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
카밀로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드 님에게 요정에 대해 급히 말씀드리다 빼먹은 게 있었지.
‘마력 조화’.
드래곤이 이능력자의 조상격이라 말한 것은, 그들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 때문이었다.
산처럼 거대하고 벼락처럼 흉포했다는 고대 종족은 메마른 땅에 비를 불러올 수 있고 풍요로운 인간 도시를 일시에 무너뜨릴 수도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강대한 힘이지.’
그리고 그런 힘을 현재 이능력자들이 ‘이능’이라는 이름을 달고 부분적으로나마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대신, 후계를 낳고 기르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했다.
어린 육신에 부여된 지나치게 비대한 마력. 그 부조화를 견디지 못한 아기 드래곤들은 알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죽어가곤 했다.
그를 도운 것이 바로 요정이었다.
요정은 본디 갓 태어난 세계의 불균형한 에너지를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탄생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이를 보살피는 유모처럼 드래곤 알을 보살폈다. 편중된 힘을 고르게 풀어내고, 죽어가던 유체를 치유하여 마력을 균형 잡히게 조절했다.
필요하다면, 외부의 마력을 빼 와서라도.
‘그리하여,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기도 했다고 했지.’
고대 시대에는 마력은 생명과 동의어였다. 마력을 지나치게 빼앗긴다는 것은 죽음과 마찬가지.
그러나 조화라는 대자연의 이치에 집착하던 요정들은 마력의 불균형을 마주하면 생명을 희생시켜서라도 뜻을 이루고자 했다.
“……그로서, 분노한 신에게서 신탁을 받은 옛 왕국의 왕은 요정을 학살하고 벗을 지키려던 드래곤마저도 멸족시켰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은 생을 앗아간 대가로 왕은 저주받고 옛 왕국은 멸망했다.”
카밀로는 람서스 제국의 건국 이전 전설을 중얼거렸다.
흥미로웠다. 어디까지나 야사(野史)라서 더욱 그랬다.
실제로는 요정과 드래곤은 무고한 존재였으며 억울하게 죽었다는 설이 중론이었으니까.
‘그 마탑주가 연구했으니, 반박할 사람도 없고.’
야사 바탕의 이야기라 말씀드리는 걸 빼먹은 모양이다. 정보상답지 않은 실수에 카밀로는 한숨을 내쉬었다.
요 며칠 발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겠지. 카밀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이다.
* * *
아이반 레토스 자작은 귀족다운 우아한 걸음걸이를 유지했으나, 지하 감옥으로 다가갈수록 발걸음은 조급해지고 뛰듯이 빨라졌다.
‘드디어.’
자신의 허리를 박살 낸, 그 미천한 것에게 보복할 날이 왔다!
모욕적이고 비참한 실패 후, 레토스 자작은 고드윈 공작 덕분에 간신히 탈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실패한 일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제이드 리안에 대한 증오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죽여버리겠다. 아니, 죽여달라고 빌 정도로 만들어버리겠어!’
고드윈 공작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채 은밀히 이 갈던 레토스 자작은 드디어 기회를 얻었고, 망설임 없이 그 빌어먹을 가이드를 납치해와 감옥에 처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수십, 수백 번도 넘게 이 순간을 상상해 왔던 레토스 자작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이능력자들을 대령시킬 수 있었다.
가이드 길드에서도 제대로 가이딩해 주길 거부하는, 등급은 낮으면서도 가이딩 감도는 낮아 가이드를 운신 못 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이능력자들.
그런 짐승 같은 것들에게, 그토록 귀애하던 가이드가 짓밟히면 해리스 고드윈의 얼굴은 어떻게 될까.
‘그것도, 해리스 고드윈이 어린 시절 감금당했다는 지하 감옥에서!’
미쳐버리겠지. 무력감과 원한에 차 정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을 고드윈 공작은 나야.’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진 레토스 자작은 흥분으로 심장이 펄떡거렸다. 당장 그 모멸적인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쯤 시작했겠지?’
계단을 점프하듯 내려간 레토스 자작은 지하 감옥 안으로 들어섰다.
고드윈 공작에게서 받은 열쇠를 열고 들어선 감옥은, 한때 고대 마수 공허가 봉인되었다는 전설처럼 스산하고 음침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흠칫하던 레토스 자작은 이능력자들이 흥분 어린 소리를 내는 것을 인지하고 다가갔다.
자신이 보기 전에 죽여버리면 곤란했다.
“어이-!”
죽지 않게 작작, 정도껏 하라고 외치려던 레토스 자작은 멈칫했다.
왜인지 코를 찌르는 듯한 달큰한 향기가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뭐지? 의아해하던 레토스 자작은 눈앞의 광경에 굳어졌다.
“허억, 헉…….”
기묘한 광경이었다. 레토스 자작은 자신도 모르게 오페라의 노래를 떠올렸다.
그대의 살결은 달콤한 독이며 따스한 손길은 매혹적인 죽음이니,
오, 나의 사랑하는 악마여. 요정이여. 내 모든 것을 앗아가소서.
이능력자와 가이드의 관계를, 영웅과 요정에 빗대어 만든 선전 오페라.
그곳의 가장 유명한 배우, 티르안이 부르는 노래에는 주지육림을 연상하는 듯한 무대 연출이 곁들여지곤 했다.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레토스 자작은 그 장면을 보며 낄낄 웃어댔다.
그러나 당장 보이는 모습 앞에서는 입꼬리가 굳어져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발, 커헉, 제발……!”
처음부터 이렇게 된 건 아니었다.
이능력자들은, 맨 처음 가이드 소녀를 취하려던 헨릭이 갑자기 목이 잡힌 듯 굳어져 있다 다리 꺾여 주저앉은 모습에 놀랐다.
‘뭐지? 너무 흥분해서 잠시 다리 힘이 풀린 건가?’
더 생각했더라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인지가 작동하기 전에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지독히도 달큰한 향. 그것이 이능력자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 향의 원천에 온 신경을 기울이게 했다.
‘저것이다.’
‘저것을 먹어야 해. 먹고 싶어. 먹을 거야-!’
이성을 잃고 본능에 조종당한 이능력자 하나는 소녀의 하얀 살결에 이를 묻었다. 그리고,
“커, 헉-”
독을 먹은 것처럼 피를 토해냈다. 눈이 벌겋게 돌아갔다.
다른 하나는 그녀의 손길에 닿아 마력이 미친 듯이 빨려 정신을 잃었다.
소녀가 죽을 때까지 억지로 신체 접촉 가이딩을 취하겠다며 흥분하던 이능력자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저 아름답고 매혹적인 가이드는, 자신들을 위한 제물이 아니었다.
그들이야말로 저 소녀를 위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들 모두 지독할 정도의 짙은 향에 육신이 묶인 뒤였다.
“이, 이게 무슨……!”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섰던 레토스 자작은 신음했다.
그는 분명 제이드 리안이라는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 예쁘긴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소녀는 아름답고 매혹적이었으며 신처럼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괴물 같았다.
이능력자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마력이 빨려가는 쓰러지는 모습들을 목격한 레토스 자작은 뒷걸음질 쳤다.
“도, 도망쳐야 해.”
이건 내가 상대할 수 없어. 본능의 경고였다.
그러나,
“……!”
그러기도 전에 턱 손아귀가 잡혔다. 레토스 자작은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쇠창살 사이, 불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그를 마주했다.
“아직, 부족해.”
소녀는 붉고 도톰한 입술을 휘며 잔혹하게 웃었다.
* * *
“……!”
제이드 깨어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의 일이었다.
“여긴 어디지?”
으으, 제이드는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배가 너무 고파, 상한 음식이라도 마구 주워 먹은 것처럼 속이 매스껍고 불편했다.
‘아, 맞다.’
눈을 깜빡이던 제이드는 기절하기 전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드래곤 알이 내 마력을 엄청나게 빨아갔지.’
그러다 의식을 잃었고. 그런데 지금 자신의 몸에는, 영 구리긴 해도 마력이 그럭저럭 들어있었다.
“왜지? 자동 충전인가?”
진짜 자동 충전이라면 형편없네, 제이드는 투덜거렸다. 영 좋지 않은 마력을 취한 건지 몸이 으슬으슬하고 식은땀이 났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라예르가 저택에서 의식을 잃은 후부터 기억이 없는 제이드는 갸웃거렸다.
“지하 감옥……?”
과거, 처음 이세계에 빙의했을 때 보았던 고성의 지하 감옥과 유사한 인테리어였다.
두리번거리던 제이드는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번쩍이는 걸 인지하고 흠칫 놀랐다.
“뭐, 뭐지?!”
눈을 깜빡이자 마법진은 사라졌다.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정말로 ‘본’ 게 아니라 지하 감옥보다 더 아래에 깔린 마법진의 마력을 ‘인지’했던 것을 깨달았다.
“미친.”
기절하기 전 라예르가 저택이 부서지듯 울리는 소리. 그리고 지금의 지하 감옥, 그 아래 깔린 거대한 마법진까지.
그런 게 있을 법한 곳은 오직 하나뿐이다.
“설마 여기 고드윈 공작저야?”
맙소사. 기가 막힌 제이드는 헛웃음 터뜨렸다.
“고드윈 공작이 나를 납치해서 여기 처박았구나.”
한때 어렸던 해리스가 갇혀 있었던, 그리하여 반쯤 봉인이 풀렸던 고대 마수 공허에 잡아 먹힐 뻔했던 바로 그 지하 감옥에.
기분 급격히 바닥을 쳤다.
‘개새끼, 반드시 죽인다.’
분노가 치밀었지만,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몸 컨디션이 급격히 나빠지는 게 체감되었으니.
‘어떻게 빠져나가지?’
길을 찾아보던 제이드는 바닥에는 뿌연 먼지 같은 것들이 수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옷까지 입혀져 있는 게, 얼핏 인간으로 착각할 법한 실루엣이었다.
“이건 또 뭐야.”
사람 죽어 있는 줄 알았네.
얼핏 보기엔 듀크의 분신이 죽어서 가루로 흩어진 것과 흡사한 꼴이라 기분이 더 이상했다.
그 이상한 광경을 돌아보던 제이드는, 자신이 가두어진 감옥 쇠창살 앞에서 열쇠를 발견했다.
“어? 이건 귀족 의복 같은데.”
그것도 남성용이었다.
왜 여기 버렸지? 의아해하던 제이드는 우선 쇠창살의 잠금쇠를 열고 나왔다.
‘여기가 바깥으로 통하는 문인가…….’
그러나 지하 감옥 위로 올라온 순간, 고드윈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돌아다니는 게 문틈으로 보였다.
‘이거, 안 들키고 절대 못 빠져나가겠는데.’
어쩌지?
식은땀을 흘리던 제이드는 문득, 자신이 이능력자들한테서 흡성대법으로 빨아들인 이능 슬롯을 떠올렸다.
‘아니,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데?’
제이드는 당혹스러웠으나. 지하 감옥 근처로 누가 들어오려는 기색에 황급히 아무 슬롯이나 선택했다. 뭐라도 돼라!
달칵, 문이 열렸다.
“어디 있지?”
들어온 사람은 고드윈 공작이었다.
뱀 같은 자줏빛 눈동자. 정돈된 은빛 머리카락. 준수하지만 불길한 인상의 절름발이는 턱, 제이드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