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 칼라일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상함을 느낀 아벨라는 더욱 집요하게 그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거짓말 마.”
“정말…… 아무것도…….”
그렇게 말하는 칼라일의 숨소리는 아까보다 더 거칠어져 있었다. 열기가 오른 탓에 뺨도 조금 발갛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그를 보던 아벨라는 다른 쪽으로 오해한 건지 걱정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아가, 혹시 아프니?”
“네? 아, 아니에요! 절대 아프거나 그런 건…….”
“하지만 얼굴이 붉어. 숨소리도 안 좋고…… 아무래도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작은 손이 불시에 칼라일의 이마를 짚었다. 당황한 그는 몸을 바짝 굳히고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머니 제발…….”
“아픈 곳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해야지. 왜 숨기려고 해.”
“아니에요, 정말 그런 게…….”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어.”
울고 싶었다. 제가 아픈 거라고 단단히 오해한 아벨라 덕에 아까보다 더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는 칼라일의 손을 꼭 쥐고 놓을 생각을 않았다.
“정말 괜찮은데…….”
“아니, 전혀 안 괜찮아. 아까 보니 열이 꽤 높은 것 같더라.”
어떻게 아픈 걸 숨기려 했냐며, 속상함 섞인 잔소리도 따라왔다. 칼라일은 제 곁에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벨라를 보며 반쯤 체념해 버렸다.
‘그래, 뭣하면 옆집에 재워 달라고 하자.’
칼라일이 에샤와 레오의 오두막집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써는 그게 가장 명쾌한 해답법 같았다.
집에 돌아오기 무섭게 제게 줄 코코아를 준비하는 아벨라를 보며 칼라일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엄마, 그…… 있잖아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응? 뭔데?”
칼라일의 붉은 눈동자가 답지 않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는 한참이나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고민했다.
아벨라는 여유롭게 코코아를 준비하며 칼라일의 대답을 기다렸다. 계속해서 이어진 침묵에 왜 말이 없냐며 대답을 재촉하려는 찰나, 뜸만 들이던 칼라일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밖에서 자고 와도 될까요?”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아벨라는 순간 자신이 들은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바보처럼 되물었다.
“응?”
“그…… 오늘은 밖에서…… 자고 와도 되는지 여쭤 보려고 했어요……. 외박해야 할 것 같아서요.”
외박이라니! 아벨라는 느긋하게 코코아를 휘젓던 손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분홍빛 눈동자가 올곧게 저를 향하자, 부담스러웠는지 칼라일은 급히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외박이라니? 누가? 아가 네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지? 아니, 그나저나 칼라일이 밖에서 잘 곳은 있나? 아는 사람도 뭣도 없으면서 외박이라니?
“오늘…… 딱 하루만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밖에 잘 곳이 어디 있다고 나가서 잠을 자?”
“그, 그건…….”
예리한 질문에 칼라일은 고구마 먹은 강아지 신세가 됐다.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입술만 달싹이길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벨라가 틈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아가, 너 지금 몸 상태도 별로 안 좋잖아. 그런데 갑자기 난데없이 왜 밖에 나가서 잠을 잔다고 그러니? 응?”
“제, 제가 사정이 조금 있어서…….”
“무슨 대단한 사정이 있는 건데? 하나하나 빼먹지 말고 낱낱이 말해 봐. 어디 한번 들어는 볼게.”
아벨라의 목소리에 못마땅함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그녀는 제 기분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아까보다 더 뾰족해진 눈으로 칼라일을 응시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매서워진 눈의 아벨라에 칼라일은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작이 활활 타들어 가고 있는 오두막집 안은 무척이나 포근하고 따뜻했다. 안락한 공간이었지만, 지금 칼라일에겐 조금도 안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꼭 가시방석 같았다.
“그게…….”
“그게?”
머뭇대는 그를 보며 아벨라가 어서 말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칼라일은 애꿎은 제 손만 쥐락펴락하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거짓말로 당장 상황을 모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벨라에게 거짓을 고하는 말이 차마 뱉어지지 않았다.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맞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약 솔직하게 말했다가 어머니가 실망하시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발정 났다는 저를 천하의 쓰레기 보듯 보며 경멸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지은 죄가 있는 그는 도저히 발정기에 대해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가 들켜도 큰 문제야.’
분명 실망하실 거라고. 나에 대한 신뢰가 바닥날지도 몰라. 어떻게 다시금 쌓은 건데…….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에 놓인 그였다. 칼라일은 한참이나 고민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가며 고뇌하는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그렇게 꽤 긴 침묵이 흐르고, 칼라일은 드디어 뜻을 정한 건지 느리게 숨을 뱉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자.’
어느 쪽이든 어머니가 실망할 가능성이 있다면, 차라리 솔직하고 싶어.
칼라일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아벨라와 눈을 맞췄다. 한데 그런 스스로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올망졸망 이채가 도는 어여쁜 분홍빛 눈동자와 마주하니 겨우 다잡은 마음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사실을 털어놓으려던 그는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벙긋거렸다.
‘역시 그냥 다른 핑계 댈까……?’
아니야, 안 돼. 분명 들킬 거라고. 게다가 나는 더 이상 어머니께는 거짓말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아.
‘말씀드리자.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오늘 밤만 따로 떨어져 자면 돼.’
칼라일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으며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결연한 얼굴로 아벨라의 손을 맞잡고 입을 열었다.
“저 사실은…….”
사실은 발정기라는 게 있는데, 그게 지금 찾아온 거 같아요. 어머니께 폐를 끼칠 것 같으니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져요.
칼라일은 생각해 둔 말을 되짚으며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런데 긴장한 탓인지 혀가 꼬였다.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사실은…… 사실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고 천천히 하나하나 설명해 드리자.
쿵쿵, 널뛰는 심장을 달래려 하며 칼라일이 다시 한번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사실은 발정 났어요!”
한데 안타깝게도…… 긴장을 이기지 못한 몸이 생각해 두었던 말의 앞뒤를 모두 잘라먹고 뱉어 버렸다.
칼라일은 자신이 뱉고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숨을 헉 들이마시며 허겁지겁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말은 뱉어진 후였다.
말을 들은 아벨라의 표정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크게 뜨인 채 끔뻑끔뻑, 느리게 눈꺼풀을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그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 그게…….”
뒤늦게서야 해명을 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긴장한 탓인지 혀가 꼬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탓이었다.
완전히 망해 버린 상황에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길거리에 내앉아 대성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게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따금 불시에 오는 건데…… 어머니랑 저랑 그…… 그때 맺었던 각인 때문에…….”
칼라일은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아벨라는 차분하게 그의 말을 들어 주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하루 정도…… 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밤만 따로 자면…….”
“잠시만.”
가만히 칼라일의 말을 듣던 아벨라가 한쪽 손을 들며 말을 잘라 냈다.
“아가, 네 말은 대충 이해했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한 차례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발정기라는 거.”
하지만 칼라일은 알지 못했다.
“아가는 알고 있었어?”
“네? 알고 있다뇨? 어떤 거를요?”
“반려 사이에 발정기가 불시에 찾아온다는 거 말이야.”
지금 이 사태로 인해, 제게 얼마나 더 큰 눈덩이가 굴러오고 있는지. 순박한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네, 당연히 알고는 있었는데…….”
경험해 보는 건 저도 처음이에요. 말을 마치려던 칼라일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스쳤다.
‘잠시만, 이걸 말해 버리면…….’
뒤늦게 위험을 감지한 그가 급히 말을 바꾸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아벨라는 방금까지만 해도 동글동글 순하던 눈매를 날카롭게 세운 채, 매서운 눈으로 칼라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칼라일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알아차리고 몸을 굳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럼 아가는 각인 맺을 때, 언젠가 우리에게 발정기가 찾아올 걸 알면서 맺은 거였네? 나한테 아무런 설명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