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
레오 덕분에 칼라일은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작은 아이의 몸으로 젖먹던 힘까지 쥐어짠 건지, 커다란 덩치의 칼라일을 용케도 데려 나왔다.
“레오! 괜찮아?”
“괜찮아요. 우선 칼부터…….”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에샤와 레오가 허둥지둥 의원을 부르고, 칼라일에게 물을 뿌렸다. 하지만 아벨라는 벙찐 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엉망이 된 몰골로 정신을 잃은 칼라일을 보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귓가에 울리는 시끄러운 인파 소리도 모두 웅웅대며 흐릿해지는 듯했다.
그가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집 안으로 몸을 내던진 이유.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칼라일에 대한 분노로 화가 목끝까지 차 있었는데…….’
어디 그뿐일까. 그동안 그와 보낸 시간들이 모두 거짓으로 부정당하는 기분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실망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
그런데 수많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져 나갔다.
고작 이런 것들로 그를 쉽게 용서한다는 게 아니었다.
다만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거짓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던 추억 속에서 나침반을 쥔 것뿐이었다.
칼라일은 칼라일이었다.
잘못된 그 행동들도 결국 제 관심과 사랑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가 됐든 제 손길 한 번, 따스한 눈길 한 번, 칭찬 어린 말 한마디 듣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던 야채를 우적우적 씹어 먹던 칼라일은 변하지 않았다.
어눌한 발음으로 방실방실 웃으며 안아 달라고 보채던 칼라일도, 훌쩍 자라 제 일이라면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서 도우려 하는 칼라일도.
어떤 모습의 칼라일이든 아벨라에게 칼라일이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 * *
“어마! 옆집에서 우유 가져와써요.”
칼라일이 유리병 안에 든 우유를 들고 달려오며 외쳤다. 짧은 다리가 분주하게 오도도 움직이는 게 퍽 귀여우면서도 불안했다. 아벨라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며 걱정 어린 말을 뱉었다.
다리도 불편하면서 절뚝절뚝 뛰는 게 영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칼라일은 속도를 죽이지 않고 내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아벨라의 곁으로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으이구, 좀 천천히 오래도.”
“헤헤, 하지만 빨리 엄마 옆으로 오고 싶었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칼라일이 머리 위로 비죽 솟아난 귀를 쫑긋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무언의 뜻이었다. 아벨라는 웃으며 기꺼이 새카만 머리칼을 살살 매만져 주었다.
그날 집이 모두 불타 없어진 탓에, 아벨라는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어야 했다.
새로 짓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지라, 결국 마을 중심부 쪽에 이미 지어져 있던 빈집을 새로운 거처로 삼았는데 어쩌다 보니 에샤의 집과 무척 가까웠다.
칼라일이 말한 옆집도 에샤의 집을 뜻했다.
다행히 손해 본 비용들은 현장에서 방화범으로 붙잡힌 에녹의 재산을 몰수해 보상받을 수 있었다.
이젠 꽤 추워진 날씨에 아벨라가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소파에 앉은 칼라일은 발장난을 치며 그녀의 팔에 어깨를 기댔다.
“아가.”
“네?”
“일전에 우리 같이 겨울 축제에 가기로 했던 거…… 기억나?”
겨울 축제가 언급되자 칼라일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작은 머리통을 빠르게 주억거리며 기억난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슬슬 겨울이니까…… 축제 때 같이 구경이라도 가면 어떨까 해서.”
“저는 다 좋아여. 엄마랑 같이 가는 거면 뭐든지요!”
포슬포슬한 꼬리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순식간에 늑대의 모습으로 변한 그는 아벨라의 무릎 위에 웅크려 안겼다.
작은 털뭉치가 된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는 보기 좋은 미소만 그릴 뿐이었다.
“아마 한두 달 정도 더 지나면 눈이 펑펑 올 거야. 그때 축제도 열리니까, 구경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하자.”
칼라일이 작게 짖으며 긍정의 뜻을 보였다. 비록 몸뚱이가 작아져 다시금 어린아이 꼴이 됐지만, 그럼에도 칼라일은 마냥 좋았다.
아벨라의 미소와 애정 담긴 손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부드럽게 그의 털을 쓰다듬던 아벨라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있잖아…….”
“아우?”
칼라일이 귀를 쫑긋 세우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새끼 늑대의 모습이어서 그런지 거칠게 아벨라를 겁탈할 때와 달리 무해하고 귀엽기만 한 모습이었다.
“전부터 궁금한 거였는데…….”
아벨라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머뭇거렸다.
“음…… 그게 그러니까…….”
칼라일은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천진해 보이는 얼굴로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성체가 되면…… 그때처럼 그런 거…… 또 할 거야?”
칼라일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다시 성체가 되면. 그때처럼. 그거.
‘그게 뭐지? 그때는 또 언제고…….’
멍하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는 뒤늦게서야 아벨라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우우…… 우!”
당황한 칼라일은 아벨라가 이해할 수 없는 짖음을 늘어놓으며 소파 위를 껑충껑충 뛰어다녔다. 그러다 구석에 얼굴을 처박고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욕정으로 번들거리던 발정 난 늑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의 아벨라 곁엔 복슬복슬 귀여운 늑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왜, 말 안 해 줄 거야?”
아벨라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의 등을 쿡쿡 찔렀다. 그러자 칼라일이 풀죽은 눈으로 힐긋 그녀를 돌아봤다.
“아우우…….”
꿍얼거리는 울음소리의 투정은 덤이었다.
마지못한 칼라일은 다시금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아벨라의 허리춤을 그러안으며 그녀에게 폭 안겨 들어 갔다.
“우리 아가는 왜 엄마가 물어본 건 안 알려 주고 애교만 부릴까.”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칼라일은 귀까지 빨개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꼬리만 좌우로 바삐 흔들었다.
“하, 하고는 싶은데…….”
“흐음, 그래?”
아벨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미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당황한 칼라일이 허둥대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엄마가 안 내키시면 절대 안 할 거예요!!!”
“정말?”
“네! 정말 정말 정말요! 정 불안하시면 자를 수도 있어요!”
“자르다니? 뭘?”
“……좆이요.”
킬킬대며 물었던 아벨라는 좆을 자른다는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거길 왜 잘라!”
“그, 그거야…… 엄마가 불안하실 수도 있으니까…….”
과격한 발언에 처음엔 당황했던 아벨라였지만, 우물쭈물 손을 꼼지락대는 칼라일을 보며 순간 장난기가 돌았다.
평소라면 그런 말 말라며 칼라일을 만류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하긴, 한 번 그런 짓을 했는데 두 번 안 한다는 보장은 없지.”
“죄, 죄송해요…….”
칼라일 또한 자신의 예상과 조금 다른 그녀의 반응을 보며 더욱 풀이 죽었다. 물론 거짓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 아벨라가 그때 일로 두려워하거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면 미련 없이 거세할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벨라의 행복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시무룩한 그를 보며 아벨라가 작게 키득거렸다.
“장난이었어. 물론 그때 생각만 하면 영 못마땅하긴 하지만, 자를 필요까진 없어.”
아벨라가 오동통하게 부푼 칼라일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음…… 그런데 있잖아, 칼라일.”
“네?”
“아벨라라고 불러 볼래?”
“네, 네에? 가, 갑자기요? 갑자기 왜…….”
난데없는 제안에 칼라일이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물론 아벨라 몰래 그녀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본 적이 몇 번 있긴 하다지만, 방금 이 제안은 당황스러웠다.
“제, 제가…… 제가 어떻게 엄마 이름을 그렇게…….”
“겁탈도 해 놓고 뭘 새삼.”
“그, 그건……! 제가 정말 죄송해요…….”
시무룩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아벨라가 자상히 말했다.
“어서 불러 봐. 칼라일, 너도 우리 관계에 변화를 주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하지만 그래도…….”
“칼라일, 어미를 보며 욕정하는 수컷은 없어. 아들한테 다리 벌리고 싶은 어미도 없고.”
그녀의 말을 들으며 칼라일은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다음에 또 그거…… 할 때도 엄마 아니면 어머니라고 부를 거야?”
“다, 다음에 또요?”
순간 칼라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다음에 또…… 짝짓기 하, 할 수 있는 거예요?”
“글쎄, 뭐 그건 봐야 알겠지.”
아벨라는 일부러 어깨를 들썩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신이 난 칼라일이 소파에서 방방 뛰며 외쳤다.
“아벨라! 헤헤, 좋아요. 그럼 앞으로 아벨라라고 부를게요!”
그런데 칼라일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정작 이름으로 불러 보라고 시켰던 아벨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