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으아아-!’
제이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왜 멋대로 찾아와! 왜 멋대로 기다렸다고 해!’
심지어 저토록 피투성이인 꼴이라니, 진짜 기다렸어도 피했을 것이다.
‘자살 희망자 아닌 이상 쾌락 살인마를 야밤에 만나길 바라는 사람은 없어!’
제이드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애써 삼켰다. 죽기 싫으니까.
“그래, 그래. 말 안 해도 알아. 나도 보고 싶었어.”
그런데 기다리지도 않은 불청객, 듀크는 멋대로 창문 안 테라스를 넘어 침실까지 들어오려는 듯 움직였다.
“자, 잠깐만요!”
“……?”
제이드는 황급히 듀크를 창문 테라스 안에 가둬두듯 대기시켰다.
갸웃거리던 듀크는 어디론가 뛰어들어 갔던 제이드가 따끈한 김을 내는 물수건과 간단한 응급 키트를 들고 오는 모습에 눈이 커졌다.
“일단 치료부터 받아요.”
제이드는 듀크가 가만히 있는 사이 얼른 테라스 창문을 닫은 뒤 그를 앉혔다. 그리고 암살자의 피투성이 손에 온수로 적신 보들보들한 수건을 가져다 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대로 뒀다간 뭘 할지 몰라.’
걸어 다니는 폭탄 같은 놈이니 치료를 이유로라도 잠시 얌전히 있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
그러나 진상을 모르는 듀크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만, 직업이 직업인 이상 듀크는 다짜고짜 사람을 찾아간 적은 많았다. 하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었다.
‘치료라니.’
제게 묻은 피를 대신 닦아주는 손길이 너무 낯설었다.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던 듀크는 진지하게 자신의 손을 닦아주며 상처가 없나 살피는 제이드의 얼굴에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상처는 크게 없네요…….”
왜 없지? 제이드는 속으로 유감스러워했다. HP가 깎여야 조금이라도 상대하기 편할 텐데.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얼굴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제이드가 고개 들어 응시하자, 듀크는 왜인지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언노운 던전에서처럼, 제이드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훅 풍겨왔다. 가까이서 보이는 희고 우아한 목덜미는 갈라진 과육처럼 이를 근질거리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듀크는 이전처럼 강력한 식욕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과육을 소중히 보관해 두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 바깥을 구르다 짓물러지지 않도록…….
“……괜찮아.”
듀크는 자신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그는 긴장하던 손을 쫙 폈다가 접으며 가만히 고개를 제이드의 수건 쪽에다 기울였다.
포식자가 손에 얼굴을 기대어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데 그게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라 상어나 악어 같은 애들인 거지.’
스탯은 비슷할지 몰라도 외형에서부터 확연히 더 무서운 애들 말이다.
제이드는 천천히 수건을 가져다 대며 조심스럽게 닦았다.
‘자칫 잘못 상처라도 내었다간 뒤지는 건 나다…….’
암살자니까 얼굴 가까이 뭘 들이대는 것에는 더 예민하겠지? 긴장한 제이드의 숨결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숨결이 상대를 어떻게 흥분시킬지는 의식하지 못했다.
듀크는 살며시 눈을 뜨고 긴장으로 집중한 제이드의 얼굴을 가까이서 응시했다.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뚫어져라.
선이 고운 얼굴과 어둠 속에 푸르게 반짝이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과 붉고 말랑한 입술. 가녀린 몸매에 분홍빛 곱슬머리가 흐드러졌다.
“…….”
피를 닦은 듀크의 뺨에 붉은 기가 올라왔다. 하지만 워낙 피투성이의 몸이라 제이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이드.”
흥분을 몰아내듯 숨을 내쉰 듀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들었어, 가이드 길드에서의 일.”
“그래요?”
“용병왕도.”
“귀가 밝으시네요.”
“응, 나 인기인이야. 여기저기서 알려주려는 사람이 많아.”
천진한 말투에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국에서도 연쇄 살인마는 팬덤이 있었다지…….
“그래서 황실 상대로 준비하는 거야?”
정보를 거기까지 확보했으면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도 대강이나마 짐작하고 있겠지. 제이드는 순순히 동의했다.
“뭐. 이래저래 당한 게 많으니까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맞아.”
평탄한 대화가 즐거운 듯 듀크는 히죽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니까 나도 도와줄게.”
“?”
“나도 네 계획 돕겠다고. 전에도 말했잖아?”
그 말에 피 닦아주던 수건 툭 떨어졌다.
“……어, 어떻게요?”
당연하지만 제이드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제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시면서…….”
“뭐든, 어떻게든 도와줄게. 내 능력 알잖아?”
히죽히죽 웃으며 윙크하는 듀크의 모습에 제이드는 속으로 외쳤다.
‘싫어! 꺼져!’
물론 듀크는 유용하다. 그의 이능은 복제니까. 제이드도 알고 있고, 실제로 그가 협력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저 자식을 어떻게 믿고.’
미친 쾌락 살인마라는 것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니까.
‘듀크는 지금 당장은 싱글벙글 웃어도,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날 죽이려 할 법한 위인이지.’
이런 사람에겐 도움은커녕 계획을 상세히 밝히는 것부터 위험하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래서 제이드는 좋게 웃으며 거절하려고 했으나,
“……나는 안 끼워줘?”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만 따시킨다 이거야?”
“아니, 왕따라뇨. 실제 따돌림당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말은 좀 아닌 거 같…….”
실제로 따돌림받은 적도 있었던 제이드가 정색하자, 듀크의 회색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고였다.
‘미친.’
제이드는 소름이 끼쳤다. 진짜 돌았어?
“나 안 믿는구나.”
“네?”
제이드는 황당해져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연히 안 믿지, 너의 뭘 보고 믿어?
“나는 진심이었는데.”
“예??”
갑자기 무슨 진심 타령이야, 미친놈아. 니 진심은 1시간도 못 가잖아!
제이드가 어처구니없어 말문을 잇지 못하는 사이, 듀크는 행동을 개시했다.
“너무해-!”
빼앵 거짓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드러누워 사지를 버둥거린 것이다.
“으악!”
제이드는 질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마트 장난감 앞의 아기처럼 ‘단비꼬야!’ 하고 지랄발광을 하는데, 그 짓을 하는 주체가 진짜 아기가 아닌 180이 거뜬히 넘는 건장한 사내다.
진짜 미친놈 같고 제정신 아닌 걸로 보이고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무서웠다!
멘붕한 제이드는 도망치듯 테라스에서 벗어났지만, 어느덧 듀크는 거머리처럼 기어들어온 뒤였다.
“오지 마, 미친놈아!”
그러나 이미 늦어서 침실의 카펫마저 망가질 판이라, 제이드는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집 나간 이성을 불러들였다.
“저, 저기 듀크 님? 제가 님을 꼭 못 믿겠다는 게 아니라-”
“나도 끼워줘어억-!”
“…….”
제이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 이런 정신 나간 새끼가 다 있어.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 제이드 님?”
침실의 방음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괜찮으세요? 무슨 소리가-”
“-아아아악!!”
제이드는 기겁하여 문가로 달려갔다.
보통이라면 하녀가 대기하고 있었겠지만, 해리스와의 일로 울적했던 제이드는 ‘혼자 있고 싶다’고 사람들을 다 물린 상태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다른 사내새끼를 들였다?’
그리고 그 사내새끼가 ‘배신이다’, ‘너무한다’는 등 징징거리는 걸 다른 사람들이 듣는다? 거기다 그게 듀크- 그러니까 이능력자다?
상상만으로 제이드는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되었다. 세간에 어떻게 보일지 너무 뻔했으니까.
‘내, 내가 세컨드 두고 바람피우는 걸로 아는 거 아냐?’
안 그래도 알루카스의 일로 빡친 해리스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죽는다!’
얼굴만 빼꼼 내민 제이드는 황급히 변명했다.
“벼,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기엔 소리가…….”
하녀들이 미심쩍어하는 순간, 제이드는 등 뒤의 듀크가 2차 진상 짓을 시작하려는 기운을 느꼈고,
“흐-”
“어어엉-!!”
입으로 듀크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어쩌다 저런 미친 새끼한테 걸려서……!’
실제로 통곡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제, 제이드 님?! 왜-”
하녀들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늘 생글거리고 슬퍼도 조용히 훌쩍이던 제이드가 저러다니.
거기다,
‘방 안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의아해진 시선들이 안을 기웃거리려던 순간,
“해리스 님이 날 외면하시니! 너무 슬퍼서! 으허어엉……!”
제이드는 재빨리 고개 돌려 2차 통곡을 시작했다.
‘신이시여, 저는 이런 재앙을 맞이할 정도로 잘못 살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진심 어린 통곡에 하녀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약간 화색이 되었다.
“그, 그렇군요! 고드윈 소공작님이 보고 싶으셔서-”
“흐흐흑! 나는 진심인데-!”
“네? 방금 누구…….”
“진심! 진심으로 해리스 님 보고 싶다고!!”
듀크가 또 염병 소리 내자 하녀들 더 상대할 정신이 없어진 제이드는 황급히 마무리한 뒤 쾅, 문 닫았다.
“……알겠어요, 알겠다고!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만 하세요, 말씀드릴 테니!”
“그래?”
듀크는 언제 울고불고 진상 부렸냐는 양 말끔한 얼굴로 일어나 히죽 웃었다.
“잘못한 거 알았으면 됐어. 이제 말해봐.”
“…….”
진짜 죽었으면……. 제이드는 살의를 참으며 여차여차 설명했다.
“흐음, 재미있겠다.”
듀크가 눈을 빛냈다.
‘왜지? 최대한 노잼에 지루해 보이도록 설명했는데.’
불행히도 통하지 않았는지, 쾌락 살인마는 신난 얼굴로 말했다.
“할래, 나 꼭 할래!”
“……보통 이런 미친 짓은 최대한 안 끼어들려고 하지 않나요?”
“나 미친 짓 좋아해.”
“그래 보여요…….”
듀크에게 시달려 정신이 너덜너덜해진 제이드는 포기했다.
“다 들었으면 이제 꺼져-”
달라고 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하녀들이 밝은 소리로 말했다.
“제이드 님, 고드윈 소공작님께서 제이드 님의 말씀을 듣고 직접 찾아오신대요!”
“뭐?”
발랄한 하녀들의 목소리에 제이드의 정신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