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와 창으로 쏟아지는 반짝이는 햇살.
오늘은 모처럼 가게 휴무일이었다.
잠에서 깬 칼라일은 하품을 크게 한 번 하고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아벨라는 아직 꿈나라에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기 위해 뒷다리를 뒤로 쭈욱 뻗으며 고개를 젖혔다. 절로 끙, 앓는 신음이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양쪽 뒷다리를 모두 푼 칼라일은 아벨라가 잠에서 깨기 전에 작은 바구니 하나를 입에 물고 급히 집을 나섰다.
모처럼의 쉬는 날인 만큼, 아벨라가 좋아하는 과일들을 한가득 구해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칼라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두막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누군가가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 * *
불편한 다리로도 능숙하게 산을 오른 칼라일은 잘 익은 블루베리 덤불을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울리지 않게 초롱초롱 이채를 띠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거!’
칼라일이 꼬리를 마구 흔들며 블루베리 덤불을 향해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을 뿐인데, 단내가 훅 끼쳐 왔다.
칼라일은 검은콩 같은 코를 씰룩이며 덤불 중에서도 가장 잘 익은 블루베리들만 쏙쏙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위협적으로 블루베리를 뜯어 가는 칼라일 탓에, 이른 아침부터 열매를 따 먹으러 온 소동물들은 근처 나무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지만, 원흉인 그는 모르는 일이었다.
동물들은 혹여 자신들이 늑대의 아침밥이 될까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정작 칼라일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분주했다.
지난밤, 제 욕심대로 문지르고 들쑤신 아벨라의 음부 걱정으로 가득했다.
어젯밤 정도야, 평소에도 늘 하던 정도였으니 괜찮을 게 분명하건만. 그럼에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한 차례 피를 본 후로 더욱 조심스러워진 그였다.
양껏 블루베리를 뜯은 칼라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다가, 잘 익은 버섯들도 발견했다.
언젠가 아벨라가 구운 버섯을 먹고 싶다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칼라일은 잽싸게 버섯 또한 캐기 시작했다.
커다란 늑대의 앞발이 섬뜩하게 발톱을 세우고 버섯에 가까워졌다. 날카로운 발톱은 사냥감의 살점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몹시 위협적이었으나, 정작 그 발톱이 향한 곳은 버섯 주변의 흙이었다.
팍, 팍, 소리와 함께 칼라일이 버섯 주변 흙들을 정성껏 파냈다. 늑대가 버섯을 캐기 위해 앞발을 쓰다니. 모습이 좀 우스웠지만 칼라일은 아무렇지 않게 파 낸 버섯을 입으로 물어 바구니 위로 툭 던져 넣었다.
블루베리와 버섯으로 가득해진 바구니를 보며 칼라일이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블루베리 파이를 굽고, 구운 버섯과 스튜를 만들어 놓으면 잠에서 깬 아벨라가 기뻐할 게 틀림없었다. 귓가에는 벌써 저를 칭찬할 아벨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산을 내려가는 칼라일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불편한 왼쪽 다리쯤이야, 더 이상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오는데, 오두막집 인근에서 불쾌한 기척이 느껴졌다.
바구니를 입에 물고 있던 칼라일은 걸음을 늦추며, 예리하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잡혔다.
에샤였다.
‘빌어먹을…….’
저 여자가 이 시간에 여기는 왜…….
늦어졌던 칼라일의 걸음이 다시 조급해졌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아벨라는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눈치였다. 칼라일이 달려가는 중에도, 에샤가 몇 번 더 노크를 했지만 안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해의 위치를 확인한 칼라일은 아직 아벨라가 잠에서 깰 시간이 아닌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지난 저녁 몰래 그녀에게 먹였던 네프라 약초가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
그저 욕정을 해소하기 위해 먹였을 뿐인데, 뜻밖의 행운이었다.
‘어머니가 깨기 전에 돌려보내야 해.’
칼라일의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으로 물들었다. 아벨라와 마주쳤다간 그녀가 무슨 망언을 뱉을지 모르니, 제 선에서 돌려보내야 했다.
에샤는 칼라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다시 한번 노크를 하려 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컹! 울음소리가 한 번 들려왔다.
“헉……!”
집채만 한 늑대가 제 쪽으로 달려오고 있음을 확인한 에샤는 그 자리에 얼어 버렸다.
늑대의 잔뜩 찡그려진 콧잔등과 노골적으로 드러낸 송곳니가 위협적이었다. 입에 물고 있는 블루베리 가득한 바구니가 조금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맹수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
한데 겁에 질려 바들거리던 에샤는 의외로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놀라 입을 떡하니 벌리더니, 지금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저를 향한 시뻘건 눈동자와 시선을 맞췄다.
“너, 너…… 그때 그 애구나?”
에샤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칼라일은 부정도, 긍정도 않은 채 그저 경고를 담은 목울림 소리만 냈다.
과정에서 물고 있는 바구니까지 확인한 그녀는 확신했다. 눈앞의 늑대가 칼라일이라는 것을.
에샤는 완전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칼라일을 바라봤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벨라 곁에서 떠날 생각이 없나 봐?”
“…….”
“동족들을 죽인 것처럼, 아벨라에게도 해를 끼치려고?”
에샤의 입에서 동족이 언급되자, 칼라일이 움찔했다. 기분이 나빠진 건지, 안 그래도 구겨져 있던 콧잔등이 더욱 구겨졌다.
‘역시, 그 멍청한 개새끼가 인간에게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어.’
끝까지 한심한 새끼. 칼라일은 레든을 떠올리며 이 상황에 대한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에샤는 겁도 없이 그런 칼라일에게 엄포를 놓듯 말했다.
“경고하는데…… 아벨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칼라일에겐 그저 우스운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내가 없을 때 찾아온 걸까.’
칼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근처에 숨어 지켜보고 있던 건가.’
생각보다 더 귀찮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직이 한숨을 토한 칼라일은 할 말 다 했으면 썩 가 보라는 듯 지긋이 에샤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언쟁으로 시간을 흘리고 싶지 않아 모습 또한 일부러 인간으로 바꾸지 않았다. 괜히 그녀와 말다툼을 하다 아벨라가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다 들었어. 너희…… 애당초 새끼 늑대도 아니었다면서?”
그런데 이어진 에샤의 말에 칼라일이 멈칫했다. 칼라일은 입에 물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어디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 매서운 눈으로 에샤를 응시했다. 그 눈에도 에샤는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오가 전부 말해 줬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잠시 어려졌던 것뿐이라…….”
한데 에샤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칼라일이 말을 가로챘다. 컹! 크게 짖는 소리에 에샤의 뒷말이 묻혀 버렸다.
그는 마치 이 이상 씨불이지 말라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며 그르르, 그르르…… 위협적인 소리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에샤가 주먹을 세게 말아쥐며 중얼거렸다.
“하…… 웃기지도 않아.”
에샤는 칼라일이 정성껏 챙겨 온 블루베리와 버섯 바구니를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그 짧은 시간 어리광 좀 받아 줬다고 아벨라가 진짜 네 엄마라도 된 거 같았어?”
그런데…… 운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에샤의 시선이 바구니를 향하기 무섭게, 아니. 에샤의 입이 다시 한번 열리기 무섭게. 굳게 닫혀 있던 오두막집 문이 열렸다.
“정신 차려, 저번에도 말했지만 너는 아벨라의 진짜 가족이 아니야.”
끼익, 문소리에 당황한 에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미 칼라일을 향한 모진 말은 입 밖으로 나와 버린 후였다.
오두막집 문이 열리고,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아벨라였다.
아벨라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샤와 칼라일을 번갈아 바라봤다.
“……에샤?”
아침부터 산에 다녀온 듯한 칼라일. 그리고 그런 칼라일에게 폭언을 하고 있던 하나뿐인 제 친구, 에샤.
“너 지금…… 지금 칼라일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어리광, 진짜 엄마, 진짜 가족.
문을 열기 전부터 들려오던 에샤의 큰 언성에 아벨라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얼마 전 제게 안겨 버림받을 일이 없음을 증명받고 싶어 하던 칼라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는 그냥…… 엄마가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어요.
-제 문제인가 봐요. 제가 너무 못나서…… 그래서 항상 엄마한테 버림받을까 봐 겁에 질리고……. 엄마는 늘 제게 과분할 만큼 잘해 주시는데…….
-저희……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가족인 거죠……? 버림받을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거 맞죠?
그날, 아가가 갑자기 왜 그런 불안감에 휩싸인 건가 했는데…… 하나뿐인 친구가 원흉이었다니.
아벨라의 얼굴에 실망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