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글쎄, 누구 때문에 온몸이 너무 쑤셔서…… 겨울 축제에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아벨라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날 밤의 일로 근육통이 온몸에 도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살짝 커튼을 걷고 창문 너머를 보니, 마을이 정말 눈으로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곧 겨울 축제를 시작할 것 같았다.
매년 겨울 축제는 폭설이 오고 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시작하는 게 관례였다.
멍하니 창문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데, 풀 죽은 칼라일의 기척이 느껴졌다. 힐긋 뒤를 돌아보자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만 달싹이고 있었다.
모양새가 우스워서, 아벨라는 장난치려던 것도 있고 잔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벨라가 푸흐흐, 소리 내어 웃자 칼라일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보였다.
“하, 하지만 전에…… 어머니가 같이 축제…… 가 주신다고…… 했었는데…….”
그는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연신 아벨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벨라는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포시 입꼬리를 올렸다.
“축제 가서도 그렇게 엄마라고 부를 거야?”
“네, 네?
“이상하지 않을까. 내 나이에 이렇게 큰 아들이 있으면 말이야.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걸?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거 말이야.”
잠시 눈을 끔뻑이던 칼라일은 이내 아벨라의 말을 이해하고 귀를 쫑긋 세웠다. 신이 난 건지 등 뒤로 복슬한 꼬리가 털을 이리저리 날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 그럼 축제 같이 가는 거죠? 그런 거 맞죠?”
아벨라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러자 칼라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천진한 그 얼굴에 아벨라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고, 칼라일 또한 좋다며 아벨라를 따라 방실방실 웃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아…… 벨라.”
칼라일은 아직 입에 붙지 않은 그녀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뱉어 보며 눈치를 살폈다. 아벨라가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그제야 그는 다시 한번 아벨라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뺨을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자신이 차려 놓은 아침상이 떠올랐는지 곧장 그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 칼라일!”
놀란 아벨라가 그에게 들린 채 허우적거렸으나 칼라일은 꿈쩍도 않았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금세 아벨라를 식탁 의자에 앉혔다.
“우선…… 식사부터 해요, 아벨라.”
쭈뼛거리며 숟가락을 쥐여 주는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서 아벨라의 입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예상대로, 며칠 지나지 않아 겨울 축제가 시작되었다. 작은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인 만큼 규모는 소박했지만 그럼에도 칼라일은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음악 소리를 들으며 아침부터 꼬리를 바쁘게 흔들어 대는 통에 온 집 안에 검은 털이 폴폴 흩날리는 중이었다.
“오늘 가는 거 맞죠? 네? 그런 거죠, 엄…… 아, 아니, 아벨라……?”
흥분을 숨기지 못한 그가 예전처럼 다시금 아벨라를 엄마라 부를 뻔했다. 급하게 호칭을 바꾸는 그를 보며 아벨라는 옷부터 입으라는 듯 직접 짠 두툼한 털옷을 하나 꺼내 왔다.
“우선 옷부터 입어.”
눈 깜짝할 사이 옷을 입고 목도리까지 한 칼라일은 초롱초롱 아이 같은 눈으로 천진하게 아벨라를 응시했다. 눈 오는 날이면 온 동네의 개들이 모두 뛰어나와 논다더니, 칼라일의 모습도 영락없이 딱 그 꼴이었다.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갈 듯한 그는 신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지? 밖에서는 귀랑 꼬리 조심해야 하는 거.”
“네! 조심할게요, 절대 밖으로 안 튀어나오게……!”
칼라일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벨라는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외투를 더욱 꽁꽁 동여매 줄 뿐이었다.
* * *
축제는 꽤 소란스러웠다. 인근 마을에서도 모두 놀러 온 탓에 인파가 상당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틈에 끼어 있는 게 처음인 칼라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 우와…… 사람이 엄청…….”
“엄청 많지?”
“네…… 신기해요.”
그러면서도 오뚝하게 솟아난 코를 씰룩이며 킁킁댔다.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냄새들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벨라, 저기 저 저 나무 막대에 꽂힌 고기는 뭐예요?”
“아, 저건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이야. 먹어 볼래?”
“정말요? 먹어 봐도 돼요?”
제대로 된 외출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는 그였기에 온 정신이 축제에 팔려 있었다.
자극적인 길거리 음식과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 그리고 시끌벅적한 노래까지.
아벨라가 사 준 꼬치를 양손 가득 든 그는 쉴 새 없이 고기를 뜯으며 축제를 구경하기 바빴다.
“그나저나 신기해요. 고작 눈으로 이렇게 다양한 걸 만든다는 게…….”
칼라일이 축제 한편에 위치한 수많은 눈 조각상들을 보며 감탄했다.
“너희 동족들은 저런 거 안 하고 놀았었니?”
“네, 보통 늑대의 모습으로 생활하니까요. 그 모습으로는 눈을 뭉치기도 어려워요.”
칼라일이 푸흐흐, 웃으며 대답했다. 아벨라 또한 그제야 이해된다는 듯 옅은 미소를 흘렸다.
“하긴, 그건 그렇네.”
칼라일은 대답 대신 그녀가 사 준 고기 꼬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꼭 맞붙어 있어 그런지 꽤 쌀쌀한 겨울바람이 불고 있었음에도 춥게 느껴지지 않는 겨울이었다.
“너무 오래 나와 있었나?”
하지만 그럼에도 아벨라는 혹 그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되는 건지, 조금은 발개진 칼라일의 코를 보며 걱정 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해도 지고 있네. 내일 다시 구경 오자. 어때?”
“아, 벌써요?”
“응, 벌써 해가 졌으니까…….”
“혹시 아벨라가 추운 거예요?”
“아니, 나는 괜찮은데 칼라일 네가 감기 걸릴까 봐 그래.”
아벨라는 차가워진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것만 먹고 갈까? 내일 다시 나오자. 어때?”
“하지만…….”
“응?”
“하지만 저녁이면 저 눈으로 만든 조각상들에 불이 들어온댔는 걸요.”
칼라일이 작은 목소리로 아벨라의 눈치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거…… 보고 싶어서…….”
커다란 손이 어울리지 않게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아벨라는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보며 저도 모르게 웃음이 더 진해지고 있었다.
“오구구 그게 그렇게 보고 싶었어?”
커다란 머리통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벨라는 새카만 머리칼을 살살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잔웃음을 흘렸다.
“흠, 그런데 계속 이대로 있기는 조금 그런데…….”
“왜요?”
“쌀쌀하잖아, 감기 걸릴지도 몰라.”
분홍빛 눈동자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멀찍이 보이는 한 간이 판매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칼라일! 그럼 저기 가서 코코아 두 잔만 사 올래?”
“코코아요?”
“응, 추우니까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서 시간 보내고 있자. 이러면 괜찮지? 어때?”
제안에 칼라일 또한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여기 계셔야 해요!”
코코아를 사러 가면서도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는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칼라일이 눈매를 보기 좋게 접어가며 웃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꽤 멀어졌다. 그럼에도 칼라일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는 건 명확하게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아벨라의 입가에선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바보, 앞이나 잘 보지.’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벨라가 앞이나 잘 보라는 뜻으로 열심히 손짓을 해 보였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칼라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장 코코아를 구입하는 듯했다.
그렇게 홀로 남은 아벨라는 모처럼 마주한 축제 풍경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혼자였는데…….’
누군가와 함께 축제를 즐긴다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아벨라는 축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삼삼오오 거리로 나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을 볼 때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허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굳이 축제 날이면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모두가 즐겁다는 듯 울려 퍼지는 노래도 불쾌한 소음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벨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음악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멀찍이서 양손에 코코아를 들고 급히 걸어오는 칼라일이 보였다.
키가 훤칠하여 그런지 인파 속에 섞여 있어도 단연 눈에 잘 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일까.
“여어, 거기 아가씨.”
웬 낯선 남자들의 목소리가 아벨라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당황한 그녀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니, 언제 다가온 건지 일면식도 없는 남자 셋이 서서 아벨라를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