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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비록 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래도 손님이 떠날 땐 거한 식사를 대접하는 게 일반적인 예의였다. 도안 자작가에서는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저녁 만찬을 준비했다.
물론 말만 만찬이었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다. 식재료에 큰돈을 쓸 수는 없는 상황이라 평소 내놓은 음식 중에 조사단이 더 좋아했던 것 위주로 가짓수를 몇 개 더 늘리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한나가 솜씨가 좋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그녀는 조사단이 그 음식들을 싫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좀 더 나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조사단에는 그녀의 동생인 엘 도안이 있었고, 조사단원들 모두가 동생의 동료들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게다가 그중에는 앞으로 그녀와 결혼할 상대도 있었다.
‘그래, 뭐. 결혼할 걸 생각하면 확실히 아끼긴 해야 하니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명단을 확인하다가 그 안에서 휴이의 이름을 발견했다. 휴이 세블로아드.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풀네임이었다. 마르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끝내자고 통보한 후 마르티안은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고 그쪽에서 요청하는 만남도 전부 거절했다. 물론 휴이는 집착하는 개들이 그러하듯 엉망으로 굴었다. 응접실에서 내내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고, 언질도 없이 서재로 찾아와 벌거벗기도 했다.
그건 한때, 마르티안이 만족스럽게 여겼던 개의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마르티안은 철저하게 그를 무시했다.
“백작님이 이렇게 하는 게 마음 정리하기 좋다면 마음대로 하세요. 이 관계는 조사 일정이 끝나는 순간 끝이라는 건 기억하시구요.”
그녀는 지겨운 줄다리기를 할 생각으로 휴이를 무시했다. 어쨌든 조사가 끝나면 그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야 했으니까. 마르티안은 제 앞에서 우는 휴이가 지겹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을 생각하며 냉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휴이는 더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인의 영지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작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굳이 왜 계속 여기에 있는 건지…….’
마르티안은 한숨을 뱉었다. 휴이는 아직도 자작가의 저택에 있었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백작가에서 보내는 서류를 처리하느라 바쁘다고 했다. 대체, 왜 버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있느니 본인의 영지로 돌아가는 게 편한 상황이었으니까. 마르티안과 그의 사이에는 더는 남아있을 것도 없었다.
‘뭐 어떡하겠어.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고.’
휴이는 단순히 그녀의 파트너로 저택에 머물렀던 게 아니었으니까. 명백한 사유가 있어서 자작가에 머무르는 정식 손님이다. 함부로 내쫓을 수는 없었다.
마르티안은 일부러 침실과 서재만을 오가며 일했고 그래서 더더욱 휴이와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이번 마무리 만찬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조사 기간이 끝날 때까지 그를 보지 않고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르티안은 만찬 참여 목록에 적혀있는 아서의 이름을 보았다. 아서 우드. 휴이 세블로아드와 아서 우드가 함께하는 저녁이라니 여러모로 한숨이 나왔다.
‘어차피 백작과는 관계가 끝났으니 되었어. 공적인 자리기도 하고 거기서까지 난리를 치진 않을 테니까.’
마르티안은 휴이와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급이 맞지 않는 결혼은 여러모로 어려운 법이었고, 각자의 가문을 책임지며 다른 가문의 배우자 역할까지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특히 휴이는 백작이자 공작가의 후계자였다. 그의 배우자는 백작 가문을 내부관리를 담당하고 향후 공작가의 내부 재정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자작으로서 하는 일보다 휴이의 배우자로서 해야 하는 업무량이 훨씬 많아질 게 뻔했다. 그건 결코 원하지 않는 우선순위의 변화였다. 그녀는 결혼 후의 삶이 온전히 자작가에서 이뤄지길 바랐으니까.
‘아서 우드는 일은 확실히 하니까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겠지. 아버지처럼 뜨개질 같은 건 못할 거 같지만.’
그녀는 잠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미남이었다. 한때 기사준비도 했었던 그는 사실 외향과 어울리지 않은 취미를 여럿 가지고 있었다.
레이스를 뜬다거나 바느질을 해서 인형을 만든다거나 하는 작고 오밀조밀한 일들이었다. 선대 자작이었던 마르티안의 어머니는 커다란 손으로 만들어 내는 남편의 결과물을 상당히 좋아하고 귀여워했다.
덕분에 마르티안은 열 살이 넘어서까지 화려한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옷들을 주로 입었다. 화려한 옷은 움직임이 번잡스럽고 불편했지만, 마르티안은 아버지가 들인 공을 생각해서 상당히 오랫동안 그런 것들을 참고 입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좋은 추억이었다. 바람에 펄럭대는 레이스 달린 드레스를 입고 가족들 다 같이 가까운 곳으로 놀러 가거나 산책을 했던 것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마음에 남아있었다.
마르티안은 자신이 만들게 될 새로운 가정이 그러길 바랐다. 소소한 일상을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가족관계. 그 일상에 어울리는 건 휴이 세블로아드가 아니라 아서 우드였다.
자작가의 식당은 조사단이 처음 온 날과 같이 꾸며졌다. 느긋한 불빛으로 채워진 테이블은 그때처럼 분위기가 있었다. 마르티안은 오랜만에 옷을 차려입고는 조사단원을 맞이했다.
조사단원들의 얼굴은 피곤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지만 그래도 다들 웃는 낯이긴 했다. 어쨌든 보고서가 어느 정도는 마무리된 상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만찬은 끝을 상징하는 만찬이었다. 결과가 실패든 성공이든 사람이 너무 괴롭다 보면 그냥 끝나간다는 것이 반가운 법이었다.
조사단원이 거의 다 자리에 앉았을 즈음 교수와 휴이 세블로아드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마르티안은 휴이 세블로아드도 이 조사의 평가자 중 하나임을 기억해냈다.
도안 자작가는 조사 대상지였기 때문에 가장 가깝게 조사과정을 보고 평가하는 1차 평가자였지만 그는 이 조사의 지역 담당자로서 조사에 대한 책임을 일부 지고 있었다.
이내 교수가 고개를 돌려 마르티안에게 인사를 했다. 교수의 등장으로 인해 조사단원들 분위기가 굳어지는 게 느껴져서 그녀는 일부러 웃었다. 어쨌든 초대한 사람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데 손님이 그걸 망치는 건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이내 교수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휴이까지 자리에 앉자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교수는 채워지는 음식들을 보고는 확연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오. 제가 한 번 더 먹어보고 싶었던 것들만 골라서 나와 있군요? 이 오리구이는 꼭 다시 먹어보고 싶었는데……. 이곳의 음식은 수도에 돌아가도 오래 잊지 못할 거 같습니다, 자작님.”
그의 표정이 풀리자 자연스럽게 나머지 사람들도 표정을 풀었다. 상석에 앉은 사람이 좋아하니 눈치를 보던 분위기도 점점 누그러진다. 집사가 하인들을 시켜 술을 따르자 교수가 가볍게 건배를 청했다. 무탈한 끝을 위해 건배. 건배사는 약간 우울했지만 교수의 음식 칭찬이 튀어나오면서 분위기는 좀 더 밝아졌다.
“고기가 간이 완벽합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게 식감도 완벽하구요.”
교수는 술을 훌렁 마시며 오리고기를 연방 입에 넣었다. 마르티안은 그 칭찬에 웃음으로 대응하며 교수에게 음식을 더 권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저쪽에 앉아있는 엘 도안과 아서 우드를 살폈다.
둘은 비슷한 위치에 앉아서 속닥대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엘 도안이 좋아하는 샌드위치 튀김이 놓여 있었다. 아서 우드가 뭔가 장난을 친 것인지 엘 도안이 그에게 주먹을 소리 없이 휘둘렀다.
‘동갑이긴 하구나. 영 그렇지 않아 보이더니…….’
아서의 모습은 평소 그녀 앞에서 보이던 모습과는 좀 달랐다. 마르티안은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게 나쁘진 않다고 여겼다. 일 처리는 똑 부러지긴 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어딘가 미숙한 면이 있었으니까. 능숙하고 능글거리는 면이 있는 게 나쁘진 않다.
그녀가 그쪽에 시선을 거두었을 때였다. 휴이가 그녀가 보던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아서 우드에게 닿아 있었다. 그가 아서에게 말했다.
“아서 우드라고 했던 거 같은데, 맞나?”
“네? 아……. 맞습니다. 백작님.”
그가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휴이는 이곳 조사단원과 말을 섞은 적이 거의 없었고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엘 도안을 제외하면, 그가 조사단원을 두고 아는 척하는 거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식탁 위의 시선이 단번에 몰렸다.
들뜨고 웅성대던 분위기가 미묘하게 조용해진다. 교수마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휴이를 보았지만 그는 그것들을 무시하며 할 말을 이어갔다.
“일을 잘한다고 들었는데? 졸업 후에 정해진 일자리가 있나?”
“예?”
“졸업 후에 정해진 일자리가 있냐고. 원한다면 수도에 있는 가문을 소개해 줄 테니까.”
그건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다들 졸업 후를 염려하고 있던 상황이라 식당으로는 소리없는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아서는 몰린 시선에 몹시 당황한 채였지만 휴이의 적대감만큼은 분명하게 읽어냈다. 마르티안의 서재에서 안 좋게 마주친 이후로 안 그래도 늘 긴장하고 있던 차였다.
아서는 가능한 겸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다 뛰어난 조사단원들도 많아서…….”
“겸손이 과하군. 당장 졸업 후에 갈 곳을 찾느라 아쉬운 상황으로 아는데?”
그건 처음보다 날 선 말투였다. 아서는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댔다. 졸업 후에 도안 자작가로 올 예정이긴 했지만 아직 공식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조사가 실패로 끝난 상황이었다. 다들 졸업 후 행방에 대해 예민한 상황인데 그의 결혼 이야기가 알려지면 여러모로 눈치가 보일 게 뻔했다.
그는 한참을 머뭇대다가 휴이의 말을 수긍했다. 마르티안과 관계 발전이 없었다면 그의 말대로 일자리 하나가 아쉬웠을 테니까.
“……네, 맞습니다.”
“그럼 소개받아. 남편과 사별한 백작이니까 능력껏 일하면서 제법 잘 처신하면 한 자리 차지하기도 나쁘진 않을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던데, 여러모로 능력이 좋다고 들었으니까.”
이번에는 누구나 다 느낄 정도로 예민하고 적대적인 말투였다. 그는 아서를 확실하게 깎아내렸고 그를 조롱했다. 술과 음식으로 들떠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교수마저 당황해서 휴이를 불렀다. 그가 그새 술에 취한 건가 의심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개를 돌린 휴이의 얼굴은 유달리 말끔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깬 건 마르티안이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휴이를 똑바로 보았다.
“백작님,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이 자리에는 제 동생도 있다는 걸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엘 도안에게 한 이야기는 아니잖나?”
“듣는 것만으로도 상처받는 말도 있는 법이니까요. 제가 아끼는 사람들이 마음 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습니다, 백작님.”
휴이의 얼굴이 굳었다. 아끼는 사람들. 그 복수형의 단어가 그의 마음을 쭉 그어 내렸다. 그녀가 아끼는 사람이 엘 도안 말고도 더 있단 소리였으니까. 아서 우드. 그녀가 아끼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 향후 그녀의 남편이 될 상대다. 그녀는 그를 곁에 두기 위해 휴이를 내친 거나 다름없었다.
휴이는 따로 받은 아서 우드에 대한 정보들을 떠올렸다. 우드 자작인 아서의 형은 공공연하게 제 동생을 무시했고, 동생들의 결혼에 어떤 돈도 지출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를 떠들어 대는 사람이었다. 휴이는 그것을 읽으며 기이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마르티안은 아서 우드가, 지참금도 챙기지 못해서 결혼조차 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걸 알까. 어쩌면 달콤한 말에 속았을지도 모른다. 떨어질 바닥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든 그곳을 탈출하려 쥐새끼같이 굴기 마련이었다.
‘감히 상대가 누군지 알고.’
마르티안은 그가 겨우 만난 주인이었다. 아무 쥐새끼나 탐내게 둘 수 없는 주인. 휴이는 마르티안의 냉대를 떠올리며 지칠 때까지 울다가도 아서 우드를 떠올릴 때면 또 분노했다. 그는 교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번 조사단의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이번 조사가 여러모로 운이 따라주질 않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예? 아, 예.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 걱정도 많이 덜 것 같습니다. 역시 믿을 구석은 백작님밖에 없군요.”
교수가 경직된 분위기를 의식하며 일부러 더 반가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의 입에서 너스레에 가까운 하소연이 이어졌다. 과장된 말투는 웃음을 자아냈다.
하인들이 돌아다니면서 재빠르게 술이 다시 채웠다. 분위기는 점차 다시 풀렸다. 식탁 위에 채워진 음식들이 제법 사라지고 나자 교수의 코가 붉어졌다.
그는 마르티안과 휴이를 보며 말했다.
“아까 아서 우드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백작님은 보는 눈이 참 좋으십니다. 저 녀석이 은근 물건이거든요. 가문 배경이 좋지 못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이미 작위 있는 귀족이 데려갔을 겁니다.”
그는 자랑하듯이 말하고는 이내 손짓으로 아서 우드를 불렀다. 그건 이 자리에 폭탄을 던지는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마르티안은 짧게 한숨을 삼켰다.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관계를 드러낼 순 없었으니까. 아서 역시 똑같은 곤란함을 느끼며 교수 옆으로 다가왔다. 교수는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웃었다.
“보시죠. 키도 크고 몸도 제법 좋고 눈치도 빠르고, 얼굴은, 음, 평범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나름 나쁘진 않습니다. 물론 백작님의 외모를 보다 보면 영 그렇습니다만 모두가 다 그런 얼굴로는 살 수는 없잖습니까? 하하하. 그래도 어쨌든 이 녀석도 귀족들 사이에 꽤 인기가 있으니까요. 올해만 해도……. 음, 몇 명이더라?”
“몇 명이라니요. 교수님, 너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아서가 당황한 얼굴로 마르티안의 눈치를 보았다. 술에 취한 교수는 그의 등을 치며 호탕하게 웃고는 휴이를 향해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백작님께서 잘 소개를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까 마음에 드셨다고 하셨으니까요.”
교수는 취한 상태였지만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아서 우드를 안타까이 여겼다. 실력에 비해 그의 앞길은 상당히 꼬여있었으니까. 어디 좋은 곳을 소개받아 자리를 잡으면 참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진심으로 아서의 앞날을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가 술에 한가득 취했다는 것이었다.
교수는 아까 휴이가 보였던 이상한 적의를 새카맣게 잊은 상태였다. 그는 아서를 끌어당겨 아예 옆에 앉혔다. 어떻게든 백작에게 잘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이 더없이 불편했다. 차라리 아프다고 하고 여기에 참석을 하지 말걸. 그가 뒤늦은 후회를 했을 때 휴이가 입을 열었다.
“그럼 부유한 영지를 가진 귀족을 소개시켜 주면 되겠군.”
“백작님, 저는…….”
아서가 마르티안의 눈치를 보며 거절하려는데 교수가 먼저 나서서 반색을 했다. 그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였다. 요리는 술과 함께 입에서 녹아내렸고, 내심 신경 쓰던 제자는 어떻게든 살길이 열리는 중이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귀족이라니, 지참금을 마련하게 힘든 아서 우드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상대였다.
교수는 신이 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유한 영지면 어디 영지입니까? 남부, 아니면 서부?”
동북부보다는 서남부의 영지들이 좀 더 부유한 편이었다. 날씨가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 많기도 했지만 제국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강으로 인해 근처마다 상업 도시가 발달해 있는 탓이기도 했다.
물자와 사람이 이동하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돈도 몰리기 마련이었다. 소개해 주겠다는 부유한 영지가 어딘지 넘겨짚으며 교수가 말을 더했다.
“남부면 좋겠군요. 우드 가문이 남부에 있으니 여러모로 적응하긴 편할 테고…….”
“그런 것까지 따질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적응이야 어떻게든 해야지. 지참금도 제대로 가져가기 어려운 입장이라고 들었는데.”
적나라한 내용에 아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에 반박할 말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수치스럽고 민망했다.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꿈틀하는 지렁이는 더 짓밟히는 법이었다.
교수가 벌게진 고개를 흔들고 하하 웃었다. 그의 귀에는 휴이의 말들이 아서에 대한 관심처럼 들렸다.
“백작님도 아시고 계셨습니까? 그럼 더 말이 편하겠네요. 아서 이 녀석이 지참금은 없어도 능력은 좋으니까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서는 고개를 숙인 채 교수의 말을 들었다. 마르티안에게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비참했을 테니까. 그는 테이블 모서리를 보며 가만히 있었다. 속이 상하긴 상했다.
“아서, 고개 들어.”
마르티안이 짧게 말했다. 그건 서재에서 백작과 마주쳤을 때, 그녀가 아서의 앞으로 나서면서 했던 것과 똑같은 말투였다. 그가 머뭇대며 고개를 들었다.
휴이는 그게 몹시 거슬렸다. 제 주제를 아는 것처럼 기죽어 있더니 마르티안이 한마디 해줬다고 뻣뻣하게 고개를 드는 게 꼴이라니.
쥐새끼는 어디에 있든 쥐새끼일 뿐이다. 작위를 가진 귀족 여성이라면 누구든 달라붙으려 했을 게 뻔한, 쥐새끼. 그가 마르티안과 결혼하려는 이유는 그저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일 뿐이었다.
휴이는 아서를 보며 일부러 그의 부족함을 자극했다.
“지참금도 없는 결혼이라니……. 그럼 상대를 가리고 따질 처지가 아니겠군. 결혼하고 자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가서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아서가 붉어진 얼굴로 머뭇대며 시선을 내렸다. 그것을 보며 마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백작님.”
휴이는 반사적으로 긴장하는 몸을 아무렇지 않게 폈다. 그녀는 명백하게 화가 난 상태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화난 것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있었다. 휴이는 그녀를 보며 달아오르는 몸을 참았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게 긴장되면서도 본능처럼 흥분하게 된다. 그녀가 쏟아줄 가학과 통제를 기대하며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가 선택한 유일한 주인.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개처럼 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마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아서 우드의 앞길에 대해서는 이제 그만 걱정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휴이는 그 순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눈치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애원하는 얼굴을 했다. 제발……. 목 끝까지 밀고 올라온 말이 뱉어지기 전 그녀가 먼저 말을 뱉었다.
“아서 우드는 저와 결혼할 예정이니까요.”
식탁 위로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아서 우드가 불려간 이후로 조사단원들은 아닌 척하면서도 그쪽에 귀를 기울이던 참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모두 마르티안이 하는 말을 들었다. 식기 소리조차 멈춘 상황 속에서 마르티안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결혼을 발표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휴이의 태도를 더는 참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교수에게 먼저 말했다. 그는 술에 취해 벌게진 채로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교수님 말대로, 곁에서 보니 확실히 아까운 인재인 것 같아서요. 따로 아서에게 청혼을 했고, 본인도 좋다고 한 상황입니다. 곧 우드 가로 정식 서안을 보낼 예정이구요. 사실, 가능한 조용히 있으려고 했는데…….”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휴이를 보았다. 그는 파리하게 굳은 얼굴로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르티안은 그를 무시했다. 휴이는 이제 그녀의 개가 아니었으니까. 쫓겨난 개가 그녀의 울타리를 물어뜯으려고 하다니, 그녀는 자신의 울타리를 확실하게 다시 둘렀다.
“백작님이 이렇게 나오시니 제가 좀 마음이 급해졌네요. 사전에 약속을 해놓긴 했지만 이러다가 아서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 거 같아서요. 제가, 워낙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녀가 아서 쪽으로 눈짓을 하며 말했다. 아서는 당황한 얼굴로 얼굴을 붉혔다. 교수는 벌린 입을 그때까지도 다물지 못하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아, 그러니까……. 어, 그, 자작님과 아서가…….”
교수는 술이 와장창 깨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도안 자작과 휴이가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자작이 아서 우드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렇다고 마르티안에게 ‘백작과의 사이는 어떻게 된 거냐’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교수는 한참을 당황해하다가 다른 소리를 입에 올렸다.
“결혼이라니……. 너무 갑작, 그, 갑작스러워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교수는 테이블 위에 찾아온 정적을 그때쯤 깨달았다. 식기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태연한 건 도안 자작뿐이었다. 그녀의 얼굴로 미소가 가득 들어찼다.
“축하를 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요. 어쨌든 좋은 일이니까요. 결혼이란 게.”
“그렇, 지요. 축하를……. 하하……, 아니, 언제 두 분이 만나서…….”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무 말이나 내뱉던 교수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것인지 파악이 된 것이다. 보고서를 가지고 오가던 게 아서 우드였으니까.
교수는 그제야 휴이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있었다. 아니 완전히 질려 있었다. 이건 실연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최악인 상황이었다.
침묵이 식탁 위로 들이찬다. 교수는 급하게 접시에 덜어두었던 음식을 칭찬하며 입으로 밀어 넣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맛있던 음식들이었는데 무슨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교수가 조사단들을 향해 빠르게 눈짓을 하자 조사단원들이 급하게 따라 먹으며 떠들기 시작했다.
식기 소리와 함께 술과 음식이 참 맛있다는 소리, 그리고 자작가에서 너무 편하게 지냈다는 칭찬들이 이어졌다. 애써 이어지던 인위적인 소리들은 휴이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끊어졌다.
“피곤하군. 이만 먼저 일어나지.”
“먼저 일어나신다니 아쉽네요. 집사, 모셔드려.”
마르티안은 바로 집사에게 안내하게 했다. 그건 거의 축객이나 다름없는 태도였다. 휴이는 주먹을 쥔 채로 조금 몸을 떨었다.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전부 무시했다.
이 모든 상황을 시작한 건 휴이였으니까. 어차피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사적인 관계였을 뿐이었다. 이 자리는 다분히 공적인 자리였고 서로가 한도 이상 돌발행동을 할 수는 없는 자리였다.
휴이는 집사의 안내를 거절하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묵직하게 들어찬 침묵을 깨기 위해 집사가 하인들에게 손짓했다. 비어있는 잔에 술을 따르라는 소리였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들어차자 그나마 분위기가 나아진다. 만찬은 다시 이어졌다.
* * *
휴이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취할 만큼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숨이 뜨겁게 흘러나왔다. 그건 지금껏 참아왔던 모든 감정들의 총합이었다. 무너진 댐에서 쏟아 내리는 물처럼 감정은 견딜 수 없이 범람했다.
마르티안의 곁에 있고 싶어서, 예쁨받는 개가 되고 싶어서, 그 손과 시선이 자신에게 닿도록 참고 노력해온 것들이 무너졌다. 흘러내리는 것들은 온갖 것들 위로 범람했다.
“으, 흐윽……. 흐으…….”
마르티안은 그를 잘라냈다. 휴이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은 미련은 거대하게 일렁이며 그를 삼켰다. 아서의 뒷이야기라도 밝히고 싶어 안달이 났을 정도로. 마르티안이 그 모든 것을 알고도 그를 선택했음을 깨달았을 땐 아서의 비참한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르티안은 자신의 사람을 물어뜯으려 하는 그를 칼같이 내쳤다. 아서 우드는 이미 그녀의 사람이었고 그는 이미 타인이다. 버려진 개였다. 치밀던 화는 순식간에 고통으로 변했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 서러웠다.
“……흐으, 흐윽……. 주인님…….”
눈가가 붉어지다 못해 부어오르기 시작할 즈음에야 휴이는 울음을 겨우 억누를 수 있었다. 쏟아진 감정이 터져나가고 나자 남은 건 현실이었다. 마르티안과의 관계가 이제는 끝이라는 현실. 그는 입술을 짓씹었다. 눈물로 가득 젖어서 짠맛이 나는 살덩이가 짓이겨졌다.
휴이는 그녀가 감싸고돌던 아서를 떠올렸다.
“감히 누구를 넘보고……. 쥐새끼나 다름없는 주제에!”
그는 책상 위에 있던 펜꽂이를 그대로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묵직한 유리 공예품이 바닥에 부딪히며 깨졌고, 안에 들어있던 펜들이 튕겨 나와 사방으로 굴러갔다.
아서 우드를 죽여 버리고 싶다. 그는 마르티안의 가문을 갉아먹으며 살려고 들어온 쥐새끼였다. 겁 없는 쥐새끼는 그를 완전히 무시했다. 자신이 마르티안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녀의 곁에서 맴돌았다는 것 자체가 그랬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책상 위의 물건들을 내던졌다. 카펫과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 잉크병이 깨지면서 검은 얼룩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치우고 닦아내도 흔적은 남을 것이다.
휴이는 마르티안이 이것을 확인하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자신에게 찾아와서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이대로 바닥을 기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잉크병이 깨진 위를 기어 다니며 무릎과 다리가 다 찢어져도 좋을 거 같았다.
그런 상상들과 감정들은 그를 더 울게 했다. 이건 끝난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상상을 하고 그런 가정을 하는 자신이 비참했다.
휴이는 젖어버린 눈가와 뺨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방 안은 이미 엉망진창이다. 하인들에게 안을 치우라고 말하려고 움직였을 때였다. 발에 뭐가 툭 걸렸다. 물건을 집어 던질 때 같이 떨어진 서류였다.
-저택 내 욕실 확장공사 및 기타 구입 관련 처리안
휴이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집사장이 보내온 서류에는 이전에 그가 지시했던 추가 공사와 마르티안에게 선물하기 위해 말해놓은 물품들의 구입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섬세한 공예품과 장신구들은 어떤 보석상을 섭외해서 의뢰했고 의복의 경우에는 어떤 의상실을 현재 알아놓았는지, 전부 수도에서 고위 귀족들을 상대로 운영하는 곳들이었다. 자질구레한 용품들에 대한 내용은 생략되어 있었지만 엇비슷한 수준의 가게들에 의뢰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꿈을 꾸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지시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이 상황이 되고 나니 비참한 추억일 뿐이다. 휴이는 그것을 잔뜩 구겼다가 이내 다시 폈다. 그리고는 집사장이 적어놓은 가게 목록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모두 수도에서 유명한 공방들과 의상실들이었다. 그는 그곳을 드나드는 귀족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떠올렸다. 휴이는 한참을 그것을 보다가 이내 입술을 꽉 깨물고는 그 종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만찬은 새벽이 다되어서 끝났다. 그녀는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했다. 실패든 어쨌든 조사는 끝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이 저택에서 떠날 테니까. 그건 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때가 드디어 다가온 것이다.
마르티안은 휴이를 끊어낸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놓고 아서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나니 마음은 더 확고해졌다. 결혼한 뒤에까지 관계를 이어나가면 어떨지 오늘만 봐도 결과가 뻔했다.
휴이는 그때에도 아서를 무시하면서 깔아뭉개려 들 테니까.
‘그런 꼴이 되게 할 수는 없지.’
그녀는 가족과 가문의 안정감을 몹시 중요시여겼다. 그건 그녀의 손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존중하고 지켜야 하는 체계였지만 휴이는 그걸 쉽게 무시하고 함부로 움직일 사람이었다. 고작 침대 위 관계를 위해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할 순 없었다.
‘당장 쫓아내지 못하는 게 짜증이 나긴 하지만…….’
다른 개였다면 그녀는 이미 끝을 선언했을 것이다. 지금껏 그녀의 상대는 그녀가 원하면 얼마든지 이곳에서 쫓아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휴이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거기에 짜증을 느꼈지만 너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기다리면 끝은 올 테니까.
마르티안은 휴이가 그녀의 침실이나 응접실에서 버티고 있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양이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뭐? 새벽에 자기 영지로 돌아갔다고?”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깨어난 마르티안은 자신이 들은 말을 다시 확인했다. 집사가 약간 곤란한 말투로 다시 말했다.
“백작님께서 새벽에 본인이 영지로 떠나셨습니다. 배웅은 필요 없다고 하셔서 일단 짐을 꾸리고 이동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하인들과 함께 도왔습니다.”
“이게 무슨……. 왜 갑자기 떠난 거야? 어제 일 때문이야?”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말이 없으셨지만…….”
집사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말은 없었지만 정황상 떠오르는 이유는 그것뿐이었으니까. 집사는 백작의 표정이 몹시 굳어있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마르티안이 그가 말하지 못한 것을 대신 뱉어냈다.
“자존심이 상했다, 뭐 이런 건가 보네?”
귀족들 중에는 이런 쪽 자존심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구는 경우가 제법 많았다. 사적인 망신은 수치와 흥분의 요소지만 공적인 망신은 그냥 망신일 뿐이니까.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게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잘된 거 같긴 해. 어차피 끝난 관계긴 하니까.”
그녀는 상황을 가볍게 정리했다. 버림받으면 죽을 것처럼 굴어놓고는 이렇게 단번에 떠나버린 게 의외이긴 했지만 상대의 심리까지 더듬어 상황을 파악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귀족 간의 연애란 가볍고 흥미 위주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집사가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그래도 서안 정도는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배웅조차 하지 않고 손님을 보낸 상황이니까요.”
“그 정도야 해야겠지. 간단하게 적어줄 테니까 그쪽으로 전달해.”
집사가 알겠다고 답했을 때 침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론이 들어왔다. 늦은 아침을 위한 간단한 식사였다. 그가 테이블에 음식들을 내려놓는 걸 보면서 마르티안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하게 우려낸 차는 잠을 깨우려는 용도로 주로 마시는 것이었다. 피어오르는 향만으로도 피곤함을 가시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서 그녀는 천천히 차를 음미했다. 수프는 매우 부드러워서 속을 달래기 딱 좋았다.
마르티안은 바구니에 담긴 빵을 수프에 적셨다. 집사가 옆에 서서 조사단의 방마다 음식들을 들였다고 보고했다, 어제 늦게까지 술과 음식에 취해 있었으니 오늘 하루는 침대에서 노곤하게 보내고 싶을 터였다.
“아, 그리고 집사. 결혼 말이야.”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가급적 빨리했으면 좋겠어. 엘 도안 졸업할 때 즈음으로.”
“졸업 때요? 자작님. 그건 너무 급한 것 같습니다. 그쪽에 정식 서안도 보내지 않은 상황인데 답변이 돌아오기까지 적어도 한 달에서 한 달 반은 걸릴 겁니다. 그럼 졸업까지 남는 기한이 너무 적고…….”
“어차피 그쪽에서 거절하진 않을 거잖아, 지금부터 준비를 먼저 하고 있으면 되잖아. 예복 치수나 이런 거 조사단 돌아가기 전에 의상실에 의뢰 넣어서 미리 치수 재고 하면 굳이 기다릴 일도 없을 거 같은데.”
아서 우드와의 결혼은 아서가 도안 자작가로 몸만 들어오는 방식이었다. 지참금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아서 우드의 능력을 지참금 삼기로 했다. 결혼식에 드는 비용은 전적으로 도안 자작가의 몫이었기 때문에 우드 가문에서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이론적으로야 틀린 말이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결혼식 진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소리였다. 무슨 결혼 준비를 상대가문의 답변도 듣지 않고 진행한단 말인가. 집사는 말도 안 된다고 대답하려 했지만 마르티안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어제 만찬에서도 일이 있었잖아. 어쨌든 구설에 오르기 좋은 상황이니까 그냥 빨리 결혼하고 덮어버리는 게 나을 거 같아. 집사도 내가 빨리 결혼하길 바라긴 했잖아? 이 기회에 빨리빨리 처리하면 더 좋을 거 아냐?”
농담처럼 말을 맺긴 했지만 마르티안은 진심이었다. 조사단원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휴이 세블로아드가 아서 우드를 걸고넘어졌고 마르티안은 대놓고 아서 우드와 결혼한다고 밝힌 상황이다. 누가 들어도 흥미 넘치는 화제였기 때문에 분명 소문이 돌 게 뻔했다.
집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청혼 서안을 작성해서 보내고 나머지는…….”
“아서가 준비해야 하는 것들 있지? 예복이나 이런 거. 그건 조사단이 여기 머물 때 빨리 해버려. 조사 기간이 끝나고 다들 돌아가면 다시 부르기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번거로우니까.”
“알겠습니다.”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어있는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테이블이 정리된다. 마르티안은 집사에게 오늘은 느긋하게 좀 쉬겠다고 말했다. 보통 만찬 다음날은 느긋하게 쉬면서 보내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집사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나갔다.
뒤에 서 있던 론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입고 있는 건 얇고 쉽게 흘러내리는 침실용 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주방으로 가서 식사할 것들을 가져온 것이다. 옷 위로 유두 고리 모양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툭툭 건드렸다.
“다음번에는 이걸 걸칠 필요도 없는 거 아냐? 어차피 다들 알았을 거 같은데.”
그녀가 론의 상의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론은 오래 머뭇거리지 않고 네라고 대답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수치를 반기지 않는 성격이 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그의 시선이 불안하게 떨리는 것을 보며 마르티안은 느긋하게 웃었다. 이런 표정을 짓고 있으면 더 몰아붙여서 울리고 싶어졌다.
“뒤돌아서 엎드리고 엉덩이 들어.”
그녀는 시킨 대로 움직이는 론을 보다가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헐렁하게 걸쳐진 바지는 큰 힘이 아니었는데도 금세 엉덩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마르티안은 가볍게 웃었다. 바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느라 내내 곤욕이었을 론을 생각하니 웃음이 다 나왔다. 속옷을 못 입게 했으니까 더 그랬겠지만.
마르티안은 그의 엉덩이를 보다가 구멍을 막고 있는 마개를 발견했다.
“귀여운 걸 넣어놓고 주방까지 갔다 왔네?”
마르티안은 웃었다. 둥근 모양새의 마개는 크기도 크고 딱딱한 재질이라 안에 집어넣으면 이물감이 심한 도구였다. 스스로 그걸 집어넣고 주방까지 갔다 온 게 기특하다. 마개를 안으로 더 꾹 누르며 그녀가 물었다.
“이런 꼴로도 주방까지 갔다 오고 많이 늘었네? 조만간 벌거벗고도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은데? 등에 쟁반을 하나 달아 줄 테니까 기어서 갔다 올래?”
“으, 흡, 주인님…….”
론은 차마 대답을 못 했다. 마르티안이 그의 엉덩이를 손으로 내리쳤다.
“대답해야지?”
“읏, 흐으, 원하시면……. 흐윽.”
마르티안이 마개 끄트머리를 뒤로 잡아 뺐다. 주름이 반사적으로 조여졌다가 이내 풀렸다. 둥근 모양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주름이 그에 맞춰서 늘어났다. 구멍의 지름만큼 벌어진 구멍은 더 이상 주름조차 없었다. 흐으, 흐윽. 찢어질 듯 벌어진 게 고통스러운지 론이 신음을 뱉어냈다.
그녀는 마개를 다시 안으로 푹 쑤셔 넣었다.
“흐읍! 흐…….”
“원하시면? 너는 싫다는 거야?”
마르티안이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뒤에 넣은 마개를 다시 잡아당기는 손길이 이전보다 더 거칠어졌다. 구멍이 거칠게 벌어졌다가 이내 다시 쑤셔 박히는 게 몇 번 더 이어졌다.
한계까지 찢어내는 감각과 내벽을 짓누르는 감각이 번갈아 오갔다. 론은 참기 버거운 감각을 견디느라 몇 번이나 카펫을 긁어야 했다.
“흐윽! 흐으……. 아니, 큿, 아닙니다. 주인님. 흐으읏.”
마르티안이 마개를 완전히 뽑아냈다. 질척한 윤활제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구멍은 거친 자극에 의해 벌어진 채였고 그 안에 고여있던 윤활제가 줄줄 흘러서 론의 고환과 성기를 적셨다. 억눌린 신음 소리가 호흡과 함께 흘러나오는 것이 귀를 즐겁게 했다.
마르티안이 그를 일으켜 소파에 앉게 한다. 반쯤 발기한 것이 끄덕대며 흔들렸다. 마르티안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으며 그 성기를 움켜잡았다.
“아서 우드와 결혼한다는 거 아까 들었지?”
“흐읍, 네, 주인님.”
“걔는 이런 쪽으로 전혀 모르더라고.”
마르티안은 부부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아서를 데리고 하는 희롱은 그저 장난에 불과했으니까. 아주 가벼운 유희였고 그런 정도로는 그녀의 가학적인 욕망을 채울 수 없었다. 결국은 침대 위 파트너를 둬야 할 것이다.
그건 결혼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이었지만 대신 한 가지 달라지는 점은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외부의 파트너를 집 안으로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급할 때 론을 가져다 쓰는 일이 더 늘어날 것이다.
“네가 더 고생해야 한다는 뜻이지. 저택 내에서 내 가학을 감당할 사람이 너밖에 없을 테니까.”
론의 얼굴이 머뭇대며 펴진다. 네, 주인님. 답하는 목소리로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마르티안은 그대로 론의 성기를 흔들었다. 가학 없는 자극이 이어지자 그의 몸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성기는 순식간에 단단해져서 제 모습을 갖췄다. 흐으, 흡, 흑, 주인님. 론은 엉덩이를 움찔대며 헐떡댔다. 그가 쌀 것 같다는 소리를 했지만 마르티안은 귀두 아래를 압박하며 계속 흔들었다.
론은 얼마 참지 못하고 사정했다. 질척한 정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세 번 정도 싸게 만들어선지 정액이 쏟아지는 세기가 대단치 못했다. 질질 흐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정액을 훑어서 다시 그의 성기에 대고 문질렀다.
“흐으으, 흐으, 주인, 끄으…….”
그가 숨넘어가는 신음을 뱉어냈다. 예민해진 곳에 쏟아지는 자극이 지나치다.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는 함부로 몸을 뒤틀지도 못했다. 마르티안이 그의 위에 앉아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론의 성기가 고삐라도 되는 것처럼 잡고는 계속해서 흔들었다. 질척하게 젖은 곳을 흔들 때마다 그의 몸이 떨린다. 그녀가 고삐를 쥐고 흔들면 그녀의 말은 신음을 뱉으며 예쁘게도 몸을 움찔댔다.
흐으, 히익, 그의 신음이 높아졌다가 낮아지길 반복했다. 아랫배가 지나치게 오그라든다. 감각은 배뇨의 감각으로 이어졌다.
“흐, 주인, 제발, 흐읍, 그만, 그만……. 하으, 더러…….”
론은 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르티안은 자극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흐으아, 높은 신음이 토해졌을 때 그의 앞으로 물이 투명한 액체가 흥건하게 쏟아졌다.
론이 급하게 손을 대서 막으려고 했지만 줄줄 흐른 것은 그의 성기와 사타구니 사이로 쏟아졌고 마르티안의 아래마저 적셨다. 줄줄 흘러내린 것이 소파까지 스며든다.
“엉망으로 싸질렀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적나라한 자국들이 그녀의 바지에 남았다. 론은 급하게 몸을 앞으로 굽혀 그녀의 다리 사이를 핥기 시작했다. 젖은 자국은 혀로 닦아낸다고 사라지진 않았다.
마르티안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와 다리로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투명하게 쏟아낸 물줄기가 거한 흔적을 만들어 냈다.
그녀는 일부러 그것을 한참 보았다. 론의 얼굴이 수치로 힘겹게 일그러졌다.
“빨리, 치우겠습니다. 주인님.”
“네 혓바닥으로?”
그 말에 론이 네라고 대답한다. 순하게 대답하는 그 대답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마르티안은 가볍게 그것을 거절했다.
“그럴 필요 없어. 하인을 부를 테니까. 너는 그동안 저쪽에 가서 벽을 보고 서 있어.”
론은 아래를 벌거벗은 상태로 벽을 보고 섰다. 마르티안은 몸을 닦지도 못하게 해서 그는 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서 있어야 했다. 치자면 그건 아무 데서나 싸지른 벌이었다. 그렇게 만든 것은 마르티안이었지만 결국 참지 못한 론의 잘못이다. 그는 하인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기색이 이어진다. 바닥을 닦는 사람은 그의 바로 뒤까지 와서 걸레질을 했다. 론이 흠칫 굳어서 덜덜 떠는 것을 보며, 집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공식적인 조사 기간이 끝난 지 일주일째였다. 끝내지 못한 서류작업과 이런저런 일 처리 때문에 조금 더 머물렀던 조사단들이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자작가를 떠나는 날이었다.
자작가의 주방에서는 이틀에 걸쳐 다양한 간식거리들을 만들어 냈다. 작은 박스에 담긴 디저트들은 조사단에게 챙겨주기로 한 선물이었다.
마르티안은 줄지어 서 있는 마차에 그것들을 하나씩 싣게 했다. 교수는 자신의 몫으로 만들어진 상자를 열어보고는 기쁜 표정으로 웃었다.
“세상에, 옆에 쌓아두고 먹고 싶었던 것들뿐이군요. 감사합니다.”
조사는 실패로 끝났고 최소한의 방패막이 되어줄 백작마저 일이 틀어져 돌아간 상황이다. 도안 자작가에서 챙긴 선물은 선물이라기보다는 위로에 가까웠다. 교수는 상자를 닫아 하인에게 넘기고는 마르티안을 향해 말했다.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저희 쪽에서는 도움이 되질 못해 죄송합니다. 결과가 좋았다면 여러모로 좋았을 텐데…….”
“그래도 좋은 사람을 얻었으니까요. 그걸로 충분히 도움을 얻은 셈입니다.”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아서에게 시선을 두었다. 교수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조건적으로 우위에 있는 쪽에서, 결혼 확정도 되기 전에 이런 식으로 결혼 상대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니까. 연애 상대에게 완전히 빠져서 온갖 것을 가져다 바치는 귀족이라도 결혼에 관해서는 한없이 이성적으로 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마르티안이 지금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일종의 눈치 주기다. 결혼할 쪽은 아서 우드가 확고하니 쓸데없이 백작과의 관계를 입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었다.
백작이 돌아간 이후 그녀는 아서와의 관계를 대놓고 드러냈다. 조사단이 보고서 최종 정리를 하며 저택 안에서 지내던 동안 그녀는 수시로 집사를 보내 아서를 서재로 올라오게 했다. 그건 둘의 관계를 조사단 전체에게 드러내는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사실 로아 교수 입장에서는 마르티안이 휴이와 연결되는 것이 훨씬 좋았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당한 애인 사이로 발전하는 거야 흔한 일이었으니까. 관계가 제법 잘 진행되면 그걸 바탕으로 여러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휴이에게는 수많은 인맥과 자금과 권력이 있었고, 당장 이번 조사의 실패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줄 만한 사람도 그뿐이었다.
‘백작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만한 여지가 있어야지.’
교수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도안 자작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구는데 무슨 설득을 하고 무슨 편을 들 수 있을까. 말을 꺼내 보았자 역효과만 일어날 게 뻔했다.
게다가 그는 휴이와 친분이 있었을 뿐, 도안 자작과 사적인 친분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둘 사이에서 일어난 사적인 것들을 물어보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교수는 휴이와 마르티안이 대단한 관계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휴이가 불타오르듯 굴고 있긴 해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또 금방 식기 마련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는 뭐든 빠르게 배우고 잘 해내는 만큼 쉽게 흥미를 잃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먼저 시들해지는 상대가 마르티안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그렇게 단번에 휴이를 내칠 거라고는 더더욱.
그리고 하필 자신이 데리고 온 조사단원이 그 관계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백작이랑 헤어질 거라면 다음 상대가 조사단은 아니었어야 했는데, 이거 참.’
상황이 여러모로 껄끄럽고 애매했다. 교수는 버릇처럼 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렀다. 이미 휴이는 이곳을 떠난 상황이었다. 엎질러진 물과 끝나버린 일을 고심한들 바뀔 것도 없었다.
물론 교수 역시 이 상황이 답답하니 아서에게 좀 신경질적으로 굴긴 했다. 그렇다고 도안 자작에게까지 그런 티를 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적당히 예의를 차려 말을 이었다.
“우드 가문으로 결혼 서안을 보냈다고 들었습니다. 아서를 좋게 평가해 주시니 다행이군요.”
“여기서 그쪽 영지까지 거리가 워낙 멀어서요. 최대한 서둘러 보냈습니다만 답변이 오는 데까진 시간이 꽤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지요. 우드 가문은 남서쪽 끝에 있으니까요. 거의 제국 끝에서 끝을 오가는 거나 다름없는 거리라서……. 나중에 오가는 게 좀 번거롭겠습니다.”
동쪽 산맥 아래에 자리 잡은 도안 자작가와는 달리 우드 가문의 영지는 제국의 남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지 크기가 작고 수입원이 애매하긴 하지만 남쪽 바다와 서쪽 숲을 일부 포함하고 있어 풍경이 다채로운 편이었다. 물론 일부러 찾아가서 볼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
교수는 둘이 어차피 결혼한다는 마당에 괜한 안 좋은 소리를 했나 싶어서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우드 영지로 가는 길에 여러 둘러볼 곳들이 많긴 합니다.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이곳저곳 들러서 여행하는 기분으로 오가면 지루한 길은 아닐 겁니다.“
우드 영지를 가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제국의 남부는 여러 가지 볼거리가 많았다. 넓은 강을 따라 펼쳐진 넓은 평야도 그렇지만, 남쪽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 해수욕으로 유명한 해변과 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었고 상업으로 크게 발달한 거대한 항구도시를 즐기며 머물 수도 있었다.
교수는 원한다면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해 주겠다며 나서자 마르티안은 가볍게 웃었다.
“추천받은 곳을 들르게끔 일정을 짜야겠네요. 우드 영지로 가는 건 졸업식이 끝난 후에 수도에서 내려가는 식이 될 거 같아서요. 그때 바로 결혼할 생각이라서 우드 영지를 여러번 오가진 않을 거 같습니다.”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요? 그, 졸업 직후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요. 여러모로 준비하기가 빠듯할 듯한데…….”
아무리 이것저것을 간략하게 한다고 해도 귀족의 결혼은 여러 가지로 챙길 것이 많았다. 그때쯤 약혼을 하겠다면 모를까 결혼이라니. 교수는 이렇게까지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백작과 관계가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마르티안은 그의 의문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대답했다.
“결혼 준비가 빠듯하긴 하지만 그래도 가능하긴 할 거 같습니다. 미리 할 수 있는 건 미리 해 둔 상황이라서요. 조사 기간이 끝나고도 조사단이 며칠 더 머물러 주어서, 덕분에 결혼식 예복 재단을 끝냈거든요.”
그건 급한 결혼 날짜보다 더 당황스러운 말이었다. 결혼 서안에 대한 답이 오기도 전에 예복 재단이라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진행 속도에 교수가 눈을 크게 떴다.
“결혼 예복이요? 아니 결혼 예복을 벌써 맞추셨단 말입니까?”
되묻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주변에 있는 조사단원 모두가 교수를 힐끔댔다. 그 분위기에서 동떨어져 있는 건 한쪽에서 짐 마차를 확인하고 있던 아서 뿐이었다. 그는 혼자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린 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로아 교수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음을 깨닫고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힐끔대던 조사단원들이 재빠르게 다시 자기 할 일을 시작했다. 그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당황해서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우드 가문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상관이 없긴 하겠지만……. 그,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건 또 처음 들어봐서.”
마르티안은 가볍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짐을 옮기고 확인하던 조사단원들이 안 보는 듯하면서도 이쪽을 주시하다가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부산스러움이 거의 줄어든 상황이니 그녀와 교수의 대화를 엿듣기에 좋았을 것이다. 그녀는 일부러 교수를 붙잡고 결혼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쓸데없는 소문이나 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들에게 자신과 백작의 관계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나 다름없었다. 마지막에는 아서까지 끼어서 난장판이 났다. 소문이 흘러나가기 딱 좋았다. 물론 그녀는 내심 교수가 조사단원의 입단속을 시키리라 생각했다.
백작이 처참하게 거절당하고 무시당한 이 상황에서 이야기를 대놓고 떠벌린다는 건 공작가를 우습게 보는 결과를 낳을 테니까.
물론 뒤로 은근히 퍼지는 거야 막을 수 없을 테지만 그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사교계나 수도의 귀족들과 어울릴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남편감도 구해졌으니 더더욱.
교육원의 졸업식을 참여하기 위해 수도에 올라가긴 하겠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 그녀는 결혼을 할 것이고 이곳으로 돌아와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평생 보낼 예정이었다. 남편이자 실무자 역할을 할 사람이 옆에 있을 테니 일은 더 수월해질 테고.
그런 걸 생각하면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며칠 듣는 것쯤은 또 별거 아닌 거 같긴 했다. 교수가 상황을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준비가 끝난 거 같으니 이만 떠나야겠습니다.”
“조심히 가셨으면 하네요. 조사 보고가 무탈하게 마무리되길 바라겠습니다.”
마르티안의 인사에 교수가 고맙다며 답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부들이 말과 고삐를 확인하고는 마부석에 앉았다. 이내 자작가에 머물렀던 무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도안 자작가는 이전과 다름없이 조용해졌다. 주방 사람들은 고된 손님맞이를 끝낸 대가로 한 명씩 돌아가며 쉬었다. 마르티안은 서재나 침실에서 론의 시중을 받으며 일을 처리했다.
아서가 만들어 놓은 서류목록과 요약본은 아주 유용해서 그녀는 그것을 옆에 끼고 일을 했다. 적나무의 대안을 찾기 위한 일들은 일상적인 업무를 끝낸 후에야 이루어져서 그녀의 일은 전반적으로 늘었다.
그리고 그녀보다 일이 더 늘어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자작가의 집사였다. 그는 고대하던 마르티안의 결혼준비를 위해 몹시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 일이 갑자기 진행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는 아서 우드가 괜찮은 남편감이라고 생각했다.
현재 도안 자작가는 적나무 병해로 인해서 꽤 어려운 시기를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 상황을 이해하고 직접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배우자가 몹시도 필요했으니까.
‘외모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마르티안의 아버지는 그 지역 내에서 유명한 미남이었고 그를 닮은 마르티안 역시 외모가 화려한 편이었다. 집사는 가끔 백작의 외모를 생각하곤 했는데 확실히 외적인 면은 그를 따라올 상대가 없었다.
물론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이었고 백작은 떠났으며 도안 자작가에 들어올 새로운 사람은 아서 우드였다. 집사는 착실하게 필요한 일들을 확인하며 진행했다. 결혼식 준비는 여러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때때로 어린 시절 인형처럼 예뻤던 마르티안이 떠올리기도 했고 그때의 평화로웠던 자작가의 분위기를 되새기기도 했다. 선대 자작 부부가 살아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때때로 시큰거리는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늙은 집사는 그 마음을 추스르며 결재받을 내용들을 가지고 마르티안의 서재로 향했다.
“내 결혼 예복? 이걸 굳이 왜 다시 만들어? 저번에 맞췄던 것 중에 하나로 대체해. 굳이 다시 맞출 필요 없잖아.”
마르티안이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류를 옆으로 넘겨 버렸다. 집사의 감상은 정작 결혼하는 당사자의 무심함 앞에서 파스스 깨지곤 했다. 집사는 그녀가 넘긴 서류를 다시 내밀었다.
“자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떤 귀족가에서도 결혼식 예복을 따로 맞추지 않고 그냥 입던 걸 입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 그거야 인사치레용 옷이니까 그렇겠지. 어머니는 실용적으로 만들어서 자주 입긴 하셨지만 어차피 난 번거로운 옷이 질색이야. 한 번 입고 말 옷에 무슨 돈을 들여?”
“실용적으로 만드는 건 제가 간여할 바가 아니지만 새 옷을 맞추긴 하셔야 합니다.”
“저번에 맞춘 것 중에 아직 안 입은 옷 있잖아? 그거 입는 거로 해. 남들이 한 번도 안 본 옷이며 새 옷인 거지. 앞으로 허리띠 졸라매야 하는 상황인데 줄일 수 있는 건 전부 줄여.”
“아니, 자작님. 아무리 비용을 줄여도 그렇지요. 결혼식을 준비하는 데 예복 맞추는 걸 생략하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아서 님 예복은 빨리 맞추라고 성화시더니…….”
집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답했다. 아서의 예복은 사람 있을 때 빨리 진행하자며 바로 맞추고는 쓸데없는 속옷까지 잔뜩 추가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놓고 막상 본인 예복은 생략하겠다니.
결혼식이 우드가의 지원 없이 자작가의 돈으로 치러질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작님, 그냥 예식도 아니고 결혼식입니다. 한동안 자작가가 어려울 거라고는 해도 예복을 생략해서 비용을 줄이는 건 아니지요. 차라리 다른 부분을…….”
“안돼. 더는 줄일 데도 없잖아.”
마르티안이 단호하게 서류를 옆으로 넘겼다. 울상인 늙은 집사를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복을 따로 맞추는 건 낭비였다.
“다른 부분도 이미 줄일 데로 줄인 상황인데 그렇다고 손님 맞이하는 부분에서 줄일 순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예복에서 줄여. 애초에 그 옷들도 비싸게 돈 들여서 바꾼 거잖아. 결혼할 때라도 실컷 입어야지. 결혼하고 나면 더 입을 일도 없을 텐데.”
마르티안은 사교를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꾸미고 보이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여러모로 귀찮게 여겼다. 그러니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엘 도안이 결혼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옷을 입을 일이 없을 것이다.
마르티안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고 반박할 여지가 없는 논리였다. 그녀는 이쯤에서 집사가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집사가 포기한 경우가 열 손가락을 넘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집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가가 한껏 붉어지며 눈물이 떨어졌다. 마르티안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늙은 집사가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선대 자작 부부의 장례식이 마지막이었다.
“왜 그래? ……예복 못 맞추게 해서 그래? 아니 내가 그냥 맞추기 싫다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옷들도 훌륭하잖아. 그것도 집사가 신경 써서 맞춘 거고.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절약하잔 소리였는데……. 알잖아, 우드 가문에서 지참금도 거의 보내지 않을 거라는 거.”
마르티안은 저도 모르게 변명했다. 집사가 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주책맞은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섭섭한 건 아니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예복은,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사는 올라왔던 감정을 꾹 눌렀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섭섭하기보다는 속상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결혼예식을 준비하면서 생략하고 줄일 것부터 판단하는 모습들이, 자작이 되고 나서 고생하던 마르티안의 모습과 겹쳐졌던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를 욕심내기보다는 버릴 것부터 판단하는 데 더 익숙했다. 집중을 해야 할 것을 골라내야 하는 삶은 그 외의 욕망을 모두 거세하기 마련이니까.
집사는 속상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크게 숨을 뱉었다. 이런 감상에 빠지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다. 오늘 마르티안이 결정해 주어야 하는 건 예복에 대한 것뿐이 아니었으니까.
“결혼식에 초대할 분들 명단입니다. 보통 삼사 개월 전에 참석 여부를 확인받아야 음식 준비와 손님방 준비하는 데 여유가 생기니까요. 이건 아서 님이 작성해준 초대 명단입니다. 엘 도안 도련님과 겹치는 부분이 꽤 될 거 같은데 어쨌든 늦어도…….”
집사가 명단을 적은 종이를 마르티안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결혼식은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은 행사였다. 결혼의 증인이 되어줄 사람도 물색해야 했고 그들에게 줄 선물도 따로 챙겨둬야 했으며, 저택을 어떤 식으로 꾸며서 결혼식을 치를지도 대략적인 방향을 정해놓아야 했다.
“사람 하나 옆에 두는 것뿐인데 해야 할 게 왜 이렇게 많아?”
“고용이 아니라 결혼을 하시는 거니까요. 그리고 날짜도 상당히 급하게 잡으셨구요.”
아직 우드 가문에서는 답변조차 오지 않았는데도 집사는 결혼식 준비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아서가 졸업한 직후에 결혼식을 올리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시간 내에 준비를 끝내려면 이마저도 좀 빠듯했다.
마르티안은 여러모로 번잡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결국 그녀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한 번잡스러움이었다.
“결혼도 했다 치고 넘어가고 임신도 했다 치고 넘어가서, 눈 떴더니 애가 자라있으면 딱 좋겠는데…….”
“그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없는 법이지요.”
집사의 말에 마르티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적나무의 대체재를 찾는 것도 바쁜데, 그 와중에 적당한 비용 내에서 결혼도 해야 했다. 그 뒤에도 그녀에게 떨어지는 숙제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중 가장 시급한 건 후계였다.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집사가 늘 말했던 것처럼 작위를 받은 자의 책무였으니까.
“첫째는 딸이겠지? 우리 집안에서 첫짼 다 딸이었잖아.”
“네, 그랬지요.”
“사실 임신할 생각 하니까 까마득하긴 해. 어머니에 비해서 내가 여러모로 튼튼한 편이긴 하지만 워낙 대대로 임신이 잘 되지 않는 편이니까…….”
도안 가문의 여자들은 대부분 자궁이 약했다. 생리도 불규칙했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혈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때문에 임신을 계획하고 난 이후에는 까다롭게 주변 환경을 관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크게 신경 쓸 일을 만들지 않고 마음이 한껏 편안해지게 하기 위해서 남편과 함께 한두달 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흔했고 그게 어려울 때에는 저택 안에서 요양을 하는 것처럼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신경을 쓰며 임신을 하고나면 그때부터는 안전한 출산이 문제였다.
대부분 뼈대가 가늘고 골반이 좁은 체구여서 출산할 때마다 위험이 따랐다. 그래서 대부분은 첫째를 낳고나면 더 이상 임신하지 않았다. 책무로 인해 낳는 건 한 명이면 충분했으니까. 도안자작가는 대부분 딸 하나를 두고 후계를 잇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선대 도안 자작이 마르티안을 낳은 이후에 엘 도안까지 낳게 된 건 의도하지 않은 임신 때문이었다. 그때 마르티안은 이미 일곱 살이었다. 그녀는 그 당시의 어머니를 떠올리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엘을 임신하고 어머니가 엄청 고생을 하셨던 게 아직도 생각나.”
그녀의 어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몹시 힘들어했다. 부푼 배를 어찌하지 못하고 누워 있던 모습들이 대부분이었을 정도였다.
평소 선대 도안 자작은 아픈 기색이나 약한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마르티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마르티안의 아버지마저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 자작가의 분위기는 매우 무거웠다.
“나는 신체적으로 아버지를 더 닮았고 그런 쪽 잔병치레가 전혀 없어서 그 정도로 힘들진 않겠지만 하필 적나무로 고생해야 할 때랑 겹쳐서…….”
임신을 뒤로 미룰 생각은 없었다. 대를 잇는다는 건 아이를 낳는 것만으로 상황이 끝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이가 열 살은 되어야 교육을 비슷한 거라도 시작해 볼 수 있었고 실무를 가르치려면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다면 애를 낳는 건 하루라도 빨리하는 것이 좋았다.
단지 시기가 여러모로 좋진 않다는 게 걱정일 뿐이었다. 적나무 대체재를 구하고 관리하고 찾아내는 일들은 금방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늘 돌아가던 체계가 틀어지면 일상을 끌고 나가는 데 더 많은 힘을 써야 하는 법이었다.
그 상황에서 편히 마음을 가지고 임신에 집중할 수 있을까. 마르티안은 그런 것들이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을 했다. 임신이 무탈하게 된다고 해도 사실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분명 일이 산재해 있을 텐데, 거기에 출산과 육아가 더해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일이 바쁘다고 아이에게 소홀하고 싶진 않은데……. 두 가지를 전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여태껏 잘 해오셨으니까요. 분명 무탈하게 해나가실 겁니다. 그리고 아서 님과 제가 함께 실무를 살피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업무 공백이 그리 크진 않을 테니까요. 벌써부터 너무 걱정하진 마시지요.”
집사는 그녀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삶에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고 모든 사람들은 그런 시기에 불안감을 느끼니까. 그의 위로는 평범했지만 마르티안은 그의 말이 안정제처럼 느껴졌다. 오래 삶을 살아온 사람의 위로는 똑같은 말이라도 여러모로 더 힘이 있는 법이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다과를 보았다. 달콤한 향이 나는 마들렌이었다.
“……임신하면 그렇게 메스껍다던데,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보통 시기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구요. 메스꺼운 시기가 지나가면 곧 입맛이 아주 좋아집니다. 먹고 싶은 게 많아지고 예민해지죠. 선대 자작님이 자작님을 임신하셨을 때는 한겨울에 생딸기를 드시고 싶어 하셨는데 구할 수 있는 게 조림 딸기가 전부라서요. 그걸로 며칠 동안 신경질을 내셨습니다.”
“어머니가 먹는 거로 신경질을 냈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먹는 것에 아무 욕심이 없었으니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먹었고 그래서 편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어머니가 먹는 거 때문에 신경질을 내다니.
“엘 도안을 임신하셨을 적에도 그랬어? 나는 전혀 그런 걸 못 느꼈는데…….”
“그때는 워낙 몸이 힘드셔서 내실에만 계셨으니까요. 성격이 차분하신 분이라서 신경질을 크게 내신 것도 아니긴 했습니다. 조금 호불호 표현이 명확해진 정도였구요.”
“아, 그럼 아버지가 고생했겠네. 그때 내내 내실에서 함께 계셨잖아.”
마르티안은 그때의 아버지가 왜 그렇게 피곤한 표정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단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어머니를 돌보느라 피곤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피곤함의 이유가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음식을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기사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을 정도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지만 성격은 아주 물렁물렁했다. 특히 사랑하는 상대에게는 꼼짝도 못 하고 상대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려 했다. 자신의 부인에게도 그랬고 자식들에게도 그랬다.
마르티안은 잠시 과거를 되짚어 보다가 이내 추억에서 빠져나왔다.
“나도 그렇다고 하면 아서가 고생을 한다는 소리네. 아, 아니겠구나. 아서는 아마 내가 해왔던 일을 대신하느라 바쁠 테니까 내 짜증은 론이 감당해야 할 거 같은데?”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론을 턱짓했다. 한쪽으로 물러서서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론이 그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머뭇댔다.
“어차피 지금도 마찬가지라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 같지만.”
그녀의 말에 론이 작게 네, 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이 좀 웃겨서 마르티안은 웃었다. 집사는 론이 그리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넘겼다.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집사도 알았기 때문이다.
아서가 침실에 붙어서 마르티안을 돌보는 것보다야 그녀의 업무를 대리하는 게 여러모로 더 효율적이었고, 마르티안의 짜증과 비위를 맞추는 건 론이 더 익숙할 테니까.
이내 아서가 졸업하기 전까지 결혼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과 결정해야 할 것이 줄줄이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집사가 말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언제고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가급적 빨리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마르티안이 한참 집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서재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급하게 났다. 집사가 들어와서 업무를 보고하는 동안 다른 하인이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자 하인이 헐떡대며 말했다.
“집사님. 지금 1층으로 내려오셔야 할 거 같습니다.”
자작가의 1층으로 화려하게 포장된 온갖 상자들이 쌓였다. 크고 작은 상자들은 대충 눈으로 훑어도 오십여개는 되어 보였다. 집사는 난데없는 상황에 미간을 찌푸리고는 구경하려 몰려있는 하인들을 하나하나 쫓아냈다.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로 젊은 남자 하나가 나와서 집사에게 인사했다.
“자작가 집사님이시군요.”
매끈하게 옷차림을 한 남자는 전형적인 귀족가 사용인처럼 보였다. 집사는 그가 이 선물을 여기에 가져다 놓은 장본임임을 눈치챘다.
“누구십니까? 확인도 없이 물건들을 여기에 놓아두다니요.”
“죄송합니다. 중요하게 전달해야 하는 것들이라서 제가 조금 억지를 부렸습니다. 사과드리죠.”
그는 깔끔하게 사과하고는 집사에게 종이를 건넸다. 물품명이 줄지어 적혀있는 종이였다. 포장되어 놓인 것들이 무엇인지 그 목록을 나열한 것 같았다. 53번까지 이어진 목록은 내용이 중구난방이었다. 장식품, 장신구부터 모자나 장갑 같은 잡화들은 물론이고 찻잎과 다기, 목욕용품까지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모두 세반 영지에서 보낸 것들입니다.”
집사가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곳에서 선물을 보낼 이유가 없는데…….”
백작은 마지막에 아주 안 좋게 이곳을 떠났다. 마르티안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자신의 영지로 돌아갔으니까. 그건 이 저택에 있었던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었다. 집사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서류를 다시 보았다. 뭔가 오류가 있는 게 아닐까 살펴보았지만 배달 도착지는 도안 자작가인 것이 분명했고, 목록의 마지막에 적혀있는 사인과 인장은 백작가의 것이 분명했다.
목록을 가져온 남자가 집사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하하, 이유가 없는 선물을 이렇게나 보냈겠습니까? 사실 이 선물도 크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본론은 따로 있으니까요. 이건 그러니까, 그 본론에 덧붙여서 온 작은 성의라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건 백작님께서 준비한 것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합니다.”
집사는 직감적으로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백작가에서 준비한 선물. 수많은 것 중 일부. 본론. 집사가 미간을 찌푸린 순간, 남자가 품에서 밀봉된 서안을 하나 꺼냈다.
“저는 오늘 이걸 전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서안은 금박으로 무늬를 두른 고급스러운 모양새였다. 봉투를 둘러 들어간 금박 무늬는 화려하면서도 세밀했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고 질 좋은 종이로 만든 고급스러운 봉투였다.
집사는 그것을 받으며 이 과도하게 화려한 모양새가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했다. 이내 그는 자신이 비슷한 것을 챙긴 경험이 있음을 깨달았다. 우드 가문에 보낸 서안에 사용했던 봉투와 종이가 이와 비슷했다.
집사가 황망한 얼굴로 남자를 다시 보았다.
“설마하니…….”
머뭇거리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 직접 쓰신 청혼 서안입니다.”
* * *
마르티안은 서안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귀족들의 청혼은 계약이나 다름없으므로 내용상 지키고 밝혀야 하는 것들이 꽤 많았다. 휴이가 직접 썼다는 서안에는 그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담겨있었다. 즉, 그냥 의도만을 밝힌 서안이 아니라 정식으로 요구하는 청혼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같이 보내온 선물 목록이라고 합니다.”
목록에는 값이 얼마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귀금속부터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잡화들, 그녀의 취향대로 맞춘 것이 분명한 찻잎 세트, 목욕용품 등등이 줄줄 적혀 있었다. 보통은 한두 개 정도만 보내지 않나. 마르티안은 이어지는 목록번호가 50개가 넘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서류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집사가 이번에는 물품들을 내려놓았다.
“이것들은 워낙 고가인 물건들이라 확인차 가져왔습니다.”
손바닥만 한 상자들이 줄지어 놓였다. 상자 안에는 귀걸이, 팔찌, 목걸이부터 머리 장식과 머리끈 등 각종 귀금속으로 장식된 섬세한 세공품들이 들어있었다. 마르티안은 황당한 기분으로 그것들을 훑어보았다.
“갑자기 무슨 청혼이야? 내가 지금 아서 우드랑 어떤 관계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청혼은 그 자체로는 제안에 불과하다. 가문의 이익에 따라 개인에게 결혼이 강요될 수는 있겠지만 가문이 가문을 상대로 청혼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런 청혼이야 선물을 돌려보내면서 거절 서안을 함께 보내면 그만이었다.
마르티안은 책상 위에 펼쳐진 것들을 보다가 선물 상자에 적혀있는 공방 이름을 손으로 툭 쳤다.
“확실히 돈이 많긴 하네. 이런 곳에서만 주문한 보니까.”
하나같이 유명하고 비싼 곳들이었다. 귀족이라면 다들 한번은 들어보았을 의상실과 보석 세공점, 마르티안은 여기에 놓인 세공품을 되팔면 자작가의 일 년 운영비쯤은 충분히 나올 거라는 생각을 잠깐 했다. 물론 그렇다고 백작과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건 아니었다.
이제 와 미련이라도 생긴 건지 아니면 이런 것들을 보면 그녀의 마음이 바뀔 거라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게 다 쓸모없는 노력이라는 것이었다. 이걸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바뀌진 않을 테니까. 마르티안은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다.
“선물은 이대로 다시 돌려보내는 거로 하고 거절 서안은…….”
순간 그녀가 말을 멈췄다. 그녀 앞에 놓인 팔찌 세공품 안쪽으로 뭔가가 적혀있었다. 그녀는 그 팔찌를 들어 안쪽을 확인했다. 마르티안 도안 자작. 선물 안에 새겨진 건 그녀의 풀네임과 작위였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그녀는 책상 위에 올려진 선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글자의 크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모든 선물에는 여지없이 그녀의 풀네임과 작위가 새겨져 있었다.
선물 안에 선물 받을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고가품, 특히 청혼용 선물에 이름을 새기는 건 결혼이 확정된 상황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한번 이름이 각인된 세공품은 누군가에게 팔기도 애매했고 다른 사람에게 선물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짓씹듯이 말을 뱉었다.
“이름을 새겼어. 보낸 선물에다가 전부.”
“예? 자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공품에 이름을 새기다니요? 일방적으로 보내는 선물에 그게 무슨…….”
마르티안이 이 청혼을 거절할 거라는 걸 휴이가 모를 리 없다. 그는 이미 이곳에서 거절을 당하고 떠났으니까. 거절당할 청혼을 하면서 선물에 상대의 이름을 새기다니, 차라리 쓰레기통에 돈을 버리는 것이 더 생산적인 일이었다.
마르티안이 선물 상자를 집사 쪽으로 밀었다.
“직접 봐. 거기 안쪽에 적힌 거.”
“……정말이군요.”
마르티안 도안 자작. 새겨진 필체가 쓸데없이 섬세하고 또 선명했다. 그 선물만이 아니라 다른 세공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사는 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참을 머뭇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더, 진심이셨던 모양입니다. 백작님께서 아무래도…….”
마르티안은 집사의 말을 들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진심? 뭐가 진심이란 거야? 선물의 주인이 나라는 걸 밝힌 게?”
그건 몹시 예민하고 날카로운 말투였다. 집사가 말을 멈춘다. 마르티안은 자신 앞의 상자를 그대로 내던졌다. 공단으로 만들어진 상자가 카펫 위로 떨어졌다. 반짝이는 귀걸이가 튕겨 나와 바닥을 굴렀다. 치미는 감정이 억센 숨으로 나와 흘렀다.
“그래, 다들 집사처럼 생각하겠지. 휴이 세블로아드가 마르티안 도안 자작에게 진심으로 구애 중이라고, 얼마나 즐겁게 떠들겠어.”
휴이는 어마어마한 돈을 지불해 청혼용 선물들을 주문했고, 선물마다 그녀의 풀네임과 작위까지 또렷하게 새겼다. 이런 주문이 들어오면 세공점에서 선물에 대한 정보를 그곳에 오가는 귀족들에게 소문을 내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선물 받는 사람이 우아하게 자랑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그건 오래 이어져 온 사교계의 자랑방식이었다.
세공점에서는 이 선물에 대한 것들을 귀족들에게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들은 귀족들은 이 흥미로운 소식을 이곳저곳으로 전했을 것이다. 공작가의 후계자인 미혼의 백작이 한미한 가문의 자작에게 청혼을 한다니. 그 자체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좋은 내용이었다.
마르티안은 백작가에서 온 서안을 손으로 움켜쥐어 구겼다.
“백작이, 내 결혼을 어떻게든 망치고 싶은 모양이야. 이렇게 대놓고 내 정체를 드러내서 소문을 만들려는 걸 보면……. 우드 가문에서 눈치를 보길 바라는 거겠지.”
휴이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쓰레기가 될 것들을 주문한 건, 마르티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상대이니 알아서 행동하라는 뜻이다.
우드 가문은 제국의 남부에 있는 작은 영지였으니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닿진 않았겠지만 금세 알게 될 게 뻔했다. 결혼을 위해 도안가문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하면 바로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녀의 청혼을 수락하는 것도 그로 인해 휴이와 괜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몹시 부담스러워할 것이 뻔했다. 휴이는 자신이 가진 지위를 충분히 아는 자였고 그의 배경은 이 세계에 몸담은 이상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서열이었다.
그러니 휴이의 청혼은 그녀의 주변을 차단하는 행위였다. 그녀는 얼마든지 이 청혼을 거절하고 선물을 돌려보낼 수 있었지만 그뿐이다. 휴이 역시 계속 애 닳은 척 구애를 계속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렇게 구는 동안 그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녀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건 구애의 탈을 뒤집어쓴 마킹이었다.
마킹. 개새끼가 감히 마킹을 했다. 감정이 폭발할 것처럼 치밀어 올랐지만 마르티안은 일단 참았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서 그의 배경과 지위를 무시하고 일을 진행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우드 가문에서 어떤 서안을 보내올지는 이미 뻔했다.
“일단은, 지금 결혼 관련 진행하던 거 모두 멈추고…….”
대응 방법은 하나뿐이다. 휴이가 그녀를 포기하고 모든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이 상황을 무시하는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뒤에야 다시 상대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지금껏 계획한 것들이 전부 무너졌다는 뜻이었다.
마르티안은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집사가 급하게 다가왔다.
“자작님, 이러시면 손을 다치십니다.”
늙은 집사는 마르티안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결혼이야 조금 늦어져도 되지 않습니까. 소문은 또 금방 사그라드는 법이니까요. 기다렸다가 다시 진행하면 되는 일입니다.”
집사는 마르티안이 결혼하는 걸 그렇게 바라왔던 사람이다. 그가 먼저 나서서 결혼이 늦어져도 괜찮다고 말하는 걸 듣고 있으니 마르티안은 자신의 분노가 푸시시 꺼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화는 났지만 적어도 여기서 화풀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쉬어야겠어. 내일 다시 이야기해. 결혼이 무산될 거 감안해서 급한 일만 처리해주고.”
집사는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바로 나가진 않았다. 마르티안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목욕물을 데워서 올리도록 할까요? 따듯한 물로 피곤함을 풀고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 괜찮아. 필요하면 따로 이야기할 테니까…….”
그녀는 괜찮다는 말로 집사를 설득해서 내보냈다. 그대로 침대로 가서 눕자 몸이 가라앉는 것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착했던 개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난리를 쳤지만 금세 비슷한 쾌락에 이끌려 잘 살았다. 개들이 말하는 주인님이라는 말의 무게는 늘 그 정도였다.
‘미친 새끼.’
마르티안은 휴이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를 주인이라고 여겨서 이렇게 구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그녀를 진짜 주인이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굴 수 없었으니까.
주인의 미래를 틀어쥐고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관계를 개선하려 드는 개는 없었다. 그는 그냥 자신의 욕망과 욕구가 가장 중요한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마르티안은 론이 침대로 올라오는 걸 눈치챘다. 그는 몸을 굽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는 그 앞에 가져온 것들을 놓았다. 얇은 회초리와 고무로 만들어진 넓은 매였다.
“……맞고 싶어?”
“네, 주인님.”
주저 없이 나온 소리에 마르티안이 픽 웃었다. 피학에는 아무 재능이 없는 론이 이렇게 나오는 건 그녀의 눈치를 살폈기 때문이다. 주인의 화풀이 대상이 되려는 것이다.
이전에는 그녀가 먼저 나서서 론을 쓰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이제 론은 이런 식으로 도구를 들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된 건 나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감정들이 쉽게 제어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됐어. 오늘은 한계 내에서 멈춰주지 못할 거 같으니까.”
“괜찮습니다, 주인님.”
론이 각오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답했다. 한계를 넘어가는 매질은 피가 터지다 못해 살이 패는 수준인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상처가 아무는 것만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살 아래에 새겨지는 멍과 아픔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갔다. 울음과 고통을 능숙하게 참아내는 론마저도 그런 때는 소리를 지르며 울곤 했다.
물론 그런 경험은 종종 있어 왔다. 마르티안은 가학을 좋아했고 개를 몰아붙이는 것에 능숙했으며 묵묵하고 재미없게 구는 론은 이런저런 실수를 자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매질하는 이유가 론과 완전히 상관없는 타인인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마르티안은 손을 뻗어 론의 무릎을 가볍게 매만졌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태도는 기특했지만 휴이 때문에 인해 론을 매질하고 나면 그 후에 기분이 좋을 거 같지 않았다.
“내 기분 풀어주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오늘은 됐어. 네가 나중에 끙끙댈 때마다 때린 이유가 생각날 텐데 기분 좋을 거 같지 않거든.”
“…….”
“목욕을 하긴 해야겠다. 피곤한 건 분명한데 영 잠이 안 올 거 같은 기분이야. 집사에게 가서…….”
론이 그녀의 옷자락을 꾹 움켜쥔다. 머뭇거리는 얼굴이 그녀를 보고는 이내 다시 아래로 숙여졌다.
“절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마.”
“주인님.”
그녀가 냉정하게 쳐냈는데도 론의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 마르티안은 그 태도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 론을 보았다. 고개가 푹 숙여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목이 이미 붉었다.
“주인님이, 백작님 생각을 안 하셨으면 좋겠어서…….”
“……널 때리면서 네 생각을 하라고?”
“네, 주인님.”
목소리가 머뭇 떨렸지만 쥐고 있는 손은 그대로다. 마르티안은 론의 고개를 들게 했다. 온통 붉어진 얼굴이 그녀를 마주했다. 마르티안은 픽 웃었다. 맞을 도구를 들고 때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수줍은 모양새였다.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릴 거야. 내 상태가 지금 엉망이거든.”
“네, 압니다.”
“압니다, 하고 대답하면 끝나는 게 아니잖아. 화풀이도 못되면 어떡할래, 못 버티면?”
“어떻게든 노력하겠…….”
마르티안은 픽 웃었다. 론은 고통을 몹시 잘 참는 개였지만 그래서 그런지 안일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못 버티면 벌거벗은 채로 복도에 서 있게 될 거야. 구멍에 윤활제를 잔뜩 붓고 유리로 된 모조 성기를 박은 채로.”
론의 얼굴이 긴장으로 잔뜩 굳어진다. 그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고통을 자처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론을 더 몰아붙였다.
“대답해.”
“……네, 주인님.”
그가 각오를 한 것처럼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마르티안에게 만족감과 흥분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개에게 손을 뻗었다. 익숙한 개와의 관계는 기분 전환을 하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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