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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16화 (116/119)

116화

“약속할게, 응?”

죽어가는 제이드의 얼굴을 보며 듀크는 치댔다.

“나도, 네가 먼저 손 내밀었던 용병왕 알루카스처럼 이능의 힘으로 네가 원한다는 그 해주석을 얻게 해줄게.”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말로 끝내달라는 의미였다.

“천만에.”

그러나 듀크는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히죽히죽 웃었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으면 이제 가! 가라고!’

제이드는 속으로 외쳤다. 입 밖으로 내기엔 무서웠다. 지금은 싱글벙글 웃어도 언제 눈 뒤집혀 칼부림할지 모르는 미친놈이니까.

‘저 청개구리 같은 자식. 가라고 하면 더 궁둥이 붙이고 버티려 하겠지.’

내가 어쩌다 이런 놈하고 엮이게 된 거지? 죽겠다…….

듀크는 다채롭게 변하는 제이드의 얼굴을 감상하며 길게 늘어뜨린 분홍색 곱슬머리를 손가락에 휘감았다.

사실 듀크의 입장에선 가볍게 투정 부린 것에 불과했다.

그가 진심으로 작정하면 제이드의 목을 틀어쥐고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도 일도 아니었으니.

그런데도 그답지 않게 칭얼거린 건,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었으니까.’

해주석 탈주 계획 따위가 아니라, 제이드 리안이라는 소녀의 인생에.

최강의 암살자답게 듀크는 제이드가 자신을 조심스레 밀어내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뭐, 첫인상이 살짝 안 좋아서 그런 거겠지?’

확실히 언노운 던전에서 좋게 만나지 않긴 했다. 혼자서 납득한 듀크는 제이드에게 무해하게 웃어 보였다.

“잘해줄게.”

“……필요 없다고 해도 할 거죠?”

물론 크게 효과는 없었다. 껍데기가 무해하면 뭐하나, 알맹이가 흉악한데.

“응.”

“인성 무슨 일이야. 어디 팔았어요?”

“하하, 본래 밑바닥 인생이 탑 티어까지 올라가려면 인성 정도는 희생해야 해.”

“희생이 아니라 원래부터 없던 게 아닐지……?”

“네 주인님, 해리스 고드윈도 예외가 아닐걸.”

반쯤 정줄 놓고 막말하던 제이드는 그 말에 발끈했다.

‘이 자식이 해리스를 욕해?’

물론 그런 경향이 아예 없진 않지만! 그래도 내 최애는 내가 까!

그러나 무어라 반박하기도 전,

“아.”

듀크가 인기척을 감지했다.

“네 주인님 온다.”

“알면 얼렁 가요!”

제이드는 사색이 되어 듀크를 창문 테라스 쪽으로 밀어냈다. 순순히 밀려나던 듀크는 갑자기 우뚝 섰다.

“제이드.”

“왜, 왜요!”

“이거 불륜 현장 같지 않아? 바깥에는 남편이 다가오고 침실에는 내연남이…….”

“개소리 말고 가세요!”

“난 세컨드도 좋아~!”

“꺼지라고!!”

더는 좋게 달래 내쫓을 정신이 없었던 제이드는 발로 걷어차다시피 듀크를 테라스 바깥으로 내쫓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죽으라고 창문 바깥으로 밀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래 봤자 죽을 위인도 아니었다.

“꺄~ 내 인생에 불륜이라니, 짜릿해~!”

듀크는 수줍게 뺨을 붉히며-그게 잘 어울리는 얼굴이라는 게 가장 소름 끼쳤다-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제이드는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해리스가 들어오기 전에 나가야 해!’

방 안에 듀크의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인 두려움에 다급히 마중을 나가는 척 뛰쳐나간 제이드는,

“제이-”

“해리스 님!!”

해리스를 보자마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품에 안겼다.

‘흑흑, 우리 해리스가 최고야.’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듀크라는 개진상 이능력자를 한 번 만나고 나니 새삼 해리스가 얼마나 양반이었는지 실감이 났다.

‘내가 처음 만난 게 해리스라서 너무 다행이다……!’

빙의하자마자 본 게 듀크 같은 놈 만났으면 진짜 뒤졌을 거야. 긴장이 풀린 제이드는 해리스의 듬직한 품에 안겨 훌쩍였다.

“…….”

그녀를 품에 안은 해리스의 얼굴이 어떠한지 보지 못한 채.

해리스의 두 팔은 바로 제이드를 안지 않고 굳어져 있었지만, 이내 천천히 내려와 소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감정을 억눌러 삼키듯, 조용히.

* * *

사실, 해리스는 고의로 제이드를 피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목덜미에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흩날리며 해리스의 귀에 속삭였다.

[너는 무의미해. 모두가 너를 하찮게 보겠지. 우리를 뺀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는 별 볼 일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야.]

[누구도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너는 사랑받을 수 없는 인간이니까.]

[그저 추악하고 더러운 벌레-]

해리스는 눈을 감은 채 목덜미 뒤의 연기를 날벌레를 처리하듯 내려쳤다.

소리는 사라졌지만, 발치의 그림자는 음침하게 술렁였다. 해리스는 그를 발로 억누르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괜찮소, 소공작?”

레노르조차 걱정의 기색을 드러낼 정도로 해리스의 안색은 창백했다.

수도에 도착한 후부터 그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직 반절이나마 봉인 당한 공허가 묻힌 땅이라 그런 것일까. 점점 공허를 통제하고 억누르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좀 쉬는 것이…….”

“됐으니 빨리 끝내지.”

퍼레이드 도중 무슨 일이 반드시 터질 것이다.

해리스는 지도로 구역을 살피다 떨리는 눈꺼풀을 억눌렀다.

‘그래도, 제이드 곁에선 그나마 낫지만…….’

문제는 그가 바쁜 몸이라는 거였다.

마탑의 추적을 피해 육로로 온 터라, 그들의 도착은 상당히 늦은 셈이었다.

건국제 준비만으로 빠듯한 시기에 갑자기 터진 일(가이드 길드와 퍼레이드 등)까지 처리해야 하니 해리스는 며칠째 잠도 못 자고 있었다.

제이드가 사실을 모르고 외면당한다고 오해한 것은, 해리스가 그녀의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제이드가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지 않길 바라는 것도 있었지만,

“……나를, 좋아한다고 했잖아.”

배신감도 있었다.

일을 마무리하고 침실로 돌아온 해리스는 음울히 중얼거렸다. 몇 번이고 말했잖아, 나를 좋아한다고.

물론 그 말을 믿는다고 해서 해리스가 전적으로 안심한 건 아니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제이드가 보이는 호감과 애정의 눈동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에게도 향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선대 공작이나 하녀들, 용병왕 새끼와 상단 찌꺼기 것들. 그리고 어쩌면 라예르가의 레노르와 디뮈아드 새끼까지도.

‘그리고, 그 오빠라는 새끼.’

해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이드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며, 그는 첫 만남부터 곱씹어보곤 했다.

그러면서 감옥을 탈출하며 잊었던 인물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머릿속에 잘 박아두지 않았던 마른 실루엣은 어쩐지 제이드와 외형적으로 닮아 있었다.

‘죽진 않았겠지. 제이드 성격상, 제 오빠마저 죽인 놈을 좋아하진 않을 테니까.’

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탈주했을까.

뒤늦게라도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금방 지워버렸다.

‘한번 버렸으면 끝이지.’

감히 제이드를 버리고 탈주하다니. 사정이 있다 한들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제이드는 자신의 것. 가족답지도 않은 새끼에게까지 양보해 줄 수 없었다.

가뜩이나 제이드는, 비록 자신에게만큼 강하게 반응하지 않더라도, 저토록 많은 이에 얕고 넓은 애정을 베풀었다.

자신과 달리.

그것이 짜증 나고 화나고 불쾌하고 싫었다.

‘나는 아닌데, 너는 왜?’

그러나 굳이 입 밖으로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어린애처럼 한심한 투정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

제이드의 마음은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도.

그런데,

‘사, 살려주세요…….’

그 겁먹은 얼굴이라니.

제이드를 찾아가던 해리스는 멈칫했다.

해리스는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이드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그에게 절대적인 근거이자 명제였으며 불변의 사실이었다.

너는 나를 사랑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자신을 위해 몇 번이고 달려들고 구해주려 애쓰겠는가? 제이드가 살아온 궤적이 그녀의 마음을 증명했다.

해리스는 제이드의 애정을 신뢰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받아들였었다.

즉, 해리스에겐 애정과 신뢰는 동의어였다.

하지만, 제이드는 처음부터 그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너를 죽일 거라고,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야?’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한 충격은 통증처럼 아렸다. 그날 ‘할 말이 그것뿐이냐’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근본적인 상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배신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발 늦게 피어난 분노 덕분이었다.

어떻게.

“해리스 님!”

자신을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진 제이드가, 금방 울망울망해진 얼굴로 달려와 안겼다.

어느덧 익숙해진 품을 마주 끌어안았다. 가냘픈 등을 습관처럼 쓰다듬자, 물기에 젖은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마주해 왔다.

“지, 진짜 아니에요.”

더듬거리는 목소리. 간절하게 반짝이는 눈동자.

의심을 사고 싶지 않다는, 미움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신으로 뿜어져 나온다.

“제가 가이드 길드에서 용병왕을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요! 그리고, 손을 잡자고 한 것도…….”

“알아.”

“절대 육체적 스킨쉽을 말한 게 아니…… 네?”

“알고 있어, 제이.”

해리스는 가만히 제이드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내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어떻게 이토록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달구어진 배신감이 심장에 상흔을 남겼다.

유감스럽게도, 해리스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나 때문이겠지.’

자신이 제이드에게 죽이겠다 협박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녀가 자신을 믿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이 통증이 신뢰받지 못하는 이의 괴로움이리라. 해리스는 자조하며 제이드의 이마에 이마를 기대었다.

“네가, 나를 배신하리라 의심한 적 없어.”

진심이었다. 손을 잡자는 발언도 오해한 적 없었다.

다만, 감히 자신의 가이드에게 몰래 접근하려 한 더러운 용병왕 새끼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을 뿐.

네 시선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을 질투했을 뿐.

진심을 삼키며, 해리스는 생각했다.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그러니 믿음을 얻어낼 수 있도록 자신도 행동으로 보여야 했다.

제이드가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너를 믿어.”

“……!”

해리스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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