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
안색이 어두워진 아벨라를 보며 칼라일이 다시 한번 그녀를 불러 보았다.
“아벨라? 표정이 안 좋아요.”
“취소.”
“네, 네?”
아벨라는 뜬금없이 칼라일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며 말했다.
“이름으로 부르라고 한 거 취소야.”
“가, 갑자기요?”
“기분 나빠. 꼭 동네 꼬맹이가 내 이름 멋대로 부르는 거 같아서 버릇없어 보여.”
“네에? 하지만 아벨라…… 아 아니, 엄마가 방금 이름으로 불러 보라고…….”
“그러니까 그거 취소한다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칼라일이 바보처럼 눈을 끔뻑였다.
“아직 이름으로 부르기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기분이야. 물론 머리는 다 컸다지만…… 그래도 조금 더 크면 그때 허락해 줄게.”
이래서야 꼭 선물을 줬다 뺏는 것 같았다. 칼라일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고 뺨을 부풀렸다.
그 모습이 꽤나 사랑스러워서 아벨라는 퉁퉁 부푼 칼라일의 뺨을 쿡쿡 찔렀다. 하지 말라는 듯 칼라일이 몸을 쭉 내뺐지만, 아벨라는 굴하지 않았다.
“찌, 찌르지 마세요…….”
“으음, 싫은데?”
“너무해…….”
“에이, 아무렴 칼라일 너만 하겠어?”
“그, 그건 그렇지만…….”
“푸흡…….”
몸이 어려져 그런지 눈물도 훨씬 쉽게 차올랐다. 칼라일은 눈가에서 느껴지는 찡한 열감을 느끼며 입을 빼죽거렸다.
실컷 칼라일을 놀리며 장난치던 아벨라는 뒤늦게 그를 달래 주었다. 늘 그렇듯 칼라일은 그녀의 다정한 손길 몇 번에 쉽게 풀어져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어느덧 뉘엿해진 해가 산 너머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아벨라는 슬슬 저녁거리를 준비하자며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라일 또한 그녀를 따라 쪼르르, 움직였다.
달그락달그락, 두 사람이 분주하게 저녁을 준비하는 소리와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기분 좋게 새 보금자리에 울려 퍼졌다.
서늘한 바깥 공기와 달리 포근한 두 사람의 하루가 그렇게 천천히 막을 내려 가고 있었다.
* * *
칼라일의 몸은 빠르게 성장했다. 아벨라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아무래도 그때만큼 큰 상처가 아니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칼라일은 어느새 그녀보다 훌쩍 자란 제 키를 보며 호기롭게 웃고 있었다.
“엄마, 저 키 많이 크지 않았어요?”
확실히 그 말엔 아벨라도 동의하는 바였다. 이젠 칼라일을 볼 때면 목이 빠져라 고개를 들어야만 했으니까.
“음, 크긴 컸는데……. 왜? 또 전처럼 나쁜 짓 하려고?”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농담이야.”
아벨라는 당황하여 허둥대는 칼라일을 장난스럽게 툭 치며 가게 일을 이어 나갔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내리는 눈의 양도 많아져서, 다른 계절보다 유독 분주했다.
아벨라는 가게 앞에 쌓인 눈들을 보며 빗자루를 쥐었다. 그러자 멀찍이서 약초를 정리하던 칼라일이 헐레벌떡 달려와 빗자루를 빼앗았다.
“어, 엄마!”
“응?”
“제가 할게요. 밖에 추워요. 안에서 재고 정리만 해 주세요.”
“아냐, 오늘 옷도 두껍게 입었는걸?”
“그, 그래도요…… 괜히 감기라도 걸리시면…….”
칼라일이 허둥거리자 아벨라가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이렇게 유난스럽게 구는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얄궂게 웃었다.
“내가 감기 걸려서 겨울 축제 못 갈까 봐 그러는구나?”
“아뇨! 절대 그런 건…….”
제 진심 어린 걱정이 고작 겨울 축제 때문으로 매도당하는 게 서러웠는지 칼라일은 입을 잔뜩 삐죽거렸다. 그럼에도 아벨라는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에이, 아니긴 뭘. 맞잖아.”
“아니에요! 정말…… 겨울 축제보다 어머니 몸이 걱정되는 거라고요.”
칼라일이 마치 반항기의 소년처럼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툴툴대다가도 아벨라가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언제 그랬냐는 듯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이런, 벌써 해가 졌네. 우리도 슬슬 정리하자.”
점점 깊은 겨울이 되면서, 해가 드는 시간도 짧아졌다. 자연스럽게 가게의 영업시간도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변방의 겨울은 타지보다 더 춥고 매서웠으며 길기도 무척 길었다.
원래 아벨라는 겨울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산에 있는 약초들은 모두 꽁꽁 얼어 버리지, 수입은 줄지, 춥기만 엄청 춥지. 게다가 장작값까지 생각하면 허리가 절로 휘는 기분이었다.
그녀에게 겨울은 춥고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었다.
그저 하루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원치 않는 손님 같은 존재.
“얼른 집 가서 엄마랑 코코아 마시고 싶어요.”
“신기해라, 아가는 육식이면서도 의외로 단 걸 좋아한단 말이지.”
“고기도 좋고 코코아도 좋아요.”
“흐음…… 그래?”
“아, 그, 물론…… 엄마가 제일 좋지만요.”
하지만 이번 겨울은 마냥 싫지 않았다. 칼라일과 처음 보내는 겨울이라 그런 건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다.
“아, 맞다. 그리고 제가 아까 장작도 엄청 많이 패 놨어요!”
칼라일은 털이 복슬복슬한 꼬리를 사방으로 흔들어 대며 아벨라에게 몸을 가까이 붙였다. 꼭 칭찬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 같았다.
“고생했어, 칼라일.”
코코아를 마실 생각에 들뜬 칼라일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아벨라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밖은 잠깐 나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빨개지고 뺨이 시릴 만큼 무척이나 추웠지만, 칼라일과 함께 나는 겨울은 이상하게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그렇게 평화로운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칼라일의 속은 전혀 평화롭지 못했다. 천진한 아벨라는 꿈에도 모를 이야기였다.
* * *
‘망했다.’
방금 전, 아벨라의 손길을 받자마자 칼라일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다.
코끝으로 밀려들어 온 어딘지 간질간질한 향기. 달콤한 것 같으면서도 아랫배가 절로 조여 드는 미묘한 그런 체향.
칼라일은 직감했다. 자신에게 발정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물론 처음 아벨라와 반려를 맺을 때, 발정기를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때의 칼라일은 오히려 발정기를 핑계 삼아 아벨라를 품에 안을 생각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그날 후로 어머니가 싫어하는 건 절대 안 한다고 약속했는데…….’
어떻게 용서받아 다시금 평화를 되찾았는데. 그날 밤과 같은 일이 다시 한번 일어난다? 칼라일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비슷한 일이 한 번이라도 더 일어나는 순간, 어쩌면 아벨라는 마음의 문을 영영 닫아 버릴지도 몰랐다. 해사하게 웃는 그 어여쁜 얼굴도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본디 발정기는 각인을 맺은 암컷과 수컷 양쪽 모두에게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아벨라의 체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저와 달리, 제가 가까이 다가가도 눈 하나 꿈쩍 않는 아벨라를 보니 그녀는 발정기에 대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설마 동족이 아니어서……?’
인간의 몸으로는 발정기를 느끼거나 맞을 수 없는 건가?
칼라일이 혼란스럽다는 듯 제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아벨라가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마다 풍기는 미묘한 살 내음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아벨라와 좀 떨어져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한데 갑자기 떨어져 지낼 수도 없고…….’
뭐라고 설명 드려야 하지? 발정기라고 해야 하나? 그럼 잠은? 엄마랑 한 침대에서 절대 못 잘 거 같은데……. 아니, 한 침대가 뭐야. 한집에 있는 것도 위험해.
‘그럼 발정기가 끝날 때까지는 밖에서 지내야 하나?’
그랬다간 발정기가 끝나기도 전에 내가 얼어 죽을지도 몰라…….
칼라일은 눈이 수북하게 쌓인 길거리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아벨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가, 왜 한숨을 쉬고 그래?”
단순한 물음에 불과한 그 말에도, 칼라일의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심장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발정은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위태로웠다.
“아가?”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아벨라가 칼라일의 앞으로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아.”
그는 난데없이 가까워진 아벨라의 얼굴에 놀라 그대로 얼어 버렸다. 숨을 쉴 때마다 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체향이 폐부 깊숙이까지 밀고 들어왔다.
결국 버티다 못한 칼라일이 티 나지 않게 뒷걸음질 쳤다. 거칠어지려는 숨을 고르며 인내심을 발휘하기 위해 마른 침을 느리게 삼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별 효과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