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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14화 (114/119)

114화

제이드는 루켄의 항의를 듣지 못한 척했다. 아니, 꼭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져야겠어?

‘난 아니라고 봐. 님들 같은 이능력자도 아닌 제가 이 폐허에 있다간 터진 새우 꼴 난다고요!’

“…….”

유감스럽게도 제이드의 깊은 뜻을 알아줄 사람은 여기 없어서 공간에는 싸한 침묵만이 깔렸다.

‘역시 타인의 이해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제이드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알루카스에게 은밀히 눈짓했다.

“제이, 그만 깜빡이고 이리 와.”

“……넵.”

물론 ‘은밀히’는 성공하진 못했다. 여섯 개의 눈이 모두 제이드 한 명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알루카스는 알아먹었다는 듯 씩 웃었다.

“해리스 님.”

그와 동시에, 느릿느릿 폐허를 지나 다가가던 제이드는 빠르게 해리스에게 달려들었다.

“……!”

해리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오는 제이드를 안았고,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알루카스는 신경이 분산된 그 짧은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루켄을 둘러업고 부서진 건물의 바깥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일시적으로 제압당했다 한들, S급 이능력자다. 해리스가 돌아보았을 때엔 이미 사정거리 밖으로 도주한 뒤였다.

‘진짜 튀는 게 누군데, 흥.’

제이드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역시 알루카스는 남자의 자존심이니 뭐니 군말 없이 튈 줄 알았다. 용병이잖아? 불리하면 튀는 게 일상인 족속들.

당연하지만 제이드가 계획한 바였다. 알루카스는 이제 자신의 동맹이자 엘워드 황태자를 공격할 창이었다.

‘얌전히 해주석만 가지고 튀려고 했는데, 황태자가 너무 건드리잖아.’

고드윈 본성에서의 습격에 이어 이번 가이드 길드의 건까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있을 수 없으니 먼저 꺾어버릴 심산이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황태자를 상대하기도 전에 알루카스를 다치게 할 순 없었다.

별로 큰 상처가 없는 시점에서 마무리되어서 다행이야.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제이드는,

“……안 제이.”

해리스의 부름에 몸을 움찔 떨었다.

모두 필요해서 한 일이다. 돌이켜도 번복하겠지. 하지만…….

“이게 무슨 짓이야.”

올려다본 해리스의 얼굴은 몹시도 싸늘했다. 붉은 눈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안광에 제이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도구!”

“뭐?”

“용병왕 알루카스는 황실을 상대하기 위한 도구예요!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없어요! 저는 그의 누이가 황태자에게 억류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를 알리면서 동맹의 의미로서 손을 잡자고 했을 뿐이에요. 다른 의미는 절대 없었고, 가이딩도 하지 않았……!”

“그만.”

당황하여 다다다 내뱉던 제이의 입이 막혔다.

해리스의 손이 그녀의 입술 위에 얹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무게도 가해지지 않은, 가벼운 저지였음에도 제이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안 제이. 네가 할 말은 그게 다야?”

본명을 불려서일까, 눈동자가 가장조차 하지 못하고 마구 흔들렸다.

물론 이게 다는 아니었다. 분명 그녀가 내뱉은 말은 사실이었지만, 오롯한 진실은 아니었으니까.

해리스는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 본 거지? 손바닥이 떨어지자마자 제이는 신음하듯 대답했다.

“사, 살려주세요…….”

항복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 말에 해리스 얼굴은 더욱 싸늘해져서, 제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오답을 찍었구나.

“살려줘?”

조소하는 목소리에 제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난 이제 죽었다.

* * *

물론 진짜로 죽진 않았다.

그 뒤 ‘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하고 일 다 끝나고 나서야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압박감에 식은땀까지 흘리게 했던 해리스의 시선은 그제서야 돌아갔다.

‘그리고 가이드 길드를 마저 정리했지.’

우리 해리스, 이렇게 책임감 있으시다. 한번 맡기로 결정한 일은 끝까지 제 손으로 처리하는 모습 아주 멋져!

그러나 나는 최애뽕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차라리, 그날 바로 화냈으면 나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해리스는 그러지 않았다. 고요히 내게서 고개를 돌렸던 해리스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고,

‘무, 무서워.’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런 말도 없었다.

‘공포 저항 어디 갔니! 언니는 네가 필요해!’

과거 엄마 계정으로 과금했다가 들통났던, 그러나 엄마가 당장 화내지 않고 말없이 침실로 들어가셨을 때의 기분이었다.

그게 벌써 며칠 전. 가이드 길드의 일은 모두 정리되고 이제 해리스는 레노르와 함께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쭉 이런 냉전이란 말이다.

‘망했다. 진짜 망했어.’

문제는 무엇을 얼마나 망쳤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일단 해리스가 빡칠 만한 부분-외간 이능력자(알루카스) 만나 스킨쉽 제안(손잡자고)한 것-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설명했는데.

‘……네가 할 말은 그것뿐이야?’

아무래도 그게 문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나는 침대 위에 뻗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자 마지막으로 해리스를 보았던 밤이 떠올랐다.

귀가하는 마차. 나를 돌아보지 않던 해리스의 옆얼굴, 뚜렷한 이목구비 위로 수도의 불빛이 음영을 일렁이고 적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바라보기만 해도 좋을 아름다운 그 날의 얼굴이, 왜인지 마음을 욱신거리게 했다.

“으~!”

나는 침대를 팡팡 내려쳤다. 분명 처음엔 분위기 좋았는데!

가이드 길드에 갈 때만 해도 우리 사이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다.

‘내 본명도 묻고, 나 꼬시나 싶을 정도로 다정하고.’

가이드 길드에서 어떠한 함정이 터질지도 모르겠다 싶긴 했지만, 정작 문제가 되었던 건 그 사건이 아니라 예상치도 못한 알루카스의 등장이었다.

‘그때 돌아서야 했을까?’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내 앞에서 가볍게 굴긴 하지만 그래도 알루카스는 용병왕이라 불릴 정도의 거물, 내가 나중에 따로 만나자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해.’

나는 손에 쥔 비단 주머니를 보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알루카스는 나와 손을 잡았다. 아마 내 한 몸 희생해 그들을 빼돌려준 대가가 아니었을까.

‘필요할 때 부르라는 호출 아이템이라.’

알루카스가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황금 장신구는 알고 보니 던전을 구르며 얻은 아이템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비단 주머니 안의 아이템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넣었다.

객관적으로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나를 겨냥한 함정을 피했고, 가이드 길드엔 내 사람들이 포진되었으며, 알루카스라는 좋은 협력자를 구했다.

그런데도 마음은 답답하고 기분은 울적했다.

‘해리스 때문이지.’

그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하나만으로 내가 이렇게까지 흔들린다는 건,

“진짜 좋아하는구나…….”

아아, 한숨이 길게 나왔다.

물론 나는 해리스를 좋아한다. 고백한 적도 있었다. 최애로서, 인간으로서.

‘하지만 이성으로선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적어도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든 마음을 회피하려고 했다.

물론 나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피해갈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진 않았다. 몸이 가면 마음도 따라간다고, 가이딩을 이유로 스킨쉽한 게 얼만가.

‘심지어 상대는 해리스잖아.’

성격이 어떠하든 외형만큼은 누구라도 홀리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다.

그러나 나는 그 엄청난 외모를 보기도 전, 활자로 읽히는 그의 일부만으로도 이미 해리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사실상 정해진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한계까지 모른 척하려고 했다.

원작을 운운하려는 게 아니라, 당장 내가 그에게 숨기고 있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가진 무기부터 수상하지.’

허공에 손을 펼치자, 빛과 함께 총이 나타났다. 총기 짧은 권총의 형상을 하던 무기는 내 의지가 담기자 기다란 라이플로도 늘어났다.

S급 아이템, ‘기만의 은총’.

‘왜 기만이라는 말이 붙었나 했더니,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 있어서였지.’

처음에는 유용한 무기를 받아서 기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해리스에게 자랑하려던 순간 멈칫했다.

어째서, 해리스의 광폭화를 막은 대가로 받은 게 무기인 걸까.

그 의문이 떠오른 순간,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본능적으로, 더 파고들어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리고 해리스가 묻기 전까진 절대 먼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지.’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해리스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나는 점점 그를 나의 해주석 탈취 계획에 끼워 넣고 싶지 않아졌다.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이 있으니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해리스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위험에 처하게 두고 싶지 않고 이용하고 싶지도 않아…….

“순정적이네.”

“그러게요, 이제 와 안 어울리게…… 엑?!”

나는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틀에 앉은 회색의 인영에 기겁해 굳었다.

존재감이 이상할 정도로 옅지만, 외형만큼은 훈훈하고 호감을 주는 인상의 미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안녕, 제이드.”

오늘은 또 어디서 부상을 입은 건지 온통 피투성이인 꼴의 사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쁘다는 듯 눈을 휘었다.

“나 기다렸어?”

피로 물든 입술 아래 뾰족한 송곳니. 광기와 장난기가 뒤섞인 목소리.

듀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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