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곱게 키운 아들이 자라면-11화 (12/82)

<011>

환히 눈을 접어가며 웃는 칼라일의 표정은 어찌나 순박하고 무해해 보이는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긴장이 풀어지게 만들었다.

“그래, 그러자. 아가가 원한다면 평생 엄마랑 둘이 살자.”

순하게 웃던 칼라일이 기껍다는 듯 그녀에게 몸을 치댔다. 그러다 조그마한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제가 얼른 커서 다른 수컷들이 못 찝쩍대게 지켜 줄게여!”

“응? 수컷들?”

수컷이라는 표현이 낯설어 살짝 눈썹을 씰룩인 것도 잠시.

“네! 엄마는 엄청엄청 예뻐서 분명 다른 수컷들이 막 찝쩍거릴 거 같아요.”

“으음……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아벨라가 괜히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라일은 아벨라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단 말이에요.”

“말이라도 고마워.”

터무니없는 소리에 아벨라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엄마는 평생 저랑 단둘이 살기로 해쓰니까……. 그러니까 제가 얼른 커서 다 혼내 줄게요!”

조금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손으로 칼라일이 허우적대며 말했다. 아벨라의 눈에는 그저 세상 모르는 어린아이의 투정 같아서 마냥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꼬물거리는 이 작은 아이가 어떤 짐승이 될지도 모르고.

* * *

아벨라의 삶은 무척 바빴다.

일주일에 두 번은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올라야 했고, 그 두 번을 제외한 나머지 날은 가게 문을 열고 약초를 팔아야 했다.

오늘은 가게에 나가 약초를 파는 날이었다.

아직 침대에서 웅크리고 자는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가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엄마…….”

그러자 언제 깬 건지, 칼라일이 졸음 가득 묻은 눈을 비비며 아벨라를 부른다.

“이런 미안. 아가 깼니?”

“으응…… 일어나써요.”

“오늘은 가게 나가 봐야 해서, 엄마 혼자 다녀올게.”

근래 들어 약초를 캐러 산에 갈 때는 칼라일도 아벨라를 따라가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엄마…… 저도 같이 가게 가면 안 돼요……?”

저를 두고 가려는 그녀를 보며 칼라일이 답지 않게 쪼르르 따라 나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올망졸망 그녀를 올려다보는 칼라일은 퍽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라고 해서 칼라일을 집에만 두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혼자 가게로 출근하는 이유라면 간단했다.

놀라거나 흥분하면 주체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귀와 꼬리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칼라일의 몸집.

혹 다른 사람들이 이런 칼라일을 보기라도 한다면, 누구라도 의심의 씨앗을 키울 것이었다. 그러다 치안대에 신고라도 들어가면 골치 아팠다.

아벨라가 거절의 말을 고르기 위해 머뭇거리자, 그걸 눈치챈 칼라일이 섭섭하다는 듯 눈매를 죽였다.

“미안해, 아가…….”

“…….”

“엄마도 두고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야……. 아무래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의아하게 생각할 거 같고…….”

“그럼 제가 얼른 어른이 되면 돼요?”

얌전히 아벨라의 말을 듣던 칼라일이 눈동자를 빛내며 되물었다.

“어른이 되면 더 안 크니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예요!”

확실히 그럴듯한 말에 아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가가 어른이 되면 엄마랑 같이 나가자.”

“헤헤, 좋아여!”

그녀가 긍정의 대답을 해주자, 그제야 꺄르륵 웃는 칼라일이었다.

아벨라가 힐끔, 방 한편의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가로로 그어진 작대기들이 잔뜩 있었다. 그녀가 칼라일의 키를 쟀던 흔적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반에서 알짱대던 칼라일은 어느새 허리까지 쑥 커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올해가 다 가기도 전에 성인이 될 거 같은데…….’

그러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개와 인간의 시간이 다르듯, 늑대와 인간의 시간도 달라서 혹 칼라일이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건 아닌지에 대한 그런 걱정.

또랑또랑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가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생긴 가족인데…….’

아벨라는 칼라일의 흔적으로 가득해진 작은 제 오두막집이 좋았다.

이불에 한 움큼씩 묻어 있는 검은 털들도, 칼라일이 장난치다 뜯어 놓은 낡은 소파도, 이리저리 뛰어놀며 생긴 나무 바닥의 발톱 자국도 그리고 부르면 곧잘 달려와 제게 안기는 작은 털뭉치도.

이제는 칼라일이 없는 일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가.”

칼라일은 아벨라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한 걸 곧바로 알아차렸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 톤이 조금 달라졌다는 것도.

“……쑥쑥 크는 것도 좋지만 조금만 더 늦게 커도 좋을 거 같아.”

아벨라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끔뻑이던 칼라일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저 방실방실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왜? 엄마랑 같이 가게 나가고 싶어서?”

“네! 그것도 그렇고…… 얼른 커서 엄마랑 이거저거 잔뜩 할 거예요!”

“이거저거?”

의미심장한 말에 그녀가 다시금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

다행히 올해의 우기는 작년과 달리 폭우나 태풍 없이 지나갔다. 덕분에 아벨라는 우기 중에도 산에서 제법 많은 약초를 캘 수 있었고, 앞서 칼라일이 잡아 온 사냥감들도 야금야금 되판 덕분에 그런대로 넉넉한 돈이 쌓였다.

물론 잘난 귀족 나리들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푼돈이었으나, 한낱 소시민인 아벨라에게는 그럴듯한 목돈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기 무섭게 칼라일은 아벨라의 삶에 녹아들었고, 아벨라 또한 칼라일의 삶에 녹아들었다.

이제 둘은 정말 완전한 가족처럼 보였다.

아벨라는 제 무릎을 베고 누운 칼라일을 보며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비죽 솟아오른 귀를 보며 새카만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칼라일은 기분 좋다는 듯 웃으며 아벨라가 가게에 나간 동안 집에서 혼자 보낸 시간에 대해 조잘거렸다.

홀로 집 안을 돌아다니고, 심심해서 소파나 침대 모서리를 물어뜯었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 말마따나 아벨라가 집을 나서기 전보다, 가구들의 상태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가, 요즘 이가 많이 뾰족해진 거 같아.”

아벨라는 천이 다 찢어진 낡은 소파를 보며 말했다. 그녀가 조심히 칼라일의 입술을 들춰내자, 날카로운 송곳니가 시야에 담겼다.

아이에서 소년으로, 조금씩 자란 그는 이제 제법 그럴듯한 맹수 같았다.

그래서 아벨라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아가한테 물리면 엄청 아프겠는데?”

“아, 안 물어요!”

놀란 칼라일이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제가 엄마를 왜 물어요.”

어눌하던 발음도 이젠 또렷하다. 아벨라는 성치 못한 가구 모서리들을 보며 장난감을 하나 사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장난감을 사면…….’

인간 장난감으로 사야 할까? 아니면 개나 고양이용 장난감……?

아벨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칼라일은 그저 모처럼 여유롭게 보내는 그녀와의 저녁 시간이 좋아 환히 웃을 뿐이다.

* * *

“와, 아가. 벌써 키가 이만큼 컸어. 조금만 더 있으면 엄마만 해지겠는데?”

아벨라가 벽에 등을 기댄 칼라일의 머리 위로 작대기를 그으며 말했다.

“세상에……. 처음 만났을 땐 콩알만 했는데.”

“치, 콩알은 아니었어요.”

칼라일은 콩알이라는 비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투덜거렸다. 그런 그를 보며 아벨라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아이는 아니었어도, 어려서부터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봤더니 싱숭생숭했다.

처음엔 제 허벅지 정도에서 알짱거리던 아이가 이젠 저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힐긋 바라본 벽에는 칼라일의 성장 흔적이 남아 있는 작대기들로 가득했다.

“엄마, 내일은 약초 캐러 가는 날이죠?”

“응, 그런데 요즘 일교차가 제법 커져서…… 아가는 괜히 따라왔다가 감기 걸릴 거 같은데.”

어느새 늑대의 모습으로 바꾼 칼라일을 보며 아벨라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칼라일은 기분 좋다는 듯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아벨라의 뺨을 할짝댔다.

“오늘은 이만 슬슬 잘까?”

“아우!”

칼라일이 아이보다 사내의 모습에 가까워지면서, 아벨라는 이제 그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한 침대를 쓰기가 조금 부담스럽다고 느꼈다.

그녀의 속을 알아차린 건지, 어느 순간부터 칼라일은 잠들기 전이면 꼭 늑대의 모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늑대일 때의 모습도 예전과 사뭇 달랐다. 전에는 조막만 하던 덩치가 지금은 사냥개만 해졌으니까.

칼라일은 능숙하게 침대로 뛰어올라 몸을 웅크렸다. 그가 올라가니 벌써 침대의 절반이 꽉 찬 느낌이다.

침대에 올라간 그는 앞발을 이용해 아벨라가 누울 자리를 파바박 긁더니, 꼬리를 이용해 발톱 자국이 가득 남은 침대 위를 탁탁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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