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
“어머니, 아는 수컷…… 아, 아니 아는 사람이에요?”
칼라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눈치 없는 아벨라는 반가움을 지우지 않은 표정 그대로 칼라일을 향해 한껏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응, 예전에 우리 집 근처에 살던 친구야! 수도 귀족 가문에 취직하면서 오래 못 보고 지냈는데……. 너무 오랜만이다, 세상에!”
칼라일의 품에서 빠져나온 아벨라가 그를 향해 다가가며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저를 알아봐 주자 에녹이란 남자 또한 신이 난 건지 반갑게 입을 열었다.
“역시 아벨라 너 맞았구나? 여전하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에샤도 잘 지내고 있지?”
“나야 뭐 항상 잘 지내고 있지! 에샤도 너 온 거 알면 반가워하겠다. 그나저나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휴가?”
“응, 이번에 휴가를 꽤 길게 받았거든. 모처럼 부모님께 인사도 드릴 겸 내려왔어.”
칼라일이 시뻘건 눈을 번뜩일 땐 제대로 말도 못 하더니,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술술 말을 뱉었다.
제법 친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칼라일의 표정만 점점 어두워졌다.
한참 아벨라와 인사를 주고받던 에녹은 여전히 저를 매섭게 쏘아보는 칼라일의 시선을 느낀 건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벨라 네 옆에는…….”
에녹의 눈이 힐끔 칼라일을 향했다가 재빨리 다시금 아벨라에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네 애인이니?”
“애, 애, 애인?”
그러자 놀란 아벨라가 무척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아냐…… 우리는 절대……!”
그런 사이 아니야! 라고 말하려는 찰나.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하던 칼라일이 불쑥 아벨라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끼어들었다.
“맞아요, 애인.”
“카, 칼라일?”
“처음 뵙겠습니다, 칼라일이라고 합니다.”
칼라일은 언짢음을 숨기지 않고 눈썹을 씰룩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에녹은 내민 손을 어색하게 맞잡았다.
“에, 에녹입니다. 반가워요.”
태연하게 애인 노릇을 하는 그를 보며, 아벨라가 입을 벙긋거렸다. 마치 왜 애인이라 대답했냐고 따지는 것만 같았다.
칼라일은 아벨라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들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 그래도…….”
“그렇다고 아무 사이 아닌 남이라고 소개되고 싶지 않았어요.”
칼라일이 품에 안긴 아벨라를 더욱 감싸 안으며 나직이 말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아, 아냐 나는 절대 불쾌해서 그런 게 아니라……!”
“둘이 사이가 무척 좋아 보여.”
중간에서 허둥거리는 아벨라를 보며 에녹이 말했다.
“아벨라, 표정도 많이 밝아진 것 같고.”
“어, 으응? 내 표정?”
“응, 예전엔 이렇게 웃는 거 되게 보기 드물었는데…….”
에녹이 뒷말을 흐리며 괜스레 뒷머리를 긁적였다.
“웃는 거 보니 되게 기분 좋다.”
그 말에 언짢아진 건 이번에도 칼라일 쪽이었다.
아벨라가 웃는데 자기가 왜 기분 좋아하고 난리인 건지. 칼라일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에녹을 응시했다.
“너도 수도에서 일하더니 때깔이 좋아졌어. 수도 사람 다된 거 같다, 얘.”
타들어 가는 칼라일의 속도 모르는 아벨라는 까르륵 웃으며 에녹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경계심을 바짝 세운 칼라일을 보며 눈치 없이 말했다.
“아가,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런데 에녹은 이상한 사람 아니니,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아까부터 엄마 몸이나 힐끔거리면서 등신처럼 웃는 저 개새끼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도통 못마땅했다. 친구라면서 왜 저렇게 변태 새끼마냥 눈깔을 굴리는 건지. 칼라일은 짜증을 숨기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아가?”
그런데 가만히 있던 에녹이 갸웃하며 물었다.
“애칭을 아가라고 하는 거야?”
아무래도 다 큰 칼라일에게 아가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그 질문에 아벨라가 허둥거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아, 으응……. 애, 애칭! 맞아 애칭……. 뭐 그런 거야…….”
에녹은 미묘하게 아벨라와 칼라일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시선이 못마땅해서 칼라일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냈다.
“아벨라, 아까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는 어서 자리를 파하고 싶은 마음에 아벨라가 하지 않은 말까지 꾸며내어 말했다.
“어서 가요. 맛있는 거 해 줄게요.”
그제야 칼라일의 속을 알아차린 아벨라가 아쉬움을 달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그러자. 에녹, 만나서 반가웠어. 볼 일 있으면 또 보자!”
보란 듯이 아벨라의 손을 깍지 끼워 잡기까지 한 그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에녹을 등졌다. 그런데 그런 그의 뒤로 에녹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둘이 같이 사는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벨라 또한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우리? 응, 같이 살고 있어. 그건 갑자기 왜?”
“아…… 그렇구나. 아니야, 아무것도.”
“그래, 그럼 고향 온 김에 푹 쉬다 가!”
결국 모처럼의 나들이는 찝찝하게 막을 내렸다. 칼라일은 아벨라의 손을 꽉 맞잡은 채, 발걸음의 속도를 높일 뿐이었다.
* * *
“아까 그 수컷이랑 친하세요?”
시장에서 사 온 식재료들로 간단히 저녁거리를 준비하던 칼라일이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물었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 요리하는 칼라일을 구경하던 아벨라가 푸흐흐 웃으며 대답했다.
“에녹 말하는 거니?”
“네.”
“으음…… 예전엔 꽤 친했어. 약초 캐는 것도 여러 번 도와주고 했었거든.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도 도와줬고.”
“불미스러운 일이요?”
칼라일이 의심을 거두지 않고 물었다. 여전히 그는 에녹이란 자에 대해 경계를 바짝 세우고 있었다.
“아, 예전에 집에 도둑이 든 적 있었거든……. 그때 에녹이 많이 도와줬지.”
아벨라는 에녹을 꽤 신뢰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 사실이 칼라일을 더 불만스럽게 했다.
‘어머니야 그 놈팡이를 좋게 볼지 몰라도…….’
칼라일은 알고 있었다. 아벨라를 흘기던 퀴퀴한 갈색 눈동자에 지저분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것을.
‘상관없어.’
이미 내 반려니까.
하지만 더러운 눈이 아벨라를 향하는 것조차 불쾌하고 싫었다. 칼라일의 표정은 도통 밝아질 줄을 몰랐다.
탁, 탁, 일정한 간격으로 당근을 썰던 칼라일은 실수인 척 교묘하게 칼날에 제 손을 베이게 했다.
“아……!”
나무 도마 위로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그러자 가만히 구경하고 있던 아벨라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라일! 세상에!!!”
“아, 아으……. 죄, 죄송……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피가 많이 나! 이런, 저번 상처가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기다려. 약초 가져올게!”
서랍에서 허겁지겁 치료용 약초를 챙긴 아벨라는 칼라일의 상처를 보며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그녀는 손을 바삐 움직이며 칼라일의 상처를 치료했다. 제법 능숙한 손길이었다.
“아까…… 엄마가 다른 수컷이랑 살갑게 이야기 나누던 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아요.”
“으이구, 그랬어?”
“……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요.”
“그래도 칼질하면서 다른 생각 하면 안 돼.”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는걸요.”
그렇게 말하는 칼라일의 눈가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이제는 눈 하나 꿈쩍 않고 처연한 척 아벨라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그였다.
“엄마…….”
“응, 아가.”
“저는 이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요. 엄마도…… 엄마도 저를 제일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칼라일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아벨라가 다정히 웃으며 칼라일과 눈을 맞췄다.
“당연하지. 아가, 걱정 마. 질투하지 않아도 돼. 에녹과 친했던 건 맞지만 정말 그저 친구일 뿐이니까.”
“정말인 거죠……?”
“응, 정말이야.”
칼라일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그럼 세상에서 제가 제일 좋다고 말해 주세요.”
커다란 덩치로 어리광부리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칼라일다워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벨라는 칭얼대는 그의 머리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며 원하는 대답을 내어 주었다.
“당연하지. 칼라일, 나는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늘 말하지만 너는 내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야.”
나긋하게 속삭여지는 말을 들으며 칼라일은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하니 영 떨떠름하던 마음이 꽤 가라앉았다.
“죄송해요, 매번 이런 식이라서…….”
칼라일은 이런 스스로가 원망스럽다는 듯, 자책을 담은 목소리로 작게 입을 열었다.
“정말 고치고 싶은데…….”
고치고 싶은데…… 동정 외에 다른 방법으로 엄마에게 관심받을 수 있는 법을 모르겠어요. 더 이상 동정할 거리가 남지 않으면, 그땐 엄마가 지금처럼 제게 눈길을 주지 않을까 봐 늘 걱정스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