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아벨라는 생각할 것도 없이 칼라일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털로 북실북실한 그의 목덜미를 와락 그러안았다.
‘분명 상처받았을 거야.’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벨라는 가슴이 지끈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서 있는 칼라일을 달랬다.
“괜찮아, 아가. 저런 말 신경 쓰지 마.”
“아벨라, 잠시만……!”
칼라일을 달래는 데 급급한 아벨라를 보며 에샤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벨라는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에샤, 방금 했던 말은 너무 실망스럽다.”
“아니야, 나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말마따나 진짜 가족은 아니지. 하지만…… 굳이 그렇게 아픈 부분을 후벼 팠어야 했니?”
칼라일을 감싸 안은 아벨라의 팔은 분노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칼라일에 대해 미리 말 못 한 건 미안해. 너도 알겠지만 쉽게 떠들고 다닐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아벨라…….”
“그렇다고 해서 네가 칼라일에게 막 대해도 되는 건 아니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벨라는 칼라일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떨결에 아벨라와 집 안으로 들어온 칼라일은 입에 문 블루베리 바구니를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안으로 들어온 아벨라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칼라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에샤의 험담을 하며 열을 내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제 자리에 서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오히려 걱정이 들기 시작한 건 칼라일 쪽이었다. 칼라일은 말없이 한참이나 서 있는 아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낑…….”
칼라일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콧잔등으로 블루베리 가득한 바구니를 그녀의 발치로 밀어냈다.
하지만 아벨라는 가냘픈 어깨를 애처로이 떨기만 할 뿐, 분홍빛 눈동자가 다정하게 칼라일을 향하는 일은 없었다.
더욱 초조해진 칼라일은 아벨라에게 다가가 제 몸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북슬북슬 따뜻한 털뭉치가 애교부리듯 치대 오자 그제야 아벨라가 반응했다.
“흑…… 아가…….”
가만히 굳은 채 무얼 하는 건가 했는데. 아벨라는 울고 있었다.
푹 숙인 고개가 들리고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발갛게 부어오른 그녀의 눈가를 본 칼라일은 당황을 금치 못하며 급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아벨라보다 머리 하나는 커진 칼라일이 허리 숙여 눈높이를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어머니, 왜 울고 그러세요.”
커다란 손은 뽀얀 뺨을 감싸 안고 흐르는 눈물을 다정히 닦아내 주었다.
“울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다는 말에도 아벨라는 울음을 멈추긴커녕 오히려 더욱 서럽게 훌쩍일 뿐이었다. 자상한 손길에 눈물샘이 무너져 버린 그녀는 더욱 소리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미안…… 흑, 미안해……. 나는, 흑, 에샤가 저런 말을 한 줄도 모르고…….”
아벨라는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침부터 저를 위해 블루베리와 버섯을 따겠다며 산을 오른 칼라일인데……. 그런 칼라일이 제 친구에게 모진 말을 듣고 있을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칼라일이 에샤를 불편해하는 것 같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몰랐어, 바보처럼.
아벨라가 제 눈물을 닦아 주는 커다란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어 놓으며 뺨을 비볐다.
“미안해……. 흑, 칼라일, 정말…… 흡, 흐윽, 미안해, 너무, 미안해…….”
“어머니가 죄송해하실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정말 괜찮은걸요?”
칼라일은 일부러 능청스럽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아벨라에게는 더욱 속상할 뿐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울음 탓에 말을 뱉기가 힘들었다. 아벨라는 끅끅 서러운 숨소리만 흘리며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도저히 칼라일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흑, 흐윽…….”
이렇게 무능력하게 울고 있을 때가 아닌데…… 울어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칼라일이잖아.
아벨라는 울기만 하는 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의젓하게도 칼라일은 그런 그녀를 보며 두 팔을 벌려 자신의 품에 단단히 가두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칼라일…… 흡, 칼라일…….”
“어머니가 이렇게 눈물 흘리시는 게 더 속상한걸요.”
아벨라의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칼라일은 잘게 떨리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다정히 저를 안아 주는 따뜻함에 아벨라는 기어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흐흑, 그런, 흡, 그런 말에 상처…… 흑, 받지 마, 정말…… 나는 정말 너를 가족으로, 흑 생각하고 있고…… 흑.”
아벨라가 무어라 주절주절 말을 뱉어 댔으나,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칼라일은 귀를 쫑긋 세워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었다.
큼직한 손이 허리까지 내려온 분홍빛 머리칼을 느리게 쓸어 넘겨 주며 조그마한 여체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가 우시는 걸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칼라일의 눈이 어딘지 의미심장한 빛을 띠었다.
그는 울음이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벨라를 보며 자리를 옮겼다. 한 손으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그녀를 공주님처럼 품에 안고, 성큼성큼 넓은 보폭으로 빠르게 침대로 향했다.
제게 안겨 우는 아벨라를 보다 보니, 이미 아래는 잔뜩 부풀어 오른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벨라에게 들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칼라일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따라 누웠다. 그러자 아벨라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칼라일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흑, 흐윽…….”
“쉬이, 어머니 그만 울어요.”
“미안해…… 흑, 한심하게 울기나 하고…….”
“한심하다뇨, 조금도 한심하지 않은걸요.”
오늘은 어딘지 평소와 반대의 상황이 된 두 사람이었다.
칼라일은 아벨라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아벨라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 흘리느라 바빠 보였다.
그렇게 아벨라는 칼라일의 품에 안겨 한참을 더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칼라일의 가슴팍이 눈물로 흥건해졌을 때쯤이 되어서야, 아벨라는 겨우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지셨어요?”
“……응, 흑, 고마워.”
“고맙다뇨, 전 한 것도 없는걸요. 오히려 저야말로…… 감사해요.”
“무슨 소리야, 흑, 나한테 고마워할 게 뭐가 있다고…….”
“제 편…… 들어 주셨잖아요.”
칼라일이 나긋나긋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벨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보다 친구분과 더 오래 알고 지내셨을 텐데…… 그것만으로도 저는 너무 감사해요.”
“에샤가 아무리 내 오랜 친구라 해도, 흑, 내 가족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야.”
물론 칼라일 또한 에샤의 말에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아벨라가 든든한 가족이자 아군 그리고 보호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한 그는 멋대로 쿵쾅대는 마음을 달래느라 한참이나 애를 먹었다.
‘물론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실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으니 다행이었다. 칼라일은 저보다 한참 작은 아벨라의 손에 깍지를 끼우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정말 걱정 않으셔도 돼요. 저 상처 안 받았어요.”
“……거짓말.”
“물론 상처받을 뻔하긴 했지만…… 괜찮아요. 엄마가 이렇게 저를 감싸 주셨는걸요.”
칼라일은 괜스레 털이 풍성한 꼬리를 꺼내고는 간지럽히듯 아벨라의 허리에 휘감았다.
“그러니까 너무 속상해 말아요. 아, 오늘 아침에 산에서 블루베리를 잔뜩 따 왔는데 모처럼 같이 파이라도 만드는 건 어때요?”
칼라일은 언젠가 제 몸집이 작았을 적, 아벨라가 파이 만드는 법을 알려 주겠다며 함께 밀가루 반죽을 조물거리던 날을 떠올렸다.
정작 그는 고기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파이 따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아벨라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말에 요리법을 외우려 노력했었다.
그 덕에 지금은 꽤 그럴싸하게 파이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 그리고 버섯도 좀 챙겨 왔어요. 얼마 전에 구운 버섯이 드시고 싶다 하신 게 생각나서…….”
칼라일이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아벨라의 눈치를 살폈다. 아벨라의 눈가는 어느새 다시금 물기로 축축해지고 있었다.
“흑, 흐윽…… 칼라일…….”
늘 어른 같던 아벨라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칼라일은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조금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엄마. 왜 또 울고 그러세요.”
그가 자상한 손길로 아벨라의 눈가를 지분거렸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아벨라를 뒤덮었다. 저밖에 모른다는 듯 구는 맹목적인 붉은 눈동자도, 요염한 입꼬리도, 포슬한 꼬리도.
감히 이 세상천지 어디에 이렇게 따뜻하고 천진한 늑대가 있을 수 있을까.
우습게도 아벨라는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호시탐탐 저를 노리는 늑대의 품에 몸을 맡겼다.
칼라일은 기꺼이 그런 아벨라를 붙잡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