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
칼라일은 말없이 동의했다. 어쩌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았다. 굳이 쓸데없이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눌 필요 없이, 레오의 숨통을 끊어 버리는 쪽이 뒤탈 없고 편한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답지 않게 이러는 건 옛정인 걸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칼라일은 스스로를 향해 조소했다.
‘옛정은 무슨.’
남아 있을 정이 뭐가 있다고…….
“내가 너를 해하려고 했었다는 거. 좀 더 정확히 말해 줄 수 있을까?”
“…….”
“칼,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맹세코 단 한순간도 너를 해하려 한 적이 없어. 물론 네가 괴롭힘당하는 것까지 나서서 막아 주지는 못했지만…….”
울크 신께 맹세를 올리고도 멀쩡하다는 건, 레오가 순혈이 아니거나 혹은 그의 말이 진실이거나. 둘 중 하나의 경우밖에 없었다.
전자일 일은 없었으니, 답은 후자였다.
여태 침묵으로 일관하던 칼라일이 한숨을 뱉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야. 평소처럼 형이 가져다준 사냥감에 독초가 섞여 있었어. 난 의심 없이 먹었다가 죽을 뻔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날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는데……. 왜인지 오늘은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말을 뱉으면서도 건조한 기분이었다.
칼라일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까지 가 보니 억울하더라.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줄 알았으면, 다리 병신이라고 조롱하던 그 새끼들 한 놈이라도 죽여 볼걸. 낳아 놓고 제 성에 차지 않는다고 아들 취급도 안 하던 그 여자 목 한 번이라도 물어뜯어 볼걸.”
당장 지금만 해도 칼라일은 다리 한 쪽이 불편해 정자세로 서 있지 못했다. 그가 비스듬히 서 있는 이유를 아는 레오는 말없이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그래서 그랬어. 순혈만 사용할 수 있다던 울크 신의 힘. 죽을 생각으로 빌려 왔거든. 다리 병신이긴 해도 꼴에 순혈은 순혈이라고 그 힘이 써지긴 하더라.”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멀쩡해졌던 다리. 그리고 동족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때마다 괴물처럼 솟구치던 턱의 악력.
골이 울릴 정도로 짙었던 피비린내 속에서 칼라일은 묘한 희열을 느꼈었다. 대가가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힘을 사용하길 잘했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으니까.
“그게 다야.”
그렇게 서서히 힘이 사라지고, 넘쳐흐르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육체는 점점 작아져 갓 태어난 새끼 늑대의 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작아진 몸은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망가져 갔다. 전신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어서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눈앞에 나타난 게 아벨라였다.
처음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했다. 얼른 죽게 내버려나 두지, 인간 주제에 저를 갓난아기 취급하며 약초를 발라 주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이 상처가 무슨 상처인 줄 알고, 고작 산속에서 따온 약초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며 모든 걸 포기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니…….
-아가야, 꼭 나아야 해.
저도 포기한 제 목숨을 자꾸만 연명시키며 살리려는 게 우스우면서도 거슬렸다.
-엄마가 열심히 간호해 줄게. 그러니 어서 나아야 해. 알았지?
그러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말을 들으며, 칼라일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엄마. 분명 그에게도 낳아 준 어미는 존재했다. 하지만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어미에게 절름발이 새끼의 존재는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따뜻한 모유라든가 애정 어린 시선 따위는 한순간도 칼라일의 것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들려온 한숨 소리와 경멸 어린 시선만이 그림자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차갑던 세상에서 아벨라는 유일한 빛이었고 안식처였다.
칼라일과 레오 사이엔 꽤 긴 정적이 맴돌았다. 레오는 할 말을 고르는 건지 오랫동안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기만 했다.
“……칼, 네가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 침묵을 깨고 레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절대 독초를 섞은 적 없어. 게다가 약초 쪽으로는 아는 지식이 없으니 섞으려 해도 무얼 섞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가만히 그 말을 듣는 칼라일은 허망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울크 신에게 맹세한 순간부터, 그날 일은 레오가 한 짓이 아니라는 걸.
그럼 내가 겪었던 그 고통은 어디에서 보상받아야 하는 걸까.
칼라일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씁쓸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어딘지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부주의했던 탓도 있다고 봐.”
레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칼라일 앞에 무릎 꿇었다.
“……미안해, 칼. 네가 괴롭힘당하던 걸 방관해 와서, 정말…… 미안해.”
칼라일은 보기 불편했는지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딴 사과 필요 없으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나 말해.”
“아…… 그건.”
“왜, 말 못 할 비밀이라도 있나?”
레오가 당황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분주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어딘지 수상쩍은 행동에 칼라일이 미간을 좁히며 추궁했다.
“말하는 게 좋을 거야. 형이 무고하다고 해서 호락호락하게 살려 둘 생각은 없으니까.”
레오는 아까보다 더 뜸을 들였다.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시선을 힘없이 땅으로 떨궜다.
“어머……니가…….”
그렇게 한참을 머뭇거리기만 하던 레오가 꽤 오랜 정적 끝에 입을 열었다.
“어머니?”
칼라일이 되묻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께서…… 아마 본인을 대가로 나를 살려 주신 것 같아. 나도 정확하게는 몰라. 마지막 순간에 보였던 장면들로 그렇게 추정할 뿐이야. 또 어려지는 건…… 너도 알겠지만 생명이 위험해질 때 발동되는 순혈 특유의 능력이고…….”
그 말에 칼라일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쩐지 그 여자치고 쉽게 숨통이 끊긴다 싶었다. 제가 아무리 울크 신의 힘을 빌렸다 한들, 우두머리는 우두머리였다.
당시에는 사방에 튀긴 피와 낭자한 비명들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지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다른 늑대들보다 허무하게 숨이 끊겼었다.
그 여자가 제 생명력을 깎아 가며 살린 레오를 보고 있자니 어딘지 기분이 더러워졌다. 제게는 한 번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준 적 없으면서, 레오는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귀한 아들이었던 걸까.
같은 그녀의 자식인 처지였음에도 칼라일은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한 희생이 무의미하게 레오를 죽여 버리고 싶기도 했다.
이러다간 정말 레오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물어뜯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얘기는 끝났군.”
칼라일은 레오를 등지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여기서 끝내는 게 내 마지막 정이야. 기분 더러우니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
“칼…….”
그러자 레오가 다시 한번 그를 붙잡았다. 칼라일은 적의로 가득 찬 눈을 숨기지 않고 매섭게 그를 응시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가 그 여자를 증오한다는 건 형도 알고 있잖아.”
칼라일이 잔웃음을 흘리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나는 단지 진실이 궁금했을 뿐이야.”
“……미안해.”
들릴 듯 말 듯 힘없는 레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칼라일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뗐다. 수많은 감정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결코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칼라일은 애써 스스로를 달래며 저를 향해 환히 웃어 주던 아벨라를 떠올리려 노력했다.
-엄마한테는 칼라일 너밖에 없어. 네가 내 유일한 가족이야.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도 엄마만 있으면 돼.
그렇게 칼라일은 언젠가 아벨라가 제게 해 주었던 말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어떻게…… 어떻게 칼라일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러다 불현듯 실망감이 짙게 드리운 아벨라의 말이 떠올랐으나, 억지로 지워 냈다. 지워 내고 또 지워 내고. 그 여자와 비슷한 눈을 했던 싸늘한 아벨라의 표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도 칼라일은 계속해서 지워 냈다. 그리고 해사하게 웃어 주던 과거의 아벨라만 기억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런 칼라일의 마음 한구석엔 꽤 큰 불안감이 싹트고 있었다.
‘다시 예전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이대로라면 어떻게 될지, 칼라일은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 답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우리는 각인을 맺었으니까. 그러니까 엄마는 싫든 좋든 나와 평생 함께해야 해.
그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며 칼라일이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 아벨라가 다시금 제게 마음을 열어 줄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동정심에 약한 편이니, 불쌍한 시늉을 하면 금세 다시 저를 품어 줄 것이다
‘우선 돌아가서 엄마랑 시간을 좀 더 보내자. 그럼 될 거야.’
그렇게 다시금 아벨라가 기다리고 있을 오두막집으로 향하는 길. 칼라일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연기……?’
아벨라의 오두막집이 있는 곳에서 거무튀튀한 연기가 하늘을 향해 솟구치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