질이었다.
물론 하인이 보기에는 백작의 모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아마도 이 방에서 시중을 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의 외향을 불만족스럽게 여기는 건 백작 자신뿐이었다.
백작이 스스로에 대해 왜 그토록 박한 평가를 내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인은 한숨을 꾸역꾸역 삼키고는 백작의 머리 모양을 다시 만지기 시작했다.
“백작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집사장이 들어오며 말했다. 그제야 휴이는 시간을 한번 확인하고는 가볍게 손짓하여 머리를 만지는 하인을 물렸다. 거울 속 모습이 여전히 탐탁지 않았지만 시간보다 늦게 내려갈 순 없었으니까. 그는 아까 골라두었던 반지를 끼고는 집사장에게 물었다.
“마르티안은? 식당으로 향했나?”
“아닙니다. 백작 부인께서는 아직 집무실에 계십니다.”
마르티안은 보통 시간에 딱 맞춰 내려오거나 조금 늦었다. 그건 확연한 온도 차였다. 그는 그녀와 만나는 시간을 하루 종일 신경 쓰며 기다리다가 결국은 약속된 시간보다 먼저 내려가곤 했으니까.
그래도 오늘은 그런 것들이 크게 섭섭하진 않았다. 저녁 식사부터 짧은 술자리, 침실로 이어지는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
휴이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는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이번에는 손에 끼운 반지가 약간 거슬렸다. 하인이 그의 심기를 눈치채고 세공품을 보관하는 상자를 다시 들고 왔다.
“음식은? 보고한 대로 준비한 건가?”
그가 반지를 다시 고르며 물었다. 손님맞이를 위한 만찬이라면 모를까, 부부가 하는 식사에서 메뉴까지 일일이 확인하는 건 과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부인에 관해서 유난히 예민하고 통제적으로 굴었다. 문제는 스스로 기행을 저지르면서도 그게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집사장은 약간의 답답함을 느꼈으나 이내 이 정도에서만 멈춰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복도 한가운데서 꿇어앉아 울고 애원하고 자위를 해대는 것에 비하며 이정도는 얼마든지 수용 가능한 부분이었으니까.
“음식은 보고 드린 대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만……. 조금 전에 백작 부인께서 직접 저를 부르셔서 오늘 메뉴에 대해 언질을 주셨습니다. 너무 무거운 것들은 취소하고 단순한 종류로 준비했으면 하시더군요.”
“단순하게?”
휴이는 새롭게 고른 반지를 손에 꼈다. 세공이 단순하고 두께가 있는 반지였다. 거울로 살펴보니 아까보다 이게 더 어울리긴 했다. 그는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하고 손짓으로 세공품 상자를 물렸다. 집사장이 다시 말했다.
“수프를 처음에 내고 이후에는 얇게 저민 고기들과 치즈, 절인 올리브와 과일이면 될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술은 이전에 좋아하시던 르불 지방의 와인으로 준비할 예정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한 거 같은데?”
그녀가 말한 음식은 가벼운 술자리에나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식당에 내려가 커다란 공간을 차지하고 먹기에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음식들이다. 집사장이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휴이는 잠시 갈등했다. 그녀가 가벼운 메뉴를 원한 건 정말 가벼운 음식을 원해서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적게 오가는 조용한 자리에서 먹고 싶다는 뜻이었다.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었지만, 휴이는 그녀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르티안은 그저 그냥 지루한 과정이 싫은 것이다. 식당에 내려가서 순서대로 나오는 오랜 식사를 하고, 침실로 올라가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가벼운 술을 즐긴 뒤 함께 침대에 눕는 과정이 너무 길고 지루해서, 그걸 단축하고 싶은 것뿐이었다.
“식사는 침실에 딸려 있는 곳에서 하는 거로 하고. ……마르티안이 원하는 대로 준비해.”
휴이는 지친 얼굴로 말을 뱉어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하루 종일 단장을 하는 스스로가 초라했고, 이 와중에도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스스로 원치 않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한심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의례적인 과정들이 지루하지 않았다. 도리어 매번 짧다고만 느꼈다.
휴이는 이럴 때마다 마르티안이 자신에게 조금의 애정도 가지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일부러 그를 괴롭히기 위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말로 지루하고 시간이 아까워서 이렇게 구는 것이다. 그 무심함은 그녀가 내보이는 분노와 미움보다 더 크게, 그를 상처 입혔다.
그는 거울 안의 자신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바닥으로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 * *
마르티안은 부부 침실에서 휴이를 기다렸다. 급한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거 같다는 이야기를 집사장이 들고 온 상황이었다.
테이블에는 이미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이미 차려져 있었고, 향과 맛이 묵직한 와인도 차갑게 식혀서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라기보다는 술자리에 가까운 상차림이었지만 어쨌든 명목은 저녁 식사였다. 그녀는 먼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대로 한 시간이 지나자 마르티안은 짜증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백작님께서 일이 끝나면 바로 오시겠다고…….”
집사장이 대신 고개를 숙였다. 마르티안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뻔한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녁을 걸렀는데도 도리어 입맛이 사라졌다. 그녀는 음식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안쪽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휴이는 그녀가 씻고 자리에 누울 때쯤 나타났다. 옷차림은 평소보다 훨씬 가벼운 차림새였다. 하긴, 한껏 차려입고 나타나기엔 지금 시간은 너무 늦었다. 마르티안은 왜 이렇게 늦었냐는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술을 한잔 마시고 씻고 났더니 짜증도 이미 사라졌고 지금은 그저 노곤했다.
그녀는 둘렀던 가운을 풀었다. 어쨌든 여기에 있는 이유는 관계를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의무는 의무답게 처리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녀는 어서 관계를 끝마치고 집무실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은 아침까지 함께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상대가 먼저 그녀를 한참 기다리게 만들었으니 그녀 역시 예의를 지킬 이유가 없었다.
마르티안은 아직도 가만히 서 있는 휴이에게 말했다.
“오세요. 서로 피곤한 상태니 빨리하죠.”
그 말에도 휴이는 그저 문 앞에 서 있었다. 마르티안은 벌거벗은 채로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문이 그의 등에 닿았다.
마르티안은 그의 얇은 셔츠블라우스 위에 손을 댔다. 여전히 부풀고 멍든 가슴이었다. 혼자 주무르고 잡아당겨서 늘 엉망인 유두가 옷 아래로 바짝 서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문지르고는 그의 가슴을 손으로 꾹 쥐었다. 휴이가 작은 신음을 내며 입술을 깨문다. 그의 앞은 느릿하게 흥분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이 지지부진한 관계가 지겹다고 생각했다. 의무적인 관계를 가질 때마다 그는 늘 흥분도 느렸고 사정도 느렸으니까. 오늘 같은 날까지 그런 장단에 맞춰주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휴이의 바지에 손을 집어넣어 그의 고환을 꽉 쥐었다.
평소에 그녀가 하던 평범하고 부드러운 애무와는 전혀 다른, 약간 고통스러울법한 악력이었다.
“흐! 흐읍…….”
그의 몸은 고통을 반기며 거세게 꿈틀거렸다. 그의 등이 뒤로 젖혀지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흥분에 찬 눈이 그녀를 보았다. 흥분에 젖은 눈은 기대에 차 있었다. 그의 성기는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마르티안은 손에 힘을 풀고는 바지 속에서 손을 빼냈다.
“빨리하죠.”
이 시간을 짧게 끝내려면 그를 학대하듯이 관계를 가지면 된다. 휴이는 정상적인 관계에서는 잘 버텼지만 가학적인 상황에서 제 몸을 통제하지 못했으니까. 터질 듯이 흥분하는 몸은 쉽게도 싸질렀다. 마르티안은 그를 침대로 끌었다.
물론 그녀는 휴이를 진심으로 학대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적당히 흥분을 유도해서 빨리 관계를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침대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휴이의 성기는 다시 식어 있었다.
필사적으로 흥분을 참아서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이다. 마르티안은 짜증을 확 냈다.
“늦게 와서 지지부진하게 굴 거면 그냥 그만둬요. 자꾸 식는 것 보는 것도 별로고, 이런 식으로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나는 그런, 그게 아니라…….”
“변명은 됐어요.”
그녀는 벗었던 가운을 다시 둘렀다. 달에 한번씩 돌아오는 의무는 지겨운 의무였다. 임신을 목적으로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임신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사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마르티안은 이대로 후계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다가 적당한 때에 이혼할 생각이었다. 귀족의 결혼이란 결국 후계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걸 달성할 수 없다면 결혼을 이어갈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남편에게 집중한 채 편하고 즐거운 관계를 지속하면 임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그녀는 휴이를 두고 평생 같이 살 마음이 조금도 없었고 그런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이에게 말했다.
“집사장에게 상황설명은 당신이 해요. 이쪽에서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녀가 휴이를 지나치자 그가 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마르티안이 인상을 쓰며 휴이를 보았다.
“이거 놔요.”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다신 이렇게 늦는 일 없게 할게. 그러니까…….”
가지 말란 소리가 울음과 함께 올라왔다. 휴이는 울지 않기 위해 그 말도 함께 삼켰지만 고인 눈물은 여지없이 떨어졌다.
저녁 무렵 휴이는 일부러 일정을 바꿨다. 내일 만나도 그만일 사람을 불러다가 일 처리를 시작했고 그렇게 몇 시간을 억지로 보냈다. 마르티안이 자신을 너무 서럽게 만들어서 일부러 그렇게 했다. 그녀가 자신을 기다리며 맘이 불편해지기를 바라고.
이제와 생각하니 그 모든 게 다 한심한 짓이었다. 휴이는 마르티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옷을 움켜쥔 손은 그대로였다.
“미안해. 너무 나를 귀찮게 여기는 거 같아서 그랬어. 늘 빨리 끝내려고만 하고 그러는 게, 너무 섭섭해서……. 나와 있는 걸 조금만 더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니까…….”
“누가 들으면 당신이 몹시 지고지순한 사람인 줄 알겠어요.”
“…….”
“사실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여기든 아무 상관 없잖아요. 그냥 이런 식으로.”
마르티안이 휴이의 성기를 발로 눌렀다. 시들었던 것이 그 순간 꿈틀거리듯 커진다. 흐, 흐윽. 그녀는 무릎을 꿇고 있는 그의 허벅지를 벌리게 하고는, 엉덩이 아래로 발을 넣어 고환을 툭, 차올렸다. 흐윽, 흐으응. 그가 신음을 터트렸다. 그의 앞은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보며 픽 웃었다.
“이렇게 짓밟아주기만 하면 좋아하면서, 무슨 같이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아니고…….”
“흐읍, 아니야. 나는 정말로…….”
“됐어요. 재미없는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녀는 그대로 그의 허리춤을 끌러내고는 그의 성기를 끄집어냈다. 발기한 것이 툭 불거졌다. 휴이는 그 와중에도 그게 아니라며 울었다. 무릎을 꿇고 한껏 발기한 채로 우는 모습은 몹시 한심했지만 자극적인 맛이 있었다. 어쨌든 그는 여러모로 그녀의 취향이긴 했으니까.
마르티안은 그대로 휴이의 위에 앉았다. 가운 아래로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서 딱딱한 성기는 그대로 그녀의 질벽을 문지르며 쑥 들어왔다. 흐으, 휴이가 신음을 뱉으며 움찔 허리를 굳힌다. 무릎을 꿇고 있는 상대에게 올라타는 건 그간 해왔던 일반적인 체위보다는 좀 더 자극적이었다. 맞닿은 곳으로 휴이가 움찔움찔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휴이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입을 맞췄다. 그는 급하게 반응하며 그녀의 입술을 빨고 핥았다.
“흐윽, 마르티안…….”
그는 마르티안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맞췄다. 입술을 빨고 입 안으로 혀를 얽으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르티안은 이대로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고개를 젖히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건 종종 일어나는 가학적인 욕망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억눌렀다. 개를 괴롭히는 일은 그녀에게도 대가를 요구했다. 단순히 그녀가 꿈꾸던 미래를 포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순간순간 그에게 향하는 가학 욕구를 참아내야 했다. 그건 이중적인 감각이었다.
그녀는 무너지는 휴이를 보며 쾌감을 느꼈다만 그건 동시에 이런 욕구를 참아내는 걸 바탕으로 했다. 그렇기에 그녀는 늘 미묘한 욕구 불만에 시달렸다.
마르티안이 손을 올려 그의 뺨을 살살 쓸었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자 그녀는 손을 움직여 그의 입술을 가볍게 막았다. 휴이는 자신을 막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과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급하게 핥았다.
마르티안은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반듯한 이마 아래로 투명한 녹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직도 물기가 남은 눈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녀가 먼저 입을 맞추어 주었다는 것에 또다시 희망을 품고 흥분한 모양이었다. 이 결혼 생활이 벌써 이 년째인데도 그는 아직도 희망을 품었다.
“빨리 싸요. 그래야 내가 집무실로 돌아가서 론을 쓰지.”
마르티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휴이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진다. 그녀는 이 순간이 몹시도 좋았다. 희망을 가지려는 개를 붙잡아 절망으로 처박는 감각은 분명한 가학의 감각이었으니까.
그녀는 다시 한번 휴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손길이었다.
휴이는 당장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왜, 흐으, 마르티안. 왜 어째서…….”
“날 여기에 혼자 두었잖아요. 저녁 내내 시간 낭비를 하게 했으니까 아침까지는 당신 혼자 있어요.”
“하지만 오늘, 흐읍, 오늘은 임신할 수도 있는…….”
“론이랑 관계를 할 건 아니니까, 어차피 상관없잖아요.”
그녀가 론을 데리고 하는 건 그저 학대였다. 임신이 가능할 때는 더더욱 그런 방식으로 관계가 이어졌다. 그녀가 임신이라도 한다면 아이의 아버지는 휴이 세블로아드여야 했으니까. 그런 면에서 그녀의 성향은 몹시 깔끔한 편이었다. 물론 휴이는 그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는 아래를 꾹 조이며 허리를 들썩댔다. 안에 가득 들어찬 휴이의 성기가 꿈틀대며 움직였다. 그는 그녀를 붙들며 울었다.
“마르티안. 내가, 흐으, 잘못했어. 사과할게. 뭐든 할게. 흐윽, 그러니까, 가지 마. 제발 오늘은…….”
이어지는 애원을 들으며 마르티안은 엉덩이를 문지르듯 움직였다. 자극이 이어지자 울음으로 점차 신음이 섞였다. 움찔거리는 몸이 필사적으로 흥분을 참아내기 시작한다. 그는 신음과 울음을 내뱉으면서도 계속 애원했다. 가지 마. 가지, 마세요. 존대와 반말이 섞였다.
마르티안은 팔을 뻗어 그의 엉덩이를 꾹 움켜쥐었다. 엉덩이 살을 양쪽으로 벌리면서 거칠게 주무르자 신음이 커진다. 그가 흥분을 느끼는 만큼 그녀 안으로 삼켜진 것이 꿈틀댔다.
마르티안은 가볍게 신음을 뱉고는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그가 울며 그녀를 바짝 끌어안았다. 뭐든 해도 된다는 태도였다.
“흐윽, 흐읍, 흐, 마르티안…….”
마르티안은 깨무는 강도를 좀 더 높였다. 흐으, 흑. 여린 살이 물어뜯기자 자국이 순식간에 붉게 남았다. 그가 신음을 토해냈다. 그녀 안에 들어있는 것이 더 꿈틀댔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엉덩이를 비벼서 자신의 안에 들어있는 것을 흔들었다. 흥분한 애액이 흘러내려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난다. 휴이는 몸을 뒤틀며 덜덜 떨기만 했다.
그것이 필사적인 애원이라는 것을, 마르티안은 알고 있었다. 이런 관계를 가질 때마다 휴이가 지지부진하게 구는 이유도 하나뿐이었다. 이런 관계 중에만 마르티안을 껴안고 붙잡고 만질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그가 싸버리면 바로 씻으러 들어갔다. 그 뒤에는 그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다. 휴이는 이런 시간이나마 어떻게든 늘리고 싶어 했다.
오늘은 뭐가 뒤틀렸는지 그녀를 기다리게 했지만.
“흐으, 흐윽, 가지 마세요. 가지, 흐읍, 흐, 가지 마. 제발, 흡, 마르티안.”
결국 그마저도 오래 못 갈 고집인 것이다. 애원하는 목소리는 신음과 울음으로 엉망이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엉덩이를 꽉 틀어쥐고는 허리를 계속 움직였다. 이 개의 뒤를 쑤시지 못한 채로 관계를 끝냈다는 게 새삼 아깝다. 스스로 엉덩이를 벌렸다가 고통으로 엉엉 울며 헐떡대는 게, 어울렸을 텐데.
이내 그녀는 휴이의 목을 두 손으로 감았다. 엉망이 된 얼굴은 여지없이 자극적이다. 목을 조르고 싶고 개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을 참고는 그저 그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백작님, 그만 우세요.”
잔뜩 젖은 뺨이 축축하다. 마르티안은 그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다. 젖은 입술 위로 그녀의 입술이 겹쳐질 때마다, 그는 기대와 절망을 오가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 의미 없는 행위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자꾸 기대를 걸었다. 마르티안은 그가 꼼짝도 하지 않고 흥분을 버티는 것을 기다리다가, 손을 내려 그의 유두를 꾹 잡았다.
“정말 피곤하니까, 빨리하죠.”
그녀가 부어오른 살덩이를 꾹 쥐어 누르자 휴이가 허리를 움찔 떤다. 매일 스스로 자극하는 곳이니 작은 가학에도 쉽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녀는 손끝으로 살덩이를 비벼 눌렀다. 이미 가득 흥분한 곳이다. 그녀는 움켜쥔 것을 조금 세게 잡아당겼다.
“흐, 아, 안돼. 흡, 끄…….”
그의 아래가 움찔움찔 떨린다. 휴이가 그녀를 막으려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확 잡아당겨 밀착시켰다. 좋아하는 거 해준대도 그러네. 그녀가 말하자 휴이가 헐떡이며 우는 소리를 냈다. 론에게 간다는 것이 어지간히 싫은 모양이었다.
약아빠지게 구는 개를 보며, 그녀는 그의 가슴에 짓눌린 손을 움직여 손톱을 세웠다. 살덩이를 날카롭게 짓뭉개는 감각이 이어졌다.
“하으, 흐읏!”
휴이가 급하게 상체를 뒤로 뱄다. 마르티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붉어진 유두를 잡아 그대로 비틀었다. 흐으, 시, 싫어. 흐으아! 무릎을 꿇은 채 버티던 몸이 들썩댄다. 마르티안은 들썩이는 말에 올라탄 채 그의 유두를 몇 번이나 비틀고 흔들었다.
가학에 흥분한 몸이 뒤틀린다. 연결된 아래로 질퍽한 소리가 이어졌다. 싫어, 흐으. 싫어요. 주인님. 덜덜 떨며 하는 말이 이어졌지만 그 싫다는 소리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소리였다.
개는 한껏 흥분한 상태였으니까. 그의 진심은 그에 비하면 영 보잘것없었다.
“흐, 흡. 끄으……흐으응!”
그는 신음을 뱉으며 사정했다. 맞닿은 살은 흥분으로 한껏 떨렸지만 그는 그저 서럽게 울었다. 마르티안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이제 그만 놔요. 다 끝났잖아요.”
“흐으, 싫어요. 제발……. 가지 마세요.”
그는 울며 버티려 들었지만 마르티안이 화를 내며 이젠 강간이라도 할 생각이냐고 말하자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가 팔에 힘을 풀자 마르티안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안쪽으로 정액이 질퍽하게 흘러내렸다. 휴이가 급하게 움직여서 핥으려 들었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막았다.
“이런 걸 치우는 건, 제 개가 할 일이니까요. 그만 쉬세요.”
그녀는 그렇게 답하고는 몸을 돌렸다. 침실 가득히 울음소리가 크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