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왜, 왜요?”
사실 다행스러워해야 할 일이다. 화가 난 줄 알았던 해리스가 의심하지도 않았고 믿는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정작 제이드는 당혹스러웠다.
‘왜지? 왜 믿지?’
제이드는 자신의 말에 근거를 더하기 위해, ‘예언’을 핑계로 대고 있었다.
자신이 알루카스의 누이가 납치당한 걸 알고, 그녀를 황실에서 구해 낼 방법을 논의하자고. 알루카스가 그 허무맹랑해 보이는 말을 믿어준 게 그 부족에는 예언자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그런데 그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해리스가,
“왜냐니. 내가 널 믿는 게 이상해?”
이렇게 답하다니. 제이드는 놀라 입을 벌렸다.
당연히 이상하지! 내가 뭘 주장하면 육하원칙부터 대고 시작해야 겨우 들어줬잖아!
“아니, 해리스 님은 제 말 잘 안 믿-”
“해리.”
“……?”
돌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말에 제이드는 눈이 커다래졌다.
해리스는 제이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 쓸데없이 존칭하지 말고.”
“예?”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잠깐, 해리라고 부르라는 것도 애칭이야?’
내 이름이랑 맞춰서 두 글자로?
눈알을 도록도록 굴리며 눈치 보던 제이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 해리.”
뒤에 뭐 더 붙여서 말해야 할 거 같고 어색했지만,
“잘했어.”
해리스가 입꼬리를 휘니 멍해졌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미소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져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 세상에 해리스와 나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 이대로 저 붉은 물결에 잠겨 죽어도 좋을 것 같…….
‘……지 않아! 죽는 건 절대 네버 싫어!’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제이드 퍼뜩 정신 차리고 ‘왜 갑자기 이러냐’고 물었다.
“갑자기?”
“네, 왜 존칭도 쓰지 말라고 하고, 뜬금없이 애칭을-”
“뜬금없지 않아.”
딱 잘라서 부인한 해리스는 ‘말도 낮추라’ 덧붙였다.
‘믿음을 사기 위해서라면,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줘야겠지.’
그러나 정작 제이드는 해리스의 행동에 놀랄 뿐이었다.
“아니, 진짜 왜 이러세요? 제가 예언자라고 말했을 때도 안 믿으셨던 분이.”
“그건…….”
해리스는 순간 멈칫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래전에, 예언을 들은 적이 있었어.”
“네? 예언이라뇨.”
“아주 어렸을 적 일이야.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분의 침실에 숨어 들어간 적이 있었다고 해리스는 말했다.
‘해리스의 어머니라면, 그 예언자 황녀?’
사실 해리스의 친모, 엘리아스 황녀가 진짜 예언자인지 아닌지는 독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렸었다.
<가짜다> 파는 엘리아스 황녀가 했다는 4가지 예언 모두 하나 마나 한 뻔한 것들인데 황녀라서 올려치기 했다고 주장했다.
<예언자 맞다> 파는 어쨌거나 ‘예언자’라는 떡밥을 쩌리캐도 아닌 해리스 고드윈의 어머니에게 그냥 줄 리가 없다며 절대 맥거핀이 아닐 거라고 논쟁했고.
그리고 제이는 후자였다. 사실 별 근거는 없었고 그게 더 멋있으니까.
‘우리 해리스, 예언자의 아들!’
벌써 뽕차잖아?
한마디로 덕심의 발로였지 엄청 진지하게 믿었던 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엘리아스 황녀가, 아들 해리스에게 예언을 남겼다니.
“왜, 아니 어쩌다……?”
“알고 싶었거든.”
해리스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정말 태어나면 안 되는 아이였던 건지, 나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건지.”
“!”
제이드는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미친 공작에게 학대당해,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고 위축되어있었을 어린 해리스의 모습을.
“절대 아니에요!”
제이드는 분기탱천한 얼굴로 크게 외쳤다.
“설사 어머니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낳기로 선택한 건-”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셨어.”
그리고 웃어주셨지.
해리스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병색이 완연한, 창백한 얼굴이 띤 희미한 미소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다가오라며 뻗어진 손은 지나치게 말라 핏줄이 선명했다.
‘해리스, 나의 귀하신 아드님. 그런 생각 마셔요.’
일순 다정해 보이는 말투. 그러나 해리스는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운명이랍니다. 당신이 저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도, 그리고 내 삶이 다해가는 것도.’
모두 시작도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눈동자는 죽어가는 육신과 정반대로 타오르는 태양처럼 강렬했다. 두 눈이 뿜어내는 안광은 지나치게 형형하여 도리어 기이했다.
‘하, 하지만. 어머니는 예언자라고…… 그러니까, 저를 낳았지 않으셨다면…….’
‘해리스.’
겁에 질린 해리스가 울며 묻자, 엘리아스 황녀는 가엾다는 듯 그를 달래며 말했다.
‘기억하세요, 해리스. 만약 누군가 그대에게 예언자라고 말하며 다가온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이니, 그 어떤 말도 믿지 말라고. 후회하게 될 거라고 하셨지.”
“……!”
아, 아니 그런 셀프 디스를 하시다니. 제이드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잠깐, 설마 진짜 나를 내다보고 하신 말인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안색이 새파래졌다가 표정이 다채롭게 변하는 제이드를 보며, 해리스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이렇게 말해도, 당신은 심장이 부서지는 그 순간까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가엾게도.
죽어가는 육신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을 발하던 주홍색 눈이 순간이나마 슬픔에 젖어 들었다.
살아생전 어머니를 뵙는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몰래 숨어 들어갔던 해리스를 발견한 황녀의 유모는 비명 지르며 그를 내쫓았고, 그 뒤 어머니는 병환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그 뒤 모두가 해리스 때문에 엘리아스 황녀가 죽었다고 수군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린 그가 방문한 뒤에 죽었을 리가 있겠냐면서.
그래서 감옥에 갇힌 해리스는 가끔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곤 했다.
사기꾼이라니, 왜 그런 말을 하셨던 걸까. 결국 자신 또한 사기꾼이니 어떠한 말도 믿지 말라고, 모두 거짓말이니 반대로 생각하라는 뜻이셨을까.
그는 아직도 답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저, 전 사기꾼 아니에요. 후회하게 만들지 않…….”
“알아.”
더듬더듬 변호하는 제이드를 보며 해리스는 웃었다. 네가 내 심장을 부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아.
“믿으니까.”
* * *
건국제의 날이 밝았다.
나는 멍하니 바깥을 보았다. 해리스는 퍼레이드 일정 때문에 새벽에 나갔고, 그가 이쪽을 지나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분명 퍼레이드 도중 무언가 수작을 부릴 거야.’
그러니 너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틀어박혀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던 해리스는, 던전에서 얻은 아이템까지 주고 갔다.
A급 이동 스크롤.
1회용이었지만 거리는 무제한이었고, 시동도 간단했다. 자신이 찾기를 바라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되니까.
‘과연 A급, 사기다.’
그런데 이 사기템을 내게 주다니, 으으으,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에 엎어졌다.
만약, 이것만 주었다면 ‘개이득!’ 하고 속 편하게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과거의 이야기만 했더라면 ‘우와, 우리 드디어 진짜 친해졌나 봐!’ 하고 순진하게 기뻐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를 믿는다고 하지 않았다면…….’
그랬더라면, 이번에도 적당히 나 편한 대로 해석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모든 것이 겹쳐지니 나는 심장 중심부에서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수도는 온통 축제의 열기로 시끌시끌한데 조금도 바깥이 궁금하지 않았다.
솔직히, 해리스가 내게 어느 정도 마음을 허락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나야말로 그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이동 스크롤이라니.
만에 하나 내가 도망칠 수도 있는데, 대체 뭘 믿고.
“……나를 믿는다고 했지.”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스크롤을 만지작거렸다.
정말이지 해리스는 자신을 잘 꿰뚫어 봤다.
“이렇게까지 믿어주면, 도망가고 싶어도 못 가잖아…….”
끄응, 나는 신음하며 중얼거렸다. 관계가 지나치게 깊어졌어.
지금까지 나는 해리스에게 숨기는 일이 있어도, 사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마음 반 그도 자기 나름의 비밀이 있을 텐데 상관없지 않냐는 합리화 반이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털어놓으니 계속 입 다물고 있기 힘들었다.
‘해, 해리. 사실 난…….’
말해야 한다. 고백해야 해.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하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더듬거리는 나를, 해리스가 괜찮다며 저지했다.
‘네가 내게 숨기고 있는 게 많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
‘그렇다고 해서, 굳이 나 때문에 떠밀려서 말할 필요 없어. 네가 준비되었을 때 말하면 돼.’
나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던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에 물결처럼 퍼져왔다.
‘아, 정말이지.’
미치겠다. 내가 해리스를 최애로 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미친 듯이 멋질 필요는 없잖아-!
‘고드윈 소공작, 급히 방문하여 미안하지만 누님께서…….’
‘미안하면 꺼져, 애새끼 공자. 지금 어른들 이야기하는 거 안 보이나?’
‘…….’
나중에 디뮈아드가 찾아왔을 때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진짜 해리스가 맞나 의심할 뻔했다.
‘디뮈아드, 얼굴로 욕했지.’
나는 키득거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미룰 수 없다.
‘퍼레이드에서 돌아오면, 말하자.’
어차피 건국제에 파트너로 참석할 테니까. 그때 말하면 돼.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었다.
쿵-!!
저택이 흔들렸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