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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50화 (51/82)

<050>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아벨라는 한참이나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러다 에녹의 손뿐만 아니라, 바지 주머니에도 몇 개 욱여넣어진 제 팬티를 확인하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 말도 안 돼…….”

그녀는 입을 떡하니 벌리고 눈앞의 광경을 부정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부정은 짧았다.

“에녹, 너 설마…… 설마 그럼 예전에 있던 팬티 도둑도 설마 네가……!”

팬티 도둑? 그 말에 칼라일이 무슨 말이냐는 듯 아벨라를 바라봤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 얼마 전 아벨라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으음……. 예전엔 꽤 친했어. 약초 캐는 것도 여러 번 도와주고 했었거든.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도 도와줬고.”

“불미스러운 일이요?”

“아, 예전에 집에 도둑이 든 적 있었거든……. 그때 에녹이 많이 도와줬지.”

설마 그때 어머니가 말씀하신 도둑도 이 새끼가 그런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었다. 칼라일은 주먹을 움켜쥐고 한 번 더 얼굴을 후려갈기려 했다.

한데 아벨라가 더 빨랐다.

쿵, 쿵, 화가 난 걸음걸이로 다가온 아벨라는 쓰러진 에녹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런 미친놈!!!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일 때문에 내가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알면서!!!”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아벨라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칼라일은 세게 움켜쥐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쓰레기 같은 놈! 그래 놓고 감히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서……!”

아벨라는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질까지 하려 했다. 그러자 당황한 칼라일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벨라를 말렸다.

“어머니……가 아니라, 그, 아벨라. 손 다쳐요.”

순수하게 그는 아벨라의 손을 걱정할 뿐이었다. 때리는 거야 제가 대신 두들겨 패면 됐다. 하지만 괜히 저런 쓰레기를 때리다 아벨라의 손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무척 속상할 것 같았다.

칼라일이 아벨라의 손을 감싸 안으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아벨라는 에녹에게 느끼는 배신감 때문인지 눈시울을 붉히며 연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악! 짜증 나!!! 그동안 다 알면서 얼마나 날 우습게 생각했을까!”

화를 내던 아벨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궜다. 그 모습에 칼라일은 가슴이 시큰거리는 걸 느끼며 아벨라를 제 품에 꽉 그러안았다.

“믿었는데……. 흑, 믿었는데 어떻게 그래, 말똥 같은 새끼야!”

칼라일은 감히 제가 무슨 말로 그녀를 달랠 수 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등을 토닥여 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비척거리며 에녹이 일어설 때쯤, 칼라일이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에녹은 매가리 없이 바닥으로 철퍽 쓰러졌다.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쭈그리고 앉은 칼라일은 에녹의 턱을 붙잡고 건조하게 읊조렸다.

“……감히 내 반려를 넘봐?”

마음 같아선 저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고 살점을 갈기갈기 찢고 싶었다. 칼라일은 느리게 숨을 뱉어내며, 가까스로 그런 충동을 참아냈다. 그러고는 에녹의 목덜미를 잡은 채, 짐짝처럼 끌고 나가 집 밖에 내동댕이쳤다.

“살려 줄 때 썩 꺼져. 두 번 다시 아벨라 앞에 나타나지 마.”

“으, 으윽…….”

“그땐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들짐승들 먹이로 던져 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칼라일이 에녹의 엉덩이를 매섭게 걷어찼다. 그러자 에녹은 두들겨 맞은 엉덩이를 부여잡고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새끼…….”

칼라일은 멀어져가는 에녹을 보며 입 안에서 욕을 굴렸다. 죽이고 싶었다. 이대로 살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인간 하나 죽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지만…….

아벨라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칼라일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아벨라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니…….”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품에 안으며 발개진 눈가를 다정히 매만져 주었다.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네가, 흑, 대체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이 바보야.”

아벨라는 괜히 칼라일의 가슴을 퍽, 퍽, 내리치며 몸을 잘게 떨었다. 분노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짜증 나……. 역시 남자 새끼들은 전부 짜증 나.”

그 말에 잠시 흠칫, 칼라일의 몸이 떨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칼라일은 아벨라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침대로 눕혀 주었다.

“믿었는데……. 정말 괜찮은 친구라고 믿었는데…….”

왜인지 칼라일은 순간적으로 레오가 떠올랐다.

-믿었는데…… 어떻게 형님이 나한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과거의 잔상에 칼라일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품에 안긴 아벨라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아벨라와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있었음에도 어딘지 속이 시큰거리는 저녁이었다.

* * *

그날 밤, 침대에 몸을 누인 칼라일은 아벨라에게서 몇 가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으셨다고요?”

“아, 아니! 만나던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냥 그쪽에서 일방적이었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아벨라가 옛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걔는 옆 마을 촌장님의 손자였거든. 되게 아무렇지 않게 찾아와서 당당하게 자기 미래에 날 끼워 넣더라고. 그러다 보니 나도 막연하게 걔와 잘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

예상치 못한 그녀의 과거사에 칼라일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아벨라가 다른 남자와 미래를 생각한 적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미래를 나불거리던 놈팡이가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에 대한 의구심일 뿐

“지금 그 사람은 어떻게 됐는데요?”

칼라일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물었다. 아벨라는 머리 위로 솟아난 그의 뾰족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으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나타나더라고.”

“갑자기요?”

“응, 그래서 나중에 그 마을에 약초 팔러 갔을 때 보니까…….”

잠시 뜸을 들인 아벨라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마을에서 꽤 괜찮은 상인 집 딸이랑 혼인했더라.”

순간 칼라일이 작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나 같은 고아보다는 그쪽이 더 괜찮은 혼인 상대긴 하지.”

아벨라는 멋쩍게 웃으며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물론 걔한테 딱히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찾아오던 사람이 그렇게 되니 기분이 묘하긴 하더라고. 좀 배신감 들기도 했고……. 그때 느꼈지. 아, 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으면 안 되는구나. 하고 말이야.”

칼라일은 아까 그녀가 뱉었던 말을 곱씹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뭐, 생각해 보면 나랑 걔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이제는 다 지난 일이라며, 아벨라가 작게 하품했다. 칼라일은 말없이 그녀의 배를 토닥일 뿐이었다.

“아직도 가끔 궁금하긴 해. 하루아침에 그렇게 발길을 끊을 거였으면, 나한테 왜 그랬던 건지…….”

칼라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는 듯 아벨라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복슬복슬한 꼬리로 괜히 그녀를 간질이기도 했다.

아벨라가 울적해 보이는 게 속상해서, 조금이나마 기분이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행히 효과는 있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던 아벨라는 어느새 칼라일의 꼬리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꼬리가 흔들릴 때마다, 검은 털이 이불 위로 풀풀 흩날리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아벨라는 뭐가 그리 좋은지 칼라일의 꼬리를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다시금 하품이 나왔다. 아벨라가 하품과 함께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잠이 별로 안 오네. 평소엔 눕기만 하면 잠들었는데…….”

그 말에 칼라일 또한 눈썹을 씰룩였다. 확실히 네프라 약초 탓에 곧잘 잠에 들던 평소와 달랐다.

‘분명 오늘도 약초를 사용했는데…….’

평소라면 진즉 곯아떨어졌을 그녀가 오늘은 하품만 계속해서 할 뿐 딱히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아벨라를 살피던 칼라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졸리세요?”

“응, 좀 피곤하긴 한데…… 막 잠들 정도까지는 아니야.”

그에 칼라일의 표정이 묘해졌다.

‘내가 오늘 약초를 얼마나 뿌렸더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도, 결코 적지 않은 양이었던 건 확실하다. 얼마 전, 아벨라가 잠결에 제 이름을 부른 날. 그날 후로 칼라일은 꾸준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랬기에 혹시라도 지난번과 비슷한 불상사가 생길까 두려워서, 오늘은 평소보다 한참 많은 양의 약초를 뿌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아직까지 잠들지 않는다고…….’

문득 초조함이 몰려왔다. 붉은 눈동자가 분주하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점점 무뎌지는 약초의 효과. 그리고 얕아진 수면의 깊이.

답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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