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순간 칼라일은의 표정이 흔들렸다. 에샤 또한 그런 칼라일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에샤는 침착하게 태연한 얼굴로 아벨라에게 인사했다.
“아벨라, 잘 지냈어?”
“나야 별일 없지 뭐, 그나저나 어쩐 일로 가게까지 왔어?”
아벨라는 잠시 앉으라는 듯 가게 구석에 위치한 의자를 빼 주었다. 하지만 에샤는 선뜻 앉지 않았다. 가게 모퉁이에 서 있는 칼라일을 힐끔거릴 뿐이었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할 말? 뭔데? 앉아서 얘기해. 차라도 좀 가져다줄까?”
“아냐, 그럴 필요는 없고……. 잠시 나가서 얘기 괜찮아?”
티 내지 않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칼라일은 몸을 굳혔다.
나가서 얘기라면 지난밤의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아니, 애당초 오늘 가게까지 찾아온 이유도 그 일 때문이겠지.
칼라일은 초조함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야기를 듣고…… 엄마가 날 믿어 주실까?’
믿어 주실 거야. 맞아, 그래야만 해. 분명 그래야 하는데…….
불안했다. 평소 제가 동족에 대해 못 미더워하던 것과 하필 오늘 답지 않게 늦잠을 잔 것까지. 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막아야 해.’
엄마가 어제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칼라일은 약초를 다듬던 과도로 지체할 것 없이 스스로의 손바닥을 그었다.
“아……!”
그러고는 단말마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붉은 핏물이 약초를 쌓아두었던 신문지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자 에샤를 따라 나가려던 아벨라가 놀라 비명을 뱉었다.
“칼라일!!!”
허겁지겁 제게로 달려오는 아벨라를 보며 칼라일이 쓰게 웃었다.
“아, 아파요……. 읏, 실수로 손을 삐끗해서…….”
“세상에, 어쩜 좋아. 깊게 베였잖아……! 괜찮니? 우선 지혈부터 하자. 이리 온!”
덕분에 에샤와 자리를 비우려던 아벨라는 칼라일에게로 온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한 에샤는 문 앞에 서서 눈만 끔뻑였다.
아벨라는 상처 난 곳에 바를 약초를 찾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아벨라를 보며, 칼라일은 한껏 고통스럽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채 밭은 숨을 토해 냈다. 물기 어린 눈망울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잠시 허공에서 에샤와 시선이 마주쳤다. 칼라일은 그 찰나의 순간에 눈매를 살짝 접어 보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눈 깜빡할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하?”
황당한 상황에 에샤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라일은 가볍게 어깨를 한 번 들썩일 뿐이었다.
“아가, 잠시 손 이리 줘.”
아벨라는 그런 두 사람의 신경전도 모른 채, 급히 칼라일의 상처를 치료하기 바빴다. 곱게 빻은 약초가 상처에 뿌려질 때마다, 칼라일은 괴롭다는 듯 몸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으, 아, 아파요……. 따가워요, 엄마…….”
어리광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그런 칼라일의 말에 아벨라가 속상함 섞인 한숨을 크게 한 번 뱉어 냈다.
“미안해, 아가. 날붙이 쓰는 위험한 일은 내가 하는 거였는데…….”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하고…….”
“무슨 소리야. 죄송할 게 뭐가 있니. 응?”
“역시 전…… 쓸모없는 식충이인가 봐요.”
“또 그런다, 또!”
상처에 약초를 바르고, 붕대까지 감은 아벨라는 칼라일의 두 뺨을 움켜쥐고 말했다.
“그런 말 하지 마. 이번 일은 사고였을 뿐이야. 여태까지 엄마 일 잘 도왔잖아. 안 그래?”
아벨라는 쓰게 웃으며 칼라일의 뺨을 매만졌다.
“실수 한 번으로 그렇게 의기소침해하지 마.”
부드럽게 저를 달래는 목소리에 칼라일은 정말 감동 받은 사람처럼 뺨을 붉혔다.
“감사…… 해요.”
“나야말로. 항상 일 도와줘서 고맙지.”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멋쩍다는 듯 뒷머리만 긁적였다.
“약초 바르긴 했는데…… 그래도 상처가 깊어서 오래 갈 거야. 당분간 손 쓰는 일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아벨라가 그렇게 말하며 뒤늦게서야 저를 기다리던 에샤를 돌아봤다.
“미안해, 에샤. 당장은 이야기하기 어려울 거 같아. 보다시피 대신 가게를 봐 줄 아이가 손을 다쳐서…….”
그 말에 에샤의 표정이 굳었다. 평소라면 미련 없이 물러났을 그녀인데, 에샤는 무언가 확고한 다짐을 하고 온 건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벨라.”
“응?”
에샤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문 앞에 서서 아벨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게 안에는 묘하게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칼라일은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 에샤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고, 아벨라는 칼라일의 상처가 그리고 에샤는 하나뿐인 제 친구 곁에 붙어 있는 속을 알 수 없는 늑대가 못마땅했다.
“알겠어, 시간 내기 어렵다면 다음에 다시 찾아올게.”
이렇게 순순히 물러가는 건가 안도한 것도 잠시.
“그런데 가기 전에 하나만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 있어?”
에샤가 결연한 눈을 한 채 물었다.
“응? 물론이지. 뭔데?”
그런 그녀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벨라는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동글동글한 눈으로 에샤를 바라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초조해진 칼라일이 시뻘건 눈을 번뜩이며 위협하듯 에샤를 쏘아봤다. 그 시선에 가냘픈 어깨가 잠시 떨렸지만, 아벨라가 있는 한 저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 건지 에샤는 물러서지 않았다.
에샤는 찬찬히 심호흡을 하고는 긴장을 죽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저 애, 누구야?”
질문에 아벨라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에샤가 다시금 말했다.
“아니다, 정정할게. 지금 그 애, 그때 네가 산에서 주웠던 늑대 맞지?”
늑대. 에샤의 입에서 정확하게 늑대가 언급되자 여태 싱글벙글 웃고 있던 아벨라의 표정 또한 굳었다. 에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긴 한숨을 내보냈다.
“역시, 맞았구나.”
아벨라는 질문에 대한 아무런 말도 않았으나, 딱딱해진 그녀의 표정이 곧 대답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아벨라가 가까스로 입을 뗐다.
“……어떻게 안 거야?”
이번엔 에샤가 침묵했다. 하지만 아벨라는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칼라일이 신경 쓰던 그 늑대.
‘설마 동족이 맞았던 거야?’
아벨라는 경악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머지않아 곁에 있던 칼라일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엄마…….”
마치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순간 동족의 냄새가 나서……. 그래서 실수했어요…….
-……저는 동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원래 다 그렇잖아요. 저 같은 다리 병신은 무리에서 도태되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야생에서는.
-동족들이…… 무서워요.
언젠가 칼라일이 제게 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벨라는 희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칼라일이 안쓰러워서, 급한 대로 에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에샤, 미안해, 그 얘기는 조금 나중에 하는 게 좋겠어.”
다행히 에샤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
“그래, 그럼. 조만간 제대로 얘기해.”
딸랑, 방울이 울리고 시야에서 에샤가 사라졌다. 그제야 칼라일은 안도의 한숨을 뱉어 내며 아벨라의 품속을 더욱 파고들었다.
“엄마, 엄마…….”
칼라일은 울기 직전의 아이처럼 허겁지겁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덩치를 죽여 가며 안겨 오는 모습이 음흉하다 손가락질받을 만도 했으나, 아벨라에게는 그저 안쓰러운 요소일 뿐이었다.
“쉬이, 아가 괜찮아. 응? 엄마 여기 있어.”
아벨라가 너른 그의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하지만 칼라일은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동족이…… 동족이…… 살아 있는 거죠?”
아벨라는 착잡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차마 칼라일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아가.”
“저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제가 살아 있는 걸 알아차린다면…… 분명 예전처럼 저를…….”
칼라일은 일부러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마치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겠다는 듯 숨을 헐떡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아벨라는 속이 찢어질 것 같은 착잡함을 느끼며 침음했다.
“괜찮아, 그럴 일 없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 줄게.”
그녀는 저보다 한참 큰 덩치의 칼라일을 어떻게든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달래 주듯 토닥, 토닥, 일정한 간격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엄마 친구분, 그분이 가게에 들어올 때부터…… 늑대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칼라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무서워요, 엄마…… 저는 정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칼라일이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아벨라의 허리춤을 꽉 그러안고 한참을 바들바들 떨기도 했다. 그러던 칼라일은 살며시 고개 들어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입을 열었다.
“엄마…….”
“……응, 아가.”
“그 친구분이랑…… 당분간 만나지 않으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