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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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주인의 예쁨을 받기 위해 경쟁하기 마련이다. 마르티안은 휴이가 론을 견제하며 경쟁하려 드는 건 알았지만, 론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론은 그러기엔 너무 순했다.

휴이의 교육에 론을 끌어들인 것 역시 두 사람이 경쟁하길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휴이의 기를 꺾어놓기 위해서 그를 론의 아래로 굴렸다.

사실 마르티안은 자신이 만든 서열을 휴이가 지킬 거란 생각을 하진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고집이 세고 고압적인 귀족이었으니까. 론에게 비싼 장신구를 넘겨주며 포섭하려 한 것은 우습지도 않았지만 그의 진짜 위치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론이 나서서 백작 상대로 싸움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마르티안은 제 옆에서 낮잠이 든 론을 내려 보다가 픽 웃었다. 덮은 이불을 들치자 론의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고리에 꿰어진 채 퉁퉁 부어오른 유두와, 엉덩이 아래로 드러난 흔적이 유독 심하게 붉었다. 늦게까지 혼이 난 탓이었다.

론이 혼이 난 건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마르티안이 명령은 백작과 론을 아우른 내용이었다. 론은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백작에게 적당한 대가를 받고, 혀 쓰는 법을 가르쳤어야 했다.

하지만 론은 백작이 바짝 엎드린 상황인데도 혀 쓰는 법을 가르쳐주기 싫어했다.

“제가…… 주인님에게 예쁨받는 방법이니까, 가르쳐드리고 싶지, 않, 아서…….”

백작에게 맞아서 얼굴을 다 부어터졌을 때도 이르는 말이나 억울한 기색 하나 없더니, 그는 그 말을 하면서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백작님께서 제가 못하는 것을 하시니까, 제게도 저만 할 수 있는 것을……남겨 주셨으면 해서…….”

그건 론의 열등과 불안이었다. 피학 성향이 조금도 없는 스스로에 대한 열등과 불안. 그는 어떻게든 제 쓸모를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마르티안은 그런 개가 예쁘다고 생각하면서도, 론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릴 때까지 추궁했다.

“론,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내가 한 말을 바꿔야 해? 응?”

다그치는 소리에 론은 울었다. 잘못했다며 우는 울음이 예쁘고 불쌍해서 그녀는 약간의 변덕을 부렸다.

“고집부리는 날마다 벌을 받을 거야. 견딜 수 있으면 마음대로 해. 대신 매일같이 혼날 생각을 하고.”

그녀는 조건을 달아 그의 고집을 허락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긴 했다. 그녀가 준 벌은 오래 견디기 어려운 매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론은 엉망인 자신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녀의 예외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울며 기뻐했다. 덕분에 정말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요즘에 이렇게 매달리고 자극하는 게 늘었단 말이지.’

그녀가 론의 부푼 유두를 손으로 짓눌렀다. 론이 잠결에도 앓는 소리를 뱉어낸다. 마르티안이 이번엔 그의 뺨을 꾹꾹 눌렀다. 백작에게 맞아서 부었던 뺨은 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것도 나중에 제대로 교육시켜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론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어느 순간 론이 눈을 떴다. 멍한 눈동자가 버릇처럼 시선을 들어 그녀를 찾았다.

“일어났어?”

“아……. 아, 네, 네.”

당황한 얼굴로 급하게 몸을 일으키던 론이 통증에 몸을 굽히고는 신음을 뱉었다. 흐으, 그의 등이 떨리는 것을 보며 마르티안이 가볍게 웃었다. 멀쩡하지 않은 엉덩이로 급하게 일어난다고 앉았으니 당연히 아플 수밖에.

“론, 여기로 올라와서 앉아.”

그녀가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론이 몸을 움직여 그녀의 위로 올라갔다. 조금 긴장한 얼굴이었다. 고집을 부리느라 실컷 혼이 난 이후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몸에 남아있는 아픔과 통증은, 어떤 개라도 제법 얌전하게 만들었다.

마르티안은 론의 엉덩이 두 손으로 꾹 움켜쥐었다. 지나치게 얇은 속옷은 피부의 열감마저 전달한다. 퉁퉁 부어있는 곳은 만지기 좋게 뜨끈했다.

“흐으! 주인님, 흣, 흐윽.”

론은 움켜쥐는 고통을 견디려 애썼다. 맞은 후가 아니었다면 적나라한 주물거림에 흥분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픔이 심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숨이 헐떡이며 뱉어진다. 견디느라 애쓰는 론을 보면서 마르티안은 여유롭게 물었다.

“아파?”

“흐으, 네, 네. 주인님, 아프, 흐읏, 흐, 아픕니다.”

마르티안이 그의 엉덩이를 움켜쥘 때마다 그의 몸이 경직된다. 흐으, 흐읍, 헐떡이는 숨이 커졌다가 억지로 삼켜졌다. 다른 개 같으면 엉덩이를 조금씩 위로 들며 피하려 했을 텐데 고지식한 개는 그런 것도 없었다. 마냥 견딜 뿐이었다. 버티는 허벅지가 조금씩 떨렸다.

마르티안이 론의 속옷을 아래로 잡아 내렸다. 천이 쓸리듯 내려가는 감각에 론이 신음했다. 드러난 엉덩이는 검붉은 자국으로 엉망이었다.

그것을 가볍게 주무르며 그녀는 자신의 개가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가늠했다. 사나흘 정도면 분명 피부가 터질 텐데 그쯤 되면 억지로 견디는 것도 무리였다. 이 고집의 기한은 길어야 그 정도라는 소리다.

“여기에다가 또 맞으면 내일은 앉지도 못해. 알지?”

그녀는 자신의 개를 떠보듯이 물었다. 론이 헐떡이면서도 그녀를 마주 보았다. 눈가가 붉어진 건 단순히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제가, 흐으, 제가 고집, 부려서……. 싫으신……거면, 흐읏.”

“싫지는 않아. 예쁨받을 방법을 빼앗기기 싫다는데, 그 정도야 이해해야지. 그냥 봐주지는 못하겠지만.”

마르티안은 그렇게 말하고는 론의 뒷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구가 부어있는 것을 제외하고 깔끔하게 말라 있던 곳이다. 손가락을 깊게 밀어넣고 긁어내리자 안에 고여있던 윤활제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건 마르티안이 윤활제를 통으로 들이부어서 쓴 탓이었지만 그녀는 모르는 척 말을 뱉었다.

“요즘 들어 엉망이네. 뒤처리도 못 해서 대낮부터 적시기나 하고.”

론의 몸이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뒤를 조였다. 손가락을 물어대는 느낌이 제법 야하다. 마르티안은 일부러 더 안을 긁어내렸다. 물컹거리는 것들이 그때마다 아래로 흘렀다.

“흐으……. 주인님, 읏, 그만, 흐으……. 제가 하게……, 하윽.”

마르티안이 손으로 그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검붉게 부어오른 엉덩이는 손으로 하는 매질에도 부들거리며 떨렸다.

“네가 못한 걸 주인이 해주잖아. 감사 인사부터 해야지.”

“흐으.”

위로 푹푹 찌르는 손길에 론이 헐떡이며 신음을 뱉었다. 윤활제가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의 귀를 괴롭혔다. 침실이 너무 환해서 수치심이 더 컸다. 한참을 끙끙거린 후에야 론은 겨우 마르티안이 원하는 소리를 뱉어냈다.

“흡, 감사, 흐윽, 합니다.”

“정확하게, 똑바로 말해.”

그녀가 엉덩이를 내리쳤다. 뒤를 들쑤시는 것이 수치였다면 이번에는 아픔이었다. 몸이 들썩인다. 손으로 하는 매질이 답을 재촉하듯 이어졌다. 철썩하는 소리를 들으며 론은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제가 모, 못 한, 흐으! 못한 뒤처리, 흐으, 흑! 지, 직접, 쑤셔주셔서……읍! 감사, 합니다.”

겨우 매질이 멈췄다. 도구로 맞는 것보다 훨씬 약했지만 그래도 통증이 깊게 남았다. 오늘 혼나면서 버틸 수 있을까. 론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술을 질근 물었다.

그의 고집은 결국 끝까지 가진 못할 고집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론은 혼나는 걸 바랐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르티안이 예뻐하는 부분들을 그냥 내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론에게 있어 그녀만이,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욕망이었다.

유일하게 원하는 것. 그 욕망은 개의 자리에 안착하며 제법 더 부풀었다. 주제를 알고 제 주인에게 다가가는 건 얼마든지 허락된다. 주제를 알면서 행동하면 때론 고집을 부려도 되었다. 그러니 이 자리만이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었고, 그가 지켜내야 하는 지위였다.

“주인님. 어제 이야기를, 못 드렸는데……”

흐트러진 마르티안의 옷 사이로, 론은 흐릿해진 붉은 흔적들을 보았다. 그건 백작이 만든 자국이었다. 그런 자국을 남기는 것이, 론에게는 아직도 허락되지 않았다. 교육 이후에 그녀는 론에게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건 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국을 남겨도 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쉽게 그렇게 하라고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론은 조금이라도 주제 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또 예전처럼 굴어서 그녀를 실망시킬지도 몰랐으니까. 자신에게 허락된 자리를 보잘것없이 여기고, 또 도망치려 할지도 몰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또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다짐하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고집부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 대가로 눈물을 쏟으면서 혼나는 시간을 버텨야 했지만, 어쨌든 그것조차 그녀가 그 정도에서 참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에 그에게만 주어지는 예외인지 아니면 그녀의 모든 개들에게 적용되는 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론은 그런 비교를 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던 것을 그만두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에게 그런 것을 허락해주었다는 것뿐이었다.

론이 몸을 조금 더 밀착시켜 그녀의 귀에 입술을 댔다. 눈치를 보는 것처럼 머뭇거리다가, 아무런 제지가 없자 이내 핥아냈다. 그녀의 귓바퀴를 가볍게 잘근거리고 귓구멍 안쪽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축축하고 물컹한 혀가 예민한 솜털들을 핥으며 들쑤셨다.

백작에게 가르치고 싶지 않은, 주인에게 예쁨받을 만한 유일한 것. 능숙하게 혀를 쓰는 것이야말로 그의 자랑이자 쓸모였으니까.

마르티안은 느긋하게, 론의 애무를 받았다. 귀와 목덜미로 이어지는 흥분은 적당히 자극적이었다. 이내 그녀는 론의 유두 고리를 손에 걸었다. 사슬은 빼어놓았지만 유두를 꿴 고리는 예전처럼 그대로였다. 둥근 고리는 손가락에 걸고 잡아당기기 좋은 크기였다.

론의 몸이 긴장하며 움찔 떨었지만 핥던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능숙한 개라면 당연한 태도였다. 그녀는 귓속을 파고드는 물컹한 자극에 가볍게 신음하며, 고리에 건 손가락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흐읍, 삼키는 신음이 그녀의 귓가로 퍼진다. 젖은 채로 파고드는 혀만큼이나 그녀를 흥분시키는 소리였다.

“흐으, 주인님. 흡…….”

귓가를 핥으며 버티려 애쓰던 론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상체를 아래로 내렸다. 그가 몸을 내리다가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버틴다. 그의 등이 떨렸다. 마르티안은 잡아 내리던 힘을 줄이지 않았다.

상체를 바짝 내리면 덜 아플 일을 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 주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흐으……흣, 주인, 으흑!”

요령 없이 버티는 개를 보며 마르티안은 가만히 웃었다. 론의 고지식한 면이 짜증스럽다가도 이럴 때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론의 흐느끼는 소리가 커졌다. 그의 이마가 고통을 견디느라 그녀의 목덜미에 비벼졌다.

주인님, 흐,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온몸으로 애원하는 꼴이었다.

“그래, 론.”

그녀가 고리에 건 손가락을 빼냈다. 론이 헐떡이면서도 바로 다시 몸을 일으켜 그녀의 귀를 핥기 시작했다. 감사하다는 인사가 속삭이듯이 이어졌다. 고통을 멈추어 주어서가 아니라 다시 핥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이었다. 개로 있게 해주어서, 이 자리에 두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마르티안은 다시 론의 유두 고리를 쥐었다. 그의 몸이 흠칫 긴장했다.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고리를 비틀었다. 잡아 내리지 않았지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헐떡이는 숨 사이로 핥고 빨아올리는 것이 급해졌다.

“고맙다며, 더 해달라는 줄 알았는데.”

“네, 주인님. 더 해서, 흡, 더 해주시면 됩니다. 흐읏…….”

그건 예쁨받기 위해 애쓰는 대답이었다. 마르티안의 손길이 조금 더 거칠어졌다. 어제부터 혹사당한 유두는 당장 찢어질 것처럼 붉어졌다. 론의 숨이 거의 울음으로 변했을 때 그녀의 손이 멈췄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론의 가슴을 가볍게 밀자 론이 몸을 바로 세웠다. 젖은 눈가가, 한쪽만 붉어진 유두와 닮았다. 예쁜 꼴이었다.

마르티안이 손을 뻗어 다시 론의 엉덩이를 움켜쥔다. 헐떡이는 숨이 채 잦아들지도 못한 상태였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다가 잦아드는 꼴이 한쪽만 붉은 유두와 합쳐져서 제법 야했다. 그 모습을 만든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마르티안은 책임을 제 개에게 떠넘겼다.

“몸부터 들이대기는. 왜, 백작님 앞에서 쑤셔지고 싶어?”

“그냥 저는, 감사해서……읏.”

대답을 들으면서 마르티안이 그의 뒷구멍에 다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구가 부어있는데도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조이는 꼴이 그녀를 흥분하게 했다. 그녀는 양손 중지 둘을 구멍에 밀어 넣어 내벽을 더듬다가 이내 손가락을 양쪽으로 쭉 벌렸다.

“그래서, 쑤셔지기 싫다는 거야?”

“아니, 요. 흐, 주인님. 너무 그렇게, 흐읏, 벌리시면…….”

고통이나 수치에 반응하는 몸은 아니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견디려는 표정이 그녀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래서 그녀는 론을 오래 곁에 둔 것이다. 오갈 데 없이 구는 이방인 출신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이런 모습이 몹시 예뻐서.

마르티안은 일부러 손가락을 움직여 론이 흥분하는 부분을 들쑤셨다. 신음이 바뀌며 그의 앞섶이 부풀기 시작한다. 고통이나 수치에 반응하지 못할 뿐이지, 오래 교육받은 몸은 작은 자극에도 잘 흥분하긴 했다. 론의 귓가가 금세 새빨개졌다.

‘아, 바쁘지만 않아도…….’

마르티안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미간을 구겼다. 평소보다 많이 지났다. 오늘은 서류 검토뿐이 아니라 조사단에게 보고받아야 할 것도 있었다. 슬슬 론을 두고 나가야 할 때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고 나니 젖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개가 괜히 괘씸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어 론의 안에 남은 윤활제를 모조리 긁어냈다.

“흐으! 흐, 주인님, 하윽! 흡.”

내벽을 거칠게 들쑤시며 긁어내는 손길에, 론이 시트를 움켜쥐며 견딘다. 번들대는 것들이 다시 울컥거리며 흘러나와 그녀의 손을 적셨다. 그녀는 론의 회음부와 엉덩이골 사이에 긁어낸 윤활제를 닦아냈다. 안 그래도 젖어있던 곳이 금세 번들거리게 변했다.

마르티안이 그의 속옷을 다시 위로 올려준다. 얇은 속옷은 엉망으로 흘러있는 윤활제로 인해 바로 젖었다. 마르티안은 일부러 속옷 위에 손을 두고, 윤활제가 남은 손으로 회음부와 엉덩이골을 문질렀다.

무언가 질질 흘려내려서 젖은 것처럼, 그 부위의 속옷이 더 질척해졌다. 기름 성분이 적당히 섞여 있어서 마르더라도 얼룩이 적나라하게 남을 흔적이었다.

“론, 오늘은 이 상태로 백작님을 맞이하도록 해.”

주인님, 론이 애원하는 것처럼 그녀를 불렀다. 수치로 붉어진 얼굴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르티안은 가볍게 웃었다.

* * *

별다른 성과 없이, 조사 기간의 반이 지났다. 계획대로라면 병증의 원인을 이미 한참 전에 찾았어야 했고, 지금은 조사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수목 검토와 원인에 따른 해결방안을 논의할 때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병증에 대한 명확한 원인파악조차 이뤄지지 못했다.

조사단의 의욕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로운 정보를 찾아낸다고 한들 상황을 반전시킬 시간이 이젠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사 방향이 찾아낸다고 한들 남은 기한 가지고는 제대로 된 결과를 내기 어려웠다. 그러니 더 노력할 이유도 없었다.

조사단은 매일 숲에 나갔지만, 이제는 숲 현장을 조사하진 않았다. 숲 관리소에 틀어박혀 최종 보고서를 늘리는 서류작업에 골몰했다. 각종 전문용어를 붙이고 첨부 자료를 늘려서 전체 양을 불리는 일이었다.

그건 질적으로 떨어지는 조사결과를 조금이라도 무마하기 위한 노력이었지만, 그렇게 해서 늘어난 서류는 아무 쓸모 없는 무의미한 내용의 집합이었다.

그건 나흘에 한번씩 도안 자작가로 전달되는 조사보고서 역시 마찬가지다. 별다른 결과물이 없다는 소리를 두세 장의 보고서로 늘리려고 하니 내용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엘 도안은 이번 주 조사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그가 맡아왔던 일이니 계속하고 있지만 보통 괴로운 게 아니었다. 자신의 무능을 보고하는 꼴이었으니까.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거 자작님에게 전달하는 보고서지?”

“아, 아서. 무슨 일이야? 밖에를 다 나오고.”

“오늘은 내가 너 대신 자작가에 가려고.”

아서는 장난처럼 웃었지만 외출용 겉옷을 챙겨 입은 상태였다. 진심으로 대신 갈 생각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엘이 그에게 말했다.

“나보다 네가 더 바쁜 거 아니야? 교수님이 최종 완성하라고 했던 보고서, 내일까지잖아.”

“그래서 가려고 하는 거야. 그거 오늘 아침에 끝냈거든.”

“그 많은 걸, 벌써?”

교수가 아서에게 준 건 600쪽이 넘는 보고서였다. 아니 그건 보고서라고 하기엔 부족한, 자료만 중구난방으로 취합해놓은 어떤 서류뭉치였다. 그걸 다 검토하고 보고서로 완성하라는 게 교수가 시킨 일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나 손 빠르잖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그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말했다. 반쯤 숨기고 있어서 그렇지 그는 원래 일 처리가 매우 빨랐다.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덕분에 중구난방인 자료를 놓고도 연결점을 찾아,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빠르게 보고서를 구성하고는 했다.

본인은 그냥 요령이 좋은 거라고 했지만 엘 도안이 보기엔 그냥 머리가 좋은 거다. 티를 내려고 하지 않아서, 대단해 보이지 않을 뿐. 엘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조사는 왜 이 모양이 된 걸까.”

“똑똑은 무슨. 그리고 아무리 똑똑해도 운 나쁘면 끝이야. 교육원에 다닌다는 건 애초에 운이 별로라는 소리니까, 이번 조사도 타고난 불운인 거지.”

“운 좋은 사람이야 애초에 첫째로 태어났을 테니까.” 그가 말을 덧붙였다. 농담하듯 한 말이었지만 조사단원들이 가진 한계를 자조하는 소리였다.

상속법상 작위나 영지의 계승은, 첫 번째 자식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첫째가 그 권한을 포기해야만 그다음 둘째에게, 둘째가 거절해야지 셋째에게 계승권이 넘어갔다. 작위 하나, 영지 하나만 가진 대다수의 귀족 가문의 경우, 첫째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구조였다.

부모가 작위를 가지고 있을 때까지는 자식들을 모두 먹이고 거두어 주지만, 작위가 다음 대로 내려가면 가문의 지원은 끊기기 마련이다. 그건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둘째 이하로 태어났다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자신이 먹고 살 길을 만들어 두어야 했다. 조사단을 이루고 있는 귀족들 모두가, 첫째가 되지 못한 불운한 이들이었다. 아서 자신을 포함해서.

“뭐 어쨌든, 전달할 보고서나 줘. 오늘은 내가 갔다 올 테니까.”

그가 엘이 들고 있던 보고서를 받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보고서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서류에는 아무 내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한데……내용이 너무 없긴 하다. 네 누님이 상황을 이해해 줘서 다행이지. 우리 형님이었으면 진짜 뺨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야.”

농담처럼 덧붙인 말이었지만 엘은 제대로 웃지 못했다. 형님을 운운하며 덧붙인 말이 사실에 가깝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서는 우드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가 아니면 모두 불운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아서는 그런 위치의 귀족들 중에서도 운이 더 나쁜 축에 속했다. 교육원에 입학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작위를 이어받은 그의 큰 형은, 그때부터 어린 동생들에 대한 지원을 전부 끊어버렸다. 아서의 어머니는 자신의 큰아들을 나무랐지만 이미 남작이 된 큰아들의 행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개인 재산을 처분해서 아서의 교육비를 따로 지원했다. 교육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의 큰 형은 어머니 재산으로 하는 지원조차 아까워했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그 재산이 곧 그의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아서가 남작가에 머무를 때마다 그의 형은 그를 돈만 먹어대는 군식구 취급을 했다.

그걸 알고 난 이후로, 엘 도안은 아서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때가 생겼다. 지금도 그랬다. 엘의 상태를 눈치챈 아서가 피식 웃었다.

“그냥 농담이었어. 심각한 거 아니고. 아무튼, 이건 내가 전달할 테니까 너는 다시 들어가 봐. 너도 맡고 있는 보고서가 꽤 많잖아?”

“많지. 벌써 세 개나 밀렸고, 거기에 오늘 새로 받은 것도 하나 있고…….”

그의 얼굴이 우중충하게 변한다.

자작가를 방문해서 보고서를 전달하는 일은 절차상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결국은 절차적인 일이었다. 그 일이 실무를 해결해주진 않는다는 소리였다. 조사가 원활할 때라면 모를까, 이렇게 형식상으로 전해야 할 때는 더더욱 시간만 잡아먹는 일이었다.

숲에서 자작가를 오가는 건 생각보다 시간이 꽤 들었다. 그만큼 실제적인 일을 처리할 시간이 줄어들었는데, 엘 도안이 일정 시간 이상 집중해야 효율이 나오는 타입이라서 더 문제였다. 그는 아서처럼 손이 빠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가 가준다니 다행이긴 하다. 일이 계속 쌓여서, 보고서 전달하러 오가는 게 좀 부담스러웠거든.”

“아아, 그런 거 같더라고. 완전 죽을상으로 돌아다니는 게.”

“많이 티 났어? 나름 표정 관리 한다고 한 건데…….”

“표정 관리는 무슨, 얼굴에 대문짝만하게 쓰고 다니던데.”

엘 도안은 감정변화가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편이었다. 기쁘고 즐겁고 신기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우울하거나 예민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행동까지 감정대로 구는 건 아니니 크게 거슬릴 건 없었지만 어쨌든 표정 관리라고 부르기엔 참으로 민망한 수준이었다. 아서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넌 진짜 도박은 하지 마라.”

“갑자기 무슨, 도박이야? 아참, 보고서 전달하고 나면 주방에 들러서 샌드위치 튀김 만들어 달라고 해. 내가 부탁했다고 하면 한나가 만들어 줄 거야.”

“샌드위치 튀김? 어감이 영 그런데.”

“근데 그거 진짜 맛있어. 안에 치즈가 듬뿍 들어가서 녹아있고 베이컨도 짭짤해서 기름진 것도 잘 모르겠더라. 그냥 막 들어가.”

“우울해하는 줄만 알았더니 나 참, 먹는 건 또 잘 먹고 다녔네. 다들 여기에서 교수님 상대하며 눈알이 빠져라 자료를 뒤지는 동안에.”

아서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자 엘이 당황한 얼굴로 변명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번에 갔을 때 한나가 잠깐 나 불러서 해 준 거야. 기분 풀라고…….”

“어쨌든 혼자 먹고 다닌 거잖아. 보고서 잔뜩 밀렸다더니?”

“그건, 보고서 가져가는 게 나뿐이니까 그렇지! 혼자 먹고 놀려고 한 게 아니고…….”

엘의 얼굴이 목까지 붉어졌다. 몹시 당황하면 나오는 반응이었다. 벌개져서 버벅대는 모습에 아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 관리는 무슨.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숨길 줄 모르는 타입이다.

나중에 누굴 좋아하기라도 하면 볼 만하겠네. 아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물이 찔끔 흐른 눈가를 훔쳤다.

“진짜, 얼굴에 다 티 나는 거 좀 어떻게 해봐. 주방에서 너 기분 풀라고 음식까지 내왔다며 표정 관리는 무슨, 아주 동네방네 다 티를 냈네.”

“너, 이, 진짜…….”

“그런 생각은 못 하고, 샌드위치가 엄청 맛있다는 생각만 했지?”

그가 낄낄 웃는다. 엘의 얼굴이 더 시뻘게졌다. 당황해서 붉어졌던 것과는 달랐다.

“사람 놀리는 게 그렇게 좋냐? 어? 진짜, 이!”

그가 아서의 정강이를 퍽 차올렸다. 아서가 악 소리를 내며 맞은 부위를 부여잡았다. 엘의 씩씩거리는 소리와 아서가 끙끙대는 소리가 섞였다.

“야, 그렇다고 뼈를 치면 어떡해? 다리라도 부러지면 네 대신 가지도 못하는데.”

“부러져서 드러누워! 가지 마!”

“보고서가 세 개나 밀린 친구를 두고? 내가 또 그렇게 야박하진 못하지.”

그가 실실 웃었다. 엘이 미간을 확 찡그렸다.

“미친놈아, 넌 이래서 고맙다가도 짜증 나.”

“선후 관계가 뒤바뀐 거 아니야? 짜증이 나지만 고마운 거지. 너 대신 가잖아?”

“말이나 못하면. 그 좋은 머리로 공부나 더 하지 그랬냐?”

“너무 주목받으면 피곤해진다니까. 일할 거만 많고.”

“그걸 또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사실이잖아.”

“어차피 너는 잘생기지 않아서 오래 주목받진 않을 거야. 일할 거는 계속 많겠지만.”

“그것 참, 냉정한 사실이네.”

아서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게 뭐 대수냐는 표정이라 엘 도안은 괜히 신경질이 일었다. 그가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니었으니까. 덩치가 제법 크고 굵직한 인상이라 좀 험악해 보여서 그렇지 못난 인상은 아니었다.

특히, 작위를 가진 40대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세대를 막론하고 큰 인기가 없는 엘의 입장에서는 모두 못마땅했다.

아서가 보고서를 품에 넣었다.

“그 샌드위치 싸서 가져올게. 너무 짜증 내지 마.”

“됐어. 그거 식으면 너무 느끼해져서 맛이 확 떨어져. 뜨거울 때 바로 먹어야 해.”

“아, 까다롭기는.”

“그러니까 애초에 혼자 먹은 이유가 있다고 했잖아!”

“그래, 그렇겠지. 엘 도안이 어련하겠어. 가서 맛있게 먹고 오겠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베어 먹고, 반쯤 먹으면 블루베리 쨈 달라고 해서 듬뿍 발라먹어. 치덕치덕 발라. 그러면 물리는 것도 없고 완벽하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였지만, 잔소리처럼 들릴 만큼 세세한 설명이었다.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제일 진지해지는 엘 도안다웠다. 아서는 피식 웃고 말을 끌어 자작가로 향했다.

* * *

마르티안은 서재에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 그녀의 서재는 온갖 서류로 엉망진창이었다. 침실에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만 옮겨서 일했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했는데, 서재에서는 아예 정리가 불가능했다.

너무 많은 자료들이 있었고, 그녀 자신이 아니면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것이 불필요한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녀가 정리까지 하며 일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다. 집사는 조사단 관련하여 너무 바빴고, 론은 잔심부름이나 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이런 일을 보조하려면 기본적인 지식과 업무적 눈치를 갖춰야 했다.

‘매번 없는데도 사람을 못 길러서……. 론에게 표 보는 법이라도 가르칠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론은 열심히 배우려 들겠지만 그녀는 공부만 가르칠 자신이 없었다. 요즘 론은 여러모로 그녀를 자극하는 경우가 많아서, 침실에만 두는데도 일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문득 백작이 떠올랐다. 공작가의 후계자로 길러졌으니 기본 능력은 확실할 것이다. 거기에 실무 능력까지 인정받아 작위를 받았다고 했으니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사람이 일이 많으니까 별생각을 다 하게 되네. 삼 개월 뒤면 끝낼 상대에게 무슨.”

그녀가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백작은 어이없을 만큼 그녀의 취향이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귀족적인 개였다. 다리를 벌릴 때면 남창보다 더 천박하면서 사고방식은 여전히 고위 귀족이라는 점이 그랬다.

개 취급을 하며 그렇게 찍어 누르는 데도, 그런 태도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정도로. 최근 론을 보석으로 회유하려고 한 것도 그랬다.

‘백작이 대단한 귀족인 거 맞지. 그러니까 좀 아차 싶어야 정상인 거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자제를 못 하는 걸까.’

사람을 한계까지 괴롭히고 몰아붙이는 게 그녀의 취향이었지만 상대를 지나치게 부숴버리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감수한 깊이만큼 상대에게 더 집착한다. 관계를 끝내려 할 때면 특히 더 번거롭고 귀찮아졌다. 그건 그녀가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휴이를 놓고 적당히 대하기가 어려웠다. 과하게 흥분하는 스스로가 제일 문제였다. 휴이가 론의 앞에서 남창처럼 굴었다는 걸 들었을 때, 그리고 그녀에게 엉엉 울며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는 희열 같은 흥분을 느꼈다.

휴이에게서 느끼는 건 대부분 그런 식이었다. 감정이라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 흥분, 단발성이지만 아주 강렬한 중독에 가까운 자극들이었다.

“정신 차리고 일이나 하자.”

그녀가 책상 아래 중구난방으로 분류된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영지에서 관리하는 나무가 무엇이었는지 연도별로 기록한 것이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 위로 어떤 글자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단어를 추론해 가면서 서류를 보았다.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곳에 쌓인 서류는 가장 최근 것이 칠십 년 전 서류였으니까.

“적나무를 대체할 만한 게 있어야 하는데…….”

오래된 서류를 보는 건 적나무가 유행하기 전 상황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지금과는 관리방식이 달랐다. 숲에 심고 관리하는 나무 종류가 10여 종이 넘었다. 마르티안은 한쪽에 놓아둔 다른 서류를 펼쳤다. 당시 수목 수입에 대한 장부였다. 적나무를 기반으로 운용하던 때와는 달리 당시 수입은 매년 변화폭이 컸다.

“확실히 가구용 나무를 팔지 못하니까 수익이 확 떨어지네. 당장 적나무를 대신할 만한 건 속나무나 백단나무 정도인 거 같은데…….”

그녀가 한숨을 뱉어냈다. 속나무나 백단나무 둘 다 적나무를 대신하기에는 단점이 너무 명백했다.

백단나무는 가구용으로 쓰이긴 했지만 무늬가 희미해서 값이 한참 떨어졌고, 속나무는 적나무보다 훨씬 비쌌지만 병충해에 약하고 외부환경에 예민하여 관리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적나무가 각광받기 전까지, 영지에서는 속나무를 제법 심었다. 수익이 좋으니까 문제를 감수하고 기른 것이다. 온전히 길러내어 수익이 확 늘었던 해도 많았지만, 병충해로 인해 큰 손해를 본 해도 많았다. 엄청난 수익을 올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망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속나무가 말라 죽었다고 해서 도안 가문 자체가 망하지는 않았다. 보통은 병해에 아주 강하고 값이 저렴한 건축용 보조 수목들도 함께 길렀으니까. 아마 감자 정도는 무난히 먹었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만 있으면 속나무가 수익은 확실할 거 같은데…….”

기르기 편하고 수익마저 안정적인 적나무가 유행하면서, 속나무를 기르는 영지는 거의 사라졌다. 공급이 줄어들자 가격도 훨씬 많이 올랐다. 따듯한 지방에서 한정적으로 나오는 흑단 나무와 가격이 비슷할 정도였다.

마르티안은 속나무 관리를 놓고 이리저리 고민했다. 이전의 자료가 제법 많으니 새롭게 시도할 선택지로 나쁘진 않았다.

문제는 관리할 사람이었다. 새로운 수종을 도전한다는 건 관리할 일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는 소리였다. 인력 수급에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두 명의 숲지기로는 당장 수익 낼 나무를 관리하고 숲의 상태도 살피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랐다.

거기에 속나무까지 시범적으로 기르자고 하면 그게 잘 될 리 없었다. 숲지기가 과로로 죽거나 아니면 일 어딘가 구멍이 나서 망쳐지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일단은 적나무 피해를 메꾸어야 하니까. 백단나무를 심거나 아니면 저렴한 건축용 나무 중에 빨리 자라는 것들로 심어서…….”

마르티안은 책상 위쪽에 밀어놓았던 종이를 앞으로 끌어왔다. 그건 그녀가 직접 정리한 서류였다. 집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것들로, 앞으로 일 년 동안 이루어질 예상 지출내역부터 훼손되지 않은 적나무를 팔았을 때 나올 예상 수입금액 등 향후 진행될 수입 지출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빼곡한 숫자 아래로, 그녀는 새로운 내용을 적어 내렸다. 적나무가 다 베어진 뒤 그 숲을 채울 나무 후보들이었다. 숲 크기를 고려해 필요한 묘목수를 함께 계산하느라, 그녀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아서가 저택에 도착했을 때 집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엘 도안을 기다렸던 모양인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물론 그건 아주 짧은 표정이었고 그 뒤의 응대는 아주 매끄러웠다. 앞서 계단을 올라가던 집사가 불현듯 뒤를 돌아보며 아서에게 물었다.

“혹시 식사를 하셨습니까?”

“점심은 먹고 왔지. 그건 왜?”

“도련님이 오시는 줄 알고 맞추어서 준비를 해 두었는데, 그게 다과라기에는 조금 과한 음식이라…….”

“혹시, 샌드위치 튀김인가?”

“아, 들으셨습니까?”

“맛있다고 극찬을 하던데? 꼭 먹어보라면서.”

그 말에 집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주방에서 들으면 아주 기뻐할 소리로군요. 그럼 다과는 원래 준비한 대로 가져다 드릴까요?”

“그렇게 해. 엘 도안 입맛에 맞는 거면 내 입맛에는 차고 넘칠 테니까.”

농담을 섞은 그의 말에 집사가 슬쩍 웃었다.

“엘 도련님이 참 유하신데, 음식 평가에는 조금 까다로우신 편이죠.”

그렇게 말하는 집사의 주름진 얼굴로 애정이 가득하다. 아서는 그냥 웃었다.

조사단에 들어온 것 자체가 운이 나쁜 결과라고 말했지만, 조사단 중에도 운 좋은 사람이 있었다. 그게 엘 도안이었다.

가문 모두에게 사랑받는 둘째,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농담이라고 여겼을 소리였다. 아서조차도 그런 건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저 도안 자작가가 둘째에게도 관대할 만큼 풍족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틀렸지.’

도안 가문은 둘째에게도 지원을 듬뿍 할 만큼 풍족한 것이 아니라 그저 엘 도안을 아끼고 사랑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조사단 모두가 이제는 그걸 알았다. 자작가의 사람들이 엘 도안을 대하는 걸 보면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졸업 후 일 년간 쓸모없이 지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엘 도안은 심각하게 낙심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얼마든지 그를 환대할 집이 있었다.

아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나서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열등감이나 짜증을 느끼진 않았다. 사실 자신과는 상황이 너무 달라서 열등감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조사단들 몇몇이 근래 들어 엘 도안에게 유난히 신경질적으로 굴고 있었으니까. 아서는 그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불쌍하다고도 생각했다. 엘 도안은 그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사랑을 너무 받고 자란 탓인지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이해도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예민하지도 않았고 그런 감정을 가진 상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나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구나, 혹은 아 오늘 기분이 좀 나쁜가 보다, 예민한가 보다, 그러고 끝이었다. 상대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열등이라니 그건 참으로 안쓰러운 감정이었다.

도안 자작의 서재는 저택의 가장 위층에 있었다. 아서는 조금 긴장했다. 저택에 머무른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최상층까지 올라가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묵직한 천과 카펫으로 꾸며진 복도는 화려하진 않았지만 제법 아늑한 느낌을 주었다.

집사가 먼저 서재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엘 도안 대신 그가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자작님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 계시면 저는 곧 다과를 가지고 들어가겠습니다.”

집사가 열어준 문으로 도안 자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간편한 차림이었다. 헐렁해 보이는 흰 셔츠와 검은 바지, 하나로 묶어 늘어트린 머리카락까지. 꾸밈새 없는 차림은 오히려 화려한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아서는 그녀의 공간으로 들어서며 예의를 표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들어와서 앉아, 엘을 대신해서 왔다고?”

“보고서를 쓰느라 너무 바쁜 거 같아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요즘 표정이 영 안 좋다 싶더니 이게 부담이었던 모양이네. 하긴 오가면서 잡아 먹는 시간이 상당할 테니까.”

“아, 엘은 나름 표정 관리를 했다고 말하던데요.”

“표정 관리?”

그녀는 그렇게 되묻고는 이내 웃었다.

“엘은 표정 관리라는 걸 할 수 없는 성격일 텐데? 어릴 때부터 아주 작은 거짓말을 해도 티가 났거든.”

“그래서 더 귀엽긴 했지만.” 그녀가 말을 덧붙이며 웃었다. 그건 자작가의 집사가 보이던 것과 몹시 닮은, 너그럽고 애정 가득한 미소였다. 감정이 녹아든 웃음은 그 자체로 생동감이 넘쳤다.

아서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때마침 집사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테이블에 놓이는 것들을 보며 아서는 정신을 차렸다.

고소한 기름내가 가볍게 올라오는 샌드위치 튀김, 단내를 풍기는 블루베리 잼과 상큼한 과일 타르트, 쿠키가 차례로 놓였다. 차는 느끼한 맛을 씻어 내릴 냉침 차였다. 집사는 아서 앞에 음식들을 주르륵 놓고, 마르티안 앞에는 찻잔과 찻주전자만 놓았다.

“……엘이 평소에 늘 이만큼씩 먹습니까?”

차려진 음식은 상상보다 더 과했다. 엘 도안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놀랄 만큼 많이 먹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과마저 이렇게 과하게 먹는 줄은 처음 알았다. 어떻게 살이 찌지 않는 거지. 그는 엘 도안의 키와 덩치를 떠올렸다.

“걔 몸은 여러모로 효율이 떨어지거든. 어릴 때도 많이 먹여두지 않으면 금방 골골댔어. 키 크고 나서는 그렇게까지 골골대진 않는 거 같지만.”

“하지만 수도에서는 이렇게까지는 먹지 않아서…….”

“우리 집안이 입맛이 좀 까다롭거든.”

그녀가 농담처럼 답했다. 옆에서 집사가 어서 드시라며 권해온다. 아서는 샌드위치 튀김을 손에 들었다. 기름종이로 감싼 샌드위치로 뜨끈한 열기가 그대로 느껴졌다.

샌드위치 튀김은 당황스러울만큼 맛있었다. 치즈와 햄으로 채워진 속은 느끼하고 짭짤했지만 풍미가 좋았다. 반쯤 먹었을 때 엘 도안이 알려준 대로 블루베리 잼을 듬뿍 바르고 먹었는데, 상큼한 것이 섞이자 살짝 물리던 느낌마저도 사라졌다.

냉침한 차는 약간 떫고 쓴 맛이 강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느끼하고 묵직한 맛과 완벽하게 어울렸다. 손바닥만 하게 나온 과일 타르트는 상큼하게 입가심하기 좋았고 달달한 쿠키는 남은 차와 또다시 어울렸다.

배가 곧 터질 것처럼 불렀다.

“잘 먹네. 맛이 괜찮은 모양이야?”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매일 먹다가는 큰일 날 거 같은데요. 순식간에 멧돼지처럼 커질 거 같습니다.”

그 말에 마르티안이 짧게 웃었다. 집사 역시 웃으며 빈 접시를 정리했다.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그녀는 아서에게 엘 도안이 교육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고, 소소하지만 제법 재미있는 일화들이 하나하나 이어졌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집사는 두 사람에게 차를 새롭게 채워주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서는 그때를 맞춰서 보고서를 내밀었다.

“조사 보고서입니다.”

봉투에 담긴 보고서는 3~4장 분량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종잇장이었다. 절차적인 필요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티가 역력했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들고 성의 없이 훑어내렸다. 이렇게 된 지가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서류의 마지막을 보기 시작했을 때 아서가 몸을 일으켰다.

“펜을 가져오겠습니다.”

“아, 그래. 책상 위에 있으니까 그대로 가져오면 돼.”

보고서 끝에는 확인 사인이 들어간다. 아서는 그녀가 말한 대로 펜과 잉크를 찾았다. 책상 위에는 서류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펜과 잉크를 손에 쥐면서, 혹시라도 펜을 떨어트려 서류를 망칠까 봐 조금 긴장했다.

“가져왔습니다, 자작님.”

아서는 마르티안이 바로 쓸 수 있도록 잉크에 펜을 찍어서 가볍게 그어본 뒤, 그녀에게 넘겼다. 개인 보좌관 같은 태도였다. 그녀는 그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보고서에 사인했다.

“필요한 절차긴 하는데,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오가는 게 좀 그렇지 않아? 그쪽도 맡은 보고서가 많을 텐데.”

“손이 빠른 편이라서요. 끝내야 할 일들은 이미 끝냈습니다.”

“손이 빠르다고? 일을 잘하는 모양이네?”

“나쁘진 않은 편입니다.”

적당한 자랑이 섞인 대답에 마르티안이 피식 웃었다. 사인을 쓴 잉크가 마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남은 차를 마시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

형식적인 보고는 사실 마르티안에게도 시간 낭비였다. 동생과 잠시 시간을 보낸다는 것 때문에 그 낭비를 기꺼이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앞으로는 숲으로 나갈 때 집사에게 보고서를 맡기라고 해야겠어.’

원래라면 조사단원이 직접 보고서를 전달하고 질의를 받는 게 정식 절차였지만 어차피 보고받을 조사 결과가 없는 상황이다. 내용이 없으니 절차가 무의미했다. 그녀는 쓸데없는 시간을 줄이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아서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자작님. 혹시 적나무 대체재를 찾으시는 겁니까?”

“……뭐?”

“책상 위 서류를 보니까 대체할 나무들을 써놓으신 거 같아서요.”

마르티안은 순간 얼굴을 굳혔다.

“훔쳐보았다는 말을 너무 당당히 하는 거 같은데?”

“아, 그게,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다가 보여서…….”

그가 머뭇대며 사과했다. 마르티안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서류를 방치한 건 사실이었다. 설명이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 표들과 나무 명칭, 숫자들. 그녀가 늘어놓은 건 아주 불친절한 서류였고 그 자체로 나름의 보안이 걸려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물론 그건 보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웠다. 애초에 서류 자체가 대단한 비밀을 담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것과는 별개로 아서의 태도는 문제가 있었다. 모든 서류는 내부적인 법이었다. 따로 언질하지 않았다면 보여도 보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고,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해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능력은 좋은 모양이야. 언뜻 봐서 파악할만한 서류는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걸 이렇게 드러내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닌 거 같은데?”

그녀가 말했다. 냉정한 표정은 그 자체로 압박이다. 아서는 긴장한 채로 다시 사과했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서는 실수를 자책했다. 어떻게든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행동이 지나치게 앞섰다. 분위기가 완전히 망쳐졌음을 느끼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작님. 사실은, 자작님께 제가 쓸모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의 말이 머뭇대며 흐려졌다. 마르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아서를 보았다. 고압적인 침묵이, 그를 재촉했다. 아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자작님. 제가 마음이 앞서서 실례를 했습니다. 이곳의 숲 관리 체계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터라, 어떻게든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졸업반이기도 하고 가능하다면, 이곳 같은 곳에서 일하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서는 벌게진 얼굴로 말을 마쳤다. 횡설수설 이어진 말은 스스로 듣기에도 무슨 소리인지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이런 멍청한 꼴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다시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필사적인 변명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까보다는 약간 풀어진 표정이었다. 다행이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며 아서는 긴장했다.

마르티안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와서 일을 하고 싶단 소리야?”

“……네, 가능하다면요.”

“보다시피 적나무 피해 때문에 수입이 확 줄어들 예정이야. 비싼 고용인을 두긴 상황적으로 어렵고.”

교육원 출신 고용인들은 기본적인 비용이 높았다. 풍요로운 시기라면 제법 긍정적으로 검토했겠지만 당장은 돈 주고 사람을 쓰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계약은 보통 장기계약이다. 교육원 출신을 두고 하는 장기 계약은 법적으로 관리되는 사안이라, 굉장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돈이 없어서 못 준다거나 중간에 계약을 파기한다거나 이런 것들이 불가능했으니까. 보장된 금전 흐름 없이 계약했다가는 파산의 시작이 될 수도 있었다. 마르티안은 아서를 훑어보다가 말을 더했다.

“이거 때문에 엘 대신 온 거야? 이번 조사 결과가 나빠서 다들 쉬게 될 거 같다더니……일자리를 구하고 싶었던 모양이네?”

“그건,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로 이곳의 체계가 좋아서…….”

스스로 듣기에도 변명같이 들려서 아서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일 년을 쉬어야 할 거라는 말에 초조해진 건 맞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 자작가의 관리 체계가 마음에 든 것도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일하고 싶은 곳이어서 욕심을 낸 거였는데 급하게 나섰다가 일을 망친 셈이다,

그럼에도 아서는 다시 기회를 잡고 싶었다. 책상에 쌓여있는 수북한 서류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서류는 일의 버거움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매달리는 심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서를 전달하러 오는 날만이라도 절 써보시면 안 될까요? 자작님이 원하시는 업무는 대부분 할 수 있을 겁니다. 나중에 계약을 안 하더라도, 기회라도 주시면…….”

고용되지 못한 상태로 졸업하면 가문으로 돌아가면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무급으로 일해야 할 게 뻔했다. 지금도 그의 큰 형은 그를 한없이 부려먹었으니까.

우드가 저택에 머무를 때면 그는 무능한 취급을 받으면서도 서류를 끝없이 처리해야 했다. 대부분 숫자를 일일이 확인하고 맞춰야 하는 장부들이었다. 제대로 못 해내면 전보다 더한 식충 취급을 받으니 어떻게든 하는 수밖에 없었다. 숫자와 표에 빠삭해진 건 그 때문이었다.

정 안되면 가문으로 돌아가서 일 년을 보내야 하겠지만, 아서는 가능한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혹시 나중에 계약을 하게 되면 계약은 법에 맞춰서 해도 실제로 주시는 건 삼 분의 일 정도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괜한 소송 거리를 만들고 싶진 않아, 아서 우드.”

아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럴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나중에 계약서를 기반으로 급여 부족분을 달라고 소송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이 밝혀지면 자작가는 무조건 그 차액을 물어줘야 했다.

아서가 침울하게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마르티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드 남작가의 셋째라고 했지?”

“예? 아, 네. 아버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셔서 큰 형이 작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우울한 얼굴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마르티안이 그를 훑어 내렸다. 엘 도안 또래라고 들었는데 덩치가 있는 굵직한 외모라서 엘 도안만큼 어리게 느껴지진 않았다.

“솔직히, 학자나 연구를 할 것처럼 생기진 않았는데…….”

“아, 제가 외모는 이렇지만 그래도 일하는 건 꼼꼼합니다.”

스스로를 두고 하는 소리가 지나치게 객관적이어서 마르티안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분위기가 풀어지자 아서의 표정도 조금 펴졌다. 외적으로는 어려 보이지 않았는데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엘의 또래처럼 보였다.

마르티안은 아서를 고용인으로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건 자작가에게 너무 큰 금전적 부담이 될 테니까. 앞으로 감자만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계약을 덜컥 할 순 없었다.

하지만 아서가 말한 대로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분명 아까운 인재이긴 했다. 그녀는 숲지기도 더 필요했고 그녀의 일을 도와줄 똑똑한 보좌관도 필요했으니까.

그녀는 장기적인 금전 부담을 줄이면서 그 모든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일단은, 먼저 아서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가 어느 정도로 일하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은니까 앞으로 네가 보고서를 들고 와. 그 날은 여기서 일하는 거로 하고.”

고용한다는 이야기는 조금도 없었지만 어쨌든 기회를 준다는 말이다. 아서는 갑작스러운 기회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거절당했는데, 어떤 이유로 마음을 바꾼 건지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대답 없이 머뭇대기만 하자 마르티안이 물었다.

“대답이 없네. 싫어?”

아서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이유야 어쨌든 이건 그가 붙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아니요, 아닙니다, 보고서 전달할 때마다 오겠습니다.”

그가 고개마저 휙휙 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애 같은 구석이 있네, 마르티안은 피식 웃고는 몸을 일으켰다. 쌓여있는 서류들이 책상 위와 아래로 가득했다. 그녀가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좋아, 아서. 오늘부터 하는 거로 하고, 서류 목록부터 정리하도록 해.”

* * *

이른 새벽, 휴이는 버릇처럼 눈을 떴다. 창문을 보니 아직도 어두웠다. 원래는 마르티안을 기다리며 제 몸 상태를 정리했을 시간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게 필요 없었다. 주인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정조대를 빼앗긴 데다가 마르티안은 이제 일찍 찾아오지 않았으니까.

애첩 아래에서 비참한 꼴이 된 후로 상황이 나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마르티안은 그를 당장 버리지만 않았을 뿐 여전히 방치했다.

“당장 혀를 잘 쓰게 만들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적어도 가르쳐 주겠다는 확답은 받아와야지.”

확답. 그 말이 얼마나 야속하고 억울한지 휴이는 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에게 답을 줄 상대는, 그녀에게 고집을 부려도 된다는 허락을 맡은 상태였으니까. 론은 고집의 대가로 매일 엉망으로 맞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버텼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휴이는 다시 방치되는 중이었다. 몸은 지나치게 깨끗해져서 도안 자작가에 처음 왔던 날과 다르지 않게 변했다. 마치 지금껏 그녀와 지내온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건 그를 몹시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몸이 지나치게 피곤했지만 도리어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건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잠들지 못하는 시간 내내 그는 온갖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초조함, 불안, 서러움과 우울, 섭섭함. 그리고 열등까지. 그건 지금껏 그의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면역이 전혀 없는 감정들이었다.

찬물로 씻고 나자 잠기운이 전부 사라졌다. 그는 가운을 고쳐 매고 방 한쪽에 놓인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 아래 카펫에는 얼룩이 남아있었다. 그가 방뇨를 해서 만들어진 얼룩이었다. 자국은 그때 겪었던 흥분과 역겨움을 동시에 일깨웠다.

휴이는 잠시 머뭇대다가 그 위에 엎드렸다. 얼룩 자국이 더 가까이 보이자 수치심이 일어났다.

“주인님…….”

그는 이 자리에 없는 마르티안을 떠올렸다. 엎드린 몸을 한 손으로 버티고, 다른 손으로 윗옷 단추를 끌러냈다. 옷이 반쯤 풀리자, 그는 잠옷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자신의 유두를 쥐었다. 부푼 살덩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거칠게 뭉개졌다.

“주인님, 흐으, 주, 인님…….흐읏. 하으, 흐응.”

통증이 심해질수록 유두가 더 딱딱하게 굳는다. 흥분의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의 유두를 가혹하게 잡아당겼다. 흐, 흐으. 사타구니 사이가 불룩하게 부풀어 올랐다. 싸고 싶은 감각을 참으며 그는 등을 세웠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천박한 꼴이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은 붉었고, 반쯤 흘러내린 잠옷 안으로 유두만 붉고 두툼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거울을 보며 양손으로 자신의 유두를 쥐었다. 양손을 크게 비틀자, 허리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그는 유두를 움켜쥔 손을 앞으로 잡아당겼다.

유축기로 계속 괴롭혀온 탓에 그의 유두는 이전보다 좀 더 두툼하게 커져 있었다. 늘어난 살덩이는 남자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컸고 그래서 더 천박해 보였다.

흐으, 흣, 아프, 흐으……. 그는 애원하면서 유두를 마구 잡아당겼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애원을 제대로 들어 준 적이 없었다. 가혹한 손길은 그녀를 쫓는 손이었다. 헐떡이는 숨이 크게 오갔다. 그의 성기는 쉽게 발기했다.

마르티안이 있었다면 분명 얻어맞았을 것이다. 개는 제 주인이 허락할 때만 천박해져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지금처럼 함부로 굴었다가는 흥분한 곳을 맞아야 했다.

바짝 올라붙은 유두에 떨어지는 매질은, 늘,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울고 빌다가 숫자를 틀리면 맞아야 하는 매질의 수가 계속 늘어났다.

열대가 열다섯 대로 스무대로. 한없이 늘어나는 숫자는 절망 같은 고통과 극도의 흥분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휴이는 매번 엉덩이를 움찔대며 울었다. 퉁퉁 부어오른 곳이 타는 듯이 뜨겁고 고통스러웠지만 허락받지 못하면 만질 수도 없었으니까.

“젖꼭지가 퉁퉁 부었네. 가서 식히고 와.”

휴이는 마르티안이 말하던 것을 떠올리며 헐떡였다. 아래가 터질 것 같았다. 방금까지 스스로 비틀고 긁어댄 유두는, 아프게 부어올라 욱신거렸다. 휴이는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어서 움직였다.

맨바닥이 드러난 곳까지 기어간 뒤 그는 몸을 엎드려 엉덩이를 들고 가슴을 바닥에 대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따갑게 달아오른 유두가 닿는다.

“흐으, 흐응……흣…….”

신음을 뱉으며 차가운 바닥에 가슴을 문질렀다. 달아오른 유두가 비벼졌다. 그게 그녀가 허락한, 식히는 방법이었다.

흐으, 으. 예민해진 살갗이 바닥에 쓸리며 더욱 붉게 부어올랐다. 차갑고 따가운 감각은 뜨겁게 아픈 것과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남창들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수치스러운 꼴도 그랬다.

휴이는 마르티안이 그에게 주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그만큼의 쾌감과 수치. 그는 허겁지겁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다. 빳빳하게 선 아래는 질끔거리며 젖어있었다.

그는 달아오른 유두를 바닥에 계속 문지르며 한 손으로 성기를 붙잡았다. 손에 쥔 것은 당장 터져나갈 것처럼 뜨거웠다.

휴이는 엄지손가락으로 귀두를 마구 문지르며, 회초리가 귀두 구멍을 비비던 감각을 떠올렸다. 마르티안의 침실에서 성기를 맞으며 사정했던 때를 상상하고, 고통과 쾌감이 번갈아 주어졌던 그 감각을 되새기려 애썼다.

“흐읍, 흐으, 흐응……읏, 흐으……”

쿠퍼액이 질질 새며 흘렀다. 온몸이 흥분했지만, 흥분의 깊이는 실제만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견디기 어려운 매질이 동반되었어야 했고 그를 강압적으로 다그치는 명령도 더해졌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는 그 모든 것을 해줄 그의 주인님이 없었다.

“주인님, 흐으, 주인님. 제발. 흐응, 제발……읏.”

천박한 상상을 유지하기 위해, 휴이는 제 아래를 거칠게 흔들면서 애원했다. 제 앞에 마르티안이 있다고 생각하자, 흥분이 곱절은 커졌다. 그는 손끝을 세워 귀두 구멍을 꾹꾹 눌러 짓이겼다.

“주인, 하으, 흐, 매번 맞을, 흐읍, 하으, 맞으면서, 흐이, 흣, 힉, 쌀 테니까…… 흐으, 흐읍 잘못했어요.”

착실하게 반응한 몸이 질척한 정액을 쏟아냈다. 눈치 보거나 겁먹지 않아도 되는 사정이었지만, 휴이는 버릇처럼 제 성기를 감싸 쥐고 정액이 멀리 튀지 않도록 막았다. 한차례 쏟아낸 것이 손을 잔뜩 적신다. 휴이는 헐떡이며 엎드렸다.

흥분은 거셌지만 만족감은 이상할 정도로 낮았다. 초조하고 간절한 마음이 더 극심해질 뿐이었다. 주인님이 해주었다면, 같이 있을 수 있었다면, 그는 더 오래 참고, 더 오래 고통스러워하며, 더 만족했을 텐데. 그가 정액으로 젖은 손을 빼내어 입에 대었다. 습관처럼 핥았다. 핥는 곳에서는 여전히 역겨운 맛이 났다.

* * *

마르티안의 침실은 두 공간이 일자로 이어져 있었다. 바깥문을 열고 들어오면 응접실이 있었고 거기에서 내실로 이어지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

휴이가 그녀의 방을 방문할 때면 응접실에는 늘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곳을 지나쳐 안쪽 내실로 들어가곤 했다. 그 안에는 늘 론이 혼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바깥쪽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응접실에는 자작가의 집사가 있었다. 그는 휴이를 응접실의 소파로 안내했다. 테이블에는 다과가 이미 놓여 있었다.

“자작님께서 아직 일이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면 곧 나오실 겁니다.”

“누가 왔나? 자작이 매번 자리를 비우던데 오늘은 일정이 있었나 보지?”

그의 물음에 집사가 잠시 머뭇댄다. 예, 하고 나오는 대답은 조금 늦었다. 집사는 휴이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이 나쁘지 않은 차였다.

휴이는 집사의 응대를 받다가 문득,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르티안의 방치를 참다못해 그가 직접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그때와 비슷했다.

“……혹시 자작이, 애첩과 있나?”

“죄송합니다만, 큼, 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집사는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피했다.

휴이가 론과 만나기 위해 올라온다는 건 집사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백작과 애첩의 만남이라니 영 이상한 일이었지만 마르티안은 이게 사적인 영역이라고 못박았다.

그래서 지금껏 집사는 이 일에 조금도 간여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간여하긴 했다. 두 사람이 만나는 시간 앞뒤로 저택 맨 위층과 그 아래층에 있는 하인들을 모두 물렸으니까.

문제는 오늘, 마르티안이 급하게 그를 불렀다는 것이다.

“백작이 오면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내실에서 나온 그녀의 옷이 잔뜩 흐트러져 있어서, 집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다. 뭔가 대꾸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 말만 남기고 다시 들어가버렸다.

그 이후로 집사는 여기에 서서 백작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차를 미리 우려내고 간단한 디저트를 준비하며 그는 어떤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물론 서로 관계를 다 아는 상황에서 적당하게 할 만한 변명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집사는 그저 상황을 회피하기로 했다. 어쨌든 이건 마르티안과 휴이 사이의 사적인 관계였으니까. 그는 평범한 내용을 입에 올렸다.

“우려낸 차는 남부에서 나오는 차입니다. 묵직한 맛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따로 골랐습니다.”

“그래.”

휴이는 찻잔을 들었다. 마시기는 했지만 차 맛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오감은 내실 문 안쪽,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안쪽 상황에 완전히 집중한 상태였으니까.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종합하며 그 안의 상황이 어떨지 떠올렸다. 상상하고, 가늠하고, 짐작했다.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지난 나흘 동안 애첩의 몸은 매일 더 엉망으로 변했다. 검고 붉은 흔적들은 매번 새롭게 더해졌고, 겹쳐진 매질 자국들은 보라색으로 변했다.

자신을 맞이하는 꼴은 또 어떠했나. 가운 하나 허락받지 못해 다 젖은 속옷을 입고 휴이를 맞이하곤 했다. 비참하다면 비참한 꼴이었다. 그게 그녀가 자신의 애첩에게 내린 벌이자 고집의 대가였다.

그건 휴이를 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벌이었다. 버리기 직전의 상태로 성의 없이 방치하는 것과는 다른, 주인이 직접 만든 흔적으로 가득한 벌. 그게 벌인가. 휴이는 그게 상이자 애정이나 다름없다고 느꼈다.

그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자, 휴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분노도, 들지 않았다. 이건 마르티안이 만든 차이였으니까. 그녀가 드러내는 분명한 서열이었다. 처음 겪는 열등감은 온 마음을 들쑤셨다.

‘왜, 왜 나는……나에게는…….’

그는 공작가의 후계자였고, 그의 영지는 부유했으며, 모두가 결혼하길 선망하는 대상이었다. 얼마든지, 그런 것들을 나눌 수 있었다. 넘길 수도 있었고, 줄 수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전부 팔아서, 마르티안의 옆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자리를 사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이방인 애첩에게도 얼마든지 줄 수 있는, 작은 자리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가 애첩을 쓰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이 불안정하고 얄팍한 위치가 그가 있을 곳이었다. 견디지 못한 마음이 울컥 튀어나왔다.

“도안 자작은, 자주 이러나?”

“그게 무슨 뜻이신지…….”

“여러 사람을 한 번에 만나면서 이런 식으로 상대를 기다리게 한다든가, 대놓고 다른 사람을 침대에 올리는 거라든가, 상대의 지위에 상관없이, 이렇게…… 이렇게…….”

휴이는 자신의 태도가 엉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곳에 개로 온 거라면 끝까지 얌전하게 있어야 했고, 백작으로 온 것이라면 사적인 이야기를 올려서는 안 되었으니까.

이도 저도 아닌 말들은 그냥 자신에게 유리하고 집사를 곤란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집사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휴이는 끝내 말을 뱉었다.

“이렇게, 사람을 방치하고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도리어 마음이 더 상한다. 휴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시간에 자신이 온다는 걸 마르티안도 알고 있다. 알았으니까 집사를 세워 둔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그가 찾아오는 시간을 피해서 애첩과 관계해도 되었을 텐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건 휴이에게 더 큰 비참함과 수치를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녀는 그를 침실 안까지 들어오게 했을 테니까. 그녀는 그저 애첩과의 관계가 즐거워서, 굳이 그 시간을 끊고 싶지 않아서, 그를 이곳에서 기다리게 하고 있었다.

“자작님도, 그, 고의는 아니실 겁니다.”

집사가 애써 답한다. 고의는 아니라니, 휴이는 그 말을 곱씹어 보다가 이를 꽉 깨물었다. 그래, 분명 고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마르티안에게 자신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대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개였고, 언제든지 버려도 그만인 개였다.

주인은 개를 고를 수 있지만 개가 주인을 고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도 당연한 상황이었다. 스스로, 예쁨받게 굴어야지. 그녀는 늘 그렇게 말했다.

휴이는 자신의 상황과 위치를 참으려고 애썼지만, 열흘 가까이 억눌렀던 감정들은 도리어 치솟아 올랐다.

“이럴 거라면 미리, 말했어야지. 미리 말했으면 나도 기다리지 않았을 거고. 기본적인 예의라는 게, 자작가에서는 없는 건가? 왜, 꼭, 이렇게까지 만들어서, 후, 으…….”

순간 눈물이 툭 떨어졌다. 휴이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참으려 애썼지만 둑처럼 터진 감정은, 눈물로 밀려 나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서러움을 토로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마르티안에게 애원하고 싶었다. 혼이 나고, 용서를 받고, 다시 그 옆에서 개가 되고 싶었다. 참으면서 견뎠던 마음들이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집사는 몹시 당황했다. 귀족이 아랫사람 앞에서, 그것도 다른 가문의 아랫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체면이 땅에 떨어지는 일이었으니까. 집사는 애써 표정을 수습하고는 울고 있는 그를 모른 척한 채, 움직였다.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백작의 앞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비어있는 찻잔에 차를 따랐다. 울음을 멈추고 나면 목이 마를 테니까. 그리고, 그리고. 집사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마르티안은 휴이와 자신이 서로 즐기는 관계라고 분명히 말했다. 쌍방이 합의한 사적인 영역이니 일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었다. 집사는 지금 이 순간, 조용히 물러나는 게 맞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휴이의 말처럼 이건 침대 위 성향과는 상관없는 예의의 문제인 거 같았으니까.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휴이는 이 상황을 전혀 즐기는 것 같지 않았다. 쌍방이 즐기는 관계라고 하기에는 그는 몹시 괴로워 보였다. 그건 얼굴이 붉어진 채 불편한 기색으로 돌아다니던, 그녀가 데려온 수많은 상대들과도 다른 태도였다.

백작은 계속 울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려 그의 옷 소매가 젖었다. 집사는 속으로 한탄을 뱉었다.

‘그냥 서로 즐기는 관계라고 하시더니……. 아이고, 자작님.’

그냥 즐기는 관계에서 누가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어지간히 상처받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무리 보아도, 적어도 지금 이 상황에 있어서는, 마르티안이 그를 두고 아주 못되게 굴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체신을 다 내려놓고 이곳에서 울음을 쏟을 만큼.

그는 우는 백작을 보며, 망나니 자식을 둔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냥 기다리라고만 전달하고 집사는 돌아가서 일을 봐. 따로 접대할 건 없으니까.”

마르티안은 그렇게 말했지만, 집사는 우는 백작을 두고 그냥 물러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침실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말한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 거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상대는 자작가의 귀한 손님이었고……. 집사는 이것저것 이유를 덧붙이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제가 안에 들어가서……자작님께 상황을 전달하고 오겠습니다.”

마르티안은 내실에서 론과 함께 있었다. 론은 침대에 누워 엉덩이 아래에 베개를 잔뜩 깔고 다리를 벌린 상태였다. 잘 차려진 상차림처럼 그의 아래는 훤히 드러났다. 성기와 고환, 아랫구멍까지 적나라하다.

마르티안은 그의 허벅지를 좀 더 들어올려 구멍을 더 잘 보이게 만들었다. 흐으, 흑. 론이 흐느끼듯이 울었다. 그녀는 허리에 찬 모조 성기를 론의 구멍에 천천히 쑤셔 넣었다. 이미 몇 번을 들쑤신 뒤라서 뒷구멍은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열렸다.

그녀는 론이 가장 느끼는 내벽 부분을 찾아 그대로 꾹 눌렀다. 느긋한 자극에도 론은 흥분을 견디지 못해 상체를 비틀었다. 론이 뒤를 써달라고 애원한 뒤로, 그녀가 집요하게 들쑤시고 있는 곳이었다.

“흐으, 제발, 흐으,……주인님, 하윽.”

“제발? 제발 더 쑤셔달란 소리야?”

론이 급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마르티안은 그대로 하체를 밀어붙이며 내벽을 푹 쑤셨다.

흐, 큭, 하읏,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들이 론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애매하게 발기한 론의 성기에서 또다시 맑은 정액이 뚝뚝 떨어졌다.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정이었다.

“론, 앞이 쓸모없어져도 뒤는 쓸 수 있다며?”

마르티안은 그렇게 말하며 팽팽하게 벌어진 그의 구멍을 확인했다. 흉물스러운 모조 성기가 처박혀서 한계까지 벌어진 곳이다. 그녀가 가볍게 들쑤시면 맞물린 주름이 함께 딸려 나오고 다시 박히기를 반복했다.

가볍게 들쑤시는 감각에도 론은 흐느끼듯이 신음했지만 팽팽한 주름은 한계까지 벌어져 있을 뿐, 빠져나가는 것을 전혀 잡질 못했다. 들쑤셔지는 대로 벌어져 있을 뿐이었다. 한계에 가까운 흥분으로 인해 흐물대는 아래에, 그녀가 다시 하체를 밀어붙였다.

“제대로 하겠다는 소리 아니었어?”

“주인님, 자, 잘 하겠……, 힛.”

마르티안이 늘어진 론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열 번 가까이 사정한 탓에, 그의 성기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론은 그녀의 손을 보며 지금껏 수도 없이 내뱉었던, 제발이라는 소리를 다시 뱉어냈다. 쾌감을 견딜 수 없어서 몸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론의 표정이 질려있는 걸 구경하며 더 천천히 움직였다. 귀두 끝을 엄지와 검지로 눌러 비볐고, 반쯤만 밀어 넣었던 모조 성기를 더 깊숙하게 밀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참고 견디려고 하는 표정들이 쾌감에 섞여 일그러졌다.

“이래서야 너무 흐물대잖아.”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을 강도로 귀두를 비볐다. 아래를 찌르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흥분하는 곳만 또다시 푹푹 찔러대자 론은 울음 같은 신음을 뱉어냈다.

귀두를 비비는 손가락에 질척한 것이 잔뜩 묻어난다. 탁하지도 않은 체액은 정액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귀두를 비비면서 아래를 들쑤셨다.

흐, 흡, 흐으, 힉,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흘러내렸다. 한껏 시달려서 예민해진 몸이 쾌감을 급격하게 흡수했고, 아랫배 안이 움찔거리면서 덜덜 떨렸다. 론이 팔이, 그녀를 막을 것처럼 허우적대다가 이내 시트를 움켜쥐었다.

우글거리는 감각들. 예민함에 더해지는 지나친 쾌감. 시달린 성기는 반쯤 단단해진 게 고작이었지만, 그의 아랫배는 당장 뭐라도 쏟아낼 것처럼 조여들었다. 성기 아랫단을 관통하는 감각이 아래를 헤집었다.

론은 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흥분해서 흩어지는 이성을 붙잡아 애원했다.

“놔, 놔주, 흐으, 제발……흡, 아, 안돼……,힛, 흐, 제발, 주인, 흐으, 흐.”

마르티안은 작정한 것처럼 자극을 이어갔다. 론은 이대로 겪을 상황을 떠올리며 작게나마 몸을 비틀었다. 벌어진 아래를 가리고 싶었지만 그런 걸 허락받은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는 그녀 앞에 한껏 벌어진 몸을 다리로 가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내 눈앞이 젖어 드는 감각이 이어졌다. 론은 더 이상 애원도 하지 못하고 이상한 신음을 뱉어냈다. 경련하는 것처럼 떨리는 론의 아랫배를 보며, 그녀는 가볍게 웃었다. 헐거운 구멍을 들쑤시는 건 재미가 없었지만, 론이 엉망이 되는 꼴은 제법 즐거웠다.

마르티안이 론의 성기를 쥐어 그의 얼굴로 향하도록 움직인 순간, 그의 성기에서 묽은 액체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정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론은 안 된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쾌감을 견딜 수 없어서 허리를 부들대며 떨었다. 물줄기는 한참이나 이어지며 그의 얼굴과 가슴을 적시고 침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줄줄 쏟아지는 건 사정액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묽었다. 미적지근한 액체를 뒤집어쓴 상태로, 론은 흐느끼듯이 신음했다.

“흐으, 흣, 흐읍……침대가, 흐읏, 더럽……흐으, 다리, 힘이……하으…….”

흥분으로 젖은 목소리가 아무 말이나 뱉어낸다. 허리가 덜덜 떨렸다. 스스로 쏟아낸 것이 온몸을 적신 채 미지근하게 흘러내렸다.

마르티안은 그의 배에 고여있는 것을 손바닥으로 쓸어내어 론의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젖은 손이 내리쳐지는 소리가 철썩대며 울렸다.

“정신 차려야지.”

그녀가 손에 튄 것을 론의 입술에 문질렀다. 흐으, 하윽, 흐으. 헐떡임은 아직도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뺨을 내리쳤다. 론의 초점이 그녀를 겨우 잡았다.

“그렇게 좋았어? 오줌을 다 싸고.”

적나라한 말은 수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론은 몇 번 눈을 깜박였다. 축축한 시트와 몸에 고이고 흘러내린 것들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침대 역시 그가 쏟아낸 것으로 이미 엉망이었다. 아래에 아무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쾌감이 컸지만, 그게 좋았냐고 하면 또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마르티안이 원하는 답은 분명했다.

“……흐으, 네, 싸게 해주셔서……읏, 감사합니다.”

마르티안이 가볍게 웃고는 젖은 손을 그의 얼굴에 다시 문질렀다. 뺨과 코에 엉망으로 문질러지는 것을 견디면서, 론은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을 핥아내려 애썼다. 더럽힌 곳을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손바닥을 핥고 있자, 벌어진 입 사이로 손가락이 밀려들어왔다. 혀를 누르고 목 안을 침범한다. 손가락이 그 안을 들쑤실 때마다 그의 몸이 경직되며 흔들렸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로 줄줄 샜다.

“근데 개가 주인을 기쁘게 해야지. 주인이 개를 기쁘게 해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묻고는, 론의 목 안을 들쑤시던 손을 빼냈다. 헐떡이면서도 론은 숨을 뱉어냈다. 그녀가 무엇을 질책하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눈물이 고인 얼굴로, 그가 잘 조이겠다는 말을 했다.

사실 그건 어이 없을 만큼 안일한 대답이었다. 지금껏 전혀 조이지 못한 뒤가, 갑자기 조여질 리가 없으니까. 지나치게 시달려서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 모르게 된 걸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론의 대답을 모른 척 받았다.

“그래? 그럼 제대로 해봐.”

그녀가 론의 아랫구멍에 처박았던 것을 느릿하게 물렸다.

주인이 박아줄 때는 힘을 빼고 주인이 빼내려고 할 때는 조여서 붙잡는 것. 론은 필사적으로 아래를 조이려 애썼지만 허무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헐거워진 곳으로 빠져나가는 감각만 이어진다. 수치와 당혹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론에게 그녀가 말을 뱉었다.

“오줌이나 쌀 줄 알지. 응?”

그녀가 다시 하체를 밀어붙였다. 구멍은 쉽게 벌어지며 그녀를 받아들였지만 빠져나갈 때도 헐겁게 벌어졌다. 론은 아래에 힘을 주려 애썼지만 안에 고여 있던 윤활제만 질질 흘러내렸다.

“이제는 뒤로 질질 흘리기나 하고.”

그녀는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주인에게는 마냥 헐거운 구멍이었으나, 정작 론은 내벽을 들쑤시는 감각으로 인해 다시 흥분했다. 제대로 힘도 들어가지 않는 허벅지와 엉덩이가, 그녀가 내벽을 들쑤실 때마다 경련하는 것처럼 떨렸다.

“잘못……흐읍, 잘못했습니다. 벌, 받겠……흐으.”

“벌은 무슨. 더는 혼날 곳도 없잖아?”

나흘을 연이어서 혼난 탓에 론의 몸은 엉망이었다. 가슴, 유두, 등, 엉덩이, 허벅지, 발바닥, 고환, 성기, 뒷구멍까지 멍들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개중에는 피가 배어 나와 딱지가 올라앉기도 했다. 제대로 앉지도 걷기도 힘든 몸을 하고도 계속 고집을 부리려 들어서, 그녀는 오늘 아침에 개의 고집을 그냥 꺾어버렸다.

“오늘, 백작님에게 제대로 가르치겠다고 해.”

참을 수 있을 때까지 고집부리게 해준다고 한 말을 변덕처럼 뒤집는 소리였다. 그녀는 이유나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만약 파트너 관계였다면 약속했던 걸 그렇게 뒤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론이었고, 그녀가 가장 쉽게 편하게 두고 쓰는 개였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론은 되묻는 말 하나 없이 대답했다. 어젯밤 눈가가 짓무를 때까지 울며 버텨 놓고도, 그걸 전부 쓸모없게 만들어버리는 소리에도 그저 수긍한 것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는 론의 속옷을 벗겨냈다.

만족할 만큼 가학적으로 관계했다가는 다시 치료를 받게 만들 것 같아서 그녀는 가학을 줄이는 방향으로 관계했다. 사정도 딱히 제어하지 않았다. 어쨌든 상을 주기 위해 시작한 관계였으니까. 그게 굳이 여기까지 이어진 건, 계속 들이대며 몸을 벌린 론 때문이었다.

마르티안은 옅게 딱지가 올라붙은 론의 유두를 비틀었다. 흐으, 흐읏. 아픔에 신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밖에 백작님이 있다고 하니까, 시간이라도 끌고 싶어?”

론은 더 예쁨받고 싶다고 대답했다. 돌려 말했지만 그녀의 질문에 수긍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르티안은 그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그녀가 그의 몸을 이 꼴로 만들고, 여태까지 견뎌온 고통을 의미 없게 만들었는데도, 론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백작과 경쟁하기 위해서 몸을 들이대고 다리를 벌렸다.

“주인님, 흐읍, 저를, 버, 벌주시고 나가시면, 흐읏, 여기, 제대로, 못 조였으니까…….”

론이 손을 내려서 자신의 엉덩이를 쥐고 양옆으로 벌렸다. 드러난 구멍은 윤활제가 흘러나와 진득하게 엉겨있었다. 뒷구멍을 보이면서 벌해달라고 하는 꼴이 더없이 그녀의 취향이긴 했지만 나흘간 매질 당한 곳에는 구멍과 회음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들쑤셔서 더 붉게 부어오른 곳을 때리기 시작하면, 금세 피가 터질 게 분명했다.

마르티안은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맞으면 다 찢어져. 용기는 가상한데 얌전히 굴어야지.”

냉정하게 거절하자 론이 움찔 긴장하며 얌전해졌다. 제법 들이대는 성격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녀가 화를 내거나 정색을 하면 쉽게 긴장하고 겁먹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르티안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백작이 한참을 기다렸을 시간이었다. 적당히 초조해졌을 테니 지금쯤 들어오게 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오늘 론에게 확답을 듣고 나면 저녁에는 완전히 기대한 채 그녀를 맞이할 테니까.

마르티안은 슬슬 백작의 뒤를 길들일 생각이었고 시기도 제법 나쁘지 않았다. 방치되었다가 겨우 가학을 허락받은 상황이라면 그녀가 조금 가혹하게 길을 들여도 견디려고 들 테니까.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론이 그녀의 옷을 움켜쥐었다.

“안에는, 안은 괜찮습니다. 주인님.”

“안?”

“구멍 안은, 아직 괜찮, 흡, 괜찮습니다. 아프게, 쑤셔서, 벌, 주셔도 되니까…….”

마르티안의 옷을 쥐고 있는 론의 손이 조금 떨렸다. 수치로 붉어진 얼굴에는 옅은 두려움도 깔려 있었다. 론은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었으니까.

“벌 받는 동안은, 흡, 아래도 조여질 테니까요. 주인님을 기쁘게 할 수 있게……읏.”

마르티안이 차고 있는 모조 성기로 그의 구멍을 가볍게 눌렀다. 뒤는 조여지지 않았지만, 긴장한 몸이 잔뜩 굳었다.

그건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아프면 아플수록, 몸이 더 많이 경직된다. 고통이 심하면 뒤도 잔뜩 조여질 게 분명했다. 의지적으로 제어할 때보다는 섬세하지 못하겠으나 어쨌든, 그녀에게 자극이 되긴 할 터였다.

“엉덩이 잡고, 벌려.”

론은 손을 내려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살결이 굳어지게 멍든 엉덩이는 제 손으로 쥐는 압력에도 상당히 아팠다. 아래를 들쑤시는 동안 이 자세를 버티려면 손에 힘이 크게 들어가서 더 고통스럽고 더 괴로울 것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론은 그녀를 보았다. 아픈 것은 어찌 되든 좋았다. 마치 처음에 그녀의 침대 위로 올라가 견뎠을 때처럼. 어떻게든 더 오래, 그녀가 자신에게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녀의 손이 론의 뺨을 문질렀다.

“십 분 동안 자세 똑바로 유지해.”

“네, 흐읍, 네. 주인님.”

“손을 떼거나 하면 몸 뒤틀면 시간이 더 늘어날 거야.”

론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르티안이 그의 구멍으로 모조 성기를 밀어넣으려 했을 때였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렸다.

집사는 몸을 뒤로 돌려서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상황이 어떨지 짐작하고 있었으니 함부로 안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그래도 외부인이 들어온 상황이긴 했다. 론의 헐떡이는 소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집사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뱉었다.

“자작님, 밖에 백작님이 오셨는데…….”

마르티안은 집사의 말이 백작과 관련된 것임을 확인하자마자, 끝까지 빼내었던 것을 론의 아래에 다시 밀어 넣었다. 벽을 거칠게 긁으며 들어오는 고통에 론이 입술을 깨문다. 집사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론의 아래를 몇 번 더 들쑤셨다.

“주인……흐읍, 끕, 흣.”

론은 어떻게든 신음을 줄이려 애썼다. 입이라도 막을 수 있었으면 상황이 더 나았겠지만 그의 두 손은 스스로의 엉덩이를 벌리고 있었어야 했기 때문에 별 쓸모가 없었다. 입술을 깨무는 것만으로는, 헐떡임과 신음은 계속해서 새어나갔다.

흐으, 흑, 끄읍, 이상하게 올라간 신음이 집사의 목소리에 덧칠하듯 덮일 때마다 집사의 목소리가 멈췄다가 이어졌다.

“자작님, 그, 제가 계속 이야기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결국, 집사는 말하던 것을 멈췄다. 마르티안은 론의 밑에 처박았던 것을 느릿하게 물렸다. 고통과 긴장으로 경직된 몸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꽉 물었다. 모조 성기가 잡아당겨지자 그녀의 안에도 자극이 일어났다. 론이 벌을 청하면서 말했던 그대로다. 흥분 어린 숨을 뱉어내며 그녀는 론에게 물었다.

“그만할까?”

목소리는 집사에게 충분히 들릴만한 크기였다. 이건 벌이었기 때문에 론에게는 무언가를 결정할 권한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굳이, 물어본 것이다.

“……아닙, 니다.”

론의 목소리는 턱없이 작았다. 마르티안은 가만히 웃었다. 원래 론은 집안사람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는 걸 힘들어했으니까.

그는 집안의 사람들과 계속 일상을 이어가야 했고 뻔뻔함이 없는 개는 이런 수치에 잘 익숙해지지 못했다. 지금도, 필사적으로 신음과 헐떡임을 참고 있다.

“자작님?”

되물은 건 집사였다. 그는 론의 실날 같은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마르티안이 론에게 물어보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나서서 주인의 애첩에게 말을 걸고 직접 재촉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대답을 해야지, 론.”

그녀는 다시 재촉했다. 론은 헐떡이듯이 숨을 내뱉고는 몇 번이고 머뭇댔다. 수치로 붉어진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주인님, 제발. 애원하는 소리가 가늘게 이어진다. 괴로워서 짙어진 눈가가 붉어진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느긋하게 구경하다가, 집사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소리를 줄여 말했다.

“그만하고 싶으면 그만하겠다고 해. 혼내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관대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이만 나가긴 해야 하거든. 덧붙인 말은 도리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론은 자신의 입술을 몇 번 짓씹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붉어진 눈가로 기어코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리, 흐읍, 벌리고 있을 테니까. 더 해주셨으면 좋겠, 흐욱…….”

마르티안이 론의 아래에 다시 처박았다. 철퍽이는 소리와 함께 론의 입에서 흐으으, 하고 신음이 터졌다. 내벽을 두들기는 고통이 이어졌다. 론은 신음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은 엉덩이를 벌리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더했다.

“얌전히, 있어야지.”

그녀는 직접 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헐떡이는 숨과 거친 신음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뭉개졌다. 끄윽, 끕 하는 소리는 확연히 작아졌지만 그렇다고 아예 안 나는 건 아니었다. 어떤 상황인지는 충분히 전달했다.

집사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었다. 론의 몸이 잔뜩 긴장한다. 힘껏 경직된 몸은 그녀가 물리는 모조 성기를 꽉 물었다. 마르티안은 아래가 저릿하게 흥분하는 것을 느끼며, 집사에게 말했다.

“후으, 론이 그렇다고 하니까 좀 시끄러워도 이해해. 어쨌든, 후우, 집사의 말은 충분히 들리니까. 할 말이 있으면, 읏, 하고.”

그녀는 론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허리를 움직였다. 쏟아지는 눈물이 금세 그녀의 손까지 적셨다. 집사의 설명이 다시 이어졌다.

“예. 백작님이, 아까부터 오셨는데 이럴 거면 미리 언질을 주는 게 맞지 옳지 않냐고 하시면서…….”

그녀는 론을 깊게 들쑤셨다. 한껏 처박을 때마다 읍, 우윽, 끕, 눌러 막힌 묘한 신음이 툭툭 튀어 올랐다. 집사의 말소리는 그때마다 빨라졌다. 신음을 자신의 말소리로 막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평소에는 집사가 알아서 나갔는데, 휴이가 어지간히 떼를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끄, 끄으, 끅, 론의 신음에는 이제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울 수준을 지난 모양이었다. 마르티안은 시간을 확인했지만 아직 5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고통 어린 울음은 더 커지면 커졌지 줄진 못할 것이다.

마르티안은 슬슬 집사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으니까, 백작님에게 이십 분만 더 기다리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자작님.”

집사는 반색하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급하게 나갔다. 마르티안은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으로 질척한 타액이 묻어났다.

주인님, 흐으, 흑. 울음과 신음이 소리를 찾았다. 집사가 나가고 나자 론의 표정은 그나마 풀어졌다. 안도를 한 것이다. 수치를 즐기기엔 론은 너무 고지식하고 뻔뻔하지 못한 부류였다.

‘벌이니까 즐기면 안 되긴 하지만.’

마르티안은 거의 끝까지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내벽을 죽 긁으면서 처박았다.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론의 눈가로 눈물이 울컥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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