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왜 알루카스가 여기에?’
제이드는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카밀로가 안내한 거지? 두 사람이 사전 협의한 건가, 아니면 카밀로가 변신해 있던 사이 알루카스가 찾아온 건가?
돌아보니 어느덧 카밀로는 사라진 뒤였다. 머리가 복잡해진 것과 반대로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푹- 손가락으로 알루카스의 두툼한 가슴을 쿡쿡 찌른 것이다.
“우, 우와.”
예상외의 감촉에 제이드 눈이 커졌다.
“좋아?”
“아, 네. 생각보다 말랑말랑하네요……?”
근육질이라 단단할 줄 알았는데.
제이드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지만, 왜인지 알루카스는 ‘말랑말랑?’ 하고 자존심 상한 얼굴이 되더니 가슴에 힘을 주었다.
“우와!!”
제이드가 놀라서 눈 휘둥그레졌다. 대박, 거기서 커질 수가 있어?
그 반응에 의기양양해진 알루카스는 이번에는 가슴 근육을 움직였다. 움찔움찔 제멋대로 움직이는 가슴이 너무 신기해서 제이드는 박수까지 짝짝 쳤다.
“우와아아, 대단해!”
“훗, 내가 이 정도다.”
“더! 더 해봐요!”
그렇게 한참 제이드는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치고, 그 호기로운 반응에 넘어간 알루카스는 근육 자랑쇼를 하는 와중이었다.
똑똑!
“큼, 다들 뭐 하세요?”
굳이 문을 두드리며 루켄이 들어온 것은.
진기명기 근육쇼에 정신이 팔렸던 제이드는 그제야 자신이 반 납치되듯 알루카스를 만나러 왔다는 걸 떠올렸다.
“아니, 알루카스 님. 갑자기 이렇게 찾아오시면 곤란-”
“곤란은 무슨, 존나 즐겼으면서.”
알루카스는 신나게 박수 쳐 빨개진 제이드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하핳, 그랬지. 제이드는 머쓱히 웃으며 말을 돌렸다.
“어쨌거나! 무슨 일이 있길래 이렇게-”
“미남계를 썼냐고?”
“근육계죠. 쟤 알루카스 님 얼굴은 하나도 안 보고 가슴 근육만 겁나 보던데.”
“…….”
제이드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그래, 그러기도 했었지.
‘하지만 신기하잖아! 가슴 근육 울끈 불끈하는 거!’
누가 와도 ‘허어’ 하면서 놀라서 지켜볼 거라고. 이건 진짜 대박감이다. 영상 찍어 올릴 수만 있다면 100만 뷰 각인데.
“뭐, 제이드 네가 좋았다면 됐어.”
알루카스는 씨익 웃으며 제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양기 넘치는 미소와 시원시원한 손길에 제이드는 새삼 실감했다.
‘이래서 바람둥이구나.’
가볍고 산뜻한 다정함.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당당함.
알루카스는 단순히 근사한 외향만이 아니라, 무형의 아우라만으로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놀아나고, 이민족이라 천시당하면서도 사교계 귀부인들을 비롯한 오만 사람들에게 인기 터진 이유가 납득이 갔다.
‘이런 장기(가슴) 자랑도 보여주는 야성적인 미남을 어디서 또 구하냐고.’
이용당하는 1회성 만남이라는 걸 알아도 넘어갈 수밖에 없겠구나.
알루카스의 무릎에서 내려온 제이드는 머리를 슥슥 정리하며 말했다.
“엘티로사 황녀도 좋았겠죠. 그녀는 당신한테 집착하고 있으니.”
“…….”
알루카스는 웃던 얼굴 그대로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있었군.”
“네에, 엘티로사 황녀가 왜 저한테 악의를 품었는지도 안답니다.”
어쩌다가 고드윈령에서 알루카스와 자신이 안면을 텄다는 소식을 들은 거겠지, 제이드는 심드렁히 생각했다.
‘<시천귀>에서도 그랬으니까.’
엘워드 황태자 밑에서 구르던 에이드리안은 알루카스와도 연이 닿게 된다.
가이드라면 남녀 가리지 않는 알루카스는 당연히 에이드리안에게도 흥미를 보였고, 하필이면 그 모습을 엘티로사 황녀가 목격해 버려서…….
‘개고구마 수난 시대가 시작되어버렸지.’
우리 불쌍한 에이드리안.
물론 1회차 때만 당한 거고, 2회차에선 곧바로 끔살해 버렸지만.
“미안, 사과하지. 네가 그렇게 황녀와 엮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알루카스는 순순히 사과했다.
왕이라는, 탑 티어의 칭호를 받는 사람이 망설임 없이 고개 숙이는 모습에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아니, 뭐…….”
“그렇지만 잘 싸우던데? 총 쏘는 거 보고 감탄했어.”
다시 고개 든 알루카스가 씩 웃었다.
“일부러 해치지 않은 건가?”
“네.”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황녀라서 당장 해치면 위험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결국, 이 모든 계략의 배후엔 엘워드 황태자가 있으니까.’
황녀는 도구에 불과하다. 내가 쏴 갈기고 싶은 건 꼬리가 아니라 머리거든.
“그 정도면 수도에서도 손꼽힐 실력인데, 누구한테 배운 거지?”
왜일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떠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작은 손에 간신히 쥐어지는 장총.
어깨 위를 누르던 손길이 고개를 과녁에 돌리며 말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자세 잡아.’
머리 위에서 울려오는 것은, 에이드리안의 목소리.
총을 들고 견착하자 마른 손가락이 잘못되었다는 듯 엄하게 팔꿈치를 찔렀다.
‘아!’
‘언제까지 내가 자세를 잡아줄 수 없어. 제대로 안 해?’
‘자, 잘못했어…….’
‘알면 제대로 해. 총을 쥐는 즉시 몸이 알아서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질책하는 목소리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몸이라도 기억해야 해, 제이.’
네가 또 나를 잊더라도.
내려다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투명하고도 어두워, 슬프고도 지쳐 보였다.
‘……에이드리안이었구나.’
그가 내게 사격술을 가르쳐 준 거였어.
먹먹히 닿아오는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욱신거렸다.
메마른 에이드리안의 얼굴에는 눈물이라곤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것이 도리어 마음 아파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데,
“-제이드?”
“아.”
정작 손에 닿은 것은 알루카스였다. 제이드는 눈이 커졌다.
‘바, 방금 뭐지?’
이건 분명 ‘제이드’의 기억이다. 그런데 왜 그게 지금에서야 떠오른 거지?
‘그리고, 몸이라도 기억해야 한다니.’
대체 뭐야.
내가 기억을 몇 번이나 잊었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인데!
‘이번 에이드리안…… 1회차가 아니었다고?’
그럼 2회차? <시천귀> 본편 시점? 그도 아니면……!
“……실수였어요.”
머리가 복잡해진 제이드는 눈을 질끈 감고 손을 거두었다.
“뭐 묻은 줄 알고, 모르고- 읏?!”
그러나 그러기도 전에 놀라던 알루카스의 얼굴이 다시 능글맞게 미소 지으며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뭐, 뭐예요?!”
당황하여 달아오른 제이드의 얼굴에 알루카스는 턱을 괴며 웃었다.
“왜? 내게 다시 반했어?”
“아니, 애초에 반한 적이 없는데 뭘 다시 반해?”
제이드는 투덜거리며 손끝을 옷깃에 벅벅 닦았다.
과장된 행동에 알루카스는 ‘아, 상처받아. 너무한 거 아니야?’ 하고 웃으며 야유했다.
“네에, 네. 잡설은 여기까지 해요.”
“잡설이라니, 너무해…….”
“그래서, 누이분은 확인하셨나요?”
흑흑, 우는 시늉을 하는 알루카스의 말을 자르고 제이드가 본론을 치고 들어갔다.
‘알루카스가 급하게 날 찾아올 이유는 그뿐이지.’
“……그래.”
알루카스는 장난기가 싹 가진 얼굴로 답했다.
“네 말대로더군.”
“유폐된 황비의 궁에 있다는 것까진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저희 부족의 예언자도 그쪽에 갇혀 있으니까요.”
진지해진 분위기에 맞춰 루켄은 제이드에게 존대했다.
이제 그녀는 그냥 예쁘장한 가이드가 아닌, 알루카스와 대등하게 말하는 상대였다.
“하지만 내부까지 진입은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황비 측에서…….”
“아니, 오해예요.”
제이드는 고개 저으며 말했다. 황비는 당신들의 적이 아니라고.
“알레히드, 그녀가 바로 유폐된 황비입니다.”
“어, 어째서……?”
“그분께선 알루카스 님의 누이시니까요.”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루켄은 기겁하며 알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알루카스는 알고 있었던 건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알레히드는 요정족 혼혈이야.’
그래서인지 알루카스의 부족이 풍비박산 났을 때 마탑의 실험체로 끌려갔지만, 가이드로 제대로 발현하지 못해 황실에 팔려나갔다.
‘처음엔, 그저 이민족 출신 예언자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그러나 알루카스가 용병왕으로 부상하면서 그의 주변을 조사하던 엘워드 황태자는 알레히드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다.
“알루카스 님이 누이분을 빼돌리면, 황실은 선전 포고를 할 거예요. 감히 황비를 훔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그러면 바로 제국과의 전면전이다.
그 명분을 가지기 위해 엘워드 황태자는 굳이 알레히드를 다 늙은 황제의 비로 밀어 넣었다.
제아무리 강력한 S급 이능력자에 용병왕이라지만, 알루카스가 제국과의 전면전까지 감당할 순 없으리라.
심지어 그는 용병단을 거느리는 리더다.
‘알루카스 하나만은 어떻게든 살아남을지도 몰라도, 나머지는 죄다 죽겠지.’
실질적으로 알루카스는 목줄이 잡힌 셈이다.
만에 하나 그가 용병왕의 자리도 용병단도 모두 다 버리고, 누이 하나만 납치해 사막으로 도망친다 해도 소용없다.
‘금제를 걸어두었으니까.’
황실 바깥으로 도주하면 자살하라는.
황태자, 엘워드는 잔혹한 사람이다.
‘알레히드는 이미 숱하게 죽은 동족들로 인해 반항할 의지를 잃었을 거야.’
그녀가 알루카스의 구조 신호조차 무시하는 건, 이렇게라도 동생이 자신을 잊고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황실에 잠입하기 위해 엘티로사 황녀를 꼬신 모양인데……. 잘못 판단했어요. 오히려 엘워드 황태자는 황녀를 통해 당신을 감시 중이니까.”
“…….”
알루카스가 침묵하는 사이, 루켄은 일그러진 얼굴로 외쳤다.
“그럼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도, 알루카스도 알고 있다. 사실상 자신들의 힘만으론 알레히드를 안전히 빼내 올 수 없다는 걸.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거겠지.’
알아.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제이드는 대답하지 않으며 알루카스를 보았다.
총명한 그라면, 자신이 무엇을 위해 침묵하는지 알 테지.
“……네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해준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해결책도.
더는 능글맞지도, 살벌하지도 않은 얼굴에서 제이드는 깨달았다.
‘지금이다.’
알루카스를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일 순간은.
“저와 손잡아요.”
그러면 당신의 누이를 구할 방도를 알려주겠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쾅-!!
문짝이 부서지며 날아간 것은.
“손을, 잡아?”
부서진 잔해 위로 울리는 나지막한 목소리.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를 밟고 들어서는 검은 인영에 제이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