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52화 (53/82)

<052>

무리를 풍요롭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순혈 암컷만이 우두머리로 있어야 한다. 순혈 늑대에게서 더 이상 암컷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멸족의 증거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신화 같은 고전 이야기였다. 동족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

여기서 뜻하는 순혈 암컷은 선대 우두머리들의 핏줄, 초대 우두머리였던 울크 신의 후손들을 뜻했다. 그리고 칼라일도, 레오도 모두 우두머리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엄연한 순혈이었다.

울크 신께 바치는 순혈의 맹세에는 치명적인 대가가 따랐다. 하여 순혈들은 결코 울크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 따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맹세를 올리고도 아직 멀쩡하잖아……?’

레오의 말에 조금의 거짓이라도 섞여 있었다면, 그는 심장을 내건 대가로 숨이 끊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레오는 숨이 끊기긴커녕 아주 멀쩡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칼라일은 진위를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입술을 잘근 씹었다.

“칼, 제발…….”

미약하게 흐르는 레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욕지거리를 읊었다.

“씹…….”

신경질적으로 레오를 팽개치고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낡은 오두막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담겼다. 버둥거리는 여체를 짓누르는 에녹을 보며 칼라일은 지체할 것 없이 손부터 움직였다.

퍽, 짧은 마찰음과 함께 에녹이 나가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군 에녹은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고 욕을 흘렸다.

“이런 씹…….”

“이런 씹?”

칼라일이 눈썹을 씰룩이며 빈정댔다. 그러고는 가볍게 에녹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아벨라는 어쩌다 너 같은 거랑 엮였을까. 아아, 불쌍한 아벨라.”

그러고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칼라일의 얼굴을 확인한 에녹의 낯은 하얗게 물들었다.

이 늦은 시각에 그가 에샤의 오두막집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것이리라.

칼라일의 손에 힘이 들어갈수록 에녹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그렇게 칼라일이 일방적으로 에녹을 제압하는 사이, 에샤는 헐레벌떡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그러고는 저를 구해 준 칼라일을 벙찐 얼굴로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칼라일은 공포로 얼룩져 있는 에샤의 눈을 확인하고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네요?”

섬뜩한 목소리가 달빛만 겨우 들어오고 있던 오두막집 안에 울려 퍼졌다. 칼라일은 에녹을 마치 한낱 벌레 다루듯 하며 얄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그의 태도에 에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잘 지내셨어요?”

에샤는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만 벙긋거렸다.

“이를 어쩌나,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놈한테 빚 하나 지셨네. 그것도 꽤 크게.”

칼라일은 산뜻하게 웃으며 손에 쥔 에녹을 장난감처럼 에샤 앞에 흔들어 보였다. 에샤는 마른 침만 삼킬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방 안엔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에녹은 여전히 발버둥 치며 캑캑거렸고 에샤는 아직도 어깨를 잘게 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평화로운 건 오롯이 칼라일뿐이었다.

칼라일은 여유로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에녹을 붙잡은 채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왕이면 밖에서 처리하려는 생각이었다.

얼빠진 에샤를 덩그러니 남겨 두고 그가 자리를 옮기려는 찰나. 등 뒤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 고마워.”

칼라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에샤는 애꿎은 제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개새끼가 하도 짖어 대는 통에 무시할 수가 있어야지.”

칼라일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판단이 자신에게 딱히 득 될 게 없다는 걸.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라면…….

‘찝찝해.’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떨떠름한 생각 때문이었다.

에녹을 처리하는 건 쉬웠다. 물론 가장 쉬운 건 그의 숨통을 끊어다 들짐승들의 아침밥으로 숲속 깊은 곳에 던져 놓는 것이었지만, 칼라일은 그러지 않았다.

아벨라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으읍!!! 으읍!!!”

대신 칼라일은 에녹의 입 안에 낡은 천 쪼가리를 잔뜩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땅 위에 널브러진 그의 등을 짓밟고 한쪽 팔을 뒤로 꺾기 시작했다.

길고 무거운 비명이 고요한 숲속에 오랫동안 울려 퍼졌다.

* * *

“에녹 말이야. 휴가받아서 내려온 게 아니라, 잘린 거라더라.”

지난 밤 일을 모르는 아벨라는 평화로운 얼굴로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말했다.

“이미 마을에 소문이 자자하더라고. 문제가 많았나 봐.”

“아…….”

“듣자 하니 원한을 많이 산 건지, 괴한에게 당했다는 소문도 있어.”

그 소문 속 괴한인 칼라일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군요.”

“응,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벨라가 말끝을 흐리며 그를 철석같이 믿던 자신을 탓하려 들었다. 기민하게 눈치챈 칼라일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히 입을 열었다.

“저도 처음엔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누구라도 껌뻑 속았을 테니까요.”

아벨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고마워, 아가.”

“뭘요.”

“정말이야. 칼라일, 네게는 항상 고마운 것밖에 없어.”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칼라일은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뿐이에요?”

“응?”

“어머니는 제게 고마운 마음뿐인 거예요?”

그가 답지 않게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소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칼라일은 말을 뱉고도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다고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아벨라의 표정에 옅은 당황이 섞였다. 칼라일은 다급히 말을 돌렸다.

“장난이에요.”

한데 평소라면 장난이 늘었다며 핀잔이라도 줬을 아벨라가 말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 미묘한 얼굴로 포크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초조해진 칼라일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되물었다.

“죄송해요, 혹시 불편하셨어요?”

“아냐, 그런 건…….”

아벨라의 말끝이 점점 흐릿해졌다. 무언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칼라일은 이 분위기가 더 이어지기 전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갈 준비 할게요.”

사실상 거의 도망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응. 그래, 늦겠다.”

아벨라도 미련 없이 그를 보내 주었다.

아벨라는 식탁에 앉아 샐러드를 깨작거리며 허겁지겁 침실로 향하는 칼라일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러다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며 느린 한숨을 흘렸다.

‘……역시 이상해.’

칼라일이 성장했을 때부터 느끼고 있던 미묘함이었지만, 최근에는 그 감정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었다.

-맞아요, 애인. 처음 뵙겠습니다, 칼라일이라고 합니다.

-아벨라, 아까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 칼라일의 입에서 제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순간부터. 이상하게 자꾸만 그가 의식됐다.

아벨라는 괜히 제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며 끙, 앓는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이러면 안 돼.’

내 손으로 키운 아이에게 이런 감정이 생기는 건 잘못된 거야. 생각해 봐. 칼라일이 어릴 적, 얼마나 작고 귀여웠는지.

‘보송보송한 솜털이 사랑스러웠지.’

그런데…… 그랬던 아이를 상대로 이러는 건 너무 파렴치하잖아. 아벨라는 스스로의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마음을 부여잡았다.

‘그간 쌓인 외로움이 이제야 터지는 것뿐이야.’

사실 외롭긴 했잖아. 칼라일을 만나기 전까지 난 가족도 뭣도 없었으니까.

아벨라는 한쪽 벽에 빼곡히 채워진, 칼라일이 자란 흔적들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엄마가 되어 주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이러면 어떡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였을까.

에녹 앞에서 애인인 척 거짓 행세를 한 것? 불안을 덜어 준답시고 나눈 각인 행위를 위해 입을 맞춘 것?

어쩌면 성체가 되어 버린 칼라일과 여전히 몸을 가까이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것부터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어무아, 마! 어마!

조그맣던 손으로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제게 두 팔을 뻗어 보이던 칼라일의 어릴 적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했다. 세상에 저밖에 없다는 듯 구는 맹목적인 붉은 눈도 마냥 좋았다.

하지만 이젠 칼라일이 저런 식으로 나올 때면, 그러니까 저를 여자로 보는 듯한 눈을 하고 바라볼 때면 전과 같은 얼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뺨이 사춘기 소녀처럼 물든다는 걸 차마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만약 칼라일이 사랑하는 이성을 데려온다면…… 그럼 나는 미련 없이 웃으며 그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을까?’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아니, 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그저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외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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