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아벨라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할 그의 속마음이었다.
“괜찮아, 당장 고칠 필요 없어.”
칼라일은 이 다정한 목소리와 손길이 좋았다.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가 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해지는 것도 좋았다. 다른 자잘한 상념 따위 들어올 여유 따위 없는 그 눈이 그렇게 기꺼울 수가 없었다.
“……제가 많이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칼라일.”
이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더 참을 수 있을까. 스스로도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칼라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폐부 깊숙이까지 그녀의 살 내음을 밀어 넣었다.
아벨라와 가까웠던 수컷. 확실히 거슬리는 존재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은 평온해졌다.
‘따로 둘이 만나려는 기미도 없었고…….’
괜찮아. 휴가 동안만 있다 가는 거겠지. 다시 볼 일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칼라일은 애써 에녹의 존재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아무 탈 없이 지나갔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하늘은 칼라일의 편이 아니었다.
* * *
늘 그렇듯 약초 가게의 오전은 평화로웠다. 아벨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고 정리를 하고 있었고, 칼라일은 약초들을 다듬으며 아벨라를 돕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창 너머로 쏟아져 내렸다. 칼라일은 기지개를 한 편 켜며 하품을 했다. 그러자 마침 때에 맞춰 가게 문에 달린 방울이 울렸다.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그는 늘 그렇듯 반사적으로 입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곳에 서 있는 건, 손님이 아닌 에녹이었다.
“와, 아벨라. 너희 가게는 여전하네?”
어딘지 경박스러운 목소리. 창고에서 재고를 정리하던 아벨라가 기웃 몸을 내밀었다.
“에녹?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할 것도 없고, 그냥 놀러 왔지 뭐.”
가게로 들어오는 그를 보며 칼라일이 코를 씰룩였다. 본능적으로 에녹의 냄새를 코에 익히려는 것이었다.
“아, 반가워요. 칼라일 씨도 계셨군요.”
어제는 등신처럼 굴더니, 오늘은 제법 멀끔하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도 한다. 칼라일은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아벨라! 오늘 점심, 시간 돼? 에샤랑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괜찮으면 너도 같이하자. 오랜만에 셋이 먹으면 좋을 거 같은데. 어때?”
셋이라는 말에 아벨라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뻔히 칼라일이 있는 앞에서 셋을 강조하는 게 어딘지 떨떠름했다.
“음…… 미안, 일이 좀 있어서. 점심은 곤란할 거 같아.”
물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하는 건 좋았다. 하지만 칼라일을 떼어놓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다 에샤와는 그날 후로 교류를 않고 있기도 했고…….
그런데 거절에도 에녹은 꽤 집요하게 굴었다.
“일? 왜? 선약 있어?”
“뭐 비슷해.”
“에이, 그래도 오랜만에 고향 왔는데……. 같이 한 끼 먹자.”
“미안해, 실은 나 에샤랑 조금 다퉜어.”
“이런, 그래? 어쩐지 에샤도 너는 부르지 말라더니…….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잠시 고민에 잠긴 듯하던 그가 일순 손뼉을 치며 좋은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그럼 저녁은 어때? 저녁에 우리 둘이 따로 먹자.”
칼라일은 완전 길거리에 서 있는 나무 취급이었다. 노골적인 배척에 칼라일이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러고는 괜스레 아벨라에게 다가가 허리를 감싸 안으며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미안한데, 우리가 저녁은 항상 함께해서요.”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당당했다.
갑자기 끼어든 칼라일을 보며 에녹이 당황했다. 그는 얼빠진 소리를 흘리다가 어색하게 그렇구나, 따위의 말을 흘렸다.
칼라일은 어제보다 더 세밀하게 에녹을 살폈다. 겉보기엔 그저 가까운 친구 같아 보이는데……. 그럼에도 어딘지 서늘함이 가시지 않았다. 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면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들고 가실래요?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
그는 괜히 우리 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벨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하는 듯한 칼라일의 모습이 귀여워서였다.
‘그래, 차라리 이편이 낫겠어.’
아벨라 또한 칼라일의 제안에 힘을 실었다.
“좋다. 에녹, 오랜만에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 이래 봬도 칼라일이 요리는 꽤 해.”
아벨라까지 말을 거드니 에녹은 거절하기도 민망해졌다. 이미 그의 저녁 시간은 한가롭다는 게 모두 탄로 난 상태이기도 했고.
“으음…… 그, 그럴까 그럼?”
결국 마지못한 에녹은 긍정의 대답을 뱉었다.
“그럴게. 모처럼 너희 집도 가고 하지 뭐.”
“그럼 이따 뵙죠.”
확답을 듣기 무섭게, 칼라일이 등 떠밀듯 에녹을 가게 밖으로 내보냈다. 아니, 거의 쫓아내다시피 했다.
그렇게 어딘지 걱정스러운 저녁이 찾아오고 있었다.
* * *
갓 구운 바게트 빵과 양파 스튜. 그리고 예쁘게 썬 치즈와 햄까지. 칼라일은 한껏 솜씨를 발휘한 음식들을 내려놓으며 에녹을 쳐다봤다.
다행히 그는 별 탈 없이 제가 한 음식들을 잘 받아먹는 중이었다.
혹 무슨 못마땅한 짓을 할지 걱정스러웠는데. 의외로 에녹은 아벨라에게 추근거리거나 아벨라를 불편하게 하는 말 등을 뱉지는 않았다.
걱정과 달리 평온한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풍성했던 식탁 위에는 빈 접시들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늘 그렇듯 칼라일은 뒷정리까지 자신이 모두 하려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접시들을 겹겹이 쌓아 올리자, 가만히 바라보던 아벨라가 그를 만류하며 말했다.
“칼라일, 괜찮아. 음식 하느라 고생 많았어. 오늘 뒷정리는 내가 할게.”
“네? 아, 아니에요. 제가 해도…….”
“아냐, 소파에서 좀 쉬고 있어.”
그녀의 등쌀에 이기지 못한 칼라일은 소파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파에 앉은 몸과 달리 머릿속은 부엌에서 뒷정리하는 아벨라에 완전히 팔려 있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아벨라가 일을 하고 제가 가만히 앉아 있는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그래서 그는 앉아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며 아벨라의 상황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에녹인지 개녹인지 하는 놈이 조용한데…….’
칼라일이 코를 씰룩이며 그의 체취를 좇았다. 그런데…… 에녹의 냄새가 침실 쪽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던가!
‘침실에는 언제 간 거지?’
생각해 보면 저녁 먹은 후부터 내내 조용했다. 저와 아벨라가 뒷정리로 실랑이를 벌일 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허락 없이 침실을 드나드는 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게다가 그 상대가 이성이라면 더더욱.
칼라일이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침실로 향했다.
아벨라에게 귀띔해 줄까 고민하다가, 제가 직접 확인해 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실로 다가가니, 살짝 기울어진 문 사이로 불쾌한 에녹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에 칼라일의 콧잔등이 잔뜩 찡그려졌다.
쯧, 작게 혀를 찬 칼라일은 문틈 사이로 내부를 확인했다. 정확하게 에녹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그림자로 추정되는 것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상함을 감지한 칼라일은 문고리를 잡고 아예 벌컥 열어 버렸다.
그러자 시야에 담긴 건, 서랍에서 무언가를 챙기고 있는 에녹이었다.
“지금 뭐 하는……!”
칼라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얼 챙기고 있나 했는데…….
작고 얇은 천 쪼가리.
순간 벙찐 칼라일이 빠르게 눈을 끔뻑였다. 에녹의 손에 들린 게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라고 차마 믿을 수 없어서였다.
속옷. 그랬다. 에녹의 손에 들려 있는 건, 아벨라의 속옷이었다.
멍하니 입을 벙긋거린 칼라일은 순간 이성이 뚝, 끊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 한 번 깜빡하고 나니 그는 저도 모르게 주먹부터 내지르고 있었다.
“이 개새끼가!!!”
칼라일의 주먹질에 에녹의 얼굴이 돌아가며 우당탕,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란과 함께 퍽, 퍽, 둔탁한 마찰음 소리가 쉴 새 없이 방을 채웠다.
“감히 아벨라 속옷을……!!!”
분노를 참지 못한 칼라일은 짐승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소란에 부엌에 있던 아벨라도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엄마, 아니…… 아니, 아벨라. 이 새끼가…… 이 새끼가 엄마 속옷을, 아니, 아니 아벨라 속옷을……!”
칼라일은 화를 참지 못하고 호칭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엄마라 부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엄마라는 말을 뱉고 정정했다.
제 속옷이 도난당한 것도 아닌데, 칼라일은 제 일보다 더 분노하며 울먹였다.
엉망이 된 얼굴로 널브러진 에녹의 손에는 아벨라의 팬티 서너 개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