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마르티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잠들었던 건지도 알 수 없이 잠이 든 모양이다. 몸을 일으키려 하니 온몸이 뻐근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은 그녀가 평소 잠들 때와 다름없는 상태였다. 창밖으로 달이 떠 있었고 주변은 고요하고 조용하다.
대체 얼마나 잔 거지. 아니 언제부터 잠든 걸까. 기억을 더듬으며 그녀가 침대 맡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방 안에는 등불이 여럿 켜져 있어서 아주 어둡진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굴었어.’
마르티안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론을 쉬게 만들 생각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듣고 나서 그를 한껏 몰아붙였다. 론이 얼마나 울어대는지 저러다가 눈이 다 짓무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적당히 하진 못했다. 마르티안은 그때의 자신에게 혀를 차며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굴러다녀야 할 도구들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몸이 힘들면 론은 거의 일어나지 못할 상태였을 텐데 그 와중에 뒷정리까지 한 모양이다. 몸도 닦아냈는지 찝찝한 느낌이 없었다.
‘그 꼴로 내 몸까지 닦은 게 장하긴 하지만…….’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다. 론은 딱딱하다 못해 강박적인 면이 있었다. 뒤처리를 제대로 못하면 또 혼날 구실이 되었겠지만 이렇게 기를 쓰고 모든 일을 다 처리할 필요는 또 없었다.
이런 관계란 다그치고 혼나는 가운데서 깊어지는 면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때로는 혼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애교를 부리거나 지치는 대로 행동하면 좋을 텐데. 론은 그런 식으로는 전혀 굴지 못했다.
마르티안이 한숨을 뱉어내고는 침대에서 발을 내린다. 잠에서 깨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흥분이 지나쳐서 시간을 너무 써버렸다.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그녀가 침대 맡으로 발을 내리는데 무언가 걸렸다.
“하아, 정말이지…….”
론이 침대 아래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아마 뒤처리를 하고 이쯤에서 쓰러진 것 모양인지 벌거벗은 몸은 등불 아래에서 봐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녀가 직접적으로 옆에서 자라고 말하지 않으면 어찌 되었든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잠들던 론이다. 습관이자 버릇 같은 거였다. 어젠 거기까지 돌아갈 힘을 없었나, 마르티안은 발로 웅크려있는 론의 몸을 더듬어 내렸다.
나지막한 뒤척임이 일어났지만 깨지는 못했다.
“론, 일어나.”
다시 흔들기를 몇 번, 그녀가 약간의 짜증을 느낄 때쯤 그의 눈이 떠졌다. 상황 판단이 잘되지 않는 듯 그의 눈이 깜박인다. 이내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가 윽 소리를 내며 다시 엎어진다. 팔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르티안이 한숨을 뱉고는 말한다.
“바닥에서 뭐 하는 거야. 침대로 올라가.”
론의 얼굴이 순간 긴장으로 굳어졌다. 침대로 올라가서 쉬라는 뜻이었는데 다른 뜻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의 입술이 머뭇거리다가 이내 꾹 다물렸다. 마르티안은 일순 그게 거슬린다는 생각을 했다. 낮에 몰아붙일 때는 예쁘게 울기라도 하더니 금세 다시 이 모양이었다. 뭐든 속으로 삼키기만 하는 것이 답답하고 짜증스럽다.
“할 말 있으면 해야지.”
“…….”
“론, 짜증나게 굴지 말고.”
“버티기가 어려워서, 머뭇거렸습니다. 차라리 묶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느라……. 제가 견뎌야 하는 건데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잔뜩 긴장했다. 자신의 꼴을 조금도 살피지 못하고, 주인의 기분이 상한 것에 더 눈치를 본다. 그런 것들이 다시 그녀의 흥분을 일으켰다.
론은 그런 자신의 태도가 종종 더 큰 가학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몰랐다. 순한 개가 이런 식으로 무지하게 굴 때마다 그녀는 흥분을 느끼곤 했다.
‘여러모로 아쉽네.’
잠들기 직전까지 무리하게 몰아붙인 것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 한가득 남은 상황만 아니라면, 그가 하고 있는 오해대로 굴어주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작위를 이어받았고 영지를 운영해야 하는 자작이었으니까.
그녀가 한숨을 뱉어내자 론이 움찔 떤다. 이내 급하게 몸을 움직여 침대로 올라오려다가 순간 신음을 뱉으며 몸을 구부렸다. 그저 힘이 빠져서 그런가 싶었는데, 한참을 구부리고 제대로 일어나질 못한다.
“뭐야, 왜 그래?”
마르티안이 미간을 찌푸린다. 론은 신음을 흘리며 헐떡이느라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엎드린 론의 몸을 더듬었다. 이내 타액이 말라붙은 엉덩이골 사이에서 딱딱한 것을 발견해냈다.
모조 성기 끄트머리. 넣어놓고 괴롭히다가 빼내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상관없겠지만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잘못 엎어지기라도 해서 안에 든 것이 내장을 잘못 찌르면 그대로 파열이었다.
“진짜 개는 아프면 아프다고 낑낑대기라도 하지…….”
마르티안은 화가 치미는 걸 애써 가라앉혔다. 어쨌든 이걸 잊은 건 그녀의 책임이 컸으니까. 물론,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 상태가 얼마나 큰일이라는 걸 론 역시 모르진 않았으니까.
마르티안은 자신의 개에게 이런 기본적인 위험요소에 대해서는 모두 가르쳤다. 그러니 그가 버틴 원인이란, 아마도 그녀가 명령하지 않았다는 것일 터였다. 그 고지식함이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론, 누워서 허벅지 들어 올려. 아랫구멍 보이게.”
론이 비틀거리며 겨우 자세를 잡는다. 마르티안은 윤활제 통을 가져와서 그 위에 들이붓듯 짜내렸다. 안이고 바깥이고 다 말라붙어있으니 젤이 없으면 빼내기가 어려운 상태였으니까. 질척거릴 정도로 아래를 적시고 나서야 마르티안은 구멍 안을 헤집어 모조 성기를 움켜잡았다.
“흐으, 읏! 윽, 흐읍…….”
끝을 잡고 힘을 주어 빼내자 론이 몸을 작게 비튼다. 속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건지 빼내는 모조 성기를 자꾸 잡아당기듯 물어댔다.
“힘 빼, 론.”
그녀가 론의 엉덩이를 손으로 후려쳤다. 경직된 것이 풀리는 그 틈을 맞춰 삼킨 것을 잡아 빼는 게 지루하게 이어졌다. 모조 성기는 굴곡이 심하게 져 있는 모양새라 한 덩어리가 빠져나올 때마다 주름에 맞물려 툭, 툭 하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부분이 빠져나오자 시작하면서 넣었던 윤활제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번들거리는 것들이 질척하게 그의 아래를 적셨다.
“이제 그만 올라가.”
론이 그 말에 잡고 있던 다리를 놓았다. 흐트러진 상태로 그는 한참 신음과 헐떡임을 뱉어냈다. 버티는 것만으로도 한계라는 것처럼.
이미 그의 등과 엉덩이, 허벅지는 이미 울긋불긋한 흔적이 가득했고 말라붙은 타액이 그의 배 곳곳에 얼룩으로 남아있었다. 사타구니 사이만이 흘러내린 윤활제로 다시 젖어 번들거린다. 한계까지 지친 몸은 더없이 야했다.
마르티안은 감정을, 아니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모로 상황에 맞지 않는 흥분이었다. 론은 쉬어야 하고 그녀는 일을 해야 하니까. 그녀가 다시 말을 뱉었다.
“론, 침대로 올라가라고.”
론의 움직임은 지나치게 느렸다. 몸을 일으켜 침대로 가는 것조차 버거운 모양이었다.
침대로 올라가 이불로 덮어 그 몸을 가리면 좀 더 나을 텐데, 기어 올라가는 몸짓이 느려서 괜히 더 야했다. 등과 엉덩이 허벅지가 느리게 움직이며 윤활제가 허벅지 안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고스란히 보였다.
론은 침대에 겨우 올라가서 다시 엉덩이를 치켜들고 엎드렸다. 마르티안이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됐으니까 그냥 쉬어.”
당장 기절할 것 같은 개를 데리고 뭘 어쩔 수는 없는 법이다. 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침대에서 풀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론이 우스운 꼴로 엎어져 있었다. 뭐야?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론이 그녀 쪽으로 버둥대듯이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떨어져 구를 것 같은 모양새라 마르티안이 침대로 다가섰다. 론이 매달리듯 그녀의 가운 자락을 움켜쥐고는 스스로가 놀라 손을 주춤 떼어냈다.
“제가 아직 잠이 안 깨어서, 읏,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그녀가 혀를 찼다. 쯧, 하는 소리에 론의 입이 바로 닫혔다. 그녀가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해서 불안해하는 꼴이었다. 마르티안이 그의 뺨을 살살 매만졌다. 달래는 행위에 론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춤대며 그 손에 기댔다.
그의 뺨을 두어 번 더 쓰다듬었을 때였다. 그녀의 손이 축축해졌다. 눈물이었다. 우는 개의 모습에 멈칫한 사이, 론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버리지 말아 주세요. 순간 그는 스스로 놀라 시선을 들었다. 생각이 입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변명도 못 한 채로 그의 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다.
“론, 또 그런 소리를 하네.”
그 말에 론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진다. 마르티안은 그의 얼굴을 붙잡아서 다시 올려보게 했다. 젖은 눈매로 다시 또 눈물이 떨어졌다. 고통을 참는 거 하나는 짜증이 날 정도로 잘하더니 이런 부분에서는 조금도 참질 못했다. 근래 들어 알게 된 개의 모습은 나름 귀엽고 좋았지만 조금 귀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만 울어, 론.”
그 말에 론이 제 입술을 깨문다. 헐떡이는 숨으로 눈물 삼키는 소리가 났다.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꼴이 가상해서, 그녀는 뺨에 흐른 것을 손으로 닦아내 주었다.
“내가 뭐라고 했어?”
그녀가 물었다. 자신이 가르친 것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버림받지 않게, 노력, 하는 게 제 몫이라고…….”
“그래. 버림받지 않게 노력해야지. 이렇게 주인에게 떼를 쓰는 게 아니라.”
버림받고 싶지 않다면 버림받지 않게 굴어야 하는 법이다. 그건 론만이 아니라 그녀의 아래에서 구르고 싶어 하는 모든 개들에게 통용되는 룰이었다. 그녀는 어떤 개에게도 미래를 약속하진 않았으니까.
론 역시 그런 개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에게 똑같은 그 태도가 론을 더 서럽게 한다는 걸 마르티안은 조금도 고려해주지 않았다.
“주제넘게 굴지 말고.”
지나치게 다정한 말투다. 론은 눈을 꾹 감고 자신의 감정을 견디려 애썼다. 그녀의 손이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땀에 젖어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주제넘게 굴지 않으면, 그가 노력한다면, 이렇게 예쁨받을 수 있을 거라는 듯이.
마르티안은 이내 론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힘없이 늘어지는 몸은 그것만으로도 밀려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는 따듯하게 그를 감쌌다. 마르티안이 그에게 말했다.
“이만 쉬어. 쉬라고 침대 위에 올린 거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 * *
도안 자작가를 비롯한 동부의 영지들은 대부분 나무로 수익을 냈다. 목재로 쓰이는 나무에는 수십 가지 종류가 있지만 각 영지들에서 관리하고 돌보는 건 대여섯 가지로 한정되어 있었다. 보통은 수익이 많이 나는 가구용 목재와 기르기 쉬운 건축용 목재를 섞어서 길렀다.
몇 가지 나무를 골라 기르고 다시 심는 게 백년이 넘게 반복되자, 근처의 산맥은 특정한 대여섯 종류의 나무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없던 이 숲들은 병충해가 한번 기승을 부리면 문제가 되곤 했다.
“벌써 영지 한곳이 끝났고 맞닿은 영지 쪽으로 퍼졌다고? 대체 언제?”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소식을 전하는 집사의 얼굴이 어두웠다.
“최근에 생긴 일입니다만 적나무가 대상이라 다들 깊게 생각지 못한 거 같습니다. 말라 죽기 전까지는 겉으로는 아무 징후가 없었다고 하구요. 일일이 잘라서 안을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보니 발견 자체가 늦어진 모양입니다.”
마르티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동일한 종류의 나무가 밀집된 숲은 그 종류를 대상으로 하는 병충해가 퍼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여러 나무들이 섞여 자라는 일반적인 숲에서는 병충해가 돈다고 한 번에 황폐해지진 않았지만, 인위적으로 수종을 관리하는 숲은 병충해 하나만으로도 숲 전체가 황폐해지기 쉬웠다. 때문에 이런 상황을 대비해 여러 수종을 섞어서 숲을 관리하는 게 보통이었지만…….
“적나무는 병충해에 강하다는 게 일반론이었잖아.”
그녀가 탄식처럼 말했다.
적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비싼 값에 팔리는 가구용 목재였다. 성장 속도가 더뎌 회전이 빠르지는 않지만, 가구용으로 쓰이는 나무들이 병충해에 약한 것에 비해 적나무는 그런 위험이 거의 없었다.
일단 심기만 하면 수익이 보장되는 수종. 동부의 가문들은 적나무의 비율을 반 이상 가져가는 것으로 원활한 금전 흐름을 도모했는데 도안 자작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 쪽 숲은 어떤 상태야?”
“몇 개를 돌며 잘라본 결과 병해에 당한 나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전염병처럼 확산되는 상황을 볼 때 아마도…….”
아마도, 금세 병해에 당하게 될 것이란 뜻이겠지. 마르티안은 한숨을 뱉어냈다. 사람들이 숲을 나눠 관리하긴 했지만 사실 숲은 그저 하나의 숲이고 산맥 역시 하나의 산맥일 뿐이었다. 이어진 숲과 산맥에서 병충해가 발병하면 동일 수종이 연이어서 병해에 걸리는 건 당연했다.
병충해를 빨리 해결할 수 없다면 대상이 되는 나무를 미리 벌목해 버리는 게 가장 일반적인 대응책이었다. 처음 보는 병충해가 생기는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주춤대다가 아직 타 수종으로 옮기는 병해기라도 하면 다른 수목까지 피해를 입기 쉬웠다. 그러니 지금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병해를 옮기는 적나무를 미리 벌목해 버리는 것뿐이었다.
“지금 있는 적나무를 자르는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어느정도 자랐지? 팔 수 있는 상태야?”
“목재 기준에 들기엔 좀 작습니다. 원래는 오년을 더 컸어야 하는 나무들이라, 성장 속도가 빠른 나무들을 챙긴다고 해도…….”
집사가 말을 흐린다. 마르티안은 한숨을 뱉었다. 자작가가 관리하고 있는 적나무는 기른 지 십 년이 막 넘어가는 것들이었다. 아직은 수익성이 없지만 사오 년이 지나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자산들. 지금 베어내는 건 길러왔던 시간과 돈을 한 번에 잘라내는 거나 다름없었다.
“몇 년 동안 감자만 먹게 생겼네.”
적나무는 그 자체로 안전적인 자산이었다. 다른 나무보다 기르는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병해에도 강하고 기르기에도 까다롭지 않았으니까.
이쪽 지역에서는 숲에 심겨있는 적나무를 담보 잡아 금을 빌리기도 할 정도였다. 그 적나무가 이렇게 피해를 입었으니 이건 단순하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앞으로가 더 큰일이야. 숲 관리도 그렇고.”
적나무를 잘라내어 오게 될 손해도 손해였지만 적나무를 대신할 안정적이고 수익이 분명한 수종이 없다는 게 더 근본적인 문제다. 앞으로는 적나무를 철썩같이 믿고 의지할 수는 없게 되었으니까. 그건 숲 관리를 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단 소리였다.
“아니, 백 년도 넘게 문제없었잖아? 왜 하필 내 대에 와서 왜 이런 일이 터지는 거야?”
마르티안의 탄식에 집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자신의 탓이라는 태도였다. 마르티안은 손을 내저어 그런 뜻이 아님을 밝혔지만 짜증과 우울을 숨기긴 어려웠다. 피해가 막심할 게 뻔했으니까. 그녀는 가능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집사가 정리한 서류를 다시 보았다.
서류에는 적나무의 병해 현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내용이었지만 상황을 타개할 대안은 전혀 없었다. 한숨이 푹푹 나왔다.
“자작님, 이건 주변 영지들이 연합해서 중앙에 보낼 탄원서입니다.”
집사가 새로운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기존의 자료들과는 달리 금박이 둘러있는 고급종이였다.
“다들 비슷하게 난리인 모양이지?”
“동부에서는 적나무를 기반으로 하는 곳이 많으니까요.”
탄원서는 지금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해당 병충해에 대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르티안은 내용을 쭉 읽어가다가 어느 구절에서 멈췄다. 적나무가 가구 목재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며 이 상황을 해결하지 않으면 더 큰 경제적 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건 좀 과대해석처럼 느껴지는데? 동부에서 적나무를 가장 많이 생산하긴 하지만 이쪽 지역에서만 적나무가 자라는 것도 아니잖아.”
“다른 지역의 적나무도 비슷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게든 중앙에서 움직여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뭘 해도 우리가 하는 것보다야 그쪽이 나을 테니까. 인력도, 돈도, 전문성도 말이지. 이런 일에 중앙에서 관심을 두려 할지는 모르겠지만…….”
마르티안은 서류 아래에 서명을 더했다. 시간과 사람과 돈을 들이면 해결 못 할 일이 없는 법이었지만 산골 지역에서는 그만큼의 돈도, 사람도, 시간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장 적나무로 인해 손해 본 걸 버티는 것만으로도 허덕일 상황에서 병해를 연구하겠다며 돈과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숲에 있는 적나무를 모두 베어내려면 얼마나 걸릴까?”
“못해도 보름은 걸릴 겁니다.”
“작업한 적나무를 팔지 않고 보관하는 건?”
“상품으로 가능한 양이 얼마나 나올지는 모르는 상황이지만 최대한 창고를 비운다고 해도 반 정도 보관하는 게 최대치일 거 같습니다.”
보통 목재의 판매는 나무를 베어낸 가을에 바로 이뤄졌다. 겨울을 넘어 보관하려면 눈비의 습도에 나무가 상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하는데 그 많은 나무를 보관할 장소부터가 마땅치 않았으니까.
마르티안은 차를 마시며 터져나가는 속을 달랬다.
“병해 때문에 적나무가 일시적으로 많이 풀릴 텐데……. 조금이라도 제값을 받으려면 가능한 늦게 팔아야 해. 창고에 있는 것들을 전부 저택 안으로 들여놓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 확보를 해봐. 가능한 적나무를 전부 보관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자작님.”
“상품으로 쓰지 못할 작은 나무들은 전부 땔감용으로 쌓아두라고 해. 창고 안 나무가 썩지 않게 하려면 겨우내 그거라도 때면서 버티는 수밖에 없으니까.”
늙은 집사는 그녀의 말을 하나하나 받아 적었다. 그의 얼굴은 침울했지만 그렇다고 아주 혼란스러워 보이진 않았다. 그 표정이 마르티안에게 묘한 위로를 주었다.
어쨌든 그녀보다 두 배는 오래 이 도안 자작가에 있었던 사람이다. 이 어려움도 그에겐 수많은 어려움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집사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시면 이 늙은 집사의 소원을 들어주시지요.”
“무슨 소원?”
“이번 축복제때 수도에 가는 것 말입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 삼 년간 감자만 먹어야 할 상황인데?”
“어려워지는 건 나중 일이니까요. 올해는 충분히 괜찮습니다.”
“올해가 이어져서 내년이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이야?”
“어려운 상황이 이번 한 번뿐이겠습니까. 이런 상황이 올 때는 함께 나눌 사람이 큰 힘이 되는 법입니다.”
“그건 그렇지.”
그녀가 수긍하듯 말하자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난리가 난 상황에서도 저런 표정이 나온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 간절함이 짠했으나 그렇다고 수도에 올라가자니 너무 쓸데없고 귀찮다. 거기에서 괜찮은 사람을 찾아내서 데려올 확률은 또 얼마나 적은가.
마르티안은 이것저것을 따져보다가 집사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러니까 집사가 오래 살아줘. 이런 상황마다 함께 나누며 가고 싶으니까.”
* * *
나무를 베어내는 일은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상품이 될 만한 적나무을 골라내는 것부터 해당 적나무가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벌목하는 것까지.
평소와 같았다면 상하는 나무가 일부 생기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속도를 올렸겠지만 이번에는 상품성 있는 나무 하나하나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일의 진행이 몹시 느렸다.
그 사이 병해는 영지 네 곳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 영지들과 맞닿아 있어 곧 피해를 입을 예정인 곳이 여섯이다. 그 안에 도안 영지도 있었다.
“골치 아프네. 그렇다고 마구 베어내자니 손해가 너무 커지고…….”
마르티안이 한숨을 뱉는다. 어머니가 남겨놓은 일지까지 훑어보는 중이었지만 딱히 좋은 수가 나오진 않는다. 비슷한 상황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읽고 나서 깨달은 건 영지 운영이 여러모로 고생스러운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뿐이었다.
“일단은 버티는 수밖에 없네.”
탄원서를 보낸 지 일주일이 넘었다. 제국에서 사용하는 적나무의 삼 분의 일이 여기서 나오니 이대로는 적나무 공급량이 확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중앙에서 이 지역을 도와주려 할지는 미지수였다.
‘망해가는 지역을 도와주는 것보다야 다른 지역의 생산량이 늘어나도록 보조하는 게 더 확실한 해결책이니까.’
그래도 그나마 희망을 거는 건 이번 병해가 안전하다고 유명했던 적나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대단한 구제책은 마련해주지 않더라도 적어도 병해를 조사하려 들긴 할 것이다. 그 정도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단지, 엉덩이가 굼뜬 중앙에서 언제 사람을 보내 상황을 수습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당장 영지 내 일처리가 문제야. 능숙한 숲 관리자들이 더 필요한데…….’
목재로 먹고사는 곳이니 나무와 숲을 관리하는 기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근처 영지들 모두가 그런 기술자들을 귀중하게 다뤘다. 보통 기술자들은 한 영지에 한둘이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가문에 묶여있는 경우가 많았다.
숲 관리라는 건 해당 지역에 대한 오랜 경험이 필요했고 가문마다 관리하는 체계방식이 다르다 보니 보안상의 문제까지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일부러 소수로 관리하는 것이다. 도안 영지의 숲 관리자는 두 명이었다.
두 명이 벌목 현장 관리부터 벌목한 나무 분류, 묘목들의 상태 확인과 폐기 여부, 그리고 병해의 조사까지 전부 소화해야 하는 것이다. 집사의 말에 따르면, 둘 다 잠을 거의 못 자고 있다고 했다.
“모르던 것도 아니었는데 누굴 탓하겠어. 미리미리 사람을 기르지 못한 내 탓이지.”
그녀가 중얼댄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팔 년간 영지를 관리했다. 오래된 관리방식을 바꾸기 위해 인력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을 매번 하긴 했지만 늘 생각에서 끝나곤 했다. 매일매일 처리하고 판단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물론 이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모두 변명에 불과한 말이었다.
그녀가 다시 자료를 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집사인가 싶어서 들어오라고 답했는데 나타난 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동생인 엘 도안이다.
“맙소사, 네가 여기 왜 있어?”
마르티안이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엘 도안이 활짝 웃었다.
“누님,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지. 넌 졸업시험 준비해야 해서 바쁘다더니 어떻게 여길 다 왔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몸이 아프진 않아?”
“질문이 너무 많아요. 누님. 문제가 생겨서 온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그는 그새 또 자란 모양인지 기억에 있던 것보다 키가 좀 더 커져 있었다. 어릴 때만 해도 작고 말랐었는데 늦게 키가 크더니 어느새 그녀보다 훌쩍 커졌다. 그녀는 엘을 소파로 이끌며 말한다. 오랜만에 본 동생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제 제법 어른티가 나네?”
“누님도. 저 이제 스물하나예요. 이미 어른이라구요.”
“그래 보았자 스물하나잖아? 나보다 일곱 살은 어리고.”
“나이 차는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대로인데…….”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는 평생 아이라는 거지.”
그 말에 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체념하듯 얌전해지는 건 말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고 부모님마저 일찍 돌아가신 탓에 마르티안에게 엘 도안은 자식이나 다름없었고, 그에게는 그녀가 부모나 다름없었다.
소파에 마주 앉은 채로 엘 도안이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먼저 이것부터 드릴게요.”
“이게 뭐야?”
봉투를 뜯어내자 서류가 한 장 들어있다. 금박으로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종이에는 황제의 허가를 뜻하는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황제의 인장이라니. 그녀의 눈이 조금 커진 채 글자를 빠르게 읽어 내렸다. 내용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적나무 병해 조사 대상지로 우리 영지가 뽑혔다고?”
“네, 곧 조사팀이 이쪽으로 올 거예요. 저도 교육원에서 차출된 조사원 중 하나구요. 대상 지역이 발표 나자마자 너무 기뻐서 교수님에게 이야기 드리고 먼저 왔어요.”
그가 서류 하단에 적혀있는 빼곡한 글자들을 가리킨다.
“여기 별첨 사안을 보세요. 조사 지역의 적나무는 조사 물품으로 모두 일괄 구매하여 연구를 진행하며, 거주하는 조사팀의 숙식비 등을 고려하여 상응하는 물품 및 대금을 추가 지원한다. 원래 조사지역으로 뽑힌 곳은 지원이 상당히 크게 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저희 영지가 되었다고 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적나무 병해 이야길 듣고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엘은 흥분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 병해는 목재 안에 검은 얼룩이 생기고 끝내 말라 죽는 병해였다. 발병하는 순간 상품 가치가 사라져 버리는 병해, 손상된 나무는 땔감밖에 쓸 데가 없다. 그러니 중앙에서 굳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근방 영지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나무를 내어놓았을 것이다.
그걸 조사용으로 모두 구입한다니 지나치게 조건이 좋아 도리어 찝찝하다. 게다가 숙식비 명목으로 물품과 대금을 기본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니 더 그랬다. 마르티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우리 영지가 선택된 거야? 이런 걸 뽑는지도 몰랐는데.”
“아, 그건 저도 듣지를 못해서……. 무슨 기준이 있지 않을까요? 병해가 아직 덜 번진 지역이라던가, 뭐 그런 거요.”
“그런가?”
“궁금하신 거면 제가 나중에 물어볼게요.”
그의 얼굴에는 어떤 의문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들고 왔다는 생각에 마냥 기쁜 상태인 것이다. 마르티안은 불유쾌한 가정들을 툭툭 털어냈다.
요즘 신경이 예민해져서 괜한 우려가 드는 거겠지. 이 별 볼 일 없는 땅에서 얻어갈 게 무엇이 있다고. 그녀는 당장의 행운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조사팀이 몇 명이나 돼?”
“저까지 합쳐서 총 열 명이에요. 교수님도 오실 거니까 열한 명이네요. 대략 석 달 정도 머무르게 될 거 같아요.”
“석 달 동안 열 한명이면 식재료부터 사야겠는데? 손님방도 전부 치워야 할 거 같고.”
“그래서 올라오기 전에 집사에게 말해뒀어요. 빨리 아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무엇보다 좋은 소식이잖아요.”
“그래, 잘했어. 안 그래도 집사도 나도 여러모로 걱정이었는데…….”
때마침 문이 열리며 집사가 들어왔다. 며칠 동안 주름이 더 깊어진다 싶었는데, 지금은 깜짝 놀랄 만큼 얼굴이 펴졌다. 그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말했다.
“다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실 다과라고 하기엔 좀 많긴 합니다만 도련님이 오셨다는 걸 알고 주방에서 한껏 신이 난 상황이라서요. 너무 많으시면 남기시면 됩니다. 도련님.”
“내가 남길 리가 있겠어?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집사.”
엘 도안이 신난 표정으로 답했다.
테이블로 식사나 다름없을 양의 음식들이 차려졌다. 고기와 치즈를 얇게 저며서 넣은 샌드위치, 콘 알갱이와 견과를 넣어 소스에 버무린 샐러드, 절인 과일들, 각종 치즈와 빵, 쿠키도 다섯 종류나 된다. 테이블을 가득 채운 음식들은 다과하고 하기엔 누가 보아도 과했다.
마르티안은 제 몫의 찻잔을 들며 피식 웃었다.
“이걸 다 먹고 저녁 식사까지 가능하겠어?”
“당연하죠! 저 많이 먹는 거 아시잖아요. 교육원에 있으면서 집 음식이 어찌나 생각나던지, 지금 같아선 다섯 끼도 먹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그가 샌드위치를 들어 한껏 베어 문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먹는 건 귀족답진 않았지만 굳이 말리고 싶진 않았다.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화려한 마르티안과는 달리 엘 도안은 어머니를 닮아 선이 가늘고 단정한 편이었다. 얌전한 생김새가 다람쥐처럼 우물대며 음식을 먹어치우는 건 언제 보아도 귀여웠다.
집사는 빈 접시에 음식을 다시 채우느라 바쁘다. 평소와는 다른 느슨하고 인자한 표정이었다. 마르티안은 웃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것들이 단번에 해결되었고 사랑하는 동생까지 함께 있게 된 상황이었다.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지. 그녀가 소파에 더 깊게 몸을 기댔다.
* * *
도안 자작가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식재료들이 급하게 구비하고 손님방을 청소하고 다시 꾸미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금세 넘어가곤 했다. 다행인 것은 조사지역이라는 이유로 벌목이 중단되었다는 점이었다.
조사단이 도착하면 함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모든 인력은 손님맞이에 한껏 집중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굴러간다고 여겼을 때였다.
“뭐? 누가 와?”
“휴이 세블로아드, 그 공작가 자제분 말입니다. 이제 백작님이라 해야겠군요.”
집사가 잔뜩 고무된 얼굴로 답했지만 마르티안은 자신이 듣는 소리가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집사는 그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병해 조사에 대한 지역 책임자가 그분이라고 합니다. 이번 조사 일정에 맞춰 조사단과 함께 방문할 예정이라고 연락이 온 상황이라…….”
“아니, 그러니까, 왜? 세반 영지는 상업이 주된 지역이잖아. 목재 생산하는 지역도 아니고.”
“아마도 탄원서에 힘을 실으려고 세반 백작에게도 서명을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중앙에 연이 닿은 귀족이니까요.”
집사는 식재료를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준비해야겠다며 잔뜩 들떠 있었다. 중앙에서 넘치는 지원을 받는 데다가 공작가의 자제와 연이 얽히게 된 상황이었으니까. 문제 될 것 하나 없이 지나치게 잘된 일이었다. 집사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백작님이 이전에는 자작님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닐 겁니다. 누구도 자작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도록 준비해드릴 테니까요.”
“뭐?”
“자작님께서 입으실 옷들을 챙겨뒀습니다.”
하인들이 전에 맞춘 새 옷들을 가지고 들어온다. 세반 영지에서 있었던 연회 이후에는 꺼내지 보지도 않았던 것들이었다. 마르티안이 멍하게 그 옷들을 바라보았다. 엘 도안이 때마침 들어오다가 늘어놓은 옷들을 보고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상에, 누님? 제가 모르는 사이에 결혼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일이 있어서 옷을 새로 맞췄을 뿐이야.”
“이 정도면 황제 폐하 앞에 서도 괜찮겠는데요?”
그의 말에 집사가 뿌듯한 표정이 지었다. 엘 도안이 옷을 살피며 관심을 보이자 집사가 나서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옷들이 기존의 어떤 옷을 수선해서 만든 것인지, 어떤 디테일이 추가되었는지, 요즘 유행이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마르티안은 거기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못한 채로 짧게 한숨을 뱉었다.
‘다시는 얽힐 일 없을 거 같았는데 이게 무슨…….’
지워버린 기억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 얼굴과 몸만 보면 정말 취향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만나 좋을 게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야 한다니 영 껄끄러웠다.
물론 이제 와 물러날 수는 없었다. 조사는 황제의 명령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조사였고, 이대로 포기하기엔 얻을 이득이 너무 컸다.
‘설마하니 이 일이…….’
마르티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이 상황을 만든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일의 규모가 상당히 컸지만, 우연이라고 여기기엔 그녀에게 주어진 것들이 지나치게 좋았으니까.
상식적이지 않은 지원 규모부터 그녀의 영지가 갑자기 그 대상으로 선정된 것까지, 쥐를 치즈로 꼬여내는 것과 닮았다.
처음에 언뜻 느꼈던 싸한 불편함이 다시 고개를 든다.
“자작님?”
부르는 소리에 그녀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집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집사와 이야기를 하던 그녀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누님, 표정이 너무 심각하신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아니야. 아까 백작님이 지역 담당자로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 그래.”
“백작님이요?”
엘 도안이 의아하다는 듯 되묻자 집사가 나서서 설명했다.
“이번에 세반 영지를 하사받으신 공작가 자제분 있지 않습니까? 그분도 조사하는 동안 머문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지역 담당자 역할을 맡게 되셨다고…….”
“아, 그분.”
엘 도안이 말을 이었다.
“아마 우리 교수님 때문일 거야. 그분이 작위 받는 데 교수님의 도움이 상당히 컸다고 알고 있거든. 보통 지역 담당자는 당일 잠깐 얼굴을 내비치고 마는데 굳이 머문다고 하는 걸 보니까, 겸사 인사라도 하고 그러려는 거 같은데?”
그 말에 마르티안이 의심하던 마음을 조금 풀었다. 다른 친분 때문에 여기까지 온다고 하면 서로 좀 어색하고 말면 그만인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왜 도안 자작가가 조사대상으로 뽑히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마르티안은 남아있는 찝찝함을 지우며 말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온다는 거면 그나마 다행이네.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는데.”
그 말에 엘 도안이 소리 내어 웃었다.
“부담이요? 누님도 그런 감정을 느끼세요?”
“무슨 소리야, 나도 사람인데. 그런 상대를 혼자 대하는 건 부담스럽다고.”
마르티안이 투덜대듯 답했다. 지위나 성향이나 하나만 했다면 좋았을 것을, 둘이 더해지니 정말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물론 이토록 껄끄러운 건 그녀 자신이 했던 행동들 때문이었다. 이렇게 얽힐 줄 알았다면 절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를 다시 하며 그녀가 한숨을 다시 뱉어냈을 때였다.
엘 도안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절 쓰세요.”
“뭐? 널 쓰다니?”
“저도 이 가문 사람이잖아요. 교육원에서 배운 전문지식도 있고 가문의 숲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으니, 조사단을 대응하는 것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처음에만 응대해주시면 그 뒤 진행은 제가 하는 거로 할게요. 누님은 보고서 정도만 확인해 주세요.”
그 말은 어른스러우면서도 약간의 허세가 느껴졌다. 그게 조금은 귀여웠다. 마르티안은 웃으며 기대하겠다고 답했다.
* * *
중앙에서 파견된 조사팀이 도착했다. 조사팀은 제국교육원에서 차출된 열 명과 그 조사단원을 지휘할 교수 한 명, 그리고 여러 짐들을 꾸리고 나르기 위한 수행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팀이었다.
저택 앞에는 조사단이 타고 온 마차 외에도 짐마차가 따로 도착했다. 개인 짐들은 물론 교육원에서 가져온 다양한 연구 도구들과 서적들이 실려 있었다.
마르티안은 집사가 골라준 옷을 갖춰 입고는 조사단 사이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눴다. 조사팀들 모두 의욕이 넘쳤고 진지하게 상황을 살피려는 모양새였다.
‘일부러 꾸며낸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만들었다고 하기엔 모든 게 지나치게 정상적이다. 마르티안은 예민하게 날 서 있던 제 의심을 거두기로 했다. 그녀가 교수와 한참 대화를 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뒤늦게 도착했다.
크고 화려한 마차에는 장미 덩굴에 감긴 방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세블로아드 공작가의 문양.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비켜섰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휴이 세블로아드가 내렸다. 햇빛을 받아서인지 그의 금발은 유난히 더 반짝댔다. 매끈한 얼굴은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품 같았다. 자연스럽게 감탄이 나오는 외모다. 마르티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왜 자제력을 잃었는지, 쓸데없이 상대를 도발하고 말았는지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이지 그녀의 취향이었다.
희고 혈색이 좋은 피부와 큰 키, 우아하지만 근육이 빠짐없이 채워진 몸과 맞으면서도 흥분할 줄 아는 야해 빠진 성향까지. 정신 차려야 해, 그녀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을 때였다. 휴이가 그녀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야, 도안 자작. 일전에는 내가 무례를 저지른 거 같아서…….”
마르티안이 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집사가 보고 있었으니까. 자칫하면 거짓말을 한 게 전부 들통 날 상황이었다.
“반갑습니다, 백작님.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그녀는 상대가 말하지 못하도록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백작님과 연이 닿을 줄은 몰랐습니다. 지내며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시구요. 그때 저도 백작가에서 편히 지냈으니…….”
마르티안은 아무 말을 지껄이며 휴이의 말을 완전히 틀어막고는 어느 순간 대화를 정리했다.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주시구요.”
그건 대화를 끝내는 말이었다. 어차피 여기에서 길게 이야기해보았자 그녀에게 좋을 게 없었으니까. 그녀가 빠르게 몸을 돌려 집사를 불렀다.
“오신 분들에게 쉴 곳을 안내해. 저녁 식사가 언제일지도 함께 알려드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자작님.”
수도에서 여기까지 오는 건 마차로 나흘은 족히 걸리는 길이었다. 피곤함이 제법 클 테니 방마다 미리 데운 목욕물과 간단한 다과를 준비했고 저녁 식사는 평소보다 늦게 잡아두었다.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는 건 그 식사 자리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집사는 그런 내용들을 조사단에게 전달하고는 하인을 붙여 각자의 방으로 안내하게 했다.
“누님, 저는 뭘 도우면 될까요?”
엘 도안이 마르티안 쪽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휘휘 손을 내저었다.
“조사단 사람들과 같이 있어. 친하게 있던 사람들과 있어야지.”
“하지만 챙겨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이삼일 지나면 너에게 맡길 생각이니까 그전까진 신경 쓰지 마. 방마다 다과 준비해뒀으니까 친구들이랑 같이 가서 맛보고.”
그 말에 엘의 표정이 밝아진다. 어른스러운 척을 해도 아직은 애다. 친한 이들이 집에 찾아온 게 처음이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을 것이다.
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조사단 무리 가운데 끼어들었다. 신난 모습이 보기 좋아서 마르티안은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시간이 지나자 저택 앞으로는 오롯하게 남는 인원이 생겼다. 휴이 세블로아드의 일행이었다. 조사단이 짐마차 하나를 쓴 데 반해 그는 혼자 오면서도 짐마차를 따로 끌고 왔다. 그걸 내려서 가지고 들어오는 것도 일이다. 마부 둘에 하인 셋, 다섯 명이 개미처럼 짐을 날랐다.
‘여러모로 유별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야영을 하는 것도 아닌데 혼자 짐마차 하나 분량의 짐이 있다니. 귀한 몸이라 자작가의 물품은 성에 안 찬다는 건지 아니면 까다로운 취향을 가졌다고 티를 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마르티안은 백작가 저택에서 보았던 장식품들과 방의 꾸밈새를 떠올리다가 그저 타고난 삶이 그런가 보다 하고 납득하기로 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집사가 어느새 백작에게 다가가 있었다. 맙소사, 그녀가 급하게 그쪽으로 다가갔지만 집사가 휴이에게 이야기를 꺼내는 게 더 빨랐다.
“백작님, 수도에서 온 분들을 위해 저녁 식사 시간을 조금 뒤로 미룬 상태입니다. 기다리기 무료하실 테니 자작님과 주변 산책이라도 하시는 게 어떨까요?”
훌륭한 접대란 손님으로 온 상대를 무료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산책로에 대한 간단한 안내까지 덧붙인 집사의 응대는 나쁘지 않았다. 그걸 해야 하는 게 마르티안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었다. 손님 응대는 주인이 해야 하는 법이니까.
‘하필, 왜, 백작하고…….’
마르티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때까지 백작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의 표정이 찌그러들었다. 그녀가 나서서 말했다.
“산책하기엔 저녁 시간까지 너무 많이 남았어. 해가 떨어지면 금세 추워 질 텐데…….”
“아,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그럼 간단히 돌아보시고 응접실에서 따듯한 차를 마시는 게 어떨까요?”
그건 더 최악이다. 함께 차를 마시기까지 해야 하니까. 마르티안이 거절하려는 걸 휴이가 먼저 답했다.
“어찌하든 상관없어. 추위를 많이 타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집사가 기쁘게 웃었다. 휴이가 마르티안을 향해 시선을 두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 혹시 자작이 추운 걸 못 견디나?”
“자작님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분이십니다. 웬만한 추위는 끄떡없으시죠.”
집사가 자랑하듯 대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마르티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춥다는 이유로 산책을 거절하려 했는데 집사가 그 핑계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녀에 대한 거라면 뭐든 자랑하려 드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영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래, 집사. 외투를 가져다줘.”
자작가의 저택에는 따로 정원이 없다. 어차피 주변이 모두 숲이라서 산책은 보통 그쪽을 걷는 경우가 많았다. 저택 안에 있는 땅에는 앞으로 숲에 심어볼 만한 나무들을 시범적으로 심어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집사가 간단한 산책로라며 알려준 곳도 그런 곳이었다.
다양하고 특이한 나무들이 많았지만 딱히 볼만한 것도 아니다. 마르티안은 휴이를 안내하며 솔직히 말했다.
“그리 볼거리가 있는 곳은 아닙니다. 정원으로 만든 게 아니라서요.”
다양하고 특이하다는 건 예쁘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범주였으니까. 휴이는 그러냐는 소리를 하고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나무에 대해 설명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마르티안은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이 어색한 산책을 빨리 끝내려면 그저 걸어서 이 길을 끝내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길의 끝은 그리 멀지 않다. 절벽 아래, 바위가 무덤처럼 쌓인 곳이 끝이었다. 희게 바랜 돌들 앞에 도착했을 때는 그 위로 노을이 짙게 번져있었다.
“마지막 풍경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네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렸을 때였다. 휴이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나는 자작을 놓치고 싶지가 않아.”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마르티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백작님, 저는 그 이야기를 이미 거절했습니다. 백작님 정도면 주인을 자처할 사람이 차고 넘치실 테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아니, 없었어.”
단호한 답변에 마르티안이 미간을 구겼다.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는 모자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외모부터 신분, 재력, 모든 것에서 최상급인 남자였다.
이 정도 인물이라면, 그를 짓밟는 시늉이라도 해줄 사람이 차고 넘쳤을 게 분명했다. 이내 마르티안은 그를 처음 만났던 게 달밤가였음을 기억해냈다. 창녀를 사는 귀족이 파트너를 제대로 구해보았을 리 없었다.
“없을 리가 있나요. 취향이 남부끄러워 제대로 된 파트너를 구해본 적이 없는 거라면 모를까.”
단정 짓는 말에 휴이가 한숨을 뱉어냈다.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단정하지만 무감하다. 섬세하고 화려한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예민하고 또 지루해 보였다.
“안타깝게도 나는, 상대가 나 때문에 긴장하는지 아닌지를 금방 알아채거든. 내 비위를 맞추려 드는 사람들은 아무리 연기를 해도 그게 보이고.”
“…….”
“내 주인이 되어 보겠다던 사람들이 왜 없었겠어? 단지 내가 내 눈치를 보는 상대를 주인이라고 여기기 어려웠을 뿐이야.”
그는 마르티안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뺨에 댔다. 노을에 물든 그의 뺨은 붉었다. 달밤가에서 만났던 때, 그녀가 만들었던 그 붉은 자국 같다. 마르티안은 자신도 모르게 그 뺨을 쓸어내렸다. 매끈하고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휴이가 그녀의 손에 자신의 뺨을 살짝 비비며 고백하듯 말을 뱉어낸다.
“날 두고 긴장하지 않는 건 그대뿐이야, 도안 자작.”
그 말에 마르티안이 멈칫하고는 잡힌 손을 빼냈다. 휴이의 시선이 그녀의 손을 쫓는다. 잔뜩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취향인 얼굴이 예뻐해 달라며 취향대로 굴고 있으니 욕망이 이성을 흩어놓으려 든다.
마르티안은 스스로 자제하려 애썼다.
“저는 백작님을 짓밟을 자신도 없고 주인이 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세요.”
말로 상황을 잘라낸 뒤, 그녀는 그대로 휴이를 지나치려 했다. 그가 그녀를 붙들었다.
“자신이 없는 게 아니잖아. 그냥 귀찮은 일이 될까 봐 피하는 것 아닌가? 자작, 나는…….”
그가 머뭇대며 마르티안을 보았다. 적당한 말로 상대를 거절하는 건 일종의 예의였다. 마르티안이 돌려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한 예의를 지켜서 그를 거절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굳이 그녀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들추며 무례하게 붙잡았다. 그녀의 표정으로 짜증이 깊게 어렸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화가 나는 거라면, 그때처럼 굴어도 돼. 그런 취급을 받고 싶어서 여기 온 거니까.”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한 말이었다. 마르티안이 짧게 하, 하고 숨을 뱉어냈을 때였다. 휴이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온 채로 몸을 숙였다.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닿는다. 키가 커서 자세가 어설프게 구부러진 상태로, 그는 가볍게 이마를 비볐다. 마르티안은 그가 뭘 따라 하고 있는 건지 바로 깨달았다. 그건 론이 하는 애교였다.
기억 속으로, 그녀가 그에게 론에게 먼저 배워야 할 거라고 조롱했던 게 떠올랐다 아니, 아무리 그랬다고 한들 공작가의 자제가 침실 노예나 다름없는 론을 따라 하다니.
그녀가 몸을 뒤로 물릴 생각도 못 하고 있자, 휴이가 좀 더 몸을 붙여온다. 거절당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나에게도 기회를 줘.”
* * *
마르티안은 산책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자 집사가 반색을 하며 맞았다. 그녀가 백작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한 모양새였다.
“응접실에 다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바깥 공기가 제법 차가웠을 테니 차를 마시면서 몸을 녹이시면.”
“백작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서재로 갈 생각이야. 필요하면 부를 테니 그전까지는 방해하지 말아줘.”
순간 집사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방금 전에 만족하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마치 방탕한 자식이 애인을 데려오자 눈짓으로 다그치는 부모 같은 모양이었다.
집사가 그런 의혹을 품는 건 여태까지 있어 온 마르티안의 행실 탓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좀 억울하긴 했다. 이번엔 방탕한 쪽이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걸 구구절절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르티안은 집사의 오해 따윈 포기하고 몸을 돌려 백작에게 말했다.
“올라가시죠, 백작님.”
도안 저택의 제일 꼭대기 층에는 하인들도 자주 오가지 않았다. 또한 이곳에 있는 방과 서재는 그녀의 취향 때문에라도 방음을 한층 더 신경 써서 보수한 상태였다. 그러니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기엔 이곳만큼 적합한 곳도 없다.
서재로 발을 옮기면서, 마르티안은 백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부터 잘못 꿰였다. 아니, 그 전에 달밤가를 가질 말았어야 했다. 자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자중을 했어야지. 마르티안이 과거의 자신을 타박하며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약간 당황했다. 비어있을 거라 여긴 공간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론, 네가 여기 왜 있어?”
“아, 자작님. 서재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정리를 매일 시키는 건지…….”
근래 론은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바깥에 나가야 하는 그런 류의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맡겨진 이유는 뻔하다. 외부 손님이 있는 동안 그의 존재를 가리고 싶은 것이다.
집사의 태도는 적나라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악의적인 건 아니었다. 론에게 시키는 일 대부분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부당하게 괴로운 일을 맡기는 건 또 아니었으니까. 마르티안이 나서서 뭐라 말하긴 애매했다.
“여긴 이제 됐으니까 나가 있어.”
그녀의 말에 론이 들고 있던 책들을 다시 서고에 꽂았다. 나가기 위해 몸을 다시 돌린 그가 일순 굳었다. 서재 안으로 휴이가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론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몰라볼 수 없는 상대였다. 마르티안이 그와 만난 이후로, 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가 얼마나 가볍고도 불안한 것인지 온몸으로 겪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래도 론은 그가 다시 마르티안과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보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확고했으니까. 그러니 이 상황을 납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고통스러웠다.
아무도 없을 만한 사적인 공간에 마르티안이 그를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뻔한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었으니까. 그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마르티안은 짧게 한숨을 뱉었다.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 론은 쉽게 주눅이 들고 긴장하곤 했다. 그게 귀엽고 예쁠 때도 있긴 했지만 개가 너무 소심해지면 여러모로 불편한 법이었다. 그녀가 적당하게 달래 주려 움직였을 때였다. 뒤에서 휴이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시선을 돌리자 휴이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을 놓아주지 않은 채 자신의 뺨에 대고는 가만히 웃는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미소였다.
“주인님.”
그 호칭은 완벽한 차림새를 한 휴이로 인해 몹시 묘하게 들렸다. 그 모양이 곧 유혹이나 다름없다. 그녀가 멈칫한 채로 휴이를 바라보자 론이 울음을 삼켰다. 끅 하고 나는 작은 소리에 마르티안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론의 표정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마르티안은 붙잡힌 손을 빼내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론, 별일 아니야. 아니니까 잠시 나가 있어.”
“자작, 님.”
엉망으로 흔들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버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도 내쳤으니 론에게는 이제 기댈 게 없었다. 그가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의 눈가로 눈물이 금세 가득 들어찼다. 그건 묘한 느낌이었다. 가혹하게 굴려도 쉽게 울지 않던 론이었으니까.
그건 그 자체로 그녀의 흥분을 이끌어냈다. 가학적인 욕망이 들어찼다.
‘여기서 론을 벗기고 삼키면…….’
그녀의 몸은 금세 흥분했다. 정신없이 바빴던 탓에 제대로 욕망을 풀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참아냈다. 눈앞의 개를 당장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지금은 불청객이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뱉어내며 휴이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까 전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였다. 우습게 방치된 꼴이다. 그가 마르티안을 보고는 불만을 드러내듯 미간을 찌푸렸다. 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건방진 꼴이었다. 그의 꼴을 내버려 두고 조롱하듯 론을 삼키는 거야 못 할 일도 아니었지만, 그렇다면 백작가에서 했던 꼴을 또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한 일이 된다.
“론, 일단은 나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론은 죄송하다는 말을 겨우 뱉어냈다. 마르티안은 제 가학심을 참아내느라 그를 재촉하듯 내보냈다.
서재에는 이제 불만스럽게 그녀를 올려다보는 ‘개’가 한 마리만이 남았다. 마르티안은 그를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차를 한잔 마시고 싶은데 집사에게 시키기도 그랬고 그렇다고 론에게 시키기도 그렇다. 피곤한 숨을 뱉어내며 그녀가 휴이에게 말했다.
“원하던 이야기를 할 테니 와서 앉으세요. 쓸데없이 고집부리지 말고.”
그제야 휴이가 마르티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하다는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타고나며 쌓인 자존심이란 본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것이 그녀를 자극하긴 했다. 순종적인 개가 취향이긴 했지만 상대를 강압적으로 몰아붙여 꺾는 재미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녀가 바로 말을 하지 않자 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성급한 말투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나를 곁에 두는 게 자작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나는 얼마든지 그대 발밑에서 개처럼 복종할 테고, 나는 자작이 좋아하는 외양과 비슷하니까…….”
“저에 대해 조사라도 하신 모양이네요?”
“그저 소문을 들은 정도야.”
휴이가 말을 흐린다. 마르티안은 픽 웃었다. 뒷조사야 당연히 했으리라 생각해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럼 아시겠네요. 전 간섭받고 구속적인 관계는 딱 질색이에요. 그런 면에서 백작님과의 관계는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구요. 만약 제가 끝까지 백작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어쩌실 생각이었죠?”
그가 머뭇대며 입을 다문다. 생각해 둔 것이 있지만 그걸 입으로 꺼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모양이었다. 뻔하다 싶어서 마르티안은 웃었다.
“제 가문의 이해득실을 놓고 고민하게 만드셨을 거 아닌가요? 좋게 말하면 회유고 나쁘게 말하면 협박인 태도로요.”
“나는 그냥, 자작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 말을 들으며 마르티안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자신의 느꼈던 찝찝했던 느낌이 결국 맞았던 것이다. 이유 없는 행운이란 아주 드문 법이었고 특히 그녀의 삶에서는 그게 더 드물었다. 그녀가 허탈해하는 듯 보여서 휴이는 조금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아니라고 해도, 이곳 영지가 여러모로 조건에 맞는 건 사실이니까. 난 추천만 했을 뿐이고 선택하는 건 조사단 쪽에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곳과 비슷한 상태인 영지가 적어도 다섯 곳은 더 있을 텐데요? 일부러 제 영지를 포함시킨 건, 회유든 협박이든 뭐든 하기 편할 것 같아서 한 게 아닌가요?”
“영지를 두고 협박할 생각은 없었어. 물론 자작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긴 했겠지. 그 외에도 나름대로 선물 같은 것들도 준비했고…….”
“어떻게든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휴이는 더 변명하려던 것을 멈췄다. 여기서 그녀와 실랑이를 벌여보았자 득 될 것이 없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상황이야. 성향이 있으니까 자작도 알 텐데? 이런 상황에서 상대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는 거. 그러니까 한 번이라도 제대로 생각해봐 줄 순 없나? 짧게라도 한번 시험 삼아서…….”
마르티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나가려는 것 같아서 휴이가 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마르티안은 그를 보며 턱짓으로 다시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그건 원래 그녀와 그의 지위를 생각하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였다. 휴이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마르티안이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개가 되고 싶으면 얌전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따위로 구는 게 아니라.”
“하지만 다시, 다시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거 같아서, 하윽.”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마르티안이 한쪽 발로 꾹 눌렀다. 흡, 흐응.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물들었다. 변명은 더는 나오지 못했다.
마르티안은 자신의 발에 힘을 주며 몸을 더 기울였다. 흐으, 끄, 흐으읍. 휴이는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지만 그의 성기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가학에 발기하는 몸은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것보다 더 천박한 모양새였다.
“아윽, 흐으읏, 잘못했어요. 기다, 흐읍, 기다리려고 했는데……못 참겠어서…….”
그가 부들대며 떨었다. 흥분으로 바짝 달아오른 몸이었다. 그녀는 휴이의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싫다면? 나에겐 널 개로 쓸 이유가 전혀 없잖아?”
“하지만, 흐, 싫어요. 흐읍, 뭐라도 할게요. 짧게라도 짧게, 흐아, 흐으응!”
마르티안이 발을 비비자 그가 허벅지 안쪽을 덜덜 떤다. 스스로 소파 위에 발을 올려서, 그의 다리 사이는 적나라할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그는 그 천박한 모양으로 버티며 개가 되고 싶단 이야기를 반복했다.
‘지금 거절한다고 해도 조사 기간 내내 귀찮게 할 게 분명한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휴이는 이번 조사에 연관되어있는 관련 담당자였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머무르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다시 휴이를 내려 보았다. 붉어진 얼굴이 그녀를 올려본다. 흥분과 희열로 흐려진 얼굴이었다.
‘처음이라고.’
원래 모든 처음은 다 특별한 법이었었다. 지나고 나면 다 거기서 거기인 관계임을 알게 되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처음 겪는 상황에 잔뜩 몰입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기 마련이었다. 막연한 환상이 넘치고 넘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때니까.
마르티안은 그를 잠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3개월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원한다면 개로 있게 해줄게. 조사 기간만이야.”
“네, 좋아요. 흐읍, 흐으응, 좋아요. 주인님. 제가 잘, 흐읍, 할게요. 주인님. 하윽.”
마르티안은 발을 짓뭉개듯 움직였다. 고통스러운 압박에도 그의 아래는 점점 더 딱딱해진다. 아픔과 고통과 자극이 통째로 다가와서 휴이는 헐떡대며 몸을 비틀었다. 마르티안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뺨을 후려쳤다. 철썩하는 소리가 몇 번이나 연이어 났다.
“너만 좋자고 하는 관계 아니잖아? 개면 개답게, 주인이 즐거울 수 있게 굴어야지.”
“흐으, 흐읍……. 네, 주인님.”
그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다리에 뺨을 비볐다. 론의 애교를 흉내 내는 태도였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보며 제 앞에 있는 개가 론과 전혀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몸을 치대는 것 자체가 익숙한 것 같기도 했고 그저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스스로 행동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는 게 론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그냥, 파트너를 하나 둔다고 생각하면 나쁠 것도 없으니까.’
계속된 거절 속에서 환상을 키우게 하느니 적당하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게 났다. 물론 깔끔하게 헤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녀는 휴이가 그쯤에는 스스로 헤어지고 싶어 하게끔 만들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주인이 없이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 말은 진짜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면역이 없다는 소리였다.
마르티안은 그런 그의 입장을 전혀 고려할 생각이 없었다. 내키는 대로, 하던 대로 굴 생각이다. 그렇다면 상대는 석 달도 채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가학이 일방적인 학대로 넘어가면 그걸 버텨내는 개는 거의 없었으니까.
마르티안이 거기까지 마음을 정하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였다.
“주인님, 더 있어 주시면 안 돼요? 오랜만에 보는 건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마르티안을 감싸고 있는 팔에 힘을 준다. 가지 말라는 걸 이렇게 적극적으로, 겁 없이 드러내는 개는 처음이라, 그녀는 어이없어 웃음을 뱉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그녀가 휴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뒤로 잡아당기자 강제로 목이 젖혀졌다. 찡그린 표정으로 그가 그녀를 올려보았다. 마르티안은 다른 손으로 그의 뺨을 툭, 쳤다.
“아까 뭐든 하겠다고 했었지?”
그가 헐떡이며 ‘네’라고 답한다. 마르티안이 그의 입을 벌리게 한 다음 손가락을 밀어 넣어 입 안을 더듬었다. 그의 목이 급하게 울렁였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구역질이 올라오자 목구멍 안이 조여진다. 끕, 끅. 고통스러운 울림과 함께 목젖이 일렁대는 게 제법 볼만했다.
그에 반해 그의 혀는 엉망이었다. 아무렇게나 핥아대는 재미없는 움직임. 애초에 혀를 써본 적이 있긴 할까. 마르티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휴이의 목구멍에 제 손가락을 깊게 쑤셔 박았다.
“컥, 흐어…….”
손가락이 세 개가 들어오자 목구멍이 엉망으로 울렁댄다. 숨마다 목 안이 울렁였다. 한참을 괴롭히던 손이 빠져나가자 휴이가 기침을 뱉어냈다. 마르티안은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만들어, 타액으로 범벅인 된 손을 그 뺨에 닦아냈다.
“혀도 제대로 못 쓰는 개라니……. 좆이나 세울 줄 알지.”
목을 괴롭히던 자극이 사라지자 남는 것은 잔뜩 세운 아래뿐이었다. 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치 때문이 아니라 아래를 흔들고 싶어서였다. 발기한 걸 손에 쥐고 흔들고 싶다. 멈춘 자극은 도리어 괴로움이었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움찔거리며 맴돈다. 함부로 굴지 말아야 한다는 건 이제 눈치로 알았다.
마르티안이 그것을 보며 말을 뱉었다.
“내 앞에서는 무조건 허락받고 싸. 함부로 싸지르면 좆 대가리가 해질 정도로 맞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주인님. 지금 싸고, 흐으읏, 하으, 싸고 싶어서…….”
그가 허락을 애원한다. 그녀는 가볍게 그 애원을 뭉갰다.
“참아.”
“하, 하지만 정말로, 흐으응, 못 참겠…….”
“그럼 좆 맞을 각오를 하던가. 아니면 개 역할 때려치우고 나갈래? 둘 중 하나는 해야지.”
냉정한 말에 휴이가 고개를 뚝 떨어트렸다. 개의 자리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정말 당장 사정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애첩을 떠올렸다. 구멍과 좆을 맞으며 울고 덜덜 떨어대던 모습을. 그건 역효과였다. 그 가학이 자신에게 다가올 거란 생각을 하니 몸을 더 흥분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흥분을 참으려 들었지만 허리가 덜덜 떨렸다.
마르티안은 서재 한쪽 서랍에서 회초리를 꺼냈다. 백작가에도 들고 갔던 그 회초리였다. 그녀가 회초리를 가볍게 허공에 휘두르자, 공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꽤 위협적으로 울렸다.
“이거 기억나지?”
“네. 흐으, 흐, 주인님.”
그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마르티안과 회초리를 번갈아 보았다. 무섭고 긴장되면서도 당장 사정할 것처럼 흥분이 몰려들었다. 흐으, 흐어, 그가 이상한 신음을 내며 자세를 버티고 있었을 때였다. 마르티안이 회초리를 휘둘러 그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흐악.”
그의 표정이 단숨에 고통으로 붉어졌다. 처음 맞아보는 마르티안의 매는 상상보다 훨씬 가혹하게 아팠다. 그의 손이 얇은 바지 위를 더듬으며 문질러댄다. 매는 살갗을 긋는 것처럼 아팠다.
“자세 똑바로 해. 손 똑바로 하고. 기본적인 건 해야지.”
마르티안은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들기자 휴이가 신음을 뱉으며 손을 뒤로 물렸다. 그의 입에서 긴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의 시선이 회초리에 고정됐다. 아까와는 달리 잔뜩 겁먹은 얼굴이었다.
가학에 흥분하는 몸이라고 해도 당장 맞는 순간의 고통은 고통이다. 고통 자체가 쾌감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은 고통 이후의 감각들을 즐기거나 학대받는 상황을 놓고 흥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주어지는 고통을 얌전하게 참아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픈 건 아픈 거였고 그래서 견디고 참아내야 하는 부분들이 생긴다.
휴이 세블로아드는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개였다. 마르티안은 회초리 끝으로 그의 사타구니 사이를 꾹 눌렀다. 고통스럽게 맞아도 발기한 것이 그대로다. 아니, 조금 더 커진 거 같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말했던 거 기억나? 달밤가에서 했던 말.”
휴가 대답을 하려다가 움찔 멈췄다. 회초리 끝이 그의 가슴을 쿡 찔렀기 때문이다. 이내 회초리가 그의 상체를 더듬듯이 내려간다. 툭, 툭, 툭. 가볍게 건드리는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그건 매질을 예고하는 움직임이었다.
두려움과 긴장에 가득 물들어 그는 마르티안을 올려보았다. 허벅지를 맞는 건 고통이 매우 컸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느낌이 흥분처럼 남았다. 매질을 원하는 건지 두려워하는 건지 모르겠는 기분이다. 휴이는 헐떡이며 신음했다. 맞는 걸까. 맞는 건 좋았지만 너무 아팠다. 그가 울상을 지으며 마르티안의 눈치를 보았을 때였다.
순간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휴이는 순간 놀랐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손놀림은 익숙하게 그를 건드렸다. 가학이 아닌데도 가학 가운데 이어지는 부드러운 느낌이 좋다. 그가 마르티안에게 기대어 살짝 애교를 부리려 했을 때였다. 그녀의 손이 떨어졌다.
“대답이 늦네.”
그제야 휴이는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를 물어보았다는 걸 기억해냈다. 이어지는 상황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깜빡 잊은 것이다. 매질을 예고하는 것 같던 그 행위들이 긴장되고 겁나서, 그리고 좋아서. 그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아, 그게…….”
“이제 와서 대답하는 건 의미가 없지.”
그녀는 휴이의 말을 막았다. 변명도 받아주지 않은 채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건 회초리로 그의 상체를 더듬던 손과 닮았다. 학대를 예고하는 웃음. 그것을 눈치채고 휴이는 침을 삼켰다. 엉망으로 망가질 것을 기대한 몸이 떨린다. 이건 태어나 두 번째로 겪는 상황이었다. 처음은 달밤가에서 당했던 그 날이었다.
마르티안은 조금도 그를 배려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욕망이 중요한 사람이었고, 개가 그것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에 가차 없었다. 마르티안이 회초리를 들어 그의 옷, 제일 윗단추를 건드린다.
“잘못을 했으면 맞을 생각부터 해야지. 위에 전부 벗어.”
무정하고 가혹한 주인. 그건 그가 기대하고 확신했던 그대로였다.
휴이는 윗옷을 벗었다. 그의 상체는 마르티안이 이전에 보았던 것처럼 자국 하나 없이 말끔했다. 잘 짜인 근육과 부피가 있는 가슴, 기본적으로 타고난 체형이 바르고 곧았다.
우아한 품종견. 그녀는 백작가 연회에서 그를 보고 생각했던 감상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 품종견이 그녀의 밑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외적인 면이 지나치게 취향이다 보니 도리어 스스로의 상태가 자각이 된다. 이런저런 변명을 붙이긴 했지만 결국 백작을 받아들인 건, 이 몸을 그냥 내치긴 아까웠던 게 아닐까. 욕망에 충실하긴 했지만 욕망에 지면서 살진 않았는데. 그녀가 속으로 한숨을 내뱉었을 때였다.
휴이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왔다. 긴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기대감이 더 크게 드러나 있었다. 마르티안은 그것이 조금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개 주제에 마냥 즐기려는 모양새가.
마르티안은 들고 있던 회초리 끝으로 그의 유두를 툭 건드렸다.
“젖꼭지가 제법 크네. 여기로 뭐 해본 적 있어?”
순간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든다. 당장 맞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당황스러웠고, 마르티안이 정말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머뭇대는 사이에 대답할 순간이 지났다.
마르티안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팔을 휘둘렀다. 가르치는 건 한 번이면 족한 법이었다. 회초리의 둥근 끝이 정확하게 그의 유두를 내리쳤다.
“흐윽!”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통증이 유두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단련된 몸이었지만 여린 살을 이런 식으로 맞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냥 부딪치는 매와는 차원이 달랐다.
흐으, 흐아…… 그가 헐떡대며 제 가슴을 손으로 문질렀다. 상체를 구부리는 상태로 그러고 있는 꼴에, 마르티안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아픔에 물든 얼굴이 억지로 들렸다.
“움직이라고 한 적이 없어. 자세 똑바로 해야지.”
“흐으, 아파서, 아파서 그랬……흡.”
마르티안은 당연한 소리를 하는 그를 보며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내 그녀가 휴이의 뺨을 후려쳤다.
“아무리 처음이어도 기본적인 건 해야지. 자세를 유지하고 버티는 것도 못 하면 어떡하라고? 이딴 식으로 개답게 굴지 못할 거면 지금 당장 때려치워. 쓸모없는 개를 데리고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안 돼! 아니요, 흐읍, 안돼요. 그건 싫어요. 주인님.”
휴이는 고개를 저으며 마구 말을 뱉었다. ‘개답게 굴지 못하면’이라니 그건 너무 주관적인 기준이다. 마르티안이 자신을 버릴 때 핑계로 삼기 딱 좋은 소리였다. 어떻게 얻은 삼 개월인데 이런 식으로 불안하게 보낼 순 없었다.
“주인님 잘못했어요. 그러지 마세요. 자세, 잘 잡을게요. 주인님.”
물론 그는 자신이 방금 보인 태도가 ‘개답게 굴지 못하면’에 해당한다는 걸 알았다. 끝에 간신히 존대를 붙이긴 했지만 처음엔 거의 반말로 소리를 질렀으니까. 그는 마르티안의 눈치를 보며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르티안은 자기 멋대로 구는 개를 내버려 두었다. 어디까지 하나, 그런 마음이 반이긴 했다. 그가 상체를 기울여 제 뺨을 그녀의 허벅지에 댄다. 방금 맞은 곳이었다.
“주인님, 얼마든지 벌 받을게요. 못했다는 이유로 바로, 흐으, 그렇게 하는 거 싫어요. 조사 기간도 얼마 안 되는데…….”
“싫다는 소리만 계속하면서, 뭘 자꾸 얼마든지 벌을 받아?”
그녀는 휴이의 머리카락을 뒤로 당겨 그를 떼어냈다. 제멋대로인 개였지만, 그녀의 정확한 지시와 손짓까지 반항하진 않았다. 단지 말투나 태도가 고분고분하지 않을 뿐이었다.
계속 변명하려는 개의 말을 그녀가 쯧, 하고 혀를 차서 막았다. 올려다보는 개의 표정이 퍽 억울하다. 제 주제를 모르고 행동하는 개는 스스로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마르티안은 회초리를 움직여 휴의 가슴을 꾹 눌렀다. 불만스럽게 올려다보던 개의 표정이, 그제야 움찔 변한다. 맞게 될 거라는 걸 모르진 않는 눈치였다.
“손 뒤로 하고 버텨.”
“주이, 흐으!”
회초리가 휘갈기듯 그의 가슴으로 떨어졌다. 회초리 대 부분으로 휘어 칠 때는 얇고 따갑게 아팠고, 끝부분이 살을 때릴 때는 묵직하고 깊게 아팠다. 고통에는 종류가 있고 차등이 있었다. 자극적이었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고통스럽다. 뒤로 맞잡은 손이 점차 풀렸다.
“흐으, 주, 주인님. 흐으! 흐아! 아프, 아파요. 흐으으.”
그의 상체가 조금씩 구부러든다. 신음은 억눌린 비명으로 바뀌었다. 언제까지, 어느 정도까지 참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매가 계속 그어질 때마다 가슴으로 자국이 점차 검어진다. 가슴이 온통 회초리 자국으로 엉망이 되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반항이나 항의 하나 할 수 없었다.
차라리 가슴살로 떨어지는 매는 버틸 만했지만 유두가 깊게 맞을 때는 견딜 수 없이 아파서 소리내어 울었다. 여린 살은 피가 날것처럼 붉게 변한 채로 잔뜩 부어올랐다. 휴이는 울며 몇 번이나 주인님을 불러댔지만 마르티안은 조금도 봐주지 않고 그를 굴렸다.
고통 가운데 버티면서 휴이는 어느 순간 흥분하는 스스로를 느꼈다.
“흐으. 흐으으, 아흡.”
마르티안이 회초리 끝으로 부어오른 유두를 문질렀다. 신음이 퍼진다. 매질에 흥분하는 이들은 고통과 고통 사이를 견디면서 더욱 흥분하는 법이었다.
그녀가 회초리로 그의 상체를 매만지듯이 훑어 내렸다. 휴이는 아까보다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 얼굴로, 몸을 뒤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신음을 뱉어내며 헐떡이는 게 확실히 예쁜 얼굴이긴 했다. 붉어진 눈시울도 그녀의 취향대로다.
“왜 맞는지는 알아?”
“아까 안 된다고 소리친, 흐읏! 읏, 주인, 주인님, 읏.”
그녀가 휴의 아래를 꾸욱 밟았다. 가슴을 가혹하게 후려 맞은 상태인데도 그의 아래는 여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즐기며 그의 좆을 좀 더 짓밟았다. 원래부터 그녀는 맞는 것에도 서는 천박한 개들을 좋아했다. 외적인 면만큼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마르티안은 달아오른 숨을 내뱉으며 짓밟던 발을 떼어냈다.
“다 벗고 소파까지 기어가.”
아래까지 벌거벗으니 발기한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휴이는 제법 능숙하게 엎드려 기기 시작했다. 창녀를 샀을 때도 많이 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기어가게 하고 적당히 짓밟히고 적당히 사정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허망한 만족감을 주곤 했다. 마르티안을 만났던 그날이 없었다면, 아마 평생을 그렇게 적당히 살았을 것이다.
그는 마르티안을 만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감각과 감정은 결코 알지 못했을 테니까.
“여유가 넘치네. 느릿느릿 기어가는 게.”
“아, 그게…… 읏.”
마르티안은 당연하다는 듯 회초리를 휘둘렀다. 매질은 무자비하고 고통스러웠다. 어떤 식으로 때려야 이만큼 아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회초리가 그의 엉덩이 중간부터 등 위쪽으로 올라가며 차례로 떨어진다.
휴이는 버티려 애썼지만, 회초리 끝 뭉툭한 덩어리로 날개뼈 아래를 맞았을 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파서 눈물이 후둑 떨어졌다.
“왜? 더 못 맞겠어?”
조롱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회초리 끝이 부어오른 자국들을 꾹 눌러 비빈다. 고통스럽고 힘든데도 이 상황을 자체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그는 아니요, 라는 대답을 간신히 늦게 않게 말했다.
“그렇겠지. 맞으면서 흥분하는 몸에 이 정도야 상이잖아.”
마르티안이 그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꾹 눌렀다. 아래가 팽팽했고 여전히 터지기 직전에 머물러 있었다.
“돌아서 앉아. 바닥에 엉덩이 대고.”
그 말에 몸을 돌려 앉았다. 서늘한 바닥이 이상한 감각을 선사했다. 곤두선 감각들 때문에 자꾸 흥분이 더해진다. 당장 싸버릴 것만 같아서 그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모았다. 마르티안이 애매하게 벌어진 그의 허벅지를 발로 툭 찼다.
“다리 제대로 벌려. 그런 거 잘하잖아?”
“흐, 흐읍, 주인, 님…….”
휴이는 주저하면서 마르티안을 올려보았다. 지금 다리를 벌리면 그녀는 분명 그의 성기를 짓밟으려 들 것이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좋아했으니까. 문제는 휴이 자신이었다. 성기에 발을 올리기만 해도 당장 싸버릴 것 같았다. 혼이 나는 건 상관없지만, 개답지 못하다고 여겨질 것 같아서 함부로 굴 수 없었다.
휴이는 제 다리를 엉거주줌하게 벌린 상태로 입을 열었다.
“……싸, 쌀 거 같아요.”
“그래서?”
그녀는 애원 같은 말을 무심하게 쳐냈다. 관계를 하며 개의 상태를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개의 상태에 맞춰주진 않았다. 그녀가 휴이의 다리 사이로 한 발 더 다가섰다. 휴이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좀 더 오므렸다. 그녀가 당장 밟기라도 할 거 같아서 그 자극을 참을 자신이 없었다.
“뭐 하자는 거야? 다리 안 벌려?”
“그게 쌀 거 같아서요. 가,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시면…….”
“아, 허락을 먼저 해줘야 내가 뭘 할 수 있는 거였어? 이 관계가?”
퍼억, 그녀가 구두 굽으로 그의 허벅지를 내리찍었다. 고통이 너무 커서 비명조차 나오질 않는다. 휴이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이 삼켰다. 마르티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제대로 벌려.”
그제야 휴이가 다리를 벌렸다. 고통 속에서도 여전히 발기한 것이 적나라하게 꿈틀거렸다. 마르티안은 픽 웃고는 그의 벌린 다리 사이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발기한 것을 손에 쥐었다.
“허락하기 전까지는 참아.”
“흐읏! 주, 주인님.”
안돼요, 라는 말은 삼켜졌다. 휴이는 급하게 오르는 사정감을 견디느라 손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맨바닥은 걸리는 것 하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가 없었다. 벌린 허벅지가 자극을 견디느라 떨린다. 그는 입술을 급하게 깨물었다.
흥분에 겨워 달아오른 얼굴은 이전과 비슷했지만 지금은 제법 겁먹은 표정이다. 마르티안은 그것을 보며 조금 만족했다. 천박하고 버릇없는 개였지만 그래도 나름의 성과는 있는 모양이었다.
“쌀 것 같아?”
“흐으, 흐윽, 네, 주인님.”
안타깝네. 그녀는 그렇게 몸을 일으켜 서랍을 뒤졌다. 적당한 요도 막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근 들어 론을 괴롭히겠다고 이것저것 사다가 챙겨둔 게 많았으니까. 얇지만 길다란 막대를 들고, 그녀가 다시 휴이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