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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47화 (48/82)

<047>

그 말에 아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흘렸다.

“푸흐…… 효도라니. 괜찮아, 아가. 안 아프고 건강하게 잘 자라 준 게 효도인걸.”

“그래도요. 전 어머니께 해 드리고 싶은 게 많아요.”

“그래? 예를 들면?”

아벨라가 산뜻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칼라일이 살짝 눈을 접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음, 예를 들면…….”

그러더니 커다란 손으로 은근슬쩍 아벨라의 허리를 휘감아 안더니 배를 쓰다듬는 것 아니겠는가.

“이런 거……?”

칼라일은 자신이 어릴 때 아벨라가 해 주던 것처럼 그녀의 배를 문질렀다. 그러자 아벨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칼라일을 밀어내려 했다.

“흣, 가, 간지러워 칼라일.”

“왜요? 어릴 때 어머니께서 자주 해 주셨던 거면서.”

“이런 건 효도가 아니잖아.”

소리 내어 웃는 그녀를 보며 칼라일은 아래가 빳빳해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애써 티 내지 않으며 저 또한 천연덕스럽게 웃어 보였다.

“장난이었어요.”

“바보.”

아벨라가 그의 뺨을 쿡 찌르며 몸을 내뺐다. 칼라일은 품에서 빠져나가는 그녀를 기꺼이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고 계세요,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아, 산딸기라도 좀 씻어 드릴까요?”

“으음,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 밀가루가 얼마 안 남았던데…… 이따 시장이라도 한번 다녀와야겠어.”

“좋아요, 같이 가요.”

칼라일은 그렇게 대답하며 능숙하게 식탁 위를 정리했다.

부엌에서는 달그락, 달그락, 칼라일이 접시를 닦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벨라는 낡은 소파에 앉아 벽난로의 따뜻한 불을 쬐고 있었다.

무척이나 평화로운 공기가 흘렀다. 그 편안함을 느끼며, 칼라일은 이런 소박한 일상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 * *

“아가, 고기도 좀 살까?”

정육점 앞에서 걸음을 늦춘 아벨라가 힐긋 칼라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칼라일도 함께 걸음을 늦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기요? 집에 아직 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요즘 장사가 꽤 잘 되는 편이어서. 모처럼 구운 고기나 해 먹을까 했지.”

슬그머니 칼라일의 반응을 살핀 그녀는 생각보다 잠잠한 그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되물었다.

“별로 안 내키니?”

칼라일은 커다란 밀가루 포대 하나를 품에 안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내키는 건 아니지만…… 괜찮아요. 굳이 저 때문에 고기 사시려는 거면 전 정말 괜찮아요.”

아벨라가 깨기 전, 아침마다 사냥을 나가고 있는 그였으니, 지금 식단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고기가 이에 낄 만큼 든 스튜에도 이제는 익숙해진 편이었고.

애당초 구운 고기보다 갓 잡은 노루를 뜯어먹는 게 더 입에 맞았기 때문에 칼라일은 아벨라가 굳이 돈 들여 가며 고깃덩이를 사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머니께서 드시고 싶은 거면 모를까……. 저 때문에 사시는 거라면 정말 안 그러셔도 돼요.”

다시금 단호히 말하는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으음…… 그래도 아가는 늑대니까…… 고기를 좀 더 많이 먹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하지만 곧 겨울인걸요. 고기보다 장작을 좀 더 사 두는 건 어때요?”

칼라일이 쌀쌀하게 부는 바람을 느끼며 아벨라의 겉옷을 꼭 여며 주었다. 확실히 현실적으로는 고기를 살 때가 아니라, 장작을 더 쌓아 둘 때였다. 아벨라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니?”

“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정 뭣하면 그때 제가 고기 먹고 싶다고 말씀드릴게요.”

완강한 태도에 결국 아벨라는 정육점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에도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처럼 나들이에 나섰다.

“모처럼 어머니랑 이렇게 걸으니 너무 좋아요.”

평소엔 필요한 것만 사고 빠르게 집에 돌아가던 둘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든 건지, 군것질거리도 사서 입에 물고는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기 바빴다.

“나도. 오랜만에 시장 구경하려니 재밌네.”

그녀의 말에 칼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장 구경하려니 재밌는 거예요? 저랑 같이 나와서 재밌으신 게 아니라요?”

그가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는 애교부리듯 아벨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벨라가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며 칼라일의 뺨을 꼬집었다.

“얘도 참. 당연히 칼라일 너랑 시장 구경하니 즐거운 거지.”

아벨라가 그렇게 말하며 칼라일에게 닭꼬치 하나를 물려 주었다. 그는 얌전히 받아먹으며 기분 좋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어머니.”

그러자 칼라일이 커다란 손을 그녀 앞에 내밀며 물었다.

“손…… 잡아도 돼요?”

“응? 손?”

겨우 손 한번 잡는 게 뭐가 문제냐는 듯, 아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칼라일의 손을 꽉 붙잡았다.

“손쯤이야 그냥 잡아도 돼.”

따뜻하게 감겨 오는 온기에 칼라일은 뺨을 붉히며 고개 숙였다. 숙맥 같은 모습에 아벨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푸흐…… 바보, 집에서는 잘만 잡으면서.”

아벨라가 그렇게 말하며 장난치듯 붙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었다. 칼라일은 기꺼이 휩쓸려 주면서도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집은…… 저희 둘뿐이잖아요.”

“응? 그게 왜?”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보니까…….”

칼라일이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그…… 오해받을까 봐…….”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아벨라는 뒤늦게서야 뜻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괜찮아, 상관없어.”

“정말요?”

“응.”

“다행이다…….”

칼라일이 눈을 접어 웃으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어머니께서 싫어하실 줄 알았어요.”

그는 괜히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혹시 또 제가 어머니를 곤란하게 만들까 봐…… 그래서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는 묘한 기분에 빠졌다. 겨우 손잡는 게 뭐라고, 제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벨라는 제 행동들을 되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평소 칼라일은 별다른 흑심 없이 천진하게 저와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할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늘 발작하듯 밀어내곤 했었다.

‘눈치를 볼 만도 하구나…….’

그런 행동들이 쌓이고 또 쌓여, 지금의 칼라일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가슴 한편이 무거워졌다. 아벨라는 씁쓸하게 웃으며 칼라일을 바라봤다.

“괜찮아, 이런 것 정도는 마음대로 해도 돼.”

“정말요?”

“응, 물론이지.”

아벨라의 말에 칼라일이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더 되묻기까지 했다.

“기뻐요, 정말로…….”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너무 기쁜 나머지 멋대로 튀어나오려는 귀와 꼬리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너무 기뻐서…… 꼬리가 멋대로 튀어나올 뻔했어요.”

“그 정도야?”

“네, 정말…… 정말로 기뻐요. 앞으로 매일 어머니랑 손잡고 걸을 거예요.”

한 손엔 밀가루를, 한 손엔 아벨라의 손을 잡은 칼라일은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따금 아벨라가 먹으라며 입에 물려 주는 닭꼬치도 맛있었다.

현재 칼라일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어찌나 행복한지, 이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적어도 웬 놈팡이가 아벨라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사람들 틈에 섞여 시장을 둘러보던 두 사람의 귓가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정확하게는 칼라일에게만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어, 아벨라?”

낮지만 조금은 가벼운 듯한 목소리였다.

“아벨라 맞지?”

게다가 서슴없이 아벨라의 옷을 붙잡는 경박함까지.

아벨라보다 더 빠르게 뒤를 돌아본 칼라일은 허락 없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려는 사내를 밀쳐 냈다. 그러고는 아벨라를 보호하듯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칼라일이 본능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눈을 가늘게 뜨며 위협적으로 사내를 쏘아보기도 했다.

비쩍 마른 몸. 주근깨 가득한 얼굴. 푸석푸석한 갈색 머리. 오늘만 해도 길에서 열 번도 더 본 듯한 흔한 얼굴의 남자였다.

“누구신데 허락도 없이 손을 막 뻗습니까?”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가 명백히 불쾌함을 담고 뱉어졌다. 그러자 남자는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아, 그, 그게 저는 그…….”

“어머, 에녹?”

그런 그를 알아본 건, 애석하게도 아벨라였다.

“세상에, 유명한 수도 귀족가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어?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고?”

칼라일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손뼉까지 치며 에녹이라는 남자를 향해 반가움을 표하는 아벨라의 모습에 방금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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