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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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가에 보고서를 들고 가는 날이 되면 아서는 속옷까지 신경 썼다. 끝까지 삽입하는 날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지만 어쨌든 옷은 늘 벗겨졌으니까.

마르티안은 혼자 일에 집중할 때는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차를 마시며 쉴 때는 당연하게 그를 벗기고 더듬었다. 함께 서류를 보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그녀의 손에 가슴이 쥔 채로 헐떡이게 될 때가 많았다.

“가슴으로도 제법 느끼는 거 같은데.”

가슴을 꽉 틀어쥐는 손이라던가 유두를 문질거리는 손가락은 흥분보단 수치를 더 일으켰다. 아서는 매번 벌게진 얼굴로, 남자도 가슴으로 흥분한다는 게 당연한 건지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껏 가슴을 만지면서 느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쨌든 마르티안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가슴을 만지고 그의 바지를 끌러냈다. 속옷을 신경쓰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녀의 손은 몹시 능숙했지만 늘 조금 거칠었다. 귀두를 손가락 끝으로 비빈다거나 고환을 한 손으로 쥐고 굴리듯 매만지는 식이었다.

악력이 조금만 더 셌다면 분명 고통스러웠을 테지만 얼얼한 자극은 언제나 그 직전에서 배회하곤 했다. 덕분에 아서의 성기는 끝까지 흥분했고 제대로 삽입하기 전에 사정하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마르티안은 아서를 능숙하게 다뤘지만, 아서는 마르티안의 흥분을 이끌어 내는 일에 있어서 자주 실패했다. 그는 그녀에게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걸 떠올리며 혼자 창피해하곤 했다.

“여분의 속옷은 다시 들러서 챙기는 거로 하고…….”

그가 남아있는 속옷을 확인하며 중얼댄다. 마르티안은 그가 혼자 속옷을 적셔도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옷은 갈아입으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서가 머무르는 방은 저택 안에 있었고 그가 챙겨온 옷도 다 여기에 있었다. 마르티안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처럼 집사에게 아서의 방에 들러서 새 속옷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건 몹시 민망한 상황이었다. 아래를 질척하게 적신 채 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 다행이었지만, 집사에게 세세한 상황을 다 밝히는 것만 같아서 그게 좀 어색했다.

그래서 아서는 이제 스스로 속옷을 챙겨서 올라갔다. 그가 무슨 색의 속옷을 여벌로 가져갈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였다.

엘 도안이 방문을 벌컥 열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아서가 속옷 서랍을 급하게 닫았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

“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 벌써 나갈 준비 끝났어?”

“시간이 몇 신데 당연히 끝냈지. 요즘 교수님 완전 예민해졌잖아. 괜히 눈 밖에 날 짓은 하지 말아야 돼. 삼박 사일은 들들 볶인다고.”

“하긴 요즘 좀 심하시긴 하지.”

아서는 대충 대꾸하며 어젯밤에 챙겨둔 옷을 입었다. 가져온 옷 중 가장 괜찮고 고급스러운 옷이었다. 엘은 이제야 옷을 챙겨 입는 그를 훑어보다가 일순, 미간을 찡그렸다.

“너 여기서 누구랑 잤어?”

“뭐?”

“잤냐고. 지금 옷차림도 그렇고 아까 속옷도 그렇고 밤 나들이 있을 때 하는 꼴 같은데?”

옷차림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아서가 입고 있던 속옷은 확실히 밤 나들이용이었다. 아래에 딱 달라붙어서 성기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속옷은 상당한 고급품이었으니까.

엘 도안은 의구심을 가진 채 아서를 살폈다. 저 속옷을 입는 날이면 어김없이 밖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왔으니까.

“누구랑 잤어? 우리 가문에서 일하는 애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고…….”

“아니긴 뭘 아니야? 그거 입은 날에는 외박이었으면서.”

둘은 교육원에서 같은 방을 썼고 그래서 서로 아는 것도 많았다. 아서는 시선을 회피하며 남은 옷을 급하게 챙겨 입었다. 늦겠다. 그런 소리를 하며 나가려는 그를 엘 도안이 붙잡았다.

엘 도안은 평소에는 맹맹하게 굴어도 한 번 완고해지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타입이었다. 망했다. 아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왜 한숨을 내쉬어? 내가 내쉬어야지. 우리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이지? 누구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너 좋자고 건드린 거야? 아니면 쌍방이 가볍게 놀자고 한 거야?”

“건드리긴 누가 건드려. 야, 우리 이러다가 아침도 못 먹고 나가야 해.”

“아침은 그냥 굶어. 누구야? 우리 가문 일인데 그냥은 못 넘어가. 일리? 에나? 레아?”

“내가 무슨 짐승 새끼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버럭 대답하는 그를 보며 엘 도안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그는 아서의 정강이를 퍽 찼다.

“시끄러워. 내가 널 몇 년을 봤는데. 그럼 누군데?”

“알면 어쩌려고. 도와주기라도 하게?”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서가 대꾸했다. 그의 입이 튀어나오며 눈썹이 내려갔다. 엘 도안은 억울한 척을 하는 그를 한심하게 내려 보다가 도와달라는 말에 멈칫했다.

“뭐야, 뭘 도와줘? 네가 별로래?”

“……내 몸은 나빠하지 않은 거 같은데 나머지는 가봐야 하는 상황이고. 아직은 평소랑 다를 바는 없어.”

엘 도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서가 지참금 문제로 매번 반강제적으로 가벼운 연애만 하고 있다는 걸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또 그렇다니, 풀죽은 개처럼 앉아있는 모습이 제법 불쌍해 보인다. 엘은 화내려던 것을 조금 죽이고 다시 물었다.

“그쪽은 가벼운데 너만 진지한 거야?”

“그런 거까지는 아니고. 아무튼 내가 더 잘해야 하는 입장이라…….”

엘 도안은 대체 누구냐고 되물으려다가 일순 멈칫했다. 원래 단점이란 상대적인 법이었다. 아서가 가진 단점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 상대방일 때 생겨나는 단점이다. 일반 평민이나 비슷한 수준의 귀족이라면 아서 역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귀족, 교육원 출신. 수도에서 일할 가능성이 높은 남자.

그 장점들은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상대가 귀족……인 건 아니지? 설마, 그러니까.”

그는 잠시 머뭇댔다. 합리적인 판단에 의하면, 이 상황이 가리키는 아서의 상대는 한 명뿐이었다. 그가 다시 “아니지?”라고 물었다. 차마 주어를 붙여서 묻지는 못했다.

아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서 아니라고 해, 엘 도안이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아서가 한숨처럼 고백했다.

“어, 맞아. 자작님이야.”

“그걸 왜 지금 이야기해! 이 미친놈아!”

엘 도안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날 엘 도안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하루를 보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처럼 넘쳐났지만 오늘은 아서가 자작가에 보고서를 제출하는 날이었다. 같이 있질 않으니 뭘 더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 미친놈이 저택에 붙잡혀 있다고 불쌍하게 여겼더니, 진짜, 하아……. 게다가, 뭐, 결혼? 누님이 결혼을 하자고 했다고?’

급하게나마 들었던 이야기는 그저 입이 떡 벌어지는 내용뿐이었다. 자꾸 떠오르는 생각으로 인해 엘 도안은 보고서에 집중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쓰던 것을 멈추고 종이에 이마를 쿵 찧어 엎드렸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아서는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도안 자작가는 고급인력이 늘 부족했던 영지였고 아서가 가지고 있는 지식들은 영지를 꾸려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으니까.

마르티안 역시 자작가를 더 발전시키려는 맥락 하에서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일하는 모습을 보았으면 더 그랬을 것이고. 하지만.

‘그럼 백작님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가 푸, 하고 숨을 내뱉었다. 그가 보기에 백작은 마르티안과의 관계에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아서가 엮이게 될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했다니, 오늘 아침의 일로 보건대 마르티안과 아서는 제법 관계가 깊어진 게 분명했다.

‘누님, 제발…….’

백작이 아직도 저택에 남아있는 걸 보면 결혼 이야기를 알린 거 같진 않았으니까. 엘 도안은 마르티안을 존경했고 언제든 그녀의 편을 들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이 상황은 정말 별로라고 생각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끙끙대자 다른 조사단원이 오늘따라 집중이 왜 이렇게 못하냐며 타박을 주고 지나갔다.

엘 도안은 저택으로 돌아가자마자 아서를 찾았다. 어, 왔어? 책상에 처박혀 일하고 있던 아서가 어색한 얼굴로 그를 맞았다. 방 안에는 잠을 깨워주는 종류의 차향이 짙게 났고 책상에는 밀린 보고서들이 가득 쌓여있다. 보기만 해도 질리는 양이었다.

“저거 끝낼 수 있긴 한 거야?”

“밤새워서 하다 보면 끝이야 나겠지.”

“미쳤네. 쓰러지기라도 하게?”

오늘 하루를 통으로 날렸으니 이삼일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할 게 뻔하다. 그의 구박에도 아서는 그저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나름 내 인생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지만 간절함이 드러나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모습이 한심하고 불쌍해서 엘 도안은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생각해 보니까 네가 누님과 결혼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더라고.”

아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 표정이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 엘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너 그건 확인해 본 거야?”

“뭐?”

“백작님하고 관계.”

“아, 물어봤어. 서로 책임지지 않는 관계라고 하시던데? 3개월인가 그렇게 만나다가 말 거라고 했고.”

아서는 상황을 되새기는 것처럼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을 더했다.

“물어보면서 사실 좀 선을 넘은 건가 싶긴 했거든. 근데 그냥 다 알려주시더라고. 솔직히, 음, 내가 뭐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잖아. 주제넘게 간섭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무튼 다 듣고 나니까 뭔가, 음, 좀 존중받는 기분이 들어서, 그, 좋긴 하더라.”

그 말을 들으며 엘 도안은 자신이 왜 찝찝함을 느꼈는지 깨달았다. 아서의 태도에서 뭔가 수줍음 같은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분명 전에도 느껴본 적 있는 것이었다.

백작이 그에게 마르티안에 대해 말할 때 보여주던 그 태도와 느낌. 엘 도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분위기를 깨자고 하는 소리는 아닌데.”

아서가 그를 바라본다. 느긋하고 능글거리는 표정만 짓는 줄 알았는데 지금은 약간 멍청이처럼 보였다. 엘은 한숨처럼 말을 뱉어냈다.

“백작님은 그냥 가볍게 만나는 거 아니야. 전에 나한테 직접 말했었어. 물론 누님은 가볍게 만나는 건 거 같은데……. 후우, 아무튼 그래…….”

“그러니까 네 말은 백작님 쪽이 더 마음이, 있다는 거야?”

“그래.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누님한테 확실히 말해놔. 백작님과 맞부딪치는 상황이 되면 어떡하려고? 솔직히 감당 못 할 거 아니야. 너희 형이 결혼을 허락해 주지도 않을 거고.”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그가 중얼댄다. 일할 때는 지나치게 머리를 굴리더니 멍청이가 다 된 모양이었다. 엘 도안이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뱉었다.

“빨리 확인해. 별문제 없으면 얼마든지 축하해 줄 테니까.”

“근데 그게……. 내가 이미 한 번 그 이야기를 꺼냈잖아. 답도 들었고. 근데 그걸 또 묻기가 좀 그래서…….”

원래는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야 할 일이었는데 일부러 물어서 답을 들은 상황이었다. 또다시 묻는다는 건 상대를 추궁한다는 소리밖에는 되질 않았다. 아서는 시든 얼굴로 한숨을 뱉었다. 엘 도안이 답답하단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 어떡하게? 나중에 잘못되면 더 문제잖아.”

“그건 그렇지……. 엘. 혹시, 네가 좀 알아봐 주면 안 돼?”

“그게 말이 되냐? 내가 거길 왜 끼어?”

“……백작님이 너한테 그, 이야기도 했다며……. 백작님이든 자작님이든 넌 혈연이고 하니까 말 꺼내는 것도 더 나을 거고…….”

엘은 자신의 미간을 꾹 눌렀다. 차라리 아예 몰랐어야 했는데 굳이 끝까지 추궁한 자신이 너무 싫었다.

“이게 진짜 별걸 다 시키네. 나보고 두 사람을 떠보라고? 안 돼, 못 해.”

질색하는 대답에 아서가 한껏 불쌍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알아. 나도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진짜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누님이 그전에도 잘 대답해 줬다면서?”

“그건 첫 번째였잖아. 또 물어봤다가 괜히 추궁하고 의심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자작님하고 관계가 안 좋아져서 일이 틀어지면……. 엘 제발, 내가 네 거 장문 보고서 두 개 받아갈게. 아니, 더 줘도 돼. 그러니까 좀 네가 해주라. 백작님이나 자작님이 화를 낼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넌 안전하잖아.”

아서는 제게 다가온 기회를 이런 식으로 잃고 싶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잃게 될까 봐 무서웠다. 엘 역시 그의 절박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았다.

“그러다가 괜히 더 문제가 커지면 어떡하려고. 일이 꼬이면?”

“꼬일 게 뭐가 있어. 그냥, 안될 일이 안되는 거겠지.”

잔뜩 우울한 얼굴로 아서가 대답했다. 그게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는지 엘 도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모른 척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 아무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그가 아서의 방을 나섰다.

* * *

세반 영지는 여러모로 성격이 독특한 땅이었다. 국경 지역이었고 제국이 나서기 전까지는 의도적인 방치로 인해 침략과 수탈이 반복되었던 곳이었다.

영지민 마을은 국경에서 가급적 먼 곳에서 작은 단위로만 존재했고, 국경 근처에는 머무를 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제국이 직접 관리한 이후부터는 안정을 찾긴 했지만 번화가와 시장이 자리를 잡고 상업적 교류가 활발해진 건 십여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상인들이 오가는 길이 안정화 되고 제법 큰 시장들이 들어선 건 고작 몇 년, 세반 영지는 한창 체계를 세워 나가는 중이었다. 관리병을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부터 시장세와 같은 세금의 문제까지. 하나하나 따지고 정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였다.

휴이는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서류와 편지들을 보았다. 대부분 그의 영지에서 보낸 것들이었다. 그에게는 실력이 좋은 실무자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결정권자의 재가가 필요한 서류가 너무 많았다.

물론 그는 조사 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 근처에 집이라도 구해야 하나? 자작은 별로 좋아할 거 같지 않은데……. 아니면 무슨 다른 핑곗거리가…….’

자주 찾아와서 머물만한 핑곗거리. 휴이는 그것을 고민하며 책상 위에 둔 연고통을 열었다. 그건 그의 주치의가 보낸 상처용 연고였다. 옅게 남은 얼굴의 상처에 연고를 덧발랐다.

그의 주치의가 보낸 약은 확실히 효과가 좋았다. 멍을 빼거나 붓기도 쉽게 가라앉아서 마르티안에게 맞은 자국도 이것을 바르면 금세 가라앉곤 했다. 그런 부분은 좀 아쉬운 면도 있어서 그는 얼굴 외에는 이 연고를 쓰지 않았다.

연고를 바르고 그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의 양을 눈으로 훑었다. 처리해서 보낸 양만큼의 서류가 오늘 아침 또다시 도착했다. 그의 하인들은 서류를 전달하고 받느라고 근래 들어 아주 바빴다.

그는 가장 위에 있는 서류를 들고 의자에 앉았다.

“읏…….”

뒤에 넣어놓은 모조 성기가 일순 내벽을 꾹 눌렀다. 모조 성기를 넣고 생활한 지 벌써 일주일째, 이물감은 꽤 익숙해졌지만 갑자기 짓눌리는 이런 감각들은 매번 그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으며 엉덩이를 들었다가 느릿하게 다시 앉았다.

마르티안과 관련되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주로 일을 했다. 어쨌든 집중할 곳이 있다는 건 멍하니 주인을 기다리는 것보다야 나은 구석이 있었다.

쌓여있던 종이들이 그의 손을 거쳐서 반대편에 놓였다. 대부분은 영지 내 세금에 대한 내용이었지만 일부는 백작가의 저택 수리에 대한 것도 있었다.

그의 저택은 원래 영지 내에 있던 기존저택을 뜯어고친 결과물이었다. 새로 저택을 짓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일단 그 저택을 수리해서 사용하기로 했다. 연회장과 손님방 그리고 휴이가 머무르는 곳 몇몇은 보수가 끝났지만 남은 곳들은 아직도 보수증축이 진행 중이었다.

집사장은 그의 취향을 잘 아는 사람이어서 선택지를 늘 훌륭하게 좁혀 왔지만, 어쨌든 최종결정은 그가 해야 했다. 제법 큰 돈을 쓰는 일이다 보니 관련된 서류가 꽤 되었다.

휴이는 저택에 대한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는 집사장에게 전달할 내용을 적었다. 추가한 내용은 특별하게 꾸밀 손님방에 대한 내용이었다.

‘도안 자작가에서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 그걸 이유로 초대하는 거로 하면 되겠지.’

휴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 자신의 저택에 마르티안이 있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풀렸다. 자신에 공간에 있는 주인님이라니.

그는 마르티안이 왔을 때를 상상하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다가 이내 어울릴 옷들과 여러 장신구들까지 떠올렸다. 아,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 걸 깜박할 뻔했어. 휴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르티안이 그런 것을 좋아할진 모르겠지만 원래 선물이란 주는 사람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휴이는 마르티안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쭉 적어나갔다. 값비싼 재질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적혔다.

그가 선물하는 것들은 지금껏 어떤 개들도 해주지 못한 수준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달아올랐다. 마르티안의 처음을 차지할 구석이 생겼다는 게 좋았다.

그는 백작가 집사장에게 보낼 편지를 따로 썼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값비싼 공방과 의상실들을 골라 한껏 돈을 쓸 작정이었다.

집사장에게 보낼 편지를 마치고 휴이는 새로운 종이를 한 장 더 꺼냈다. 수신인은 달밤가의 관리자다. 그는 애초에 일반적인 선물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마르티안이 자신에게 써줄 선물이자, 그녀가 좋아할 만한 진짜 선물. 그건 집사장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일을 더 잘해줄 터였다.

편지의 내용은 길지 않았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돈과 권력에 바짝 엎드리는 관리자는 적당히 써도 최선을 다해 움직일 것이다. 그는 두 편지를 바로 하인에게 전달했다.

* * *

조사단은 최종 보고서를 일차적으로 취합하여 수정하는 중이었다. 숲 관리소에 굳이 나갈 이유가 없는 서류작업이었지만 교수는 늘 새벽같이 조사단을 이끌고 숲 관리소에 나가 처박혔다. 자작가 사람들을 볼 낯이 없다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 그건 조사단을 책망하기 위한 말이었다.

자작가에서는 아서를 부려먹는 것 외에는 상당히 합리적으로 그들을 대우하고 있었다. 나오는 음식과 디저트는 물론이고 저택 안 하인들이 조사단을 챙기는 수준도 처음과 다를 바 없었고, 가끔가다 한 번씩 얼굴을 비치는 자작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보통은 그렇게 눈치를 주며 태도를 달리한다고 하던데 전혀 그런 건 없다. 대신 조사단을 두들겨 패듯이 닦달하는 건 교수였다.

“이게 지금 최종 보고서야? 처음부터 다시 해. 내용 앞뒤로 보강하고, 여태까지 검사한 내용들 성분들 전부 빼놓지 말고.”

교수는 최종 보고서 취합한 것을 확인하고는 각자에게 보강할 내용을 두 배씩 안겨 주었다. 조사단 사람들은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낼 기운도 없어서 억지로 늘린 내용을 더 억지로 늘리기 위해 책상에 처박혔다.

엘 도안 역시 자신의 몫을 돌려받았고, 오늘 자작가에서 일하느라 이 자리에 없는 아서의 것까지도 함께 받았다. 엘 도안의 것보다 훨씬 두툼한 양이었다.

비실대며 자리로 돌아간 조사단이 하나둘씩 쪽잠을 자기 시작했다. 교수가 규칙적으로 잠드는 낮잠 시간이야말로 그들이 마음을 좀 놓고 쉬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엘 도안은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아서의 몫을 통째로 들어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는 바로 저택으로 향했다.

“도련님, 언질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예고 없이 찾아온 엘 도안을 집사가 급하게 나와 맞았다. 집사가 깜짝 놀란 얼굴이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해서, 엘은 예민해진 기분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서에게 전할 게 있어서 왔어.”

그는 품에서 봉투에서 꺼내 보였다. 사실 보고서 수정 사안을 전달하는 게 아주 급한 사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서는 오늘 내내 자작가의 일을 하느라 보고서 따위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그럼에도 그가 온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아서는 지금 누님과 함께 있나?”

“예, 서재에서 같이 있으실 겁니다. 곧 다과를 가지고 올라가려고 했는데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아니, 아니야. 아서만 좀 불러서 이것만 전달하고 말 생각이거든. 굳이 그사이에 끼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으니까.”

그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집사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집사 역시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티안은 아서에게는 백작에게 하듯 굴진 않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일만 시키지도 않았다.

“누님은 아서랑 결혼할 생각이라던데?”

“아직 확실한 이야기가 나온 건 아닙니다만……. 자작님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 같았습니다.”

그건 사실상 확정이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한쪽이 영지와 작위를 가진 귀족이고 한쪽은 그렇지 못한 경우에, 결혼에 대한 결정권은 작위와 영지를 가진 쪽에 있었으니까. 마르티안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아서와 결혼하는 데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보통 일반적으로는, 분명.

“……백작님은 아직 2층에 머무르시나?”

엘 도안은 한숨을 내쉬듯이 물었다.

“예? 아, 예. 가장 안쪽에 있는 손님방에 머물고 계십니다.”

“영지에서 일이 많은 모양인데 아직까지 여기 계신 모양이야.”

집사가 약간 불편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답한다. 엘 도안 역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누이의 사적인 관계에 간여하고 싶지 않았다.

최근 들어 아서가 너무 한심하고 울적한 꼴로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그 몰골이 된 시발점이 자신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저택에 오지 않았을 것이다.

‘충고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가 아서에게 백작에 대해 이야기한 뒤부터가 문제였다. 아서는 눈에 띄게 축 처지기 시작했다. 엘 도안은 그렇게 굴 바에야 백작에 대해 제대로 물어보라고 설득을 몇 번 했지만 아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확인이 되지 않는 부정적인 미래란 우울을 낳기 마련이어서, 그는 우울한 얼굴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괜찮은 속옷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그 모든 것이 엘 도안의 입장에서는 영 찝찝한 상황인 것이다. 어쨌든 아서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만약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는 아서의 등을 몇 번 후려갈기며 정신을 차리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아서를 데리고 장난을 치는 건지 아닌지 모를 상대는 그의 친누이였고, 그의 우울과 불안을 증폭시킨 원인은 자신의 입이었느니 신경을 안 쓰고 싶어도 안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잠시 머뭇대며 서 있다가 결국 집사에게 물었다.

“백작님은 아시나?”

앞뒤 내용을 거의 다 생략하고 물었지만 집사는 그 물음을 단번에 이해했다. 그건 근래 들어 집사도 좀 찝찝해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물론 마르티안이 아무 언질도 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집사가 함부로 나설 순 없었다.

“제가 뭐라 이야기를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도련님.”

“그래, 그렇겠지.”

엘 도안은 한숨을 뱉었다. 집사의 애매모호한 대답은 곧 백작이 모른다는 소리였다. 만약 백작이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면 집사는 분명 알고 있다고 대답했을 테니까.

‘아서만 아니었으면 모른 척할 텐데…….’

그랬다면 엘 도안은 결코 끼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로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백작을 불쌍히 여기기야 하겠지만 그 정도 감상에서 끝날 문제였다. 솔직히 말하면 백작은 잘나고 잘난 인물이니 배려 없이 차인다고 한들 그에게 대단한 타격이 될 거 같지도 않았다.

반대로 백작이 진심으로 상대를 압박하려 들어서 중간에 끼인 누군가가 밀려난다고 해도, 그의 감상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쨌든 도안 자작가에 피해가 가지 않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백작님이 진심인지만 좀 확인하고 다시 아서에게 넘기거나 누님에게 좀 말을 해서 상황을 정리하게끔……. 그래, 확인만 하는 거니까…….’

최대한 문제가 되지 않을 상황으로 상상을 하려고 해도 속으로는 한숨이 푹푹 나왔다. 엘 도안은 마음을 정하고는 계단을 올라가던 걸 멈췄다. 집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집사, 이건 그냥 집사가 전해줘. 나는 방에서 쉬었다가 갈 테니까.”

“아, 그러면 드실만한 걸 방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샌드위치 튀김을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그냥 간단한 팬케이크가 좋겠어. 단 조림이랑 크림 올려서.”

샌드위치 튀김은 맛있지만 이 상황에 먹기에는 너무 묵직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먹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맛있는 걸 먹어야 기운이 날 거 같았으니까. 자신이 이렇게 쓸데없이 굴었다는 걸 마르티안에게 들키게 된다면, 엘 도안은 그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영문을 모르는 집사는 그저 그의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며 걱정을 할 뿐이었다.

“조금 누워서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음식은 만들어지는 대로 가져다 놓으라고 하겠습니다.”

엘 도안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백작의 얼굴을 보는 건 돌아가는 길에 잠깐 해도 그만이었다. 이 찝찝한 상황에서 말을 길게 할 생각도 없었고, 확실히 잠이 많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엘 도안은 집사에게 서류를 넘기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엘 도안이 잠에서 깬 건 늦은 저녁이었다. 그는 퍼뜩 눈을 뜨고는 창밖을 확인하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저택에 도착했는데 이미 해가 가라앉았다. 하루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미쳤지. 그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식어버린 팬케이크를 보았다. 깨워주지.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애초에 깨워달라고 말하지 않은 그의 탓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귀족을 하인이 이유도 없이 깨울 수는 없었으니까.

“아, 정말 여러모로 망했네…….”

포크로 식어버린 팬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고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게 식은 음식은 그래도 달고 맛있긴 했다. 엘 도안은 급하게 옷을 챙겨서 백작이 머무는 방으로 내려갔다.

엘 도안이 백작의 방에 찾아갔을 때 그는 서류의 산처럼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아 여기도, 이런 꼴이네. 아서의 책상과 비슷해 보이는 그의 책상을 보며 엘은 한숨을 삼켰다. 휴이는 보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이야. 최종 보고서 때문에 많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여기까지 다 오고. 읏, 후으…….”

소파에 앉으며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뱉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라 엘 도안은 멈칫했다. 섬세하게 주조한 장식품 같은 백작의 외모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살이 조금 빠진 거 같기도 했다. 한때 제법 오래 아프긴 했지만 그건 이제 한참 전의 일이었다.

의아하게 그를 보던 엘은 이내 납득했다. 그의 책상이 다시 보였기 때문이었다. 처리할 일이 산처럼 많으니 상태가 좋을 리 없었다.

“백작님이 일하시는 걸 보니 저희보다 더 무리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희야 워낙 할 일을 하는 거지만요. 많이 피곤하신 거면 저는 그냥 가볼 테니 누워서 쉬시는 게…….”

“아니, 일이 좀 많긴 하지만 그래도 무리할 정도는, 후으, 아니니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그는 느리게 숨을 뱉어내며 등을 소파에 기댔다. 그의 몰골이 확실히 좀 지치고 힘들어 보여서 엘 도안은 또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가 이렇게까지 일하면서까지 도안 자작가에 남아있으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뻔했으니까. 휴이의 마음이나 확인하고 말려고 했던 다짐이 목 안에서 덜컥 걸린다. 엘이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자 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들른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편하게 말해도 돼. 얼마든지 들어줄 마음이 있으니까.”

그건 호의가 넘쳐나는 태도였다. 엘 도안은 다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가 자신에게 왜 호의를 보이는지도 알고 있었으니까. 모두 마르티안,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엘은 차마 그를 떠보는 소리를 하지 못하고 다른 말을 입에 올렸다.

“이전에 아프다고 하셨을 때 찾아오질 못해서요. 안부를 물을 겸 들렸습니다.”

“흐음, 그래? 그것 아쉽네.”

“예?”

“뭔가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줬으면 했는데. 그 김에 도안 자작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아…….”

“좋아하는 게 뭔지, 취향은 어떤지, 최근 가지고 있는 관심사나 뭐 그런 것들 말이야. 자작에게 선물을 좀 하고 싶어서. 사실 이미 몇 개는 이미 정해놓긴 했는데, 그래도 자작이 좋아하는 것을 더 추가하면 좋을 테니까.”

그는 엘 도안을 보았다. 말투는 부드럽고 느슨하긴 했지만 사실은 상당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부탁하는 말 없이 상대에게 원하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화법, 그건 그가 자신이 가진 지위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귀족 중의 귀족이자 넘치는 돈을 가지고 있는 재력가. 그게 그의 배경이었다.

엘 도안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동정심을 죽이기 위해 애썼다. 어쨌든 휴이보다는 아서가 더 아쉽고 안타까운 위치에 있긴 했으니까. 아무리 무례하게 차인다고 해도 휴이의 지위와 재력은 그대로였다.

그러니 대단히 불쌍해지긴 어려운 상대인데도 엘 도안은 양심이 찔리는 기분을 막을 수가 없었다. 조금 빠른 어조로 말을 쏟아내는 휴이의 얼굴이 설렘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도안 자작이 목욕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 그래서 입욕제나 오일 같은 건 충분히 준비할 생각이고.”

“……그러시군요.”

“여기에서 한참 신세를 졌으니 돌아가게 되면 자작을 초대할 생각이야. 손님용 방을 새롭게 꾸미는 중인데 자작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가능한 좀 오래 머물러줬으면 좋겠고.”

엘 도안은 서재에 있을 아서와 마르티안을 떠올렸다. 차라리 백작과의 관계를 지속할 거라고 말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들뜬 휴이의 모습을 보며 불쌍하단 생각을 하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마르티안은 백작과의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었고 엘 도안은 아서에게 들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마주 보는 백작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이 상황이 여러모로 고역이었다. 휴이가 그를 살피다가 말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불편한가?”

그는 눈치가 너무 빨랐다. 엘 도안은 손을 내저으며 급하게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누님의 취향을 많이 아시는 것 같아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야 자주 같이 있으니까. 그래도 자작의 욕실 안까지는 자주 가보질 못해서 그렇게 대단히 많은 걸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 말을 하며 그의 미간이 불만스럽게 좁아졌다. 욕실에 자주 가보지 못한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엘 도안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백작이 너무 티를 낸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 이유가 감정이 너무 흘러넘쳐서라는 생각이 들면 또다시 불쌍하다. 엘 도안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저, 혹시, 백작님은 결혼 생각은 없으십니까?”

“결혼?”

“예, 결혼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을 거 같은데 제가 알기로는 약혼자도 없으시다고 들어서요.”

“결혼이라……. 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나?”

“예? 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냥 백작님이 어떠신지 궁금해서…….”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이상한 기색을 느낀 휴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와 엘 도안은 생경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마르티안을 두고 엘 도안에게 고민 상담하듯 굴긴 했지만 그 외의 개인적인 화제를 놓고 대화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엘 도안이 따로 찾아와 결혼 관련 이야기를 근황으로 묻다니.

휴이는 엘 도안의 표정을 보다가 직접적으로 그 화제를 끄집어냈다.

“나는 결혼한다면 도안 자작과 하고 싶어.”

“아…….”

“표정이 왜 그러지? 내가 자작과 결혼하진 않을 거 같았나?”

“그, 아무래도요. 지위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격차가 벌어지는 부분이 있으니까……. 또, 어, 그러니까, 작위 계승문제도 있구요.”

그건 대답이라기보다는 설득 같은 어조였다. 부디 결혼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투였다. 휴이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전까지의 엘 도안은 내심 자신과 마르티안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 주려고 노력했었으니까. 엘 도안이 꼽는 단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그의 배경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도안 자작이 결혼이라도 하나?”

짜증이 섞여 튀어 나간 말에 엘 도안이 움찔 굳었다.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당황한 표정이었다. 휴이는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이 진실에 닿았음을 눈치 챘다. 동시에 이해가 어려웠다. 결혼. 결혼이라니. 갑자기 누구와. 근래 들어 그녀의 행동반경은 저택에서 벗어나질 않았으니까.

지금까지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자신과 애첩을 두고 쓰거나 조사단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게 전부였다. 조사단. 휴이는 조사단으로 이 저택에 머무르는 귀족자제들을 떠올렸다.

엘 도안 또래의 남자들은 작위가 전혀 없는, 그랬기에 작위 있는 귀족과의 결혼이 간절한 부류들이었다.

“조사단 중에 있나? 누구지?”

결론처럼 묻는 말에 엘 도안이 그의 눈치를 보며 어물댄다. 휴이는 그가 더 이상 자신이 편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랬기에 그가 마르티안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부정적으로 답을 한 것이다.

휴이는 그를 추궁하지 않고 현재까지 조사단의 일정을 빠르게 되짚었다. 마르티안과의 접점이 있을 만한 내용을.

‘결혼까지 발전할 만큼의 시간이, 어디서…….’

마르티안은 조사단과 자주 식사하지 않았다. 동생인 엘 도안이 실무를 처리하는 덕분이었다. 결혼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한 상대와 그런 상대와 결혼을 논의할 만한 시간. 그런 접점이 대체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판단 이전에 비참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그가 엘 도안에게 말했다.

“그만 나가. 어차피 내 생각을 해서 여기 온 것도 아닌 거 같으니까.”

그건 몹시 권위적인 말투였다. 엘 도안은 움찔 굳었다. 냉정하게 굳은 그의 표정은 몹시 화려했지만 그만큼 차가웠다.

엘은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음을 느끼고 조금 후회했다. 차라리 대놓고 말하는 게 나았을까. 일부러 숨기려고 한 모양새가 되었다. 아니 일부러 숨기려 한 건 사실이었지만.

엘 도안은 상황이 나아질 구석이 없음을 깨닫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백작님. 눈치를 보며 인사하는 그에게 휴이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조사단이 숲 관리소에서 살다시피 하게 된 이후로 도안 자작가의 식당은 크게 쓰일 일이 없었다. 마르티안은 보통 침실이나 서재에서 식사를 했고, 백작은 백작의 방에서 식사를 했다. 집사가 바쁜 때이기도 했다. 마르티안의 식사를 챙겨서 전달하고 나면 백작의 몫으로 만들어진 저녁 식사를 날라야 했으니까.

백작이 마르티안과 사적인 관계가 된 이후로, 두 사람의 개인 공간에 들어가야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집사가 직접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한창 엉망인 꼴이었던 백작은 정원 산책 이후에는 점차 나아가는 중이었다.

집사는 그게 일말의 위안이라고 생각하며 트레이를 움직였다. 그날 보았던 여러 장면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심장이 다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집사가 백작의 방에 음식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을 때 백작의 모습은 평소와는 달랐다. 책상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거나 아니면 침대에 누워 있는 게 보통이었는데, 오늘은 옷을 차려입고는 어디 나가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거울을 보고 있었으니까.

“어디 나가십니까?”

“도안 자작을 보아야 할 거 같아서. 자작은 지금 어디서 식사 중이지?”

그 말에 집사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마르티안은 서재에 있었지만 혼자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끔하게 모양새를 갖춘 백작이 집사에게로 몸을 돌렸다.

“서재인가 아니면 침실?”

“서재에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일하시는 중이라서…….”

“식사를 거르고 일하는 중인가?”

“음식은 전해 드렸습니다.”

“그럼 내 식사도 그쪽으로 다시 올려.”

백작은 트레이를 한번 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집사는 곤란한 얼굴로 잠시 머뭇댔다. 약속을 하신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할 텐데 그랬다가는 지금 서재에 마르티안이 혼자 있지 않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게 될 거 같았다.

어차피 상관없는 걸까. 집사는 마르티안의 새로운 상대가 조사단 중 하나고 표면적으로는 업무를 위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자작님께서 숲 조사 관련해서 보고를 받는 중이십니다. 조사단에서 나온 분과 아직 대화가 끝나지 않아서…….”

“조사 보고? 엘 도안이 하고 있던 거 아닌가?”

“몇 주 전에 바뀌었습니다. 아무래도 바쁜 일정이다 보니 담당자를 바꿔주었다고……. 백작님?”

그는 말을 멈췄다. 휴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귀족 특유의 여유와 오만함이 일시에 사라진 것 같은 얼굴이다. 괜찮으십니까? 집사가 다시 한번 되물었을 때였다. 그는 그대로 문으로 걸었다.

백작님? 집사가 황급히 소리치듯 그를 불렀지만 휴이는 그대로 마르티안의 서재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저택이 넓지 않아서 그는 금방 서재까지 올라왔다. 복도는 평소처럼 그저 조용했다. 그는 서재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주저했다. 자작가의 최상층은 방음시설이 매우 잘 되어 있어서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조금의 소음도 바깥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고요한 복도는 그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고, 실컷 뛰는 심장은 너무 복잡한 감정에 시달리느라 정작 어떤 감정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들어가서, 확인을 하고, 그리고 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을 때는 예민하게 돌아가던 머리가 마르티안을 대할 생각을 하자 순식간에 뒤엉켰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와 결혼을 해달라고, 말하면…….’

뭐든 해주겠다고 애원하면. 휴이는 그런 말들을 애써 생각했지만 그 끝이 긍정적일 거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들이 통했다면 그는 애첩보다는 나은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

휴이는 숨을 들이켜고는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최선을 다해 가다듬은 옷차림과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자신은 누가 보아도 완벽한 고위 귀족이었고 부유한 영지를 가진 백작이었으며 화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그가 이렇게 차려입은 건 마르티안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손에 쥐여주는 스스로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닌 것인지 드러내고 싶어서.

하지만 이 안에 마르티안의 상대가 있다고 하면 그에게 과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조사단 중에 그와 대등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는 이 안에 있는 상대가 자신을 보며 한껏 기죽기를 바랐다.

그는 손잡이를 천천히 움직여 문을 조금 밀었다. 벌어진 틈으로 소리가 밀려 나왔다.

“아서, 포도에 또 자국이 났는데?”

“흐읏……흐으……. 자작님, 너무, 어렵……읍……”

반 이상 벌거벗은 채 아서는 소파에 앉아서 마르티안이 넘겨주는 포도를 이로 물었다. 그녀의 손이 잘했다는 것처럼 아서의 뺨을 토닥였다. 그는 턱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신음을 뱉어냈다.

처음에야 포도를 씹지 않은 채로 물고 있는 게 별거인가 생각했지만, 실제로 해보니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발기한 성기를 마르티안이 희롱하듯 자꾸 주무르며 자극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사실 그보다 더 힘든 건 포도를 물고 있느라 벌어진 입으로 자꾸 신음이 새어 나온다는 것이었다.

“흐으……, 흐으…… 흐응…….”

그건 스스로도 처음 듣는 신음이었다. 이런 건 여자들이 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물리지 못한 입에서는 자꾸 그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침에 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벌써 두 번은 사정했다.

그러고 나서 갈아입은 속옷인데 그게 벌써 둥그렇게 젖어 들어 있었다. 마르티안이 픽 웃으며 아서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낯부끄러운 스스로의 신음을 들으며 그가 다리를 조금 더 벌렸을 때였다.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신경질적인 소음의 끝으로 낯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안 자작.”

집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아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제 입에 물고 있는 포도를 삼켰다. 삼키자마자 딸꾹질이 이어졌다. 제 꼴이 어떤지 알아서 그는 얼굴을 들지도 못한 채로 마르티안을 붙잡았다.

당황과 수치,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작님. 그는 마르티안에게 매달렸다. 스스로 목소리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아서는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자작가의 저택에서, 마르티안에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이전에 엘 도안이 말했던 것들이 떠올랐다. 백작님은 진심이야. 엘 도안이 한 말이 맞았다. 아서는 시선이 따갑게 들러붙는 걸 느꼈다.

자리를 피해서 나가야 하나. 하지만 이런 꼴로, 어떻게.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뭇대는 사이에 마르티안이 소파 한쪽에 처박혀있던 아서의 셔츠를 쥐어 그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가만히 있어.”

마르티안이 몸을 일으키며 휴이를 보았다.

“무례하시군요, 백작님.”

그는 평소와는 달리 완전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백작으로 온 건가. 새삼스럽게 그의 지위를 떠올리다가 그녀는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공적인 위치를 생각한다고 해도 이 상황은 무례하다. 마르티안은 그와 만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식의 난입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나가 달라는 말을 하려고 했을 때, 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결혼을, 할 생각이라고 하던데…….”

미묘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억눌린 것처럼 이상한 투였다. 휴이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의 시선이 마르티안 너머, 셔츠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덩치는 크고 얼굴은 멍청하게 생겼다.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별 볼 일 없는 가문의 별 볼 일 없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조사단에 있는 귀족들이 그렇듯이.

휴이는 당장에 그 상대를 노려보며 쫓아내고 싶은 마음을 내리눌렀다. 여기에서 그런 식으로 굴면 스스로가 우스워질 뿐이었다. 그는 마르티안에게 물었다.

“왜 나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하아, 백작님.”

마르티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게 군다는 뜻이 분명해서 휴이는 움찔 굳었다.

“애초에 제가 결혼하는 게 백작님과 무슨 상관인가요?”

그녀가 휴이를 마주 보며 말했다. 애초에 둘의 관계는 침대 위에서나 의미 있는 한정적이고 한시적인 관계였다. 귀족들이 하는 가벼운 연애들이 다 그렇듯이.

휴이 역시 그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그녀의 태도가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의 곁에 보장된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이, 마르티안이 그것에 대해 조금도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게 괴로웠다. 휴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결혼은…….”

나와 해도 되잖아. 하지만 휴이는 뒷말을 삼켰다. 그건 거절당할 게 분명한 애원이었으니까. 마르티안이 직접 고른 상대 앞에서 거절당하는 꼴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차라리 보란 듯 구는 게 더 나았다.

개의 자리에 있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서열도 감수했다. 그렇다면 그녀의 결혼 역시 참지 못할 것이 없었다.

“그래, 그대의 결혼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

휴이는 억지로 웃는 낯을 해 보였다. 개의 자리에서는 애첩에게 밀리고 공식적인 지위에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상대에게 밀렸다. 전자야 그가 무능한 개라서 그렇다고 해도 공식적인 지위에서는 그가 밀릴 것이 없었다. 도리어 차고 넘쳤다.

제국 내에서 그보다 더 나은 배경과 재산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르티안의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전부 쓸모가 없었다.

처음으로 주인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자신을 진심으로 쓸모없게 취급한다는 것이 괴롭다. 낯선 감정들은 그를 화나게 했고 서럽게 했으며 괴롭게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는 주먹을 몇 번이나 고쳐 쥐었다.

그는 웃는 낯을 유하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우리 관계는 그것과 상관없으니까. 결혼을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자작의 상대도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는 마르티안이 아닌 그 뒤의 남자를 보았다. 상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하게 시선을 피했다. 휴이는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가 더더욱 불편하고 괴롭기를 바랐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하급귀족 주제에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다는 것부터가 주제넘는 일이었으니까.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는 상대를 보며 그가 겨우 감정을 가라앉혔을 때였다. 마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백작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같은데요. 이 결혼이 백작님과 상관이 없는 건, 제가 결혼할 쯤엔 저희가 더 이상 만나지 않고 있을 거라서에요. 이 관계가 애초에 삼 개월만 만나기로 동의하고 시작한 관계였으니까요.”

그 말에 아서가 오히려 더 당황해 휴이의 눈치를 보았다. 이건 상대를 잘라내는 말이었으니까. 아서는 이런 식의 말들을 많이 들어왔었다. 작위가 있는 귀족들은 그를 두고 즐기다가도 상황이 틀어지면 이런 식으로 냉정해졌다.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사람도 저런 소리를 듣는구나.’

아서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확 숙였다. 휴이가 눈물을 뚝 떨어트렸다.

‘옷이든 뭐든 처음에 나갈걸.’

상황이 매우 난처하다. 아서는 안절부절못한 상태로 휴이를 힐끔댔다. 그는 한껏 충격받은 표정으로 계속 울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눈물이 떨어지는 눈가가 한껏 붉었다.

얼마나 안타깝게 보이는지 아서 본인이라도 나서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저런 얼굴을 보면 화를 내는 게 가능할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을 때였다.

“백작님, 제가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할 말이 없다면 그만 돌아가시구요.”

냉정한 목소리였다. 아서는 바닥 무늬를 눈으로 덧그리며, 저런 외모를 가져도 소용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자작, 나는…….”

이어지려던 말은 울음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멈췄다. 마르티안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아서는 둘의 눈치를 보다가 몸을 조금씩 움직여 들고 있던 옷을 입었다.

흘러내려간 바지를 꾸물대며 올리고 셔츠에 팔을 넣고 나자 여전히 엉망이긴 하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가도 괜찮을 만한 상태가 되었다. 아서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저는 먼저 나가 있을 테니까…….”

“네가 왜 나가?”

마르티안이 날카롭게 말했다. 싸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까닥, 그녀가 턱짓을 했다. 다시 앉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서는 휴이의 눈치도 봐야 했기 때문에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이상한 꼴로 엉거주춤 다리를 굽혔다.

그는 그 상태로 마르티안에게 말했다.

“자작님. 아무래도 제가 나가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시는 데 방해가 될 거 같고 또 저는 관련이 없으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백작님은 곧 나가실 거니까.”

그냥 자신이 먼저 나가면 안 되겠느냐는 소리가 목 끝까지 나왔지만, 아서는 그 말을 삼켰다. 어쨌든 그가 최종적으로 잘 보여야 하는 건 도안 자작이다. 결혼을 통해 그를 그의 현실에서 구원해줄 상대는 그녀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마르티안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서와 결혼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남편이 될 사람이 파트너의 눈치를 보느라 자리를 피하게 만들다니 그건 그녀의 상식 밖의 상황이었다.

물론 근본적인 원인은 휴이를 개로 받아들인 그녀에게 있었다. 지위의 차이가 있으니 아서가 휴이의 눈치를 보는 건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확실히 정리를 하긴 해야겠어.’

휴이는 개로 두기엔 과분한 상대였다. 개라고 여기기 어려운 개. 마르티안이 그를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고 한들 그녀 주위 누구도 마르티안처럼 굴지는 못했다. 집사부터 미래의 남편까지 똑같았다.

아마 엘 도안이나 그녀가 아는 다른 귀족들도 그럴 것이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남편이 파트너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마르티안은 휴이를 보았다. 개는 여전히 예쁘고 그녀의 취향이었지만 고작 침대 위 취향 때문에 미래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백작님, 이만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아서와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요.”

“……나를, 나를 버릴 건가?”

버리다니. 마르티안은 그 말이 우습단 생각을 했다. 그녀가 시작한 건 쌍방의 합의로 인한 동등한 관계였다. 그녀가 아무리 가혹하게 굴었다고 한들 그 관계는 합의하에 이루어진 취향의 교환이었다. 마르티안은 그의 태도에서 풍겨 나오는, 흔히 겪어왔던 개들의 매달림을 느꼈다.

하지만 마르티안은 거기에 크게 말을 더하지 않았다. 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꾸물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간다는 사람을 붙잡아 둔 건 그녀 쪽이니 어쨌든 상황을 정리할 책임이 있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백작님, 더 할 말이 있다면 응접실에서 기다리세요. 버린다는 게 합당한 표현인지 생각을 해보시구요.”

아서는 마르티안의 말이 지나치게 고압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휴이가 무례하게 난입했고 상황을 곤란하게 만든 건 사실이었지만, 지위가 판이하게 차이나면 일반적인 예의라는 것도 비틀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무례를 차지하고서라도 그녀의 어투는 조금 이상했다. 그건 마치 지시를 내리는 것에 가까웠다. 그리고 휴이는 또 그 말을 따라 나갔다. 이런 식으로 쳐들어온 것 치고는 나가는 모습이 얌전했다.

아서는 그 모든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마르티안이 그에게 몸을 돌려 사과했기 때문이었다.

“미안, 내가 과하게 굴었지. 일부러 못 나가게 한 것도 그렇고.”

그녀는 가볍게 몸을 숙여서 아서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달래는 버릇, 아서는 그녀의 태도를 해석하며 얌전히 있었다. 마르티안은 아서를 위해 이 자리에서 있게 한 게 아니었다. 휴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굴었다.

솔직하게 미안해하긴 해도 똑같은 일이 생기면 또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녀는 아서를 위해 자신이 정한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사람이었다. 작위를 가진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러하듯.

“괜찮습니다. 자작님. 단지, 백작님이…… 감정이 격해지신 거 같던데.”

“대체 내 결혼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건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전혀 신경을 못 썼어.”

그 말에 아서는 약간 뜨끔했다.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된 원인에는, 자신이 엘 도안에게 부탁했던 일이 있을 거 같았으니까.

마르티안은 휴이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만 백작은 진심이다. 그 구도가 아서에게는 부담이었다. 마르티안이 그의 뺨에 다시 입을 맞췄다.

“크게 생각할 건 없어. 어쨌든 우리 가문에 필요한 건 너니까. 결혼한 뒤에는 네가 불편한 일은 없을 거야. 앞으로 내 파트너 중에 너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을 거니까.”

그건 친절한 설명이었다. 아서의 입장에서는 그저 믿고 싶은 말이었다. 그는 물어보려던 것을 그만두고는 마르티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유두에 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의 모습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이제 여기, 로도 느끼게 된 거 같은데…….”

“그래?”

“응접실 가셨다가 빨리, 와주시면……좋겠습니다.”

가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발언이었다. 마르티안이 그의 유두를 손끝으로 살짝 긁으며 말했다.

“당장이 아니라?”

“흐, 느긋하게 저에게 집중하셨으면 해서요. 뒤에 일정이 있으면, 흐읏, 마음이 급해지니까.”

그는 확실히 똑똑했다. 그녀는 아서가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단 생각을 다시 했다. 아서라면 론과도 무리 없이 잘 지낼 게 분명했고, 가문의 입장에서 좋은 인력일 것이며, 그녀의 취향을 고려해서 행동할 줄도 알았으니까.

그 모든 것이 그녀가 그려왔던 결혼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서의 뺨에 다시 입을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휴이는 마르티안이 시키는 대로 응접실에 있었다.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허벅지를 벌리고 이제는 익숙해진 개의 자세를 취하면서 그는 울음을 그치려 애썼다. 마르티안이 한 말을 생각하고 어떻게든 대응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는데 자꾸 생각이 멈췄다.

몇 번 버려질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버려지진 않았다. 무능한 개였지만 그의 몸은 마르티안의 취향이었으니까. 휴이는 그녀가 자신을 교육하거나 괴롭히면서 흥분하고 몰두하는 것들을 수없이 봐왔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관계의 끝이라니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이제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이 관계가 끊어질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버리지 마세요, 주인님.”

몸을 감싸고 있는 옷들이 답답하다. 어서 마르티안의 앞에서 개처럼 있고 싶었다. 근래 그의 모든 삶을 지배하고 있는 바람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마르티안의 곁에 늘 있고 싶었다. 아니, 있을 것이다.

그런 자리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어떤 노력이라도 상관없었고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걸 거부하는 건 마르티안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어떤 자리도 주지 않았다.

‘왜, 왜 나에게만…….’

그녀는 이방인 출신의 고아에겐 애첩의 자리를 주었고 작위 없는 무능한 귀족에게는 남편의 자리를 주었다. 모두가 마르티안의 곁에서 정당하게 있을 수 있는 보장된 자리였다. 별 볼 일 없는 상대에게도 쉽게 줘버리는 자리를 그 자신만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이제는, 그것 때문에 버림받게 되었다. 아니 애초부터 마르티안은 자신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제 주인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동안, 그녀는 이 관계를 끝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너무나도 서럽고 고통스러웠다.

“흐으, 흐읍, .끄으, 흐어, 흐어엉…….”

그는 소리 내 울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울컥 치미는 화와 분노가 그를 집어삼켰고 굴러떨어지는 서러움과 슬픔이 그를 뒤흔들었다. 뒤섞인 감정은 너무 커서 조금의 이성도 비집고 들어올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바닥을 기어가 마르티안을 붙잡고 애원하고 싶다가도 이 서러움을 토로하며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그녀가 고른 남자를 모두 죽여 버리고 싶었다.

몇 번을 숨을 몰아쉬며 울고 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휴이는 울던 것을 급하게 삼키며 얼굴을 손으로 닦아냈다. 최대한 예쁘게, 그녀의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있어야 했다. 혼자 있을 때는 불처럼 타오르던 감정들이 정작 마르티안이 오자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남아있는 건 애원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인님……, 흐으, 흐읍.”

마르티안이 소파에 앉자 그는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갖춰 입은 옷이 엉망으로 구겨졌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백작이고 싶은 게 아니라 개로 있고 싶었으니까. 그는 몸을 굽혀서 마르티안의 발목과 무릎에 입을 맞추고 자신의 뺨을 비볐다.

그건 개로 있기 위해 배운 애교였다. 길들여진 행동들은 모두 마르티안을 위한 것이었다. 쉽게 흥분하게 된 몸도 늘 조금은 부풀어있는 가슴도, 천박하게 애원하는 입도 모두 그녀가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백작님으로 오셨으면 소파에 앉으셔야죠.”

그녀의 말에 휴이가 울음을 새로 삼켰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새 눈가가 퉁퉁 부었지만 마르티안은 그런 꼴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개가 얼마나 약아빠지고 자기중심적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개로 있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주제에 아서의 앞에서는 또 백작처럼 굴었다. 상대를 압박하는 데 그렇게 구는 게 훨씬 편할 거라는 계산을 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티안은 소파의 반대편을 턱짓하며 말했다.

“백작님으로 오신 거면 소파로 가시구요. 아니면 돌아가. 개를 부른 적은 없으니까.”

휴이는 소파로 가지도 그렇다고 나가지도 않았다. 그는 급하게 윗옷을 풀고 가슴을 드러냈다. 부푼 유두와 멍든 자국이 남아있는 가슴이었다.

“주인님. 제가 잘못 흐읍, 잘못했어요. 결혼해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잘 가만히 있을게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계속 개로 있게 해주세요. 흐윽, 흐으……. 더 잘할게요. 서, 선배에게도 잘 배우고……, 뒤도 연습, 열심히, 흐윽, 열심히 할 테니까……”

못하면, 흐윽, 선배 좆도 빨게요. 다할게요. 주인님. 쏟아지는 애원에는 마르티안이 그에게 강요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전부 그를 길들이며, 개답지 못하다고 지적했던 것들이었다.

마르티안은 서럽게 우는 개를 보다가 이내 한숨을 뱉었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며 하는 말들은 이 상황에서는 별 쓸모가 없는 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이 관계를 계속 이어갈 마음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급작스러운 삼자대면이 아니었다면 조금은 더 관계를 이어갔을지도 몰랐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백작님.”

“휴, 예요. 휴라고 불러서…….”

그가 끅 하고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마르티안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꾸며진 관계였다. 실제로 존재는 그의 배경과 지위는 그녀 주변을 쉽게 위협했다.

그가 아서를 놓고 위협하듯 행동하리라는 건 뻔히 보이는 일이었다. 아니 굳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서는 분명 휴이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지위의 격차라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깔끔하게 결론을 냈다.

“이 관계는 이제 그만두는 거로 해요.”

휴이의 입이 그대로 벌어졌다. 그의 눈이 충격으로 커지는 것을 보며 마르티안은 말투를 바꿨다. 예의를 갖춘 상냥한 어투였지만 내용은 몹시도 냉정했다.

“조사 대상에 뽑힌 대가로 백작님의 주인 노릇을 한 거였으니까요. 서로 적당히 주고받은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끝내죠.”

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주인님 노릇이라니, 그런 말을 마르티안의 입에서 들을 거라고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마르티안은 그의 진짜 주인이었으니까. 그의 몸을 학대하고 그의 감정과 감각을 당연하다는 듯 헤집는, 진짜 주인.

그럼에도 휴이는 그 말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때의 휴이는 그녀가 자신의 주인님 노릇을 해주길 바라서 그 모든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저 무정하고 가혹한 주인을 가지고 싶어서. 그녀가 주었던 가혹한 행위들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마르티안은 그 처음에 오갔던 말들을 다시 꺼냈다,

“백작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짧게라도 그냥 개로 있게 해달라고요. 조사 기간만 만나기로 한 거 잊진 않으셨죠?”

“아니, 아니에요. 이제 그냥, 흐읍, 주인님이 좋아져서, 흐윽……계속 개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헤어지지 않고 부, 분명 계속 주인님 곁에서…….”

그는 덜덜 떨며 말했다. 지금은 처음과는 달랐다. 지금 그는 그냥 개 취급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마르티안의 개가 되고 싶었다. 그 미묘한 차이는 사실상 너무 커서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그걸 증명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르티안은 간단하게 그의 말을 잘라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단순한 대답은 설득할 틈도 없다. 휴이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그저 마르티안을 보았다. 낮에만 해도 그녀를 초대할 생각에 그토록 들떠있었는데 지금은 관계의 끝을 말하고 있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스스로 운다는 느낌조차 잘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처럼 마르티안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은 채 말을 뱉었다.

“조사도 끝나가는 상황이니까요. 어차피 슬슬 마무리를 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잘됐네요.”

휴이는 엎드려 울었다. 왜 자신에게만 이렇게 가혹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개로서도 첫 번째가 아니었고 공식적인 관계에서도 첫 번째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아닌 파트너 자리라도 줄 수 있을 텐데. 그는 그렇게라도 마르티안의 곁에 있고 싶었다.

“주인님, 흐으윽, 제가 잘못했어요. 주제넘게 굴었어요. 결혼하는 거, 흐으, 흐어…….”

상관없는 일이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나오질 않았다. 상관없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마음속에서 들끓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알았다. 배신감. 서러움. 질투. 그 모든 감정들은 그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다.

마음이 터져나가는 것 같이 괴롭다.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고 싶었다. 그는 마르티안을 붙잡고 제 얼굴을 비볐다.

“주인님, 뒤로 해주세요. 하고 싶, 어……흐으. 할래요.”

“백작님.”

“흐읍, 연습 많이 했어요. 했으니까, 벌릴 수 있어요. 주인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으니까, 흐읍…….”

그는 제 몸을 파는 것처럼 굴었다. 팔아서 마르티안의 애정과 관심을 사고 싶었다. 이 불편하고 괴로운 순간들을 모르는 척 넘어가고 싶었다. 차라리 결혼 이야기를 모른 척할걸. 그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그는 자신의 뒤를 길들이고 있는 모조 성기가 그녀가 개에게 박을 때 쓰는 모조 성기에 비해 형편없이 작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학을 좋아하는 마르티안은 억지로 그의 뒤를 벌리는 걸 분명 좋아할 것이다.

“주인님, 쑤셔주세요. 하루 종일, 흐으, 종일 쑤셔준다고 했으니까, 흐읍…….”

마르티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휴이의 행동은 그녀에게는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개를 버리려고 할 때, 그 개들이 보이던 행동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건 제 몸을 담보 잡아서라도 그녀를 붙잡고 싶어 하는 집착이었다. 그런 개들은 그녀를 여러모로 귀찮게 했다.

마르티안은 더더욱 명확하게 그를 끊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만 돌아가세요. 백작님.”

그 말에 휴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돌아가라는 말은 단순히 방으로 돌아가란 뉘앙스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잘못된 것이기를 빌었다.

“주인님, 흐으, 안 돼요. 잘못했어요. 이대로 얌전히 잘, 진짜 잘 할게요. 그만둔다고 하지 마세요.”

“백작님.”

“그냥 박히고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요. 흐윽, 흐으……기다려야 하는데 모, 못해서…….”

“다른 주인을 찾으세요.”

휴이는 순간 애원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뱉어낼 수 있는 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주인이라니.

그건 그녀가 이 관계에 둔 마음이 얼마나 가벼운지를 드러내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장난으로라도 그녀에게 다른 개를 찾으란 소리를 할 수 없었으니까. 아니, 다른 개를 보는 것도, 만지는 것도, 싫었다. .

왜, 어째서. 속이 뒤집히는 것처럼 뜨겁다. 그는 마르티안을 움켜잡았다.

“안 돼, 제발…… 도안 자작, 이러지 마. 흐읍, 나를 버리지…….”

“백작님이 납득하시든 안하시든 전 더 이상 백작님을 찾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만 다른 사람을 찾아서…….”

“아직 조사 기간도 다 안 끝났잖아. 그러니까 아직은 만나도 되잖아, 제발…… 흐읍, 흐윽……”

그는 떨어지는 눈물을 삼켰다. 마음이 미칠 것만 같다. 마르티안은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온전한 주인이었다. 견딜 수 없이 좋아서 휴이는 모든 것을 다 참았다.

독점하고 싶은 마음도 죽였고 자신의 자리가 밀려나는 것도 견뎠다. 모든 것을 다 가져다가 그녀에게 안겨도 마냥 기쁘기만 할 거 같았고, 비참해져도 좋으니 조막만 한 자리라도 적선하듯 던져주길 바랐다.

하지만 마르티안은 그 어느것도 그에게 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아니요. 여기서 끝내죠. 백작님이 찾아오신다고 한들,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을 거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냉정해 지려면 칼 같이 냉정해 져야 했다. 조사기간을 다 채워서 만난다고 한들 상황이 나아질 건 없었다.

휴이의 감정은 파트너 사이에서 오가기에는 지나친 감정이었다. 차라리 이쯤에서 끝내고 각자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 나았다. 우는 휴이를 보며 그녀가 말을 더했다.

“이만 다시 영지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 같네요.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마음 정리에 편할 때가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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