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9>
“아, 그건…….”
칼라일은 변명을 위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아벨라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그녀 말마따나 자신은 발정기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각인을 맺은 게 맞았으니까.
온몸의 피가 쪽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되찾아 가던 신뢰가 다시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칼라일은 절망스러운 눈으로 아벨라를 마주했다.
“……죄송해요.”
칼라일은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두려웠음에도 그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널찍한 어깨가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발정기 때문에 흐릿하던 정신도 순식간에 맑아진 기분이었다.
두 사람 사이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가 방 안에 들리는 소음의 전부였다.
과거의 칼라일이었다면, 사과의 말과 함께 곧장 ‘역시 이런 저 같은 건 어머니도 싫으신 거죠?’ 따위의 말을 뱉으며 동정심이라도 사려 했을 텐데, 지금의 그는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동정심으로 이어 가는 관계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던 그의 꼬리도 힘없이 바닥으로 처졌다. 겁에 질린 칼라일이 힐긋 아벨라의 눈치를 살폈지만 여느 때처럼 말간 분홍빛 눈동자는 오늘따라 더 속을 읽을 수 없었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칼라일은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 분명 아벨라의 입에서 저를 원망하고 채근하는 말이 돌아올 것 같아서였다. 아니, 어디 그뿐일까. 꼴도 보기 싫다며 저를 상종하지 않으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과 달리 아벨라는 조금도 화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언젠가 레오가 해 주었던 말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아마 한 번도 사랑받아 본 적 없었을 거예요. 제가 아는 칼은…… 항상 놀림 받고 괴롭힘당하는 불쌍한 절름발이 동생이었거든요. 그러니까 표현이 서툴러도 조금만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에샤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레오는 이따금 아벨라와 칼라일을 찾아와 살갑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처음엔 못마땅하게 보던 칼라일이었지만, 불길 속에서 저를 구한 게 레오라는 걸 들은 후로는 마음이 조금 풀린 눈치였다.
아벨라 또한 두 사람의 오해가 풀린 후로 레오와는 자연스럽게 가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레오는 가끔씩 칼라일의 과거에 대해 알려 주곤 했다.
그때 들은 과거의 이야기들 때문인지, 아벨라는 차마 칼라일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그가 제게 한 행동들이 전부 잘못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칼라일.”
“……네, 어머니.”
“너도 알고 있지? 이게 잘못된 행동이라는 거.”
그 질문에 그가 대답 대신 새카만 머리통을 두어 번 주억거렸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목이 메는 건지 칼라일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작게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아벨라는 그런 그를 보며 안쓰럽다는 듯 쓰게 웃었다.
“그래, 지금은 안다면 됐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벨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몇 가지 간단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옷과 세안 도구였다.
그런 아벨라의 행동에 당황한 건 칼라일이었다.
갑자기 세면도구와 잠옷은 왜 챙기는 걸까. 어딜 가시려고. 설마 내가 흑심을 숨기고 그런 짓을 저질러서…… 이대로 집을 나가려고 하시는 걸까?
아벨라는 정말 이대로 집을 떠나겠다는 듯 짐을 하나둘 챙기고 있었다. 덕분에 칼라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어, 어머니……!”
“응?”
그가 다급히 아벨라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당황을 지우지 못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어, 어디…… 저 두고 어딜 가시는 거예요?”
사납게 생긴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칼라일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울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그러고는 아벨라를 향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지 마세요, 저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역시 화가 난 게 틀림없다. 너무 화가 나서 더 이상 저와 대화할 가치도 없다 느껴져서, 이렇게 말을 끝내고 집을 벗어나려는 게 틀림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상황이 납득갔다. 칼라일은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절박하게 아벨라를 붙잡아 제 품에 안으려 들었다.
‘이렇게 날 떠나신다고? 정말? 물론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어요, 어머니……. 흑, 제가 잘못했어요. 저만 두고 가지 말아요. 두 번 다시 안 그럴게요. 앞으로는 절대…… 절대 안 그럴게요. 제발 엄마, 저 버리지 마세요. 흑, 아, 앞으로는…… 앞으로는 제가 말 잘 들을게요.”
아이처럼 보이기 싫어서 그리고 동정심을 사려는 과거와 다르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그는 두 번 다시 아벨라 앞에서 눈물 따위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아벨라가 절 두고 떠나려 하니 그런 다짐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다짐이고 뭐고 미련 없이 짐을 챙기는 그녀의 행동에 제 세상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는 기분이었다.
“제발요, 제발요…… 엄마, 저만 두고 어딜 가시려고요. 네? 가지 말아요. 제발…….”
이렇게 아벨라를 붙잡고 우는 와중에도, 칼라일은 만약 그녀가 정말 저를 두고 가려 한다면 배때기에 칼이라도 쑤셔 넣어서 다시금 어린아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려진 몸으로 다시 한번 그녀에게 동정표를 사서 곁에 남고 싶었다.
물론 이게 올바른 애정 구걸 방식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아벨라의 곁에 남을 수 있다면 그는 열 번도 더 스스로의 몸에 서슬 퍼런 칼날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칼라일은 결국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한참이나 훌쩍였다. 덕분에 짐을 싸던 아벨라도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아가, 갑자기 왜 울고 그래!”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아벨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벨라는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그를 보며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쉬이, 괜찮아. 뚝 해, 뚝. 칼라일, 뚝.”
그녀가 칼라일의 눈가를 닦아 주며 저보다 한참 커다란 덩치의 그를 토닥였다. 칼라일은 달래지는 중에도 아벨라의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흑, 시, 싫어요……. 제가 어떻게 안 울어요. 어머니가 저만, 흑, 두고 떠나려 하시는데…….”
그 말에 아벨라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아니…… 떠난다니. 내가 어딜 떠난다고 그래.”
“하지만 지금, 흑 짐 챙기고 계시잖아요.”
“응? 아, 지금 내가 챙기고 있는 짐?”
“네……. 갑자기 짐은 왜 챙기시는 건데요. 화나신 거잖아요. 그래서 영영 절 두고 떠나시려고…… 흑.”
잠시 눈을 끔뻑이며 칼라일의 말을 이해한 아벨라는 참지 못하고 푸흐흐 웃음소리를 흘렸다. 서럽게 우는 그와 상반되는 표정이었다.
“바보야, 발정기라며!”
한참이나 웃은 아벨라가 눈물로 엉망이 된 그의 눈가를 닦아 주며 말했다.
“어디 밖에서 잘 곳도 없는 네가 나가는 것보다, 내가 에샤네 집으로 가는 게 나으니 오늘 밤만 에샤네 집에서 보내려 한 것뿐이야.”
“거, 거짓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정말인걸? 이거 봐, 나 잠옷밖에 안 챙겼어.”
아벨라가 짐가방을 보여 주며 어깨를 으쓱했다. 칼라일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못하는 눈이었다.
“부, 분명 화나셨을 텐데…… 흑.”
“아냐, 물론 괘씸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어.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확실히 다르기도 하고.”
그녀가 새카만 칼라일의 머리칼을 두어 번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흑발이 손 틈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게 퍽 기분 좋았다.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요…….”
칼라일이 그녀에게 더욱 몸을 치대며 속삭였다.
“가지 말아요…… 흑.”
“하지만 오늘 먼저 자리를 비우려고 한 건 칼라일 너인걸?”
“그, 그건 맞지만…….”
“아니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서 나한테 전처럼 그런 짓을 하고 싶은 거야?”
“네, 네에?”
“그날 밤처럼 발정기라는 핑계로 막 그렇게 굴려고 지금 못 가게 붙잡는 거야? 응?”
“저, 절대! 절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절대 아니에요. 하늘에 맹세코 절대 저는 그러려는 의도가…….”
순간 칼라일은 아벨라가 말한 그 날 밤이 떠올랐다. 좆을 쑤셔 박을 때마다 뜨겁게 조여 오던 속살과 축축하던 내벽. 그리고 달뜬 숨을 뱉던 아벨라의 상기된 얼굴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칼라일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칼라일은 아래가 묵직해지는 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