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65화 (66/82)

<065>

또렷하게 들려오는 아벨라 말을 들으며 칼라일이 그녀의 허리춤을 와락 그러안았다. 그러자 아벨라 또한 기꺼이 그런 그를 받아 주며 다정히 등을 토닥였다.

“바보…… 바보 멍청이.”

“죄송해요……. 정말, 정말 너무…… 너무 죄송해요, 어머니.”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칼라일이 아이처럼 훌쩍이며 아벨라의 가슴팍에 뺨을 비볐다. 평소라면 흑심 가득한 행동이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부드러운 손이 새카만 머리칼 틈을 파고들며 기분 좋게 쓰다듬어 주었다. 다른 한 손은 달래 주듯 등을 쓸어내리며 일정하게 토닥여 주기도 했다.

칼라일은 제 유일한 안식처나 다름없는 그녀의 따스한 품을 느끼며 다시는 이 손길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이렇게 된 김에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차근차근해 보자.”

“초심…… 이요?”

한참 그녀의 품에서 훌쩍이던 칼라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는 아벨라를 올려다보며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어머니가 왜 이렇게…… 나보다 위에 계신 거지?’

아무리 내가 안긴 거라지만…… 이렇게 키 차이가 난다고?

어리둥절해 있는 것도 잠시.

“어려진 김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보자는 뜻이었어.”

어려진 김에? 초심으로? 돌아가?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벙쪄 있던 칼라일이 놀라 제 손바닥을 확인했다.

“어, 어려져요……? 누가…….”

그렇게 허겁지겁 확인한 손은 제가 알던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아벨라의 얼굴을 모두 덮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랬던 손이 깡똥한 어린아이의 손으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당황한 칼라일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아벨라가 차분하게 그를 말리며 입을 열었다.

“레오한테 다 들었어. 어려지는 거, 보유하고 있던 힘을 모두 소진해 몸을 치유하느라 어려지는 거라면서?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지만, 그래도 꽤 많이 다쳤던 모양이야. 물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만큼 아주 어려지진 않았지만…….”

아벨라가 말끝을 흐리며 칼라일의 몸집을 확인했다.

“그래도 꽤 많이 어려졌어. 이러니 꼭 옛날 생각나고 좋다.”

그 말과 함께 푸흐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간이 같은 낯을 한 칼라일과 대조되는 표정이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렇게 크게 다친 곳도 없는데? 칼라일이 억울하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자 그의 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아벨라가 덧붙였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아마 그 시커먼 연기를 그대로 흡입한 네 속은 말이 아니었을 거야. 그러니 그렇게 이해 안 된다는 얼굴로 입 내밀지 마. 물론 보는 나야 귀엽지만…….”

아벨라가 쿡쿡대며 그의 뺨을 꼬집었다. 그랬다. 지금의 아벨라는 칼라일을 완전히 어린아이 대하듯 하고 있었다.

‘어쩐지 지난밤 일이 있었는데도 경계심이 모두 풀어졌더라니…….’

단순히 내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화마 속으로 뛰어들어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꼬맹이가 돼서 자연스럽게 경계심이 풀린 거였어?

‘자, 잠시만…… 그럼 다시 자랄 때까지 짝짓기는?’

아니 물론 어머니 의사도 들어 봐야 하지만……. 이런 몸으로는 짝짓기도 못 하는 거잖아!

칼라일은 속으로 절규하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이 와중에 짝짓기 걱정을 하고 있는 제가 너무 한심스러웠다.

아벨라는 망연자실한 그를 보며, 즐겁다는 듯 미소를 그릴 뿐이었다.

소란스러웠지만 여느 때처럼 다시금 평화로워진 두 사람이었다.

한참 혼란스러워하던 칼라일이 힐긋, 아벨라를 살폈다. 해사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낯을 보니 속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제게만 지어 주는 저 애정 가득한 웃음이 좋았다.

초승달처럼 환히 접히는 눈매도, 보기 좋게 올라간 입꼬리도, 복숭아처럼 물든 뺨도.

칼라일은 저 미소를 평생 지켜 주고 싶었다. 만약 제 욕정이 그녀의 미소를 앗아 가게 된다면, 차라리 좆을 자르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순간 충동적으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칼라일은 흠칫했다. 그러다 다시 한번 아벨라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봤다.

그러다 오늘 아침 그녀가 제게 보였던 싸늘한 표정도 함께 떠올랐다.

상반된 두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자 이로써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욕정에 눈이 멀어 웃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칼라일에게 가장 소중한 건 아벨라의 행복이었으니까.

* * *

그날 아침. 화재가 생기기 전, 아벨라는 칼라일이 잠시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찾아온 에샤 때문에 기분이 완전 푹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몸까지 뻐근했는데, 칼라일에게 폭언을 하던 에샤가 찾아오니 영 떨떠름했다.

‘칼라일에게 폭언을 할 땐 언제고…….’

아니지, 에샤의 말대로 칼라일은 날 진짜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어. 그럼 에샤가 맞았던 걸까?

아벨라는 혼란을 지우지 못하고 에샤를 흘겼다. 단호하던 그 날과 달리 어딘지 갈등하는 듯한 아벨라를 보며 에샤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아벨라.”

“…….”

“잘 지냈어?”

“여긴 왜 온 거야, 갑자기.”

“사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고 싶었어.”

사과? 사과는 그렇다 쳐도 고맙다는 말은 뭐지? 아벨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에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실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가히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하나는 오밤중에 에샤를 겁탈하려던 에녹을 무찔러 준 칼라일에 대한 감사 인사와 사과였고, 다른 하나는 칼라일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 그렇게 모질게 말해서 미안해. 나는…… 그때 당시에 칼라일이 동족들을 몰살했다는 레오의 말만 듣고 위험한 자라 생각했어. 그런 자가 네 곁에 있는 게 불안해서 그만…….”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던 아벨라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동족들을 몰살했다고? 칼라일이?’

분명 나와 처음 마주쳤을 땐 아주 작은 아기에 불과했는데……. 그런 아기가 종족 하나를 몰살시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아벨라는 의아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레오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어. 칼라일…… 그 애가 무리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자랐는지, 전부.”

칼라일이 괴롭힘을 당했다는 건, 아벨라도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 저를 만났을 때, 다리 병신이라든가 식충이 따위의 말로 스스로를 폄하하던 칼라일은 다시금 돌이켜 봐도 속이 절로 상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흐릿하게 괴롭힘을 당했구나, 생각하는 것과 아주 상세하게 그가 어떤 괴롭힘을 당해 왔는지 듣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에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모두 들은 아벨라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 전부 사실이야?”

물론 지난밤 저를 겁탈한 칼라일이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간 칼라일과의 정을 한 번에 끊고 외면할 수 있을 만큼 아벨라는 모질지 못했다.

“……레오의 말에 따르면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야.”

“하.”

“미안해 아벨라,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고 칼라일을 오해했어. 그 아이가 돌아온다면…… 그때 만나서 다시 한번 사과와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그래도 될까……?”

아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모두 듣고 보니, 에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칼라일이 동족들을 몰살시킨 이유를 몰랐으니까…….’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아벨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런데 밖에서 웬 탄 냄새가 밀려들어 왔다.

집 안에 있던 에샤와 아벨라 모두 이상한 냄새를 감지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오두막집에 불을 붙이고 있는 에녹이 눈에 담겼다.

“이, 이게 무슨!!!”

순식간에 번진 불길과 불이 났다는 에샤의 우렁찬 목소리 덕에 근처에 있던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아벨라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누군가는 에녹을 제압하는 데 힘썼고, 누군가는 양동이를 들고 물을 퍼 나르며 불을 끄는 데 힘썼다.

그렇게 이게 대체 무슨 날벼락인지 상황 파악을 할 때쯤, 일은 터졌다.

어디선가 나타난 칼라일이 말릴 새도 없이 제 이름을 부르며 불길 속에 휩싸인 집으로 뛰어든 것이었다.

아벨라는 순간 멍청한 얼굴로 이게 무슨 일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은 짧았다. 칼라일이 화마에 잡아먹히고 있었으니까.

“칼라일!!! 어서 나와, 나 여기 있어!!! 집 안에 없다고!!!”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아벨라가 있는 힘껏 오두막집을 향해 소리쳤으나, 들리지 않는 건지 칼라일은 집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와!!! 나오라고!!! 칼라일!!! 어서 나와!!!”

어떡하지? 안 들리나 봐. 불길이 이렇게 세니……. 그래, 들릴 리가 없지. 하지만 이대로면…….

아벨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근처에 있던 물통 하나를 들고 제 머리 위로 흩뿌렸다. 그러고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달려들어 가려 했다.

한데 그녀보다 더 빠른 사람, 아니 더 빠른 짐승이 있었다. 레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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