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43화 (44/82)

<043>

이제 불안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에 아벨라의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아무리 정신없는 와중이래도 아벨라는 시장에서 밀가루 사듯 쉽게 쉽게 대답해선 안 될 말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가, 잠시만.”

아벨라가 쥐고 있던 꼬리를 슬그머니 놓으며 칼라일을 응시했다.

“그런 건…… 그러니까…….”

그녀는 혹 칼라일이 상처받을까 봐 최대한 돌려 말하기 위해 뜸을 들였다. 하지만 마땅한 돌림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 나보다는 미래에 아가가 사랑할 여자와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입을 연 아벨라가 칼라일을 바라봤다. 역시나 그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겨우 나아지나 싶었던 칼라일의 안색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예상했던 대답…….’

칼라일이 쓰게 웃으며 눈을 피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았어요.”

아벨라에게 직접적으로 제 속마음을 내보이며 고백한 것도 아닌데, 칼라일은 어딘지 속이 불편해졌다. 명치 쪽이 지끈거리면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분명 예상했던 답변임에도, 아벨라의 입으로 직접 듣고 나니 체감이 달랐다.

“……결론은 거절하신다는 거죠?”

칼라일이 꼬리와 귀를 힘없이 떨구며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탓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의기소침해진 그의 모습에 아벨라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아가,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겨우겨우 입을 뗀 아벨라가 다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네가 먼 훗날 후회할까 봐. 지금이야 네 세상에 나밖에 없다지만, 나중엔 아닐지도 몰라.”

나긋하게 설명하려는 그녀의 말에 칼라일은 어딘지 속이 비뚤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날 선 대답을 뱉고 말았다.

“그렇게 되길 바라시는 건 아니고요?”

“무슨 소리야, 그럴 리 없잖아!”

놀란 아벨라가 곧장 반박했지만 칼라일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살짝 구겨진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기대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저 같아도 몸 하나 성치 못한 짐승 새끼랑 삶을 공유한다는 건 끔찍할 것 같아요.”

“칼라일!!!”

“저 같은 다리 병신이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도 불쾌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요즘 사는 게 안락해서 깜빡 잊고 있었나 봐요.”

칼라일은 제 말이 아벨라를 속상하게 만들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일부러 그녀를 몰아붙였다.

“죄송해요, 못 들은 얘기로 해 주세요.”

그렇게 말을 하는 칼라일의 눈가는 물기로 축축해져 있었다. 말을 뱉는 입술도 파리하게 떨렸다. 아벨라는 칼라일의 손을 깍지 끼워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정말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속상하게 왜 그렇게 말해. 응?”

“딱히 틀린 말도 아닌걸요.”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그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투정만 부리고…… 죄송해요. 저 같은 걸 거둬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히 생각해야 하는데…….”

칼라일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결국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게 처연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정말…… 죄송, 흑, 죄송해요…….”

좁은 침실 안이 애달픈 울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의 눈물을 본 아벨라는 당황하여 이도 저도 하지 못했다. 그저 울음을 참 위해 꽉 쥐어진 주먹 위로 손을 덮을 뿐이었다.

“칼라일, 울지 마. 응?”

아벨라가 눈가를 닦아 주며 달래 보아도 도통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칼라일은 우는 제 얼굴을 보여 주는 게 수치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가며 아벨라의 손길을 피했다.

“……엄마.”

한참을 훌쩍이던 칼라일은 겨우겨우 눈물을 닦아 내고 울음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것 같아요.”

“뭐?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곁에 있으면 계속…… 믿고 의지하게 돼요. 그렇게 마음 편히 믿고 있다가…… 엄마를 잃으면 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그의 어깨가 무력하게 처졌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상처받을 일 없게…….”

“안 돼, 싫어.”

칼라일의 뒷말을 예견한 아벨라가 말을 가로챘다. 어느새 아벨라의 눈가에도 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내가 늘 말했잖아. 너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그녀의 눈을 본 칼라일 또한 당황했다. 아벨라가 눈물까지 흘릴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아벨라는 눈물 탓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럼에도 칼라일을 똑바로 마주했다.

“네가 말한 그 방법이면 돼? 그럼 정말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거야?”

칼라일은 알지 못했지만, 아벨라에게 그는 상상 이상으로 소중한 존재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쳇바퀴 같은 삶을 살던 아벨라의 일상을 따스함으로 물들여 준, 믿고 의지할 연인이나 가족 하나 없어 쓸쓸하던 그녀의 세상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소중한 존재.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었다.

제 손짓, 눈짓, 말투 하나하나에 울고 웃는 맹목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 단지 그를 이성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아벨라 또한 그 못지않게 칼라일을 아끼고 사랑했다.

이제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는 괜찮아. 상관없어. 원한다면 그 방법을 사용해도 좋아. 그저 혹시라도 먼 훗날 네가 후회할까 봐 그랬어. 이건 진심이야.”

그 말에 칼라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마주한 분홍빛 눈동자는 제법 결연했다. 잠시 눈을 맞췄던 칼라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응, 정말 괜찮아. 그러는 칼라일 너야말로 괜찮은 거 맞지?”

칼라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아벨라는 너른 등을 토닥이며 이제 무얼 하면 되냐는 듯 칼라일을 바라봤다. 그러자 칼라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제가 말한 방법을 사용하려면…….”

“응, 어떻게 하면 되는데?”

아벨라의 되물음에도 칼라일은 입술만 달싹일 뿐. 쉬이 다음 말을 뱉지 못했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벨라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라일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한참이나 미간을 좁혔다 풀며 엄한 입술만 짓씹길 반복했다.

“그, 그게…… 그…….”

“그게 그?”

집요하게 저를 좇는 아벨라의 눈을 피하며, 칼라일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맞춤……을 해야 하는데…….”

“이, 입맞춤?”

놀란 아벨라가 반사적으로 제 입술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라일과 입맞춤이라니. 그가 어릴 때부터 봐 왔던 아벨라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그녀의 속마음을 읽은 칼라일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자, 잠깐이면 돼요! 그…… 각인을 하는 동안만요. 물론 저도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아벨라는 여전히 난감하다는 얼굴이었다.

“이게 그…… 원래는 보통 평생을 함께할 반려끼리 사용하는 거다 보니…….”

“그, 그렇구나…….”

“……네, 죄송해요.”

칼라일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부담스러워하실 게 분명해.’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뱉었다. 한데 그의 예상과 달리 아벨라는 꽤 확고했다. 대뜸 조그마한 손이 칼라일의 뺨을 쥐더니 숙인 얼굴을 똑바로 들게 만들었다.

“그거……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거야?”

칼라일은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싶어 잠시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얼빠진 눈을 두어 번 끔뻑였다.

바보 같은 얼굴의 칼라일과 달리, 아벨라는 의욕이 넘쳐 보였다. 칼라일은 쿵쾅이는 심장을 달래며 입을 벙긋거렸다.

“하, 할 수는 있는데…….”

“그럼 하자. 지금 당장.”

저돌적인 그녀의 모습에 칼라일은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를 뻔했다. 하지만 입 안 여린 살을 세게 씹어 비죽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도 억지로 내렸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지, 지금 당장요? 정말 괜찮으세요?”

물론 안 괜찮다 해도, 여기까지 온 마당에 물러설 생각 따위 없었다. 칼라일은 시커먼 속을 숨기며 느리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응, 괜찮아. 아가, 너만 괜찮다면.”

다행히 돌아온 건 흔쾌한 아벨라의 허락이었다.

순간 흥분한 칼라일은 곧장 입술을 맞부딪칠 뻔했다.

쿵쾅쿵쾅 날뛰기 시작한 심장을 달래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세상에, 반려 각인을 엄마가 허락해 주시다니. 그는 아직도 이게 꿈인지 생신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어머니께 각인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칼라일이 뺨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마치 첫날밤을 앞둔 숫총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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