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33화 (34/82)

<033>

측은할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에 아벨라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미안함 가득 묻은 목소리로 칼라일에게 속삭였다.

“그럴게. 걱정 마, 아가.”

“정말…… 약속하시는 거예요?”

“응, 약속해.”

그제야 불안정하던 칼라일의 숨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벨라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칼라일의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많이 놀랐지? 미안해.”

“……아니에요.”

그녀의 품에 안긴 칼라일은 생각했다. 우선 급한 불은 꺼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언제 또 찾아올지 몰라.’

가장 좋은 방법은 레든 그 자식과 함께 인간도 처리하는 건데…….

칼라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벨라는 그가 무슨 험한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른 채, 그저 품에서 떨던 안쓰러운 모습의 칼라일만 되새김질하며 속상함을 감추지 못했다.

‘죽이면 어머니가 슬퍼하실 거야.’

하지만 레든만 처리하고 넘어가기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당분간 아벨라 곁을 맴돌며 에샤를 유의 깊게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불행인지, 다행인지. 칼라일의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벨라가 잠든 밤. 그가 나서서 무언가를 하기 전에, 그쪽에서 먼저 칼라일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오두막집 근처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벨라와 비슷한 체격의 인간 여자.

기민한 짐승의 감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칼라일은 힐긋, 아벨라를 살폈다. 새근새근 침실에 울려 퍼지는 숨소리. 아벨라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확인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아벨라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오밤중이나 다름없는 이런 시간에, 아벨라를 찾아왔을 리는 없으니 그녀가 찾는 게 저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칼라일은 짜증으로 가득한 붉은 눈동자를 숨길 생각도 않은 채, 에샤가 서성이고 있는 곳으로 발을 놀렸다.

“힉……!”

기척을 죽인 칼라일이 불시에 에샤 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놀란 에샤는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며 쿵쾅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칼라일을 바라봤다.

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둘은 노골적으로 서로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너, 너…… 정체가 뭐야.”

에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칼라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내 정체가 무엇인지, 빤히 알면서 굳이 확인하겠답시고 여기까지 찾아오셨을 리는 없고.”

“아벨라에게서 떨어져.”

“그건 곤란한데요.”

칼라일이 빈정대듯 말했다. 아벨라의 가까운 친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로 어떻게든 ‘요’자를 붙여 말하고 있었지만, 행동거지도 말투도 표정도 온통 짜증으로 가득했다.

“레오에게 다 들었어!”

“그런데도 제가 두렵지 않으신가 봐요?”

그제야 에샤가 잠시 몸을 굳혔다. 그런데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용케도 대답을 한다.

“왜,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게?”

도발적인 말에 칼라일이 눈썹을 씰룩였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매섭게 불어닥쳤다.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던 내가 없어지면? 그럼 아벨라가 어떻게 반응할 거 같아?”

잘게 떨리는 눈동자와 끝이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 칼라일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에샤가 겁에 질려 있다는 걸.

그녀는 자신이 뱉는 말에 확신이 없었다. 본인의 얄팍한 추리와 그 결론으로 도박을 하는 것뿐이었다.

‘빌어먹게도 그 도박이 성공한 판이라 문제지.’

칼라일은 입매를 비틀며 잔웃음을 흘렸다. 분했지만 제가 패배한 판이라는 걸 쉽게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당신과 그 개새끼의 목까지 전부 물어뜯고, 내가 어머니를 데리고 사라질 거란 생각은 못 하나 봐요?”

“……뭐?”

“아니면 인간의 흔적 따위 찾아볼 수도 없는 곳에 어머니를 가둬 둔다든가…….”

“그 가증스러운 어머니 소리부터 집어치워.”

칼라일은 뭐가 문제냐는 듯 능청스럽게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아벨라의 진짜 가족도 아니면서…….”

그 말에 여태 평정심을 유지하던 칼라일의 낯이 험악해졌다. 칼라일은 짐승처럼 낮은 목울림 소리를 내며 눈을 번뜩였다.

만약 눈앞에서 저를 도발하는 이가 아벨라의 하나뿐인 친우가 아니었다면, 진즉 목덜미를 낚아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있어 아벨라는 피가 섞인 진짜 가족보다 더 진짜 같은 존재였다.

“그러는 당신은 뭘 보고 그 개새끼의 말을 다 믿어요?”

분노를 죽이지 못한 칼라일이 빈정대듯 말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화가 억눌려 있었다. 그러자 에샤의 표정에 작은 실금이 갔다. 균열을 알아차린 칼라일은 쉬지 않고 몰아세웠다.

“그놈이야말로 당신한테 거짓을 씨불이고 있는 거면 어쩌려고.”

틈을 파고드는 질문에 에샤가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도박을 할 때와 달리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레오는 내가 잘 알아.”

“한낱 인간 주제에?”

칼라일은 참지 못하고 조소 흘렸다. 종족도 다른 주제에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잘 안다, 모른다를 논하는 건지.

“동족도 아니, 혈육도 배신한 자를 믿는다고? 차라리 토끼가 늑대를 사냥한다는 말이 더 믿음직하겠네.”

칼라일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말을 듣던 에샤는 발끈하며 외쳤다.

“레오가 그랬을 리 없어.”

“당신이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레오를 감싸는 발언에 칼라일이 본능적으로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이로써 칼라일은 에샤의 패 하나를 가져올 수 있었다.

“어머니께 허튼소리 할 생각 말아요. 그럼 당신이 그렇게 아끼는 개새끼의 숨통도 그날로 끊기는 거니까.”

좋은 먹잇감을 찾은 칼라일은 적안을 번뜩이며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달빛에 빛나는 날카로운 송곳니는 여느 때보다 더 매서워 보였다.

저열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평소 아벨라의 앞에서 순하게 웃어 보이던 입매와 사뭇 달랐다. 칼라일은 더 이상 말도 잇지 못한 채 발발 떨기만 하는 에샤를 보며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잠잠하겠지.’

역시 동족이랑 엮이면 뭐하나 되는 일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칼라일은 짜증스럽다는 듯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 * *

침실로 돌아오자 아벨라는 오늘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칼라일은 그에 흡족하다는 듯 눈을 접어 웃었다.

“어머니.”

확인하듯 그녀를 부른 칼라일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기다렸다는 듯 능숙하게 아벨라의 위로 올라탔다.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던지고, 바지 앞섶까지 푼 뒤, 천진한 얼굴을 하고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근육으로 촘촘하게 짜인 몸이 능숙하게 아벨라의 위로 겹쳐졌다.

그러는 중에도 아벨라는 꿈속을 헤매는 중이었다.

칼라일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아벨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살 내음을 만끽하듯 가만히 심호흡하길 반복했다.

흥분감에 멋대로 튀어나온 귀와 꼬리가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렸다.

‘엄마 살 냄새…….’

칼라일의 콧잔등이 씰룩였다. 그에게는 세상 어느 것보다 포근하고 안정감을 주는 체향이었다.

-아벨라의 진짜 가족도 아니면서…….

그러다 에샤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애당초 제게 진짜 가족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깟 피 따위, 섞여 있으면 무얼 하는가. 절름발이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하고 괴롭히던 것들이 과연 ‘진짜 가족’인 걸까?

‘아냐, 내게 가족은 엄마밖에 없어.’

칼라일이 입술을 세게 짓씹으며 더욱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엄마야말로 진짜 내 가족이야.’

하나뿐인 나의 가족, 나의 엄마, 나의 반려. 내게 새로운 삶을 준 나의 세상.

그깟 피가 뭐가 중요한 걸까. 칼라일은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가 어리광부리듯 아벨라에게 연신 몸을 치댔다.

‘난 엄마만 있으면 돼.’

그렇게 생각하던 칼라일의 머릿속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엄마가 내 아이를 배면 되잖아? 그럼 우리는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자 붉은 눈동자에 묘한 이채가 돌았다. 칼라일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잠든 아벨라를 바라봤다.

‘아, 처음은 엄마가 깨어 있을 때 하고 싶었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난 엄마랑 진짜 가족이 되고 싶은 거니까.

그런데 엄마가 내 아이를 배면…… 그럼 이제 난 엄마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겨우 어머니란 호칭이 입에 붙었는데…….’

칼라일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고민했다. 고민하는 동안 그의 꼬리는 즐거운 건지 좌우로 아주 빠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침대 주변에 털이 폭폭 날릴 정도로 도톰한 꼬리를 흔들던 칼라일은 사춘기 소년처럼 뺨을 붉히며 생각했다.

‘그때 되면 우리 아이가 엄마라고 불러야 하니까…….’

칼라일이 마른 침을 삼키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벨……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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