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42화 (43/82)

<042>

칼라일은 괜히 애꿎은 아벨라의 배만 살살 문지를 뿐이었다.

언젠가 이 평평한 뱃속에 저와 그녀의 아이가 품어지길 바랐다. 아벨라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게, 그녀의 완전한 사랑과 함께 그 결실을 원했다.

물론 밤사이 아벨라 몰래 이런 음험한 행동을 하면서 사랑을 논한다는 게 욕심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지 몰랐다.

상대를 배려하는 법도, 사랑을 주는 법도, 감정을 나누는 법도, 두터운 신뢰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법도. 모두 그에겐 낯선 것들이었다.

아벨라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버림받지 않기 위해, 평생 함께할 수 있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그녀의 의사 상관없이 멋대로 관계를 이어 나가고, 멋대로 반려의 각인을 새기는 것뿐이었다.

칼라일은 매일같이 산에 가서 아벨라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따다 주는 것만으로는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호감과 애정은 가능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한 사랑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역시 아이가 필요해.’

칼라일이 그렇게 생각하며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감았다. 오늘따라 유독 몸이 무거운 기분이었다.

* * *

-뒷다리가 병신이라 그런가? 쟤는 짝짓기도 인간 모습으로 하려고 하네.

-아니, 그 전에 저거한테 보지 대 주는 암컷이 있다고? 나는 그게 더 놀랍다.

-잘 봐, 동족이 아니라 인간 여자야. 도태된 열성 종자한테 딱 어울리는 반려지.

-그런데 반려 맞아? 인간들은 늑대 한 마리만 잡아다 팔아도 한 계절은 배부르게 살 수 있다던데…….

-듣고 보니 그렇네. 아무리 열등한 인간이라지만 저런 다리 병신을 괜히 집에 들일 리 없잖아. 안 그래?

-어이, 들었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 여자 사실은 네 털과 가죽을 몽땅 벗겨 팔아 버리려는 속셈일지도 모를 테니까. 아니, 애당초 접근한 이유도 이쪽에 더 가까울걸.

-잘 생각해 봐. 거무죽죽한 털에 재수 없는 붉은 눈깔 그리고 절뚝거리는 다리까지. 그 여자가 널 좋아할 이유가 조금이라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정말?

-부디 인간 시장에 고깃덩이로 진열되지는 말아 줘. 어쩌다 너 같은 것과 동족으로 엮인 우리까지 수치스러워지니까.

익숙한 목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털 색. 익숙한 덩치들.

그들 틈에 놓인 칼라일은 무어라 대꾸조차 못 한 채 몸을 웅크리고 앞발 사이로 고개만 푹 처박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조롱은 멈추지 않았고, 칼라일은 점점 더 작아져만 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익숙한 상황임에도, 해일처럼 덮쳐 오는 수많은 감정은 아직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킬킬거리는 비웃음 소리. 그 속에서 언뜻언뜻 들려오는 다리 병신이라는 단어. 칼라일은 그저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라일.

하지만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칼라…….

드문드문 희미해져 가는 목소리들이 기어코 이름을 입에 담았다.

‘싫어…….’

내 이름 부르지 마.

-칼라…… 일…….

이건 우리 엄마가 지어 준 이름이야. 왜 갑자기 안 어울리게 이름을 부르고 그래.

-칼…… 라일…….

더러운 너희 입에 올리지 마. 불쾌해, 전부 물어뜯고 싶을 만큼. 그냥 다리 병신이라고 해, 제발…….

왜인지 칼라일은 그들이 저를 다리 병신이라 부를 때보다, 아벨라가 지어 준 소중한 제 이름을 입에 담는 게 더 불쾌했다. 차라리 조롱하고 비웃는 게 더 나았다. 저 역겨운 목소리로 소중한 이름이 담기는 것에 비하면…….

-칼라일!

“좆같으니까 평소처럼 다리 병신이라고 부르라고!!!”

칼라일의 입으로 큰소리가 토해졌다. 불시에 눈이 번쩍 뜨인 칼라일은 거친 숨을 뱉으며 흐릿한 시야를 잡기 위해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아, 아가……?”

하지만 그런 칼라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들려온 건 아벨라의 목소리였다.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자 놀란 얼굴로 저를 보는 아벨라가 눈에 들어왔다.

“어, 어머니…….”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칼라일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을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꽉 막혀 버렸다.

한데 아벨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나쁜 꿈이라도 꿨니?”

저를 향해 큰소리치는 칼라일을 봤음에도, 아벨라는 눈 하나 꿈쩍 않고 그를 달래려 했다.

“어쩐지 늦잠 자는 것도 그렇고, 자는데 표정도 너무 안 좋더라니……. 어쩜 좋아, 우리 아가…….”

“저, 저는…… 저는 그게……. 그러니까 그게…….”

어버버 어버버 제대로 말 한마디 못 뱉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아벨라가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칼라일.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그러니 괜찮아, 아무 말 안 해도 돼.”

심장이 벌렁거렸다.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느리게 두어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식은땀으로 흥건한 제 몸과 벌벌 떨리는 손끝. 그리고 그런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아벨라.

아벨라는 두 팔 벌려 서슴없이 칼라일을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저보다 한참이나 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쉬이, 괜찮아. 우리 아가. 괜찮아.”

그녀는 정말 아이를 달래듯, 산발이 된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에 허공에서 떨리던 붉은 눈동자가 점차 잔잔해졌다. 불안감 때문인지 벌벌 떨리던 몸도, 숨 쉴 때마다 밀려오는 익숙한 살 내음에 점점 가라앉았다.

“그저 꿈일 뿐이야.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빈틈없이 그를 안은 아벨라는 속상함을 숨기며 말했다. 칼라일은 아무 말 없이 아벨라의 허리를 꽉 그러안을 뿐이었다.

‘왜 하필 그런 꿈을…….’

칼라일이 눈을 질끈 감으며 심호흡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은데 오늘만큼은 어려웠다. 칼라일은 아벨라의 품에 힘없이 기대어 안겼다.

“……어머니.”

“응, 아가.”

“……사랑받고 싶어요.”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 말에 아벨라는 잠시 몸을 떼어 내고, 눈높이를 맞추며 칼라일의 양 뺨을 쥐었다.

“사랑해, 칼라일.”

“…….”

“진심이야,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어.”

아벨라의 손이 부드럽게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뺨을 지분거렸다.

“불안해하지 마. 난 항상 아가 곁에 있을 테니까.”

흔들림 없이 마주한 그녀의 분홍빛 눈동자는 어딘지 결연해 보이기도 했다. 그에 칼라일은 눈을 감으며 다시금 아벨라에게 얼굴을 파묻었다.

“……어머니.”

“응.”

“왜 계속 불안한 건지 모르겠어요.”

그 질문에 아벨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의미 없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옅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칼라일은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아이처럼 어리광부리듯 뺨을 비볐다. 덩치는 산만 했으나, 하는 짓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에 아벨라는 가슴이 지끈거리는 감정을 느꼈다.

“아가가 불안하지 않게 엄마가 더 노력할게.”

그래서 그런 말을 하며 평소처럼 칼라일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날은 무언가 반응이 달랐다.

겨우 진정됐던 붉은 눈이 이채를 띠며 번뜩였다.

“정말요?”

“응, 물론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벨라는 그저 해맑게 웃기만 했다.

칼라일의 머리 위로 비죽 솟아난 귀와 뒤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포슬한 꼬리는 퍽 무해해 보였다. 시커먼 그의 속과 달리.

칼라일은 잠시 말을 뱉기 전 뜸을 들였다. 그러고는 괜히 널찍한 어깨를 풀 죽은 것처럼 떨구며 슬그머니 아벨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방법?”

아벨라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칼라일은 괜스레 꼬리로 그녀의 손을 간질이며 머뭇거렸다.

“네, 엄마랑 제가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평생이라는 단어에 담긴 무게감과 달리, 칼라일의 꼬리는 방정맞게 아벨라의 몸 주변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시커먼 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털들이 흩날리는 만큼, 아벨라의 정신도 분산되고 있었다.

“으음, 뭔데?”

“저희 종족들에겐 한 명의 상대를 지정해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삶을 공유한다고?”

진지해야 할 대화임이 확실했으나, 아벨라는 팔에 휘감긴 칼라일의 꼬리를 장난스럽게 매만지며 대꾸했다. 아까부터 정신없이 흔들리는 포슬한 꼬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네, 그러니까…… 음……. 저도 잘은 모르는데, 저와 엄마의 삶이 연결되는 거예요. 엄마의 숨이 끊기면 저도 끊기는…… 그런 건데…….”

물론 외에도 반려가 생긴 후로 나타나는 몸의 변화는 많았다. 주기적인 발정 증상이라든가, 다른 수컷의 정액으로는 임신할 수 없게 되는 것 등.

단순히 삶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칼라일은 그런 것들을 아벨라에게 설명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칼라일이 묘하게 젖은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엄마랑 이렇게 삶을 공유하고 나면…… 이제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