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64화 (65/82)

<064>

칼라일은 얼빠진 낯으로 제 품에 안겨 엉엉 우는 아벨라를 토닥였다. 그리고 눈으로는 분주하게 방 안을 살폈다.

아벨라의 오두막집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작고 아늑한 침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아벨라와…… 에샤? 레오?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친 칼라일은 곧장 표정이 썩어 들어 갔다.

“당신들이 여기엔 왜…….”

“왜라니, 우리 집이니까.”

칼라일이 묻기 무섭게 에샤가 대답했다. 에샤는 묘하게 퉁명스러운 얼굴로 칼라일에게 물을 건넸다.

“우선 물이나 좀 마셔. 이 미련한 늑대야.”

아벨라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칼라일의 등과 가슴팍만 번갈아 가며 퍽퍽 내리치고 있었다.

“바보야, 바보야……. 흑, 흐윽, 거길 들어가면 어떡해.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멍청이도 아니고 흑…….”

에샤가 건넨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난 칼라일은 그제야 조금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곳은 에샤의 오두막집이고, 아벨라의 집이 불탄 건 꿈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벨라는 무사하고…….

“하아…….”

그래, 아벨라는 무사했다. 칼라일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다시 한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다치신 곳은 없는 거죠?”

칼라일이 엉망으로 젖어 든 아벨라의 뺨을 닦아 주며 그녀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러자 아벨라가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잘근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흑, 내가 왜 다쳐, 나는 집 밖에, 흑, 있었는데…….”

집 밖에 계셨다고……? 그제야 칼라일은 집 안을 쥐잡듯 뒤져도 느껴지지 않던 아벨라의 기척에 대한 해답을 내렸다.

‘애당초 밖에 계셨던 거구나.’

칼라일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 마른세수하며 한숨만 내쉬고 또 내쉬었다.

치솟는 불길을 본 순간, 아벨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타들어 가는 집 안에서 아벨라가 홀로 겁에 질려 떨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미련하게도 몸부터 내던지고 말았다.

‘그런데 불은 갑자기 왜 난 건지?’

그런 의문이 들기 무섭게 에샤가 입을 열었다.

“에녹 그 개자식이 너에 대한 복수심으로 화재를 일으켰나 봐.”

그녀 입에서 언급된 에녹의 이름에 칼라일이 본능적으로 욕을 지껄였다.

“다행히 아벨라는 밖에 있어서 무사했는데……. 너가 집 안으로 뛰어들어서 그렇게 된 거지 뭐.”

칼라일은 아직도 훌쩍이는 아벨라를 달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지금 그놈은 어디에…….”

“치안대에 바로 잡혀갔어. 접경 지역으로 추방될 거래.”

그 말에 칼라일이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의 속을 알아차린 레오가 귀신같이 말을 얹었다.

“칼, 너 지금 네 손으로 그놈 죽이지 못해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정곡을 찔린 칼라일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레오를 흘겼다.

“네 마음은 알지만 이곳은 야생이 아니야. 인간들 틈에 섞여 살 생각이라면, 그들이 만든 규칙을 따라야 해.”

칼라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궜다. 레오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는 되지만 받아들이기엔 에녹이 저지른 일들이 너무 컸다.

“흑,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 무사해서.”

오랜 시간 훌쩍이던 아벨라가 눈가에 물기를 닦아 내며 말했다.

“정말…… 정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걱정 가득한 그녀의 질책을 들으며 칼라일은 저도 모르게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아벨라의 걱정이었다. 칼라일은 애정이 듬뿍 담긴 그녀의 쓴소리를 들으며 잔웃음을 흘렸다.

“……죄송해요.”

“뭐가, 흑, 뭐가 죄송한 줄은 알고?”

“……전부 다요.”

괘씸하다는 듯 볼을 꼬집는 그녀의 손을 느끼며 칼라일이 고개를 떨궜다.

“전부…… 죄송해요.”

진심이었다. 단순히 지난밤의 일뿐만 아니라 첫 단추를 잘못 꿴 것까지 전부.

“제가 미숙해서…… 그래서 첫 시작을 잘못했어요.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시작했으면 안 됐는데…….”

두리뭉실한 말에도 속뜻을 알아챈 아벨라였다. 칼라일은 면목 없다는 듯 애꿎은 이불만 쥐락펴락하며 아벨라의 눈치를 살폈다.

“죄송해요…….”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칼라일을 보며, 레오와 에샤가 기척을 죽이고 아주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두 사람이 비켜 준 침실에는 칼라일과 아벨라 단둘만 남게 되었다.

칼라일이 아벨라의 손을 맞잡고 나긋하게 말했다.

“물론 처음부터 불순한 마음을 품은 건 맞았지만…… 가족처럼 아들 노릇을 한 게 거짓된 행동은 아니었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크게 상심하여 그를 외면하던 아벨라는 어쩐 일인지 맞잡은 손을 더욱 세게 쥐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정말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둘 다 원했어요.”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보니 속이 시원한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맞았다. 칼라일은 둘 다를 원했다.

친어미에게 단 한 번도 받지 못했던 모성애. 그리고 반려와 함께 나누는 신뢰와 사랑.

애정이 무엇인 줄도 모르고 살던 그에게 마치 진짜 어미라도 된 것처럼 따스한 애정을 가득 들이부어 준 게 아벨라였다.

난생처음 받아본 그 애정은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다디달아서, 칼라일은 차마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

사랑받고 싶었다. 그에게 하나뿐인 아들인 것처럼 걱정 어린 잔소리와 애정 어린 손길을 받으면서도 그것만으로는 제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서, 아벨라의 옆자리까지 넘봤다.

칼라일의 말을 들은 아벨라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녀의 눈에는 씁쓸함과 동정심이 섞여 들어 갔다.

칼라일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제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마음 약한 아벨라는 언제나처럼 다시금 저를 품어 줄 것이라는 걸.

하지만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주시는 따스한 그 애정이 좋았어요. 그런데 욕심이 많아서, 그 애정을 먹어도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아서 만족하지 못했어요.”

“……칼라일.”

“꼭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점점 더 큰 애정을 원했어요. 아들이자 반려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어머니의 옆이라면 닥치는 대로 전부 제가 다 갖고 싶었어요.”

칼라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덧붙였다.

“……죄송해요. 이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벨라 또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분홍빛 머리칼이 어깨를 타고 사르륵 흘러내렸다. 칼라일은 습관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정돈했다. 그러다 혹 오늘 아침처럼 싸늘하게 제 손을 쳐내는 건 아닌가 싶어 흠칫 몸이 떨렸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 제가 건강해져서, 더 이상 어머니께 사랑받지 못할까 봐……. 지금 저를 향하던 애정과 관심이 다른 이에게 향할까 봐 불안했어요.”

이렇게 하나하나 말을 뱉고 보니 칼라일은 스스로가 무척 추하게 느껴졌다. 이전에는 애정에 눈이 멀어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칼라일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어색하게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저 당장 어머니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법에 급급해 눈이 멀었어요.”

이상하게 한 자 한 자 말을 토해 내며 칼라일은 어딘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울면 안 되는데……. 물론 거짓된 눈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다시금 눈물로 아벨라의 동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입 안 여린 살을 세게 씹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 알싸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는 힘을 죽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뺨에 부드러운 손이 맞닿았다. 칼라일이 살며시 고개를 들자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맞아, 칼라일. 이건 네가 전적으로 잘못한 거야.”

“네…… 맞아요. 면목 없어요.”

“나는 널 정말 아껴. 아낄 뿐만 아니라 믿고 신뢰하며 사랑해.”

아벨라의 입에서 들려오는 사랑을 들으며 칼라일이 쓰게 웃었다.

아마 그녀의 감정들은 모두 과거형이리라. 견고한 탑처럼 쌓였던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져 산산조각 났을 것이며, 아들로나마 무한하게 받을 수 있던 그녀의 애정 또한 유한한 우물이 되어 언젠가는 메마를 게 분명했다. 어쩌면 이미 바닥을 내보이고 있을지도 몰랐고.

침실에는 어딘지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아벨라는 무슨 말을 고르는 건지,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네가…….”

그리고 꽤 오랜 고민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런 미운 짓을 해도 차마 내칠 수 없을 만큼…… 너를 아껴.”

아벨라가 말을 끝맺은 순간, 칼라일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제가 들은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네?”

그는 바보처럼 되묻기까지 했다.

“아가 너는 내게 아직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