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자작가로 오는 청혼은 보름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휴이는 매일같이 편지와 선물을 보내며 매달리는 것처럼 굴었다. 모든 선물에는 여지없이 그녀의 이름과 작위가 새겨져 있었다. 마르티안 도안 자작. 남들이 보기에는 대단한 공작가의 자제가 한껏 매달리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집사는 매일 새로 도착하는 선물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처음보다는 선물 개수는 줄었지만 대신 고가의 세공품으로 채워졌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어마어마한 돈을 쓰고 있다는 게 뻔히 보이는 선물들이었다.
휴이의 뜻대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지 최근에는 다른 가문에서 보내온 선물과 초대장들마저 섞이기 시작했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마르티안은 집사가 전달해준 초대장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왕래조차 잘 하지 않던 친척들, 친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주변 귀족들로부터 중앙의 귀족들까지. 가문의 이름은 들어봤지만 말 한번 섞지 않았던 곳에서 온갖 초대장을 보냈다.
그야말로 노골적인 관심이었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그것들을 치워버렸다.
“앞으로는 이런 건 집사 선에서 처리해. 다 태워 버리든가.”
“알겠습니다, 자작님. 그리고……도련님과 아서 님에게서 서안이 왔습니다.”
집사가 약간 주저하며 말을 전했다. 서안을 보며 마르티안이 한숨을 내쉰다. 내용이야 열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엘 도안은 수도에 도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고 아서 우드는 결혼은 무리겠다는 이야기를 썼겠지. 그녀는 일단 아서에게 온 편지를 열었다.
“하아, 청혼 서안 보냈다는 걸 아예 비밀로 해달라네.”
그녀는 다 읽은 편지를 한쪽으로 툭 던졌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휴이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우드 가문에서도 여러모로 몸을 사리는 것이다.
차남의 결혼 때문에 공작가 후계자와 대립각을 세우고 싶진 않을 테니까. 아서는 가문의 입장을 전달하며 편지의 끝에 죄송하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편지에서는 그의 낙심과 원망이 알게 모르게 느껴졌다.
마르티안은 여러모로 답답함을 느꼈다. 그건 짜증과 자괴감이 바탕이 된 분노였다. 애초에 이런 관계를 시작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애초에 휴이 세블로아드와 만나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테니까. 그 생각은 시 때 없이 튀어나와 그녀를 괴롭혔다.
집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
“아서 님이 정말 마음에 드셨다면 상황이 좀 가라앉길 기다려 달라고 답을 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람의 관심은 보통 채 반년도 가지는 않는 법이고, 백작가에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이런 태도를 오래 보이진 못할 겁니다.”
사람들은 반복되는 상황에 대해서 쉽게 질려한다. 서너 달만 똑같은 구도가 반복되어도 구경꾼들은 지겨움을 느끼고 하나둘 자리를 뜨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집사는 그녀에게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필요한 건 반복적이고 동일한 거절, 그리고 상황을 버텨내는 인내뿐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직후를 떠올렸다. 친척들이 돌아가며 찾아와서는 결혼할 사람이라며 수많은 사람들을 내놓았다. 그녀가 자작으로서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사람을 꽂아 넣고 자작가 내 주도권을 차지하려 드는 이들이었다. 그때에도 집사는 같은 조언을 했다.
동일하고 반복적으로 거절 의사를 밝히고 상황이 소강되기를 기다릴 것. 그 조언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의미가 있었다.
“자작님, 상황이 상황이긴 하지만 너무 크게 상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을 너무 무겁게 두실 필요도 없고요.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무겁지 않아야 하는 법입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너무 화가 치밀어.”
그녀의 말에 집사는 한숨을 삼켰다. 근래 들어 저택 내 분위기는 살얼음판이나 다름없었다. 주방에서는 마르티안이 좋아하는 음식들을 최대한 만들어 올렸지만 정작 그녀가 먹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저택 안에 있으면서도 거의 침실에만 머물렀다.
‘그래도 스트레스 풀 상대는 있으시니…….’
집사는 침대에 누워 있는 론을 힐끔 보았다. 그는 요즘 이틀에 한 번은 복도까지 끌려 나와 수치스러운 꼴로 헐떡대거나 살이 다 부르트게 맞으며 울었다. 론을 좋게 보지 않았던 저택 내 사람들마저도 근래에는 론이 불쌍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물론 집사는 론보다 마르티안이 더 걱정이었다. 론에게 화풀이를 한다고 해도 그건 화풀이일 뿐이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백작이었다.
그녀의 결혼을 방해하기 위한, 그의 노골적인 구애가 가장 큰 문제다. 집사는 백작이 그녀 때문에 보였던 눈물과 여러 상황들을 떠올리다가 다시 한숨을 삼켰다.
‘처음부터 불안불안 하더라니…….’
가볍게 몸만 섞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휴이의 태도는 여러모로 엉망이었다. 감정이 무거워졌다는 것이 집사의 눈에도 보였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지금 이렇게 구는 것들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집사는 마르티안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자작님께서 화가 나는 건 당연하지요. 많은 것들이 틀어졌으니까요.”
집사는 마르티안의 성격을 잘 알았다. 빈말로라도 착하거나 좋은 성격이라고 하긴 어려웠지만, 가문과 관련된 일에 대해선 책임감이 강하고 예민했다. 갑자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가문 전체를 떠맡게 된 그때, 마르티안은 자신이 실수하거나 문제를 일으키게 될까 봐 극도로 긴장하고 경계했다.
지금도 마르티안은 백작을 욕하고 화를 내는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집사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분명한 건 자작님 때문에 이 상황이 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어차피 시간을 흘러가게 되어 있구요. 그 동안 몰두할 만한 다른 것들을 찾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몰두?”
“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땐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으니까요. 조금 계획이 틀어졌을 뿐이지 모든 일이 망쳐진 건 아니지 않습니까?”
집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수북이 쌓인 초대장을 정리해 다시 품에 넣었다. 사실 그의 말은 상황을 조금 축소한 면이 있었다. 모든 일이 망쳐진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전과 같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앞으로 마르티안의 이름은 백작과 함께 오르내릴 테니까.
다행인 것은 마르티안은 사교계에 큰 관심이 없단 것이었다. 그녀는 지금껏 도안 자작가를 지켜오느라 그런 곳에 시간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난 것이다. 그리고 십 년에 대한 대가를 이젠 돌려받을 때였다. 그녀가 지킨 이 저택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편이었다.
마르티안이 한숨을 내쉬고는 한쪽에 놓았던 엘 도안의 편지를 열었다. 편지는 짧았지만 그녀는 한참이나 그것을 보았다. 집사는 편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힐끔 보았다.
-전 제 자식을 누님에게 보낼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할 생각입니다. 누님 때문이 아니니 부담가질 필요 없어요. 저 역시 도안이라는 성을 가지고 태어난 책임을 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가문 때문이라거나 후계문제 때문이라는 걸 너무 고려하지 마시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세요.
편지로 물기가 뚝 떨어져 번졌다. 집사는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방을 나왔다.
론은 깜박 잠든 몸을 급하게 일으켰다. 늦은 아침에 잠깐 누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온몸이 엉망이라서 급하게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이를 악물어 신음을 삼키고는 마르티안을 찾았다.
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다. 노을빛이 얇은 가운을 물들이고 머리카락에 내려 앉아있었지만 그게 이상하게 외로워 보였다. 론은 자신의 하는 생각들이 주제넘은 감정들로 인한 거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생각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르티안에게 다가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고작 그뿐이었는데 엉덩이와 허벅지가 맞닿아 눌리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그의 하체는 빼곡하리만치 피멍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마르티안이 론에게 말했다.
“누워 있지. 왜?”
“주인님을 보고 싶어서…….”
마르티안이 픽 웃었다. 얼굴 한쪽이 퍼렇게 멍들고 온몸이 다 시커멓게 된 상태로 애교를 부리면서, 그게 또 능숙하진 못한 것이 론다웠다. 그녀는 론의 멍든 뺨을 가볍게 매만지며 말했다.
“더는 네 몸이 못 견뎌.”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제가 주제넘어서 혼난 거였으니까요.”
온몸에 남은 흔적들은 자신이 잘못해서 벌을 받은 거니 마르티안의 탓은 아니란 소리였다. 머뭇대며 벌어지는 입은 양 끝이 붉게 찢어져 아직 아물지 못했다. 그녀가 내키는 대로 손을 쑤셔 넣거나 모조 성기를 처박아서 자꾸 찢어지는 탓이었다.
주인의 화풀이가 되고 싶다고 기어 들어왔던 다음날 론은 벌을 받았다. 유리로 된 모조 성기를 뒤에 끼고 복도에 서 있어야 했고, 윤활제에 미끄러져 모조 성기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서 다리를 벌리고 밀어 넣어야 했다.
마르티안은 그가 수치로 인해 발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벽을 보던 몸을 돌리도록 했다. 론은 복도에 오가는 사람들이 다 보이도록 서서 자위를 해서라도 발기를 유지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론은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복도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흥분이 식어버리는 탓이었다.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식어버린 성기가 자위를 한다고 해서 바로 발기할 리는 없었다. 마르티안은 그를 복도에 세워놓고 쓸모없게 구는 좆을 매질했다.
침실과 서재가 있는 저택의 상층은 집사를 제외한 하인들은 거의 올라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집사가 아닌 하인들을 올라오게 했다.
론은 수치와 긴장, 반복되는 극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울었다. 마르티안은 그에게 좆을 벽에 문지르며 허리짓을 하게 했고 쓸모없어서 죄송하단 소리를 스스로 말하게 했다. 치밀던 짜증을 완전히 잊은 게 그쯤이었다.
그녀는 론을 다시 침실로 끌고 들어가 좆과 구멍을 마음대로 썼다.
그 뒤로는 매일이 그런 식이었다. 감정이 엉망인 상태에서는 컨트롤도 엉망이라서, 아니 컨트롤에 신경 쓰지도 않아서, 론은 그녀로 인해 매번 한계 직전까지 몰렸다. 온몸은 계속된 가학으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럼에도 론은 그녀에게 계속 매달렸다. 조심스러운 손은 매일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자꾸 매달려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건 묘한 애원이었다. 마르티안의 화를 풀기 위해 감당하는 가학들이었지만 어쨌든 이건 론이 원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개가 주인을 위하는 예쁜 태도는 늘 수줍고 주제를 아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마르티안은 론의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흐으.”
이미 멍든 곳이라서 내리친 강도는 세지 않았는데도 아픔이 상당했다. 론이 입술을 꾹 물고는 신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마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알면, 주제넘게 굴지 말아야지.”
냉정한 말은 몸보다는 마음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개가 신체적인 가학보다 이런 식의 취급을 더 괴로워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짓밟으면 짓밟는 대로, 짓이기면 짓이기는 대로 그녀의 아래에서 버티는 개였다. 론은 여지없이 괴로운 얼굴을 했지만 마르티안의 옷에서 손을 떼진 않았다.
마르티안 역시 그 손을 쳐내지 않았다. 론이 그런 것에 또 쉽게 위로받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화풀이를 담당해온 개가 예쁘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 몸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한계였으니까.
“침대에 가서 쉬어. 오늘은 달밤가에 갔다 올 거니까.”
“주인님, 제가, 흡, 참을 수 있게, 흐읏.”
마르티안이 론의 허벅지를 밟았다. 멍든 살덩어리가 짓눌리자 극심한 통증을 일으켰다. 론이 등을 떨며 헐떡이는 것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넌 좀 쉴 필요가 있어.”
“흐, 흐읏…… 주인님.”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하는 상황이고.”
마르티안은 진심으로 말했다. 이 상황의 원인이 무엇이든 결국은 결론은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가라앉을 때까지 일단은 참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짧지 않은 시간일 게 분명했다.
지금처럼 론에게 화풀이를 하며 쏟아붓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는 론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스스로의 한계를 예민하게 신경 쓰는 남창들이나 그녀가 스스로 한계를 두고 놀게 되는 귀족 파트너들이 나았다. 남창들은 이성을 잃은 손님을 대하면서도 스스로의 몸을 지켜내는 데 익숙한 이들이었고, 론이 아닌 타인을 상대로는 아무리 험악하게 대한다고 한들, 상대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이성을 놓아본 적은 없었다.
“주인님. 제가,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론, 나는 쉬라고 했어. 쓸데없이 굴지 마.”
론이 그제야 머뭇 고개를 숙이고는 붙들고 있던 옷을 놓았다. 그의 표정이 버림받기라도 한 것처럼 엉망이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했다.
“예쁘게 굴어야지.”
다정한 말은 명백한 경고였다. 론은 제 몸이 힘을 빼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르티안은 순하게 자신을 올려보는 론을 보며, 거기에 담겨 있는 자신을 향한 애정과 그로 인한 결핍을 읽어냈다.
예쁨을 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 내보이는 결핍들은 늘 간절하고 깊었다. 그녀는 그의 간절함을 헤집고 비틀었다.
“아니면 내가 나갔다 오는 동안 복도에 서 있을래? 저번처럼?”
그녀의 말에 론의 몸이 움찔 굳는다. 그건 그에겐 고통스러운 수치였다. 하인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자위를 하거나 다리를 벌린 채 좆을 맞고, 구멍에서 모조 성기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거나 혹은 그걸 밀어 넣는 걸 보이는 모든 일들이.
“네, 주인님.”
그럼에도 론은 순순히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건 단순히 마르티안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겪는 그 고통과 수치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지독하게 가혹한 상황들을 모두 버텨내고 나면 마르티안은 온전하게 그에게 집중해 주었으니까. 론에게 집중하는 마르티안의 표정은, 화풀이를 시작하는 처음과는 완전히 달랐다.
주인이 자신으로 인해 기분이 바뀐다는 것. 그건 론이 새삼 깨닫게 된 자신의 가치였다. 이전까지는 그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대로 행동했다면 이것은 그것과는 다른 범주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치와 긴장, 고통을 발판삼아 그녀의 위로가 될 수 있었다. 위로할 수 있었다.
론은 그것이 좋았다. 애첩이자 개에 불과해도, 단순히 쾌감이 도구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녀에게 뭔가를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견딜 수 없이 그를 충만하게 했다.
마르티안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가 이내 별말 없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론을 예뻐했지만 깊게 관심을 두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필요한 건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양새로 있을 개였으니까.
론은 자신을 쓰다듬는 손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다정한 손길은 동시에 무심한 손짓이었다. 그녀는 곧 그를 여기에 내버려 두고 다른 개를 사용하기 위해 달밤가에 갈 테니까. 그것이 싫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납득해야 했다.
마르티안의 말대로 그의 몸은 한계였으니까. 엉망인 몸으로는 아무것도 줄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빨리 돌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불만족한 상태로 돌아와 주기를 바랐다.
‘괜찮아. 조급해하지 않아도 돼.’
론은 일어나는 욕심을 억지로 눌렀다. 어쨌든 마르티안의 애첩은 자신이었고 그녀가 가장 쉽게 손을 뻗는 상대도 자신이었다. 몸이 한계가 아니었다면 마르티안은 분명 그를 썼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속으로는 욕심이 남았다. 그녀가 비참한 꼴로 서 있는 자신을 조금 써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녀의 손에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입에 올렸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주인님.”
마르티안은 해가 지고 나서 달밤가에 도착했다. 이곳에 이렇게 오랫동안 발길을 끊은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마차에서 내리자 하인 하나가 그녀를 안내하려 다가왔지만 마르티안은 안내를 거절했다. 어차피 엔간한 하인들보다 달밤가 구조를 더 잘 알았고. 그녀가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내주는 방은 늘 같았으니까.
마르티안은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가면서 달밤가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다르다고 느꼈다. 평소에도 시끄럽거나 하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하고 사람이 적었다.
물론 피곤과 짜증, 극도의 화를 오가면서 피로해진 몸은 그런 것에 오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이고, 마르티안 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달밤가의 관리자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그녀에게 달려왔다. 마르티안은 살이 오른 얼굴에 땀이 맺힌 것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여기 오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새삼스럽기는.”
“그래도 또, 어, 오랜만에 오셨으니까요. 제가 맞이해야 하는데…….”
“됐고 괜찮은 사람 있으면 들여보내. 파트너 삼을만한 애도 좋고 아니면 여기 있는 애를 들여보내도 돼. 평소보다 훨씬 험악할 테니까 그거 감안하고.”
그녀가 요구조건을 풀어내자 관리자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곤란하단 기색이 물씬 풍겨서 마르티안은 걷던 것을 멈췄다.
“뭐야?”
“그게, 마르티안 님. 들여보낼 사람이 마땅치가 않아서.”
“마땅치 않다고?”
마르티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관리자가 머뭇머뭇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는 순간 백작을 떠올렸다. 그는 관리자를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얻었었다. 분명 달밤가에도 손을 써두었을 것이다. 돈에 죽고 못 사는 관리자가 백작을 얼마나 반겼을지 뻔했다.
‘백작과 만나게 된 원인이 여기 있었지.’
관리자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주춤주춤 몸을 뒤로 뺐다. 마르티안은 그에게 다가가 그대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철썩 소리와 함께 관리자가 죽는 소리를 내며 뒤로 주저앉았다.
“아이고! 왜, 왜 갑자기 손찌검을 하십니까?! 제가, 뭐, 뭘 잘못했다고요.”
“뭘 잘못했냐고? 백작에게 내 정보를 팔아넘겼던 시점부터 쌓인 게 한두 개가 아닐 텐데? 그리고 내게 들여보낼 사람이 마땅치 않아?”
관리자의 말은 마르티안을 손님으로 안 받겠단 소리였다. 그녀는 치미는 화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세블로아드 가문이 대단하다더니 돈은 확실히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의 일상을 침범하고 휘두르고 남을 만큼.
그녀가 관리자의 고환을 밟을 기세로 다가가자 그가 후다닥 다리를 움직여 뒤로 도망쳤다. 손으로는 사타구니를 가리고 발로 바닥을 밀어 도망치면서도 그는 변명을 내뱉었다.
“마르티안 님,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으아, 진정하세요. 저희가 마르티안 님을 거절하려는 게 아니고오, 정말로 요즘 사람들이 오질 않는 데다가, 그, 마르티안 님 소문이 많이 퍼져서, 아무도 주선해달라는 사람이 없……끅.”
마르티안의 발이 그의 다리 사이, 정확하게 말하면 고환 아래 바닥을 퍽 내리찍었다. 관리자는 제 것이 터지지 않고 밟히지 않았다는 것에 간신히 진정했지만 딸꾹질이 나왔다. 여태껏 달밤가를 운영하며 그녀가 이토록 화가 나 있는 모습은 또 처음이었다.
진짜 부랄 한쪽이 터져나갈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그가 마구 말을 뱉어냈다.
“게다가 배, 백작님이 와서 계십니다. 그래서 더 다들, 오지도 못하고. 저희도 피해잡니다. 피해예요. 손님들이 오시질 않아서 이대로는 가다가는 파산일 거 같아서 매일 울며 지냅…….”
“백작이 여기에 와있다고?”
관리자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휴이는 벌써 일주일째 달밤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티안과 그가 만났던, 마르티안이 이곳에서 고정적으로 쓰는 그 방을 빌려서 지내고 있었다.
창녀를 사지도 않고 그렇다고 파트너를 소개받는 것도 아니었다. 관리자 역시 최근 들어 그와 마르티안과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가 무엇을 위해 그 방에 머무르는지 알았다.
마르티안이 달밤가를 방문하는 날, 그러니까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대체, 머리끝까지 화가 난 사람이랑 만나서 무슨 대단한 걸 하겠다고…….’
관리자는 마르티안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휴이에게 마르티안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반쯤은 의도적으로 그녀의 화를 일으킬 말을 골라 뱉었다.
그래야 그녀가 휴이를 만나려고 할 테니까. 물론 그건 당장 짓밟힐 위기에 처한 자신의 고환을 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의 예상대로 마르티안은 그의 고환을 뭉개는 것보다 이곳에 휴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 집중했다. 예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머리끝까지 화나 보였던 그녀의 얼굴이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는 점이었다.
관리자는 뒤로 조금 더 뒤로 몸을 움직이고는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마르티안이 그에게 물었다.
“백작이 지금 어디에 있어?”
“그게, 마르티안 님이 늘 머무시는 방에 있습니다.”
“아주, 알뜰하게도 팔아먹었네.”
그녀가 관리자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말에 가득 녹아있는 짜증을 보았을 때 화가 가라앉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표정이 사라지는 법이다. 관리자는 사태를 바로 파악하고는 뻔한 변명이라도 입에 올렸다.
“그런 게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그게 꼭 그 방이어야 한다고 하셔서…….”
“그래, 그랬겠지. 거절하고 싶어도 네 위치와 주제가 거절하지 못했다는 거 아니야.”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저는 정말 마르티안 님을 좋아하고 웁.”
마르티안이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퍽 덮어 말을 막았다. 듣기 지겨운 뻔한 소리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 그녀가 만나야 하는 건 여기에서 그녀의 눈치를 보는 관리자가 아니라, 이 모든 상황을 만들어 낸 휴이 세블로아드였다.
그녀는 관리자를 지나쳐 자신이 늘 머무르던 방으로 향했다.
휴이는 자신의 행동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돈을 쏟아부어 사교계에 소문을 돌게 하고 마르티안이 고른 결혼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그건 일종의 집착이었고 사실 누구도 이해 못 할 행동이었다.
그의 열렬한 구애에 관한 소문이 그토록 빠르게 번진 것도 그 소문이 어떤 면에서는 웃음거리이자 추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원래 높은 사람들의 추문을 즐기는 법이었다.
휴이는 매일 마르티안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구애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쓰는 청혼이 거짓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곁에 있을 정당한 자리가 필요했으니까. 보장된 위치가 필요했다.
필요. 욕구가 아닌 필요, 이건 그의 인생에 처음 맞닥트린 결핍이었다.
그는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그녀의 곁을 청소했다. 감히 다른 존재가 다가올 수 없도록 모든 영향력을 다 드러냈다. 끈질기고 반복적인 청혼은 그가 가진 진심이기도 했다.
마르티안의 이름이 적혀있는 수많은 선물들이 되돌아올 때마다 휴이는 뻔히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실망했다. 서러웠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이 그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휴이는 처음에 아득바득 품었던 마음들이 매일 같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복수에 가까운 감정들이었다. 자신에게도 내어주지 않는 자리라면 누구도 차지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 자리를 감히 차지하려 드는 모든 것들이 괘씸했다.
자신을 서럽게 만드는 마르티안을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뽑아내려면 그 자국이 거대하고 오래가는 상흔으로 남길 바랐다.
그러나 아서 우드와의 결혼이 무산된 이후에도 마르티안의 태도가 바뀌지 않자 그는 무너지는 마음을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청혼은 거절해도 좋으니 선물은 그냥 받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말하고 싶다. 그냥 보고 싶었다.
휴이는 달밤가에 찾아가 관리자를 만났다. 마르티안의 곁에 있는 모든 개를 치워버린다고 해도 그게 그녀가 그를 다시 찾게 만들어주진 않았으니까. 그 두 개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고, 그의 진짜 욕망은 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 있었다.
‘그래도, 다른 개를 찾기는 할 테니까…….’
달밤가는 마르티안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창관이었다. 휴이는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관리자를 불러서 그녀가 늘 머무르던 방을 빌렸고 거기를 개인 집무실처럼 꾸며놓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백작가의 집사장은 그 행동에 대해 몹시 당황스러워하기는 했지만 막거나 하진 않았다.
달밤가에 머무르는 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의 취향과 그의 버릇대로 갖춰진 백작가의 공간들을 생각하면 달밤가의 방은 길바닥 수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휴이는 방의 구조와 모양새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르티안과 처음 만난 곳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마르티안이 방에 들이닥쳤을 때 휴이는 서류검토를 막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그는 벌컥 열린 문에 놀라 움직임을 멈췄고 마르티안은 그대로 들어와 문을 쾅 닫았다. 휴이는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마르티안은 성큼성큼 걸어 그의 앞에 섰다.
“절 기다리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백작님.”
휴이가 입술을 꾹 깨문다. 그녀가 호칭을 백작님이라고 한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화를 내며 뺨을 때려주는 것이 더 기뻤을 것이다. 화풀이 대상이라도 될 수 있었다면. 그는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추스르기 위해 한참을 머뭇댔다.
“……오랜만이야, 도안 자작.”
나온 건 의례적인 인사였다. 그 말에 마르티안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요. 그녀가 그가 한 말을 반복하고는 하, 하고 웃었다.
“하긴, 오랜만이긴 하네요. 백작님이 가신 이후로 많은 일이 생기긴 했으니까요.”
“자작, 나는…….”
“제가 무례하게 끝을 고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제 결혼을 망치려고 하실 줄은 몰랐네요. 마음에도 없는 청혼까지 하시면서요.”
“아니, 마음이 없는 거 아니야. 나는 정말, 진심으로 자작과 결혼하고 싶어서…….”
그 말에 마르티안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휴이는 그녀가 잡아채는 대로 몸을 엉거주춤 구부렸다. 마르티안이 짓씹듯이 말했다.
“진심? 나랑 결혼하고 싶어? 너는 그게 아니라 그저 내 개가 되고 싶은 거잖아. 이대로 맞고 싶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고, 애원하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서 날 기다린 거 아냐? 내가 화가 치민 상태로 들어와서 너를 학대하길 바라면서!”
그녀가 멱살을 쥔 채 그의 몸을 뒤로 밀었다. 엉거주춤 서 있던 몸이 다시 의자 위로 엉덩방아를 찧듯이 주저앉았다. 아픔은 크지 않았지만 주인의 화를 샀다는 것 때문에 몸이 긴장한다. 긴장은 곧 흥분이었다. 학대를 기대하는 몸이 본능처럼 떨렸다.
“흐으, 주이, 흡!”
마르티안은 휴이의 뺨을 내리쳤다. 서서 내리치는 손찌검은 소리가 몹시 컸다. 휴이는 의자에 앉은 채 후려치는 매질을 얌전히 견뎠다. 뺨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고 퉁퉁 부풀어 오르는 감각이 반갑다 못해서 눈물이 났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을 겨우 되찾은 기분이었다.
마르티안은 그가 주인님 소리를 내려 할 때마다 뺨을 후려쳤다. 휴이는 그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주인님이라는 소리를 뱉었다. 피부가 찢어질 것처럼 따갑고 아팠지만 쏟아지는 가학 아래서 짓이겨지는 것들이 좋았다.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든 얻어내고 싶었다.
“흐읍, 저, 정말로, 곁에, 흐으, 곁에 있고 싶어서 청혼, 하윽, 한 거예요.”
그는 마르티안에게 말했다. 그건 한점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녀 옆에 있고 싶었고 그 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마르티안에게 청혼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로 밀려나는 것이 견딜 수 없이 싫었다. 마르티안의 손이 멈췄다. 그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뺨에 올렸다.
“기분 풀리실 때까지 때리세요. 뭐든, 다 좋으니까…….”
마르티안은 그 순간 분노를 넘어선 감정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감정이 대단하고 진실된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 모습은 그녀에게 매달렸던 흔해빠진 개들과 다를 게 없었다.
자극에 반응하고 가학에 흥분하는 수많은 개들. 그 개들과 휴이의 차이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진심으로 그녀의 계획을 망쳐놓았다. 그리고 그것에 분노하는 그녀를 발판삼아 원하는 가학을 얻어낸 것이다.
그녀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집사가 했던 말들, 엘 도안이 해 준 말. 론이 보여주던 태도들. 그녀를 위로하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더 이상 이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 앞의 상대를 무시하고 이 모든 것이 다 가라앉을 때까지 버티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말했다.
“백작님. 우리 결혼하죠.”
휴이의 눈이 확연히 커졌다. 기대와 불안으로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다. 그녀는 그것을 보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결혼이 저에게 나쁠 것이 없네요. 결혼하죠. 우리는 존중하는 아주 좋은 부부가 될 거 같거든요. 개와 주인이 아니라, 동등한 부부.”
그녀는 웃었다. 휴이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녀가 말하는 게 어떤 이야기인지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보며 그녀는 기이한 감정이 발부터 머리끝까지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건 희열 같은 흥분이었다.
제 앞에 있는 개를 영구히 짓밟는, 감각. 그건 분명한 가학의 감각이었다. 이성적이면서도 이성적이지 않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채웠다.
“이런 가학적인 관계는 조금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런 완벽한 부부요.”
꼼짝도 하지 않는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런 상대에게 짓밟힘을 당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르티안은 휴이의 얼굴이 엉망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진심으로, 이 결혼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조건으로만 보면 그녀가 훨씬 얻을 게 많은 결혼이었고 사적으로 보면 이 멍청한 개에게 가장 괴로운 복수를 하는 셈이었으니까.
물론 그녀 역시 대가를 치르긴 해야 했다. 그녀가 원하던 미래를 모두 포기하고 휴이에 대한 복수에 매이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원래 이런 감정이란 이성적이지 않은 법이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개는, 늘 그런 식으로 그녀의 감각을 건드리곤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마르티안은 손을 움직여 휴이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네가 또 청혼을 보내면 우리는 그런 부부 사이가 되는 거야. 다시는 널 휴라고 부를 일은 없을 거고. 너도 나에게 주인님이라고 부를 일이 없는 거지. 후계는 낳아야 하니까 너와 관계는 하겠지만.”
손가락이 천천히 휴이의 입 안과 목구멍을 건드렸다. 그의 목 안이 울컥대며 꿀렁인다. 헐떡대는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러내렸다.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부르려 애썼다. 그의 눈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서 젖어있었다. 마르티안은 웃었다.
“네가 원하는 게 진짜 청혼이었다면 다시 해. 그럼 그 장단에 맞춰줄 테니까.”
그녀는 손가락을 세 개까지 밀어 넣어 그의 목구멍을 거칠게 들쑤셨다. 끕, 꺽. 휴이의 몸이 고통으로 비틀댔다. 마르티안은 그의 다리 사이가 그새 부풀어 오른 것을 보았다.
이 천박한 몸이 그런 결혼생활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단순한 욕망이라면 창녀라도 사지 않을까.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부인과 남편을 두고 애인이나 애첩을 두는 건 흔한 일이었고 창관을 들락거리는 건 더욱 흔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젠, 나도 진심이거든.”
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울었다. 들쑤시는 손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하는 말들이 고통스러웠다.
숨이 막히고 헛구역질이 반복되어 그의 목으로 핏대가 들어섰다. 숨이 막혀서 앞이 흐려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야 마르티안은 손을 빼주었다. 휴이는 그녀의 손이 빠져나가자마자 숨을 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옷자락을 먼저 움켜쥐었다.
“주이, 흐으읍, 화내지 마세요. 흐윽…….”
“화? 나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한 것뿐이야. 결혼을 해도 내가 너를 개로 쓸 일이 없다는 걸. 왜,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청혼하기 아까워? 이런 결과가 나올지 몰랐어?”
그녀가 휴이의 뺨을 툭툭 쳤다. 퉁퉁 부어터진 곳은 아직도 열이 남아있었다. 눈물이 그 위로 흘러내려서 그녀의 손을 더럽혔다. 마르티안은 그의 머리채를 잡고는 너 좋을 대로 되었는데 왜 우냐며 물었다. 그건 조롱이나 다름없는 물음이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최대한 잘 대할 테니까. 이렇게 되고 싶어서 그 난리를 친 거잖아. 내 결혼마저 다 망쳐놓고.”
“결혼한 뒤에도 마, 만날 수 있으면 안 그, 흐윽, 안 그랬는데, 너무 냉정하게 버리, 흐으……흐윽, 버리려고 하셔서…….”
숨과 함께 울음이 들이켜진다. 변명을 들으며 마르티안은 더는 화가 나지 않는 자신이 기이할 정도였다. 울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개의 꼴이 즐거웠다. 그는 단순히 겉으로만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내까지 모두 엉망이 되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손찌검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학대의 감각은 여지없이 이어졌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하고 싶은가 보네.”
휴이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마르티안을 원망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자신을 배제하는 제 주인의 태도가 괴로웠다. 결혼한 귀족이 애인을 두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끝내 자신을 잘라버리려 한 것부터, 이 상황에 이르러서 그의 희망을 온통 짓밟으려는 것까지가 모두 괴롭다.
조금의 애정도, 한점의 자리도, 끝내 내주지 않는 것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원망이나 내비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휴이는 제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마음이 엉망진창이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나 싫어할까.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이 달밤가에 와서 개를 찾느니 자신을 찾아주었으면 하는 마음 정도였는데. 그것이 뒤틀리고 틀어져 여기까지 왔다.
처음부터 그녀가 자신을 달랬다면, 의례적인 약속이라도 해주었다면, 자신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울컥대는 마음들이 변명처럼 쏟아졌다.
마르티안은 책임회피를 하는 개를 보았다. 그의 속내는 짐작한 것만큼이나 지겨웠다.
“맞아. 내 탓이 있긴 하지. 그래서 이렇게 책임을 지고 있잖아. 너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내가 늘 생각해왔던 미래가 어그러졌으니까.”
고통받는 짐승을 위하는 길은 단번에 숨을 끊어주는 것이다. 마르티안은 자신을 물어버린 개에게 그런 관용을 베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너도 무언가 대가를 치르고 책임을 져야지.”
* * *
적나무 병해 조사는 소득 없이 끝났다. 한 해 동안 이어진 전염병은 제국 동부의 숲에서 적나무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건 분명 심각한 문제였지만 적나무를 주 수입으로 기르던 가문들이 아니고서야 크게 다가오지는 않는 소식이었다.
그럼에도 적나무 병해 조사가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건 휴이 세블로아드의 결혼 때문이었다. 공작가의 후계자는 그 조사를 계기로 만나게 된 자작과 사랑에 빠졌다.
제국의 사랑. 그렇게 명명된 관계는 금세 온 제국으로 퍼져나갔다. 누군가는 대단한 설렘을 담아 그렇게 말했고, 누군가는 조롱의 의미로 그렇게 말했지만 어쨌든 그 사랑은 공식적인 결혼으로 결실을 보았다.
결혼식은 공작가의 위세에 걸맞게 성대하게 치러졌다. 황성 내의 궁을 빌려서 이루어진 결혼식엔 각 계층의 고위 귀족들과 주요한 황족들, 타국의 귀족들까지 참여했다.
황제가 직접 참여하여 축사를 더했고 연회는 일주일간 이어졌다.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을 채운 사람들은 대부분 공작가의 인맥이었다.
사람들은 대단한 행운을 타고난 자작을 몹시 궁금해했다. 마르티안 도안 자작. 떠들썩한 구애부터 결혼까지, 소문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이름이 있었다. 이제는 제국 내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안 자작은 사교계에 일절 얼굴을 비추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대부분은 결혼식에서 그녀의 얼굴이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에. 저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 산골 구석에 있을 줄 몰랐네요.”
“세반 백작이 알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았어야 했는데.”
“사교계에 얼굴을 비추지 않아서 신체에 문제라도 있나 했더니 그건 아닌가 봐요.”
“그래도 외모만으로 결혼하는 건 너무 안일한 일인데, 둘 다 작위가 있으니 후계문제는 더 골치 아프겠어요.”
“애를 여럿 나으면 될 일이죠. 없는 쪽이 문제지 많은 거야, 뭐.”
“아이들 외모가 기대되긴 하네요.”
지나친 지위의 격차와 재산의 차이로 인해 수많은 말이 이어졌지만 외적으로만 보았을 때 두 사람이 지나치게 잘 어울린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며 반갑게 떠들었지만 돌아서서 수많은 말들을 이어갔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두 사람은 세반 영지에 머무르며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휴이 세블로아드와 마르티안 도안은 각자의 성을 유지한 채 결혼생활을 이어갔다. 책임질 가문과 영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지를 관리할 의무와 책임이 있었고 동시에 상대의 일을 도와주어야 할 책무도 가졌다. 휴이는 도안 자작가의 일을 돕고 마르티안은 세반 백작가의 일을 돕는 식이었다.
이론적으로는 동등한 책임과 권리가 서로에게 주어졌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도안 영지에 비해 세반은 관리할 것이 넘쳐나는 상업지였으니까. 더 바쁜 쪽으로 축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라서 두 사람은 주로 백작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하지 않고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휴이 세블로아드는 향후 공작 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자작가 저택에 머무르며 그쪽의 일을 돕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백작 부부는 참석이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만 함께 수도로 올라왔다. 그때마다 백작 부부는 예의 바르고 친밀한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그건 사람들의 관심을 떨어트리는 광경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을 때는 둘에 대한 이야기는 한물간 소문이 되었다.
세반 영지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한 관심거리였지만 이제는 그곳이 상업적으로 얼마나 발전했는지, 거기에서 나오는 세수가 얼마큼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세반 백작은 그런 쪽으로 유능해서 백작가의 부가 이전보다 최소 두 배쯤은 늘었을 거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여러분들은 백작가의 저택 가운데서도 세반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님 부부의 개인 저택을 담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곳에서는 본 것도 보지 않은 것이고 들은 것도 들은 것이 아님을 명심하세요. 이곳에서 일하는 여러분들에게는 많은 급여가 보장되지만 규칙을 어길 시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존재합니다. 기본적인 수칙들은 충분히 아실 거라 믿습니다. 특히 해가 진 이후에는 저택의 상층부, 특히 침실 층에는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곳은 백작님과 자작님이 쓰시는 침실이 있기 때문에…….”
제인은 관리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피곤하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떴다.
‘관리장님은 이 이야기가 지치지도 않으신가 봐. 어쩜 저렇게 똑같은 말을 매일 하시지.’
백작 부부의 사택은 여러모로 예민하게 관리되는 곳이었다. 관리장은 매일 저녁이면 관리인들을 모두 불러 기본수칙과 금지사항을 반복해 말했다. 제인은 이 저택에 배정된 지 석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깐깐한 분위기가 낯설었다.
제인은 백작가에 하녀로 들어온 지 이제 막 일 년 반 정도 된 하녀였다. 처음 일 년 동안은 손님용 저택에 배정되어 일했다.
그곳에는 오가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수많은 방을 정리하고 시중을 드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진이 빠졌다. 그래서 여러 수칙과 금지사항이 있어도 그와 달리 일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여러모로 융통성 있게 구는 게 필요했다.
그에 반해 이곳은 세탁실도 깐깐하게 관리하는 곳이었다. 물론 일하는 조건은 가장 좋았다. 버는 돈도 2배 가까이 많았고 일 자체가 많지 않아 여유로웠다. 그 여유를 깐깐한 절차와 태도에 쏟아야 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감수할 만했다.
사실 그녀가 이 사택에 배정받게 된 건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평소 이곳은 자리도 잘 나지 않았고, 자리가 난다고 해도 공작가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배치되었으니까.
‘추천으로 올라온 사람을 백작 부인께서 거절하는 바람에 내가 들어오게 거라고 했었지.’
제인의 입장에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책임지고 길러야 할 어린 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녀는 오늘 오전에 주방에서 받은 쿠키 조각들과 빵을 생각했다. 망친 부스러기들이라고는 해도 그 질은 손님용 저택에서 먹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종이봉투에 담아놓은 간식거리들을 동생들에게 줄 생각을 하자 고꾸라지듯 피곤한 상황에서도 절로 신이 났다.
관리장의 일장 연설이 끝났다. 제인은 주변 사람들과 가볍게 묵례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싸놓은 짐꾸러미를 확인하고 외투를 챙겼을 때였다. 그녀는 거울에 자신을 살펴보다가 목덜미가 비어있음을 깨달았다.
“아, 펜던트.”
안쪽에 부모님의 초상화가 들어있는 펜던트 목걸이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품이자, 어린 동생들과 함께 볼 때마다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소중한 물건이었다.
매일같이 걸고 다니며 힘을 내던 것이었는데 대체 어디에서 빠진 걸까. 그녀는 짐과 외투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방을 나왔다. 이대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으니까. 그녀는 오늘 내내 움직였던 곳을 급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제인은 오늘 저녁부터 나흘간 쉰다. 이쪽 저택으로 발령받아서 일한 이후로 처음 얻은 휴가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녀는 시내에 공용마차 좌석까지 미리 사둔 상태였다.
해가 지기 전에는 저택에서 나가야 야간 공용마차를 탈 수 있었다. 바깥으로는 벌써 해가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다.
“설마, 정말 거기다가 떨어트리고 왔나 봐. 어떡하지.”
본 저택의 제일 상층에 있는 대서재. 평소에는 그녀가 올라갈 일이 없는 곳이었지만, 대청소로 인해 인력이 한 번에 동원되면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대서재 청소와 정리를 담당했다. 짧게나마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였다.
“거긴 정말 올라가기 싫은데.”
저택의 상층부는 백작 부부의 부부침실과 각자의 집무실이 있었고 도서관 수준의 대서재가 있었다. 그 층 전체가 백작부부의 개인 공간이나 다름없어서 관리장은 물론이고 백작가의 집사장마저 신경 쓰는 공간이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올라가는 것조차 큰일 날 일이다. 대청소도 이미 끝났으니 세탁실 담당인 그녀에겐 대서재에 올라갈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인은 자신이 대서제 어디에다가 펜던트를 두었는지 기억해 냈다. 서재 안쪽에 있는 서가 세 번째 칸에 올려두었다. 목에서 덜렁대는 것이 혹시라도 가구나 세공품에 흠집을 낼까 걱정되어 잠시 빼서 올려두고는 일이 끝난 뒤 너무 피곤해서 그걸 잊어버린 것이다.
‘나흘 후에 돌아오면, 분명 없어져 있을 텐데.’
서재에서 놓인 싸구려 펜던트는 바로 쓰레기로 분류되어 버려질 게 분명했다. 누군가에게 이 상황을 말하고 부탁하려고 해도 그녀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단이었다.
꼭대기 층에 드나들 수 있을 만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관리장에게 직접 부탁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제인은 고개를 설레 저었다.
관리장은 매우 깐깐한 사람이라 서재 청소를 하러 들어가서 개인물품을 두고 나왔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게 뻔했다. 펜던트를 찾게 된다고 해도, 관리장이 그녀를 이곳에서 일할 수준이 못 된다고 판단해 다른 저택으로 보내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손님용 저택으로는 돌아가기 싫어.’
제인은 손톱을 질근 물었다. 손님용 저택은 일이 고되기도 고되었지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몹시 힘들었다. 그들 대부분이 아랫사람들의 실수에 예민하고 쉽게 손을 올렸고, 성적인 희롱도 예삿일이었다.
제인은 자신의 치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아무렇지 않게 엉덩이를 움켜쥐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관리장님에게 말하지 말자.’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의 뒷계단으로 향했다. 뒷계단은 저택의 구석구석에는 좁은 계단들을 뜻한다. 주로 하인들이 청소 등을 이유로 위층에 올라가야 할 때 쓰는 계단이었다.
계단은 오늘따라 텅 비어있었다. 대청소가 어제 끝났으니 오늘 밤은 다들 일찍 쉬러 들어간 것이다. 제인은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계단으로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제인은 머뭇대다가 주변을 살피고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운이 따라주었는지 그녀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왔다. 저택 최상층은 불만 켜져 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은 걸 참으며 그녀는 발끝을 들고 숨조차 참은 채 대서재까지 걸었다. 길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다행스럽게도 서재의 묵직한 문은 소음 없이 열리고 닫히도록 만들어져서 그녀는 아무런 소음도 내지 않고 대서재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다행, 후으, 다행인 거겠지?”
닫힌 문 안쪽에서 주저앉아 그녀가 숨을 몰아쉰다. 심장을 손으로 꾹 누르자 벌떡거리는 느낌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진이 온통 빠지는 기분이다. 제인은 고개를 들어 서재 안을 살폈다.
커튼이 곳곳에 쳐있어서 서재는 상당히 어두웠다. 그녀가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돌아다닐 때부터 이미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커튼 밖에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은 아주 붉었다.
‘빨리 찾고 나가야지.’
그녀는 침침한 내부가 눈에 익자마자 반쯤은 기다시피 몸을 움직였다. 가장 안쪽 서고까지 가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가구들을 지나야 했다.
제인은 신중하게 몸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몸에 부딪혀 무언가를 떨어트리거나 망가트리면 정말 큰 일이었다. 이곳에 놓인 세공품이나 가구나 장식품들은 그녀의 인생을 팔아도 갚지 못할 것투성이었다.
“아, 미친……, 왜 눈물이 나.”
펜던트는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서가에 그대로 있었다. 대청소 이후로 아무도 이곳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치마 주머니 깊게 펜던트를 쑤셔 넣었다. 긴장이 조금 풀리자 손이 덜덜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돌아가신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다.
‘정신 차려야지. 빨리, 나가야 해.’
그녀는 눈물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몸을 엎드려서 서재 입구로 항했다. 돌아가는 길은 그래도 오던 길보다는 더 짧게 느껴졌다. 제인은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여기에서 빠져나가 이 꼭대기 층만 벗어나면 된다. 그 뒤에 걸리는 건 그래도 변명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어차피, 아래층까지는 아무도 없긴 할 테니까…….’
해가 지면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었다. 관리장과 집사장이 얼마나 예민하게 그걸 주지시키는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노을이 생기기 시작할 때부터 누구도 저택 맨 위층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가 누군가를 만나거나 들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인은 불안하게 떨리는 숨을 꾹꾹 눌러 참으며 서재의 입구까지 기었다. 입은 옷의 목덜미와 등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그녀는 묵직한 문에 손을 대고는 천천히 안쪽으로 잡아당겼다. 소리 없이 당겨지는 문으로 인해 밖에서 빛이 얇게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바깥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그 틈새로 눈을 대었다.
끕, 그녀는 소리를 간신히 삼켰지만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진 못했다. 놀란 몸이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차라리 온몸이 굳어 다행이긴 했다. 문을 놓치거나 힘을 주어 닫아버리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그녀는 숨을 멈추고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았다. 이 저택의 주인인 백작이 복도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흐으, 마르티안.”
흐느끼는 소리가 울린다. 제인은 자신이 보는 게 무슨 광경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백작을 이렇게 가까이, 오래 본 적이 없었다. 백작 부부가 저택을 드나들 때는 허리를 굽히고 있느라 얼굴을 볼 수 없었으니까. 멀리서 그들이 나타났을 때 후다닥 허리를 숙이며 언뜻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작 부부의 외모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뜻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화려하고 뚜렷하며 섬세한 이목구비를 가졌으니까.
태생이 귀족임을 달고 태어나는 것인 저런 걸까, 제인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자신이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값비싼 드레스를 입어도 그들처럼은 빛날 수 없을 거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백작의 모습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려하고 섬세한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품위가 느껴지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복도에 무릎을 꿇은 채 넋을 잃은 표정으로 맞은편을 보고 있었다.
제인은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턱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는 반짝대는 것들이 눈물이었다. 빛에 따라 음영 진 얼굴은 절망으로 젖어 있었다.
‘어디를, 보시는 거지…….’
그녀는 백작이 바라보는 위치에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다가 그곳이 백작 부인의 집무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곳은 집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있는 곳이었다. 서재와 책상으로 꾸며진 개인 서재부터 침실과 응접실, 그리고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으니까. 사실상 그곳은 백작 부인의 개인 공간이었다.
지금 백작은 부인의 개인실을 보며 절망에 빠진 사람처럼 울고 있는 것이다. 제인은 그의 절망 어린 얼굴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건 낮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모양이었으니까.
그의 우는 얼굴은 절망에 익숙해지다 못해 체념한 것처럼 보였다. 제인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벌벌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제어하려 노력했다. 더는 보지 말고 문을 닫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움직여서 큰 기색 없이 닫는 것 자체가, 지금 자신의 상태로는, 가능할 거 같지 않았다.
‘누, 눈이라도 감고 일단 진정하고 나서…….’
그녀는 눈을 꽉 감고 고개를 돌렸다. 시야가 닫히자 청각이 예민하게 올라왔다. 그녀는 백작이 우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소리들이 사실은 더 멀리서 울리는 다른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단순히 우는 소리가 아니었다.
철퍽거리는 소리, 숨을 참는 소리, 흐느낌과 같은 신음. 제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그것들은 정사의 소리였다. 이곳의 모든 공간들이 방음이 잘 되어있다는 걸 생각하면, 어딘가의 방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뜻했다.
제인은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백작 부인의 개인실. 진정되려던 심장이 곧 터질 것처럼 움직인다.
“해가 진 이후에는 저택의 상층부, 특히 침실 층에는 올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곳은 백작님과 자작님이 쓰시는 침실이 있기 때문에…….”
관리장이 매일 하던 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윙 하고 휘돌았다. 그 예민한 경고가 무엇을 가리기 위해 나온 말인지 제인은 이 순간 깨달았다. 지금 백작이 보고 있는 것은 아마도, 아니 분명, 부인의 정사일 것이다.
‘보면, 보면 안 돼.’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제어해서 서재 문을 닫았다. 새어 들어오던 빛이 소리 없이 사라졌다. 제인은 엉금엉금 기어서 소파 밑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곱씹었다. 아니 곱씹고 싶지 않았는데 보고 깨달은 것이 너무 충격적이라 계속 떠올랐다. 이곳 꼭대기 층은 백작 부부가 나눠 쓰는 곳이었다. 부부 침실은 가장 안쪽에 크게 있었지만 각자의 집무실은 복도를 두고 마주 보는 위치에 있었다.
집무실의 문은 요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똑같은 디자인으로 되어있었다. 그건 이성을 잃을 만큼 사랑한 둘의 결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어떤 모양이었다.
제인은 자신이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음을 알았다. 이걸 본 걸 들켰다가는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쫓겨나는 것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귀족들은 그들의 체면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 이에 위해를 가하는 평민들의 삶과 목숨은 가볍게 여기고 쉽게 거두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무런 뒷배경도 없는 평민이야 더더욱 가볍고 쉬운 존재일 것이다. 그녀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손에 힘을 주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엄마, 아빠 어떡해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갖은 고생을 해가면서 버텨온 날들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제인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어떻게든 몰래 나가야 했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아니 죽고 싶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며 얻을 수 있는, 제 동생들에게 줄 수 있는 것들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물어뜯어 씹고는 몸을 돌려 소파 아래에서 나왔다.
서재 문은 아까와 다름없이 빈틈없이 밀착된 상태였다. 거기에 손을 대자 손끝이 다시 덜덜 떨린다. 그녀는 문의 고리를 잡아 아주 느리게 잡아당겼다. 얇은 빛줄기가 어둑한 바닥을 다시 갈랐다. 소리는 아까와 비슷했다. 흐느끼는 소리, 우는 소리. 신음. 그리고 이전보다 더해진 것이 있다면 무언가를 휘두르고 맞는 소리 정도였다.
제인은 그 소리를 인지했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자신의 상황과 그로 인한 긴장만으로도 주저앉아 쓰러지고 싶었으니까. 그녀는 스스로의 긴장을 견디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며 틈새로 밖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백작이 무릎을 꿇은 채 바지 앞섶을 열고 자위를 하고 있었다. 반쯤 구부러진 등이 흥분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었다. 그의 시선은 아까와 똑같이 그저 앞을 보고 있었다. 발기한 것을 흔드는 손이 이질적일 정도였다.
“주인님. 흐으, 흐읍! 주인님.”
순간 그의 허리가 움찔 튄다. 제인은 눈을 꽉 감았다. 이건 정말 보지 말아야 할 어떤 장면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너무 놀라고 긴장한 것인지 눈조차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백작님이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는 그걸 생각하며 벌벌 떨었다. 백작은 서재의 문이 미묘하게 열려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것이다. 무섭고 두려워서 눈물이 찔끔찔끔 났을 때였다.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복도로 백작 부인이 나왔다. 그녀는 잔뜩 흐트러진 침의를 대충 걸친 상태였다. 방금 전에 났던 소리가 무엇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처럼. 백작은 그녀를 올려보며 덜덜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그건 자신의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라고 하기에는 기이한 소리였지만, 간절하고 절박해 보이는 모양새가 그 기이함을 반감시켰다.
“왜 이러고 있어요, 복도 바닥에서.”
백작 부인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젖은 뺨을 쓰다듬는 손은 단조롭고 여상했다. 마치 이런 상황이 더없이 익숙하다는 것처럼. 백작은 무릎을 움직여 그녀에게 더 다가갔다. 내준 손이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곳에 자신의 얼굴을 기댔다.
마르티안은 가볍게 혀를 찼다. 결혼한 이후 그녀는 결혼 전에 했던 말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살고 있었다. 휴이와 부부로서의 성실하게 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휴이를 개로 대하진 않았다. 이곳에서 그녀의 침대에 올라가는 개는, 그녀의 애첩인 론뿐이었다.
휴이가 마르티안의 옷자락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흐으, 흐, 주인, 흐읏, 님. 주인님. 흐으……, 잘못했어요. 제발…….”
마르티안은 용서를 빌며 애원하는 그를 내려 보았다. 2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개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한 채로 점점 더 고통스러워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마음이 식을 수 있어도, 바로 옆에 두고서는 포기하지 못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었으니까.
그녀는 이미 이런 사이가 될 것이라고 휴이에게 경고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청혼을 철회하지 않았다. 영영 그녀를 놓치느니 어떻게든 옆에 두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멍청한 선택은 괴로운 대가를 포함하기 마련이었다. 대가. 그녀는 그 단어를 곱씹으며 휴이를 내려 보았다.
직접 학대당하지 못한 채 안달복달을 하며 부인이 애첩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자위나 하는 것. 그 모두가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르티안이 그를 백작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다. 휴이가 몇 번이고 한 애원을 다시 꺼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매일 이렇게 못 견디게, 흐으, 흐윽, 하지 마세요. 주인님. 제발…….”
“못 견디게? 그건 좀 억울한 말이네요. 당신이 론과 하는 걸 하도 궁금해하기에 그냥 문을 열어준 것뿐인데…….”
그녀는 사실관계를 지적하며 답했다. 처음부터 론과 관계할 때 문을 열어놓았던 건 아니었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건 휴이가 여러모로 그녀를 짜증 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론과의 관계를 못 견뎌하며 자꾸 난리를 쳐댔고 방해하려는 의도로 문을 두드리고, 사람을 보내고, 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마르티안은 아예 밤마다 문을 열어놓고 보란 듯이 론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건 휴이가 잃어버린 개의 자리였다. 언젠가는 얻어내서 있었던 자리, 하지만 이제는 영영 잃어버린 자리였다.
그때마다 휴이는 복도에 주저앉아 이런 식으로 울었다.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화를 풀어 달라고. 그래서 제발 개로 있게 해달라고. 그녀는 몸을 굽혀 무릎을 꿇고 있는 휴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당신이 원하던 대로, 우리는 부부가 되었고 서로 평생을 존중하며 살게 되었잖아요. 근데 왜 이렇게 굴어요.”
그녀는 휴이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절망하는 얼굴에는 실낱같은 희망이 퍼져나갔다. 멍청하기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만졌다.
마르티안은 이 상황이 지루하면서도 또 지루하지 않았다. 낮의 삶을 대가로 그녀는 이 밤을 얻었다. 그녀가 원하던 대로 휴이는 고통스럽게 울며 애원하고 바닥을 기며 절망하곤 했으니까.
백작님. 그렇게 부를 때마다 개는 절망에 빠졌고 이런 우습지 않은 손길에 또 희망을 품었다. 2년.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시기 동안 그녀는 휴이를 짓이기는 데 제 삶을 지불했다.
‘서로가, 대가를 치르는 거지.’
휴이가 밤새 울며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그녀 역시 잃어야 했던 것들이 많았다. 자작가에서 지내지 못하고 이곳에서 지내는 것부터가 그랬다. 마르티안이 이곳으로 들어오며 데려온 인력은 론이 전부였으니까.
자작가의 사람들은 도안 영지에서 머물면서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고, 그녀에게 중요한 서류를 보내면서, 빈 영지를 꾸려나가는 중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사랑했던 땅에서 꿈꾸던 모든 미래를 잃어버렸다.
그녀는 휴이에게 말했다.
“정 짓밟히고 싶으면 그럴 용도의 애첩을 들여요. 나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애첩이 있는 것 정도야 별거 아닌 일이고.”
“흐으, 안 돼요. 그렇게 못 하겠…….”
“날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하고 다녔잖아요. 그냥 다시 옛날처럼 살라니까 왜 이렇게 구는 건지.”
그녀가 한심하다는 것처럼 혀를 찼다. 휴이는 다시 눈물을 쏟아냈다. 그가 원하는 짓밟힘은 사창가를 돌며 얻었던 쾌감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주인으로 여기면서 그녀가 주는 가학들을 견뎌내고 싶었다.
마음과 몸이 온통 그녀에게 잠기는 관계만이 그를 진심으로 흥분하게 했다. 그것만이 좋았고 그것만 원해서 이제는 다른 누구도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눈에 지루함이 곁드는 것을 느꼈다. 마르티안은 가차 없는 주인이었고 못난 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마르티안의 시선을 더 오래 받고 싶어서 자신의 성기를 흔들어 급하게 사정했다. 흰 백탁액이 그의 손과 복도 바닥을 더럽혔다.
“주인님, 흐읍, 이거 먹을 동안만 봐 주세요. 맛있게 먹겠…….”
그는 제 손을 허겁지겁 핥았다. 비릿하고 역한 것에 혀를 문대자 끔찍하고 토할 것만 같은 맛이 났다. 휴이는 그것을 삼키고는 억지로 웃었다. 그러나 마르티안은 가볍게 혀를 차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가지, 가지 마세요. 주인……, 흐으…….”
휴이는 성급하게 윗옷을 끌러냈다. 아니 거의 뜯어냈다. 벌어진 옷 사이로 스스로 만지고 유축기로 빨아들여 검붉게 멍든 것들이 유룬이 드러났다.
그녀의 아래에서 기어 다닐 때와 다름없이 부풀어서 두툼한 유두가 난잡하게 보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유두를 움켜쥐고 비틀고 잡아당겼다. 고통과 자극으로 인해 허리가 들썩인다.
마르티안이 내려다봐주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일었다. 그건 비참한 흥분이었다.
“주인님, 흐으, 제발, 저도 써주세요. 흐윽, 용서해 주세요. 여기에 고리를 달아서 찢어질 때까지 끌고 다녀서…….”
그가 스스로의 유두를 가학적으로 잡아당겼다. 늘어난 곳이 시뻘겋게 변한다. 뚫어주세요. 울며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지없이 탄탄하고 잘 짜인 몸이었고, 울며 애원하는 꼴은 그녀의 취향에 맞는 시각적 자극이었다.
마르티안은 생리적인 흥분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냥 할 때는 영 지지부진하게 굴더니 젖꼭지 잡아 뜯으면서 세우고.”
그녀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휴이는 끅끅 울면서도 그 말에 완전히 발기했다. 수치를 느낀 몸이 반응한 것이다. 그 천박한 몸은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이토록 빠르게 반응하진 않았다.
그건 휴이가 어떻게든 관계를 오래 끌고 싶어서 흥분을 참기 때문이었지만 어땠든 가학과 수치가 더해지면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반응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마르티안은 이제 그의 몸에 그런 식으로 손을 댈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애를 들이거나 아니면 창관을 가라니까요.”
휴이는 그대로 엎드려 울음을 쏟아냈다. 안 돼. 흐으, 싫어요. 주인님. 우는 소리 사이에 그런 말들이 마구 튀어나왔다.
귀족들이 애첩을 두거나 창관에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휴이처럼 기를 쓰고 안 가려고 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로. 마르티안은 엎드려 우는 휴이를 보며 그의 울음소리가 아래층까지는 들리겠단 생각을 했다.
‘집사장이 탐탁지 않아 하겠네.’
백작이 이런 꼴로 복도를 오간다는 걸 안 이후로, 백작가의 집사장은 관리장을 시켜 이른 저녁부터 이곳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공작가에서 차출됐다는 관리인들은 철저할 정도로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였고 그랬기 때문에 감히 백작 부부의 사생활에는 간섭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 대신 통제할 수 있는 아랫사람들을 조이고 제어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유지했다. 이곳에 어떤 흠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는 것이다.
마르티안은 그들이 관리하는 ‘흠’에 자신이 끼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뭐, 그리 신경 쓸 바는 아니지.’
마르티안은 적당하게 이곳의 분위기를 무시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실리를 찾으며 살고 있었다. 그건 적당하고 조용히 지내는 과정이었다. 물론 백작가 사람들이 원하는 ‘조용히 지내는 것’이란 그녀가 휴이의 애원을 받아주는 거겠지만.
“가지, 마세요. 흐윽, 주인님. 주인님.”
그녀가 몸을 돌리자 휴이가 크게 울며 매달렸다. 그건 너무 흔하게 반복되어서 이제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 울음이었다. 마르티안이 귀찮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녀는 대서재의 문이 미묘하게 열려 있다가 스륵 닫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있나 본데. 마르티안은 호기심을 가지고 잠시 그쪽을 보았다. 어차피 보이는 걸 막고 싶은 건 그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곳에 누가 숨어들었다고 해서 예민하게 반응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기서 보고 있는 게 누구인지 궁금하긴 했다.
엄격하게 통제된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그녀는 대서재에 숨어든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다.
* * *
제인은 휴가 내내 멍했다. 오죽하면 동생들이 어디 아픈 게 아니냐며 걱정을 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동생들을 데리고 다니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샀다. 주방에서 준 쿠키와 빵을 뒤늦게 나눠 먹으며 그럴듯한 티 타임도 가졌지만 맛이 어떤지는 거의 느끼질 못했다.
‘귀족들 사정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해 못 할 거라고 했으니까…….’
그녀는 같이 일하던 친구가 늘 말하던 말을 떠올렸다. 이해 못 할 일, 아니 이해해서 좋을 게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생각 때문에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도 몰랐다.
제인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도 어린 동생들이 지내는 집에는 신경 써서 보수할 것들이 많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 아무런 문제 없이 일주일이 지나자 제인은 점차 상황을 잊었다. 물론 백작 부부를 보게 되면 불현듯 그 장면이 떠올라 움찔 굳게 되긴 했지만 어차피 허리를 숙이고 있느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표정이 숨겨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쉬지 않고 일했다. 오죽했으면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러다가 쓰러지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제인, 백작 부인께서 부르신다.”
열흘이 되던 날, 제인은 관리장에게 불려가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 백작 부인이 차를 마시는 동안 잠깐 말동무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말동무라니. 귀족 중에 평민들의 삶이 궁금해서 말동무를 들이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제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백작 부인께서 원래 말동무를 필요로 하셨나요?”
“아니, 아마도 네가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 관심을 가진 게 아닌가 싶은데…….”
“외부요?”
외부라니? 설마 다른 저택을 관리했다 넘어왔다는 이유로 그렇게 말하는 건가 싶어 그녀가 되물었다. 관리장이 한순간에 표정을 바꾸고는 큼하고 헛기침을 했다.
“다른 뜻은 아니고……. 아무튼, 하던 일은 멈추고 올라가 보도록 해. 백작 부인께서 다른 지시를 내리시면 내게도 알리고.”
제인은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 백작 부인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자신을 갑자기 부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날 밤의 일. 그녀는 꼭대기 층 복도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무조건 모르는 척을 해야 해.’
그녀는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는 백작 부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마르티안은 론에게 다과를 내오게 하고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공간이 섬세하게 나뉜 집무실에는 응접실도 있었고 간단하게 다과를 준비할 수 있는 간이 주방도 딸려 있었다.
론은 그곳에서 다과를 준비했다. 디저트는 아침마다 주방에서 새로 올렸고, 차는 직접 끓여서 내왔다. 이곳에서 차를 내는 걸 배운 덕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론에게 이것저것 다 배우라고 하고 싶은데…….’
마르티안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며 속으로 중얼댔다. 이곳에는 그녀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머리를 만지는 사람, 피부를 관리하는 사람, 욕실 시중을 드는 사람, 옷을 관리하고 입혀주는 사람 등등. 세분화된 담당자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어간다.
그녀는 자신의 공간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싫었지만 지금 드나드는 사람이 최소한의 인원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더 이상 말하는 걸 포기했다.
‘빌어먹을 품위 유지.’
그녀는 매일매일 이어지는 관리들이 귀찮고 지겨웠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은 주에 한 번이나 사흘에 한 번 정도 조절하긴 했지만, 옷을 입고도 드러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매일 관리를 받아야 했다.
손과 발, 얼굴, 목, 이런 곳들은 매일 마사지를 받거나 팩을 해야 했고 입고 꾸미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씻는 것부터 머리 모양을 정하는 것, 옷과 몸에 걸치는 세공품들을 고르는 것 등등. 마르티안은 아침마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대기하는 상황이 아직까지도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똑같은 과정을 휴이 역시 매일 겪고 있었으니까. 이곳에서 품위유지는 일종의 의무였다.
‘뭐 어쨌든 돈이 많다는 소리니까. 품위유지 명목으로 내 앞으로 나오는 비용도 어마어마하고.’
그녀가 가능한 좋은 점들을 생각하고 있었을 때 론이 다과를 들고 나왔다.
“오늘 올라온 디저트가 많이 달아서 씁쓸한 맛이 강한 차로 준비했습니다.”
론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디저트는 치즈가 덩어리로 녹아 들어간 초코 쿠키였다. 이전에도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는 디저트라 마르티안은 큰 관심 없이 찻잔을 들었다.
짙은 색을 가진 차에서 묵직한 향이 났다. 확실히 평소 마시던 것보다는 씁쓸했지만 묵직한 향과 함께 살짝 도는 신맛이 디저트와 잘 어울렸다.
“맛이 좋네.”
마르티안은 가볍게 감탄했다. 론의 차 끓이는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이제는 자작가의 주방에서 끓인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론이 한껏 기쁜 얼굴을 대답했다.
“론 이리 와봐.”
그 말에 론이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다과를 담당하는 개인 하인으로 이곳에 있었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지 개가 되었다. 얌전한 모양새는 자작가 때와 다름없었지만 그의 외형은 그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는 이제 자작가의 애첩이 아니라 백작 부인이 측근처럼 두는 하인이었으니까. 론은 이곳에 있으면서 상당한 교육을 받았고 역시나 품위 유지 명목으로 많은 관리를 받았다.
돈과 시간을 들여 가꾸자 론은 닦아놓은 원석처럼 빛났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격식 있는 옷을 입자 예쁜 골격이 돋보였고, 피부가 매끈하게 관리되고 나니 어두운 피부색보다는 예쁘장한 이목구비가 더 잘 눈에 띄었다. 부드럽게 유지되는 검은 머리카락은 만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마르티안은 디저트로 나온 쿠키를 손에 들어 끝부분을 부러트렸다. 바닥으로 툭, 쿠키 조각이 떨어졌다. 론이 엎드려 바닥에 떨어진 것을 먹었다. 툭, 툭, 연이어 조각들이 떨어진다. 식감이 부드럽게 만들어서인지 쿠키를 부러트릴 때마다 부스러기가 많이 떨어졌다. 론은 얌전하게 그런 것들을 핥았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옷 때문에 개처럼 움직이는 모양새가 더 천박해 보인다. 론은 그녀가 더 이상 쿠키를 떨어트려 주지 않자 그녀의 앞에 다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맛있었어?”
“네, 감사합니다. 주인님.”
론은 얌전히 답했다. 주방에서 차를 고를 때 참고하라는 뜻으로 맛보기용 디저트를 한두 개를 올려주긴 했지만, 백작 부부의 몫으로 만든 것보다는 당연히 질이 떨어졌다.
이 저택에서는 백작 부부의 몫으로 만들어진 건 절대 아랫사람이 손댈 수 없었다. 디저트가 남거나 음식이 남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백작 부부가 직접 내주는 게 아닌 이상 그것들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고 전부 버려졌다.
“차도 줄까?”
그녀가 찻잔을 가볍게 들며 물었다.
“주인님이 원하시면…….”
“너는 원하지 않고?”
그녀가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 론이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게, 주인님을 위해 내온 차라서…….”
“그건 아까 쿠키도 마찬가지잖아? 디저트들도 원래는 내 몫으로 따로 만든 거니까.”
“…….”
“론, 말이 앞뒤가 안 맞는데? 제대로 말해. 괜히 감추려 들지 말고.”
그녀가 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부드러운 손길에 론이 겨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주인님을 위해 내온 거라서, 바닥으로 쏟아지는 게 싫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싫다는 식의 부정적인 단어는 아예 내뱉을 줄도 몰랐기 때문에 그는 그런 소리를 할 때마다 늘 긴장했다. 마르티안은 목석같은 애첩이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다물 줄만 알던 입이 자신의 감정을 내뱉을 줄 알게 되는 것이 그리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물었다.
“쿠키를 만든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네, 주인님.”
풀죽은 목소리였다. 마르티안은 론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어 찻잔에 담긴 것을 조금 덜어냈다. 손바닥에 찻물이 고였다. 론이 놀라 수건을 찾으러 몸을 일으켰다.
“론. 다시, 앉아.”
“하지만 손에…….”
“멍청하게 굴지 말고. 바닥에 쏟아지는 거 싫다고 해서, 이렇게 해주는 거잖아.”
그 말에 론이 머뭇대며 다시 꿇어앉았다. 그녀의 손에 고여있는 찻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론은 그 손에 입술을 대고는 혀를 내밀어 핥았다. 방금 전 차를 끓이며 맛본 것과 다를 바 없는 맛이었지만 그때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아니, 좋은 건 마음이다. 자신이 말한 속상하단 소리를 듣고,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써줬다는 게 좋았다.
할짝거리는 동안 그녀의 손에 있던 것이 조금 바닥으로 흘렀다. 론은 바닥으로 떨어진 것까지 핥고 난 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마르티안이 가볍게 손짓을 한다. 닦을 것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론은 따듯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와 그녀의 손을 닦았다.
론은 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은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그녀를 올려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뭐가? 개처럼 먹인 게?”
“아까, 손으로 받쳐주셔서요.”
그 말에 마르티안이 픽 웃었다. 개처럼 음식을 먹였는데, 고작 손으로 받쳐준 것 가지고 설렌 아이처럼 구는 것이 우습고 귀여웠다. 그녀가 손으로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다음에는 못 해줘. 손이 엉망이 되잖아.”
물수건으로 닦아내면 그만이긴 했지만 그걸 들고 오는 동안 기다리는 게 찝찝하고 귀찮다. 마르티안은 론에게 주었던 배려를 금세 거둬갔지만 론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수긍했다. 네, 주인님. 그가 얌전한 얼굴로 다시 답했다.
대놓고 침대에서 부리는 애교 같은 건 능숙하지 않았지만, 론의 장점은 이런 것들이었다. 별거 아닌 작은 거를 붙잡고 기뻐할 줄 아는 것. 마르티안은 예쁘게 꾸며진 개를 만족스럽게 보았다.
“네가 만든 차를 맛보니까 어때? 맛있었어?”
“아, 그게, 그냥 괜찮았, 습니다.”
론이 조금 주저하듯 답했다. 스스로 만든 것에 좋은 평을 하는 게 아직은 부끄러웠다. 마르티안은 그의 답을 듣고는 의외라는 것처럼 말했다.
“네 입이 나보다 고급인가 보네. 나는 맛있고 좋았는데 너는 그냥 괜찮았다는 걸 보니까.”
“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러니까, 제 말뜻은 그게 아니라…….”
론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애첩 외의 자리가 생긴 개는, 그쪽으로 받는 칭찬에는 몹시 어색해했다. 마르티안은 론의 그런 새로운 모습들이 좋았다. 백작가로 오게 되어서 잘된 것 중에는, 론이 쓸 만한 일을 배우게 되었다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원래 맛을 섬세하게 느낄 줄 알아야 잘 만드는 법이야. 입맛이 섬세하고 고급이면 다행인 거지. 여태 네 정액과 내 애액만 실컷 먹여서 혀가 둔해졌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론의 얼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붉었다. 문을 다 열어놓고 하는 관계에도 익숙해진 주제에 이제 와 이런 소리에 수치를 느끼는 것도, 그러면서도 또 꼬박꼬박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모두 다 예쁜 모습들뿐이었다. 적극적으로 변한 거 같다가도 순간순간 이렇게 구는 게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마르티안은 론의 뺨을 가볍게 쓸었다.
“내일부터 개 밥그릇이라도 하나 둬. 바닥이 너무 더러워지는 거 같으니까.”
그녀는 웃음기를 담아 말했지만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다. 론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가 마르티안 곁에서 하는 일에는 그녀가 원하는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들어있었으니까. 물론 당장 내일까지 이곳의 분위기에 걸맞은 개 밥그릇을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은 없었다.
백작 부부가 쓰는 곳에 놓이는 것들은 대부분 주문 제작으로 만들어졌다. 너무 과하게 만들어져 전체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것만 따로 놓아도 백작가의 품위를 알 수 있는 물품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게 개 밥그릇이든 아니면 화려한 장식품이든 마찬가지였다.
마르티안 역시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내일부터라는 말에는 그를 혼내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론은 마르티안의 무릎에 뺨을 댔다. 밥그릇이니 굶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얌전히 있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남은 차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