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61화 (62/82)

<061>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아벨라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칼라일은 태연하게 눈을 끔뻑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네?”

“지금 뭐 하자는 거냐고 물었어.”

어젯밤 저를 그렇게 범해 놓고, 어떻게 이렇게 눈 하나 꿈쩍 않고 없던 일인 양 굴 수 있는 걸까. 경악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라일은 아벨라가 차를 마시는 게 더 중요한 건지 눈치 없이 찻잔을 들이밀었다. 아벨라는 매섭게 그의 손을 쳐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아벨라와 칼라일 사이로 울려 퍼졌다.

“아…….”

아벨라가 이렇게까지 저를 밀어낼 줄 몰랐는지, 칼라일의 낯에 당황과 놀람이 섞였다. 어색하게 허공을 떠도는 제 손을 거두며, 칼라일은 늘 그렇듯 상처받은 눈을 했다. 가증스러운 모습에 아벨라는 말문이 막혔다.

“그…… 죄송해요.”

칼라일은 쌀쌀맞아진 아벨라를 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아프셨어요?”

기죽은 목소리로 묻는 게 평소의 칼라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벨라는 마치 자신만 유난스러워진 기분에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벨라가 배신감이 짙게 드리운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어떻게…… 어떻게 칼라일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목소리 끝은 파리하게 떨렸다.

믿었는데, 정말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칼라일은 그동안 나를 무어라 생각해 왔으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걸까.

지난밤 낯선 쾌락에 휩쓸려 저까지 이상해져 버린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래선 안 되는 거였다. 애당초 칼라일이 제게 손을 대지만 않았더라도, 자신이 그렇게 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아벨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경계심을 잔뜩 곧추세우고 묻는 아벨라를 보며 칼라일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는 어머니는요?”

“……뭐?”

“애당초 어머니가 그런 말씀만 않으셨어도…… 저는 얌전히 착하고 순한 아들인 척, 그렇게 지냈을 거예요.”

“그럼 내게 보였던 모습들이 전부 가짜라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냥 항상 이러고 싶었어요.”

칼라일은 이불을 세게 움켜쥔 아벨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었다. 그러고는 자상하게 깍지 끼워 맞잡기까지 했다.

“늘 말했잖아요. 제게는 어머니밖에 없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내겐 칼라일 너뿐이었다고! 하지만 이런 뜻이 아니었어. 어떻게…… 어떻게 칼라일 네가 이럴 수 있냔 말이야!”

아벨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울먹였다. 수많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고작 제 손바닥만 한 작은 새끼였던 그가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왜요, 저 같은 다리 병신이랑은 짝짓기도 하기 싫어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

칼라일 또한 알고 있었다. 그는 알면서도 일부러 아벨라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뾰족 솟아난 귀를 힘없이 늘어뜨리고 음울한 낯을 했다.

“처음부터 어머니가 제 세상의 전부였어요.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욕망이에요. 물론 어머니는 저 같은 거랑 하고 싶지 않으셨겠지만…….”

“그건 네가 못나서가 아니라, 나는 애당초 너를 가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랬던 거야.”

아벨라는 배신감을 지우지 못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평소라면 신경 쓰였을 법한 시무룩한 얼굴의 칼라일도, 이제는 마냥 밉게만 느껴졌다.

“정말 너무 실망스럽고 당황스러워. 아직도 믿기지 않고……. 정말 충격적이야.”

아벨라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제 속을 털어놓으며,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를 등져 누우려 했다. 하지만 칼라일이 더 빨랐다.

“약속하셨었잖아요. 제가 아주 나쁜 늑대여도 미워하지 않기로. 평생 단둘이 함께하기로.”

칼라일은 저를 등지려는 아벨라의 몸을 붙잡고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 어머니께서 약조하셨던 내용이잖아요.”

그 말을 듣자 아벨라의 머릿속으로 잊고 있던 과거의 파편이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정말로 저 안 미워할 거죠?

-물론이지.

-막, 막…… 만약에 이짜나요.

-만약에?

-만약…… 제가 막, 아주 나쁜 늑대면…… 그래도 안 미워할 거예여?

그래 분명 그런 약조를 한 적이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 같은 상황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때인데…….

아벨라는 그 작았던 칼라일과 한 약속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 몰랐다는 듯 더욱 실망한 눈을 했다.

“이러려고 그랬던 거였니?”

아벨라가 힘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처음부터 이러려는 속셈으로…… 그랬던 거였어?”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칼라일이 제게 보였던 대부분의 행동이 모두 납득 가능했다. 최근 각인을 맺자며 조르던 것까지 전부.

“네, 저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해사하게 웃으며 긍정하는 그를 본 아벨라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뱉을 수 없었다.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사과를 기대한 것까진 아니었으나, 이런 식으로 당당하게 수긍하는 모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아벨라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칼라일이 제가 알던 그 칼라일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

그래,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 편했다.

천진하게 웃으며 제 품에 안겨 고롱고롱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던 그 작은 털뭉치가, 처음부터 저를 두고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걸 차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거짓말이라고 믿는 쪽이 편했다.

‘차라리 아는 이성이 나밖에 없어서……. 그래서 그런 잘못된 욕구가 생긴 거라면 몰라.’

그런데 처음 날 본 순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생각을 이어 나가던 아벨라는 힘없이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그녀는 소리 죽여 눈물을 훌쩍이며 칼라일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혼자…… 있고 싶어.”

그는 의외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었다.

“푹 쉬세요. 가게는 제가 나가서 휴일 팻말 걸어 둘게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도저히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벨라는 칼라일이 싫은 게 아니었다.

그는 인파 속에 섞여 있어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수려한 외모를 갖고 있었고, 굉장히 자상하기까지 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칼라일이 성인이었을 때 마주했다면, 아벨라 또한 그에게 첫눈에 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현실은 시작점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벨라에게 칼라일은 제 손으로 곱게 키운 아들이었다.

새카만 털을 이리저리 흩날리며 오두막집을 우당탕 뛰어다니던 짤막한 팔다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이따금 설익은 산딸기를 먹고 시다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혀를 내밀던 칼라일도, 혹여 제게 미움받을까 전전긍긍하던 칼라일도, 모두 엊그제 일 같았다.

말조차 제대로 못하던 그를 데려와 친아들처럼 여기며 키웠는데…….

역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만 상했다. 가슴께가 지끈거리고 절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벨라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는 울음을 삼켰다.

* * *

아벨라의 작은 약초 가게 앞에 선 칼라일은 문고리에 ‘오늘 하루 쉽니다.’라는 팻말을 걸었다. 아벨라의 몸 상태로 보았을 때 오늘은 푹 쉬게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칼.”

그렇게 팻말을 걸고 돌아가려는데,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얘기 좀 하자.”

레오였다.

며칠 사이 훌쩍 자란 모습이 낯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발음조차 다 뭉그러진 아이의 모습이더니, 이제는 조금 자라 혼자 밖을 돌아다니는 데 문제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칼라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그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그날 레오가 보였던 반응을 곱씹으며 칼라일이 미간을 좁혔다.

-죽이려 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서 어때? 다리 병신 하나 제대로 못 죽인 소감이.

-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는 나보다 형이 더 잘 알겠지.

-나는 정말 조금도…….

한낮임에도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향한 칼라일은 무심한 눈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저보다 한참 작은 체구의 레오는 형이라 부르기에 어딘지 이질감이 들었다.

“칼…… 우선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

레오가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어색하게 운을 띄웠다. 칼라일은 별 대답 없이 비스듬히 선 채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에샤도……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칼라일은 본론이나 말하라는 듯 작게 혀를 찼다. 그러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레오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그날…… 네 입에서 나온 말이 조금 이상해서. 그래서 다시 한번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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