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51화 (52/82)

<051>

내성.

사실 은연중에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현실을 마주하니 입 안이 썼다. 음침하게나마 아벨라의 몸을 더듬을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칼라일은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꾸몄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몸을 뒤덮고 있었음에도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벌써 자정이에요.”

“그러네. 웬일로 이 시간까지 잠이 안 오지?”

“내일 피곤하실 수도 있으니 어서 주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칼라일의 눈에는 우울감이 담겨 있었다.

“으응……. 아가도 얼른 눈 붙여. 같이 자자.”

따스한 손길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칼라일은 차마 웃지 못했다. 약에 대한 내성으로 인해, 당장 오늘 밤조차 아벨라를 안지 못하게 생겼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는 고롱고롱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벨라가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늘 그렇듯 그녀의 위에 올라타 멋대로 보지를 더듬거리며 좆을 비벼 대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래서 칼라일은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하여 욕정을 죽였다.

잠도 오지 않고, 여러모로 괴롭고 우울한 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칼라일은 억지로 눈을 감고 양의 숫자를 세며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코끝에서 달콤한 살 내음이 아른거려도,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꽤 잘 견디는 중이었다.

그렇게 무탈히 하루가 끝나 가는 건가 싶었다.

적어도 오두막집 주변에서 역겨운 개 냄새가 느껴지기 전까지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흐릿한 정신을 붙잡고 있을 무렵.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느껴졌다. 기분 좋게 늘어져 있던 뾰족 귀 또한 쫑긋 일어섰다.

‘이 냄새는…….’

언제 잠에 들려 했냐는 듯, 또렷해진 정신으로 칼라일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낡은 창문을 밀자 끼익,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바깥의 찬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더불어 역겨운 개 냄새도.

“죽여달라고 온 건가?”

찾아온 이를 확인한 칼라일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회색 머리의 작은 남자아이가 바들바들 떨며 그를 올려다봤다.

레오였다.

“도와줘.”

“미쳤군.”

“부탁이야 칼. 염치없는 것 알지만…….”

칼라일은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창틀을 뛰어넘었다. 그러고는 위협적으로 레오의 멱살을 잡아챘다.

“염치없어? 지금 이게 어디 염치만 없는 정도인가?”

칼라일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단번에 그의 숨통을 끊어 먹을 것처럼 위협했다.

“날 죽이려 들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염치없지만 도와달라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뻔뻔한 건 그 여자를 닮은 건가?”

그 말에 레오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고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이려 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지 마, 역겨운 새끼.”

칼라일은 미련 없이 레오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레오의 얼굴이 점점 시뻘게졌다. 그는 버둥거리며 기침을 내뱉었다.

“아, 안 돼……. 켁, 큭…… 반려, 에샤와 이어져 있어서…… 에샤도 죽…….”

에샤가 언급되자 칼라일의 표정에 실금이 갔다. 아주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그는 잠시 고민했다.

‘겁도 없이 무슨 정신으로 날 찾아온 건가 했는데…….’

그 인간과 반려를 맺고 찾아온 건가. 그럼 그렇지. 죽고 싶은 게 아닌 이상에야, 제 앞에 홀로 나타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지금 둘 다 죽여 버릴까. 칼라일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세상모르고 평온하게 잠든 아벨라가 떠올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

칼라일이 불만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레오는 막혔던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쿨럭, 쿨럭…….”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헐떡이는 레오를 응시했다. 그러자 대충 숨을 갈무리한 레오가 급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상한 놈이 쿨럭, 쿨럭…… 에샤에게 손대려고 해.”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제게 그것만큼 고마운 일이 어디 있다고, 저더러 도와 달라 하는 건지. 칼라일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비웃음을 그렸다.

애당초 눈엣가시 같던 여자였다. 다른 사람의 손으로 치워 버릴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칼라일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 뒤에서 다시 한번 레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 제발! 칼…… 다음 표적은 네 반려일지도 몰라!”

반려라는 말에 순간 칼라일의 눈이 살벌한 이채를 띠었다. 심기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미간은 잔뜩 구겨져 엉망이었다. 레오는 기죽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에녹, 에녹이란 놈이 지금 에샤를…… 쿨럭, 겁탈하려고 해. 제발 도와줘.”

에녹이 언급되자 칼라일의 표정은 순식간에 썩어 들어 갔다. 벌레라도 씹은 양 칼라일이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

속옷을 훔치다 들켜 흠씬 두들겨 맞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그쪽으로 가서 또 사고를 치는 건가. 웃기지도 않았다. 아벨라는 어쩌다 그런 인간말종하고 엮여서…….

칼라일이 씁쓸하게 입술을 씹었다.

그런데 씁쓸한 건 씁쓸한 거고. 아무리 에녹이 싫다지만, 제가 왜 에샤를 구하러 가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칼라일은 여전히 귀찮다는 눈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부탁할게, 제발…….”

레오가 머리를 조아리며 칼라일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 않았다.

“누가 그 여자의 핏줄 아니랄까 봐……. 정말 역겹도록 뻔뻔해.”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당장 저 작은 머리통을 쥐고 으깨 버리고 싶었다.

아벨라의 친우가 그의 반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꾸역꾸역 원한을 억누르고 있는데……. 그런 제 속도 모르고 도와달라며 뻔뻔하게 비는 레오를 보고 있자니 그냥 전부 다 없애 버리고 싶었다.

에샤도, 레오도. 모두.

“칼, 제발 이렇게 빌게.”

칼라일은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서서 레오를 응시했다. 레오는 그저 가만히 엎드려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른 채,

“칼, 제발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옛정?”

도와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죽여 달라고 비는 건가? 칼라일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는 조소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무슨 옛정을 생각하라는 거지? 아, 형님한테 껌뻑 속아 뒤질 뻔했던 그 옛정?”

흉흉하게 날이 선 송곳니는 당장이라도 사냥감의 목덜미를 꿰뚫을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그래, 형님을 이렇게 마주하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 아주 괴로웠거든. 그땐 정말 죽는 줄 알았어. 하하, 그렇게 등신처럼 동족 하나도 못 죽인 채 죽었다면 억울해서 세상을 떠돌았을 거야. 덕분에 그럴 일은 없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비아냥대는 말에 쥐죽은 듯 땅만 보던 레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엔 묘한 혼란이 들어차 있었다.

“자, 잠시만. 지금 내가 염치없는 건 알지만 방금 그 말은 무슨…….”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나 혼자 죽었으면 죽었지 처음부터 그렇게 동족들을 멸족할 생각은 없었어.”

칼라일은 싸늘한 눈으로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멸시받는 게 힘들긴 했지만, 태어나길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냈거든.”

레오는 멍청한 얼굴로 칼라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때는 형님을 믿었던 적도 있었지.”

칼라일이 나직이 말을 흘리며 조소했다.

“그래서 어때? 다리 병신 하나 제대로 못 죽인 소감이.”

“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소린지는 나보다 형이 더 잘 알겠지.”

“나는 정말 조금도…….”

레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칼라일의 화를 더 부추겼다. 칼라일은 저도 모르게 그의 목덜미를 다시금 낚아채며 위협적으로 이를 세웠다.

“조금도 모르겠다는 개소리는 하지 마. 그땐 정말 죽여 버릴 테니까.”

“아냐, 정말 난 모르는 일이라고!”

“모르는 일? 형이 직접 독 묻힌 꿩을 내게 던져 놓고 모르는 일이라고?”

그 말에 레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변명할 생각 하지 마. 내 인내심도 바닥이니까.”

“칼! 아니, 그럴 리가. 난…… 나는 정말 그런 적 없어. 내 모든 걸 걸고, 울크 신께 심장을 대가로 맹세할 수 있어!!!”

레오의 말에 칼라일이 잠시 멈칫했다. 신께 올리는 맹세. 칼라일과 마찬가지로 레오 또한 종족의 우두머리였던 그분의 아들이었다.

이 맹세가 갖고 있는 무게를 아는 칼라일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