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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11화 (111/119)

111화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아니, 사람 누구? 왜 만나야 하는데?’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해와서 목걸이에 달린 돌멩이(에이드리안)를 제대로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묻기도 전,

“제이드!”

먼발치에서 해리스가 나를 불러왔다.

“그 옆은 누구야? 이리 와.”

아직 가이드 길드에서의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

찌푸려진 미간은 혹시 어디선가 또 나를 공격하려는 적이 나타날까 경계하고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답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데, 날 잡아 오는 카밀로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답지 않게 채근하는 기색이라 나는 더 생각하지도 않고 답했다.

“화, 화장실 좀 물어봤어요! 잠시만 다녀올게요!”

그리고 후다닥 뒤돌아섰다. 더는 나를 붙잡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쩐지 해리스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워.’

훅 실감이 났다. 내가 ‘가이드가 아니’라는 사실 말고도 그에게 말하지 않은 일이 많다는 게.

“시간을 벌어서 다행이군요.”

이를테면, 내 옆의 카밀로라든지.

이전 고드윈 본성에서 알루카스를 가이딩했다고 오해받았던 일 덕분에, 나는 해리스가 다른 이능력자들을 극도로 경계하고 내 곁에 두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지.’

카밀로라는 이능력자를 만났다는 거나, 해리스에게 말한 것과 별개로 그녀와 따로 해주석 훔치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각인 보호자 에이드리안을 한 번 소환(?)했다는 것까지도.

‘의식을 잃은 해리스를 깨웠던 게 내 힘이 아니라는 것도 말 안 했네…….’

새삼스럽게도 깨달았다.

나는 해리스에게 그리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그것이 해리스에겐 기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고백할 게 너무 많아.’

나는 쓰게 웃었다. 일부러 기만하려 작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점점 숨기는 게 많아지고 있었다.

“제이드 님.”

나를 에스코트하듯 발걸음을 옮긴 카밀로는 순식간에 또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면서 속삭였다.

“일이 급하니 빠르게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

“이전에 요정에 관해 조사를 요청하셨지요.”

“아, 응. 그랬죠.”

완전 까먹었네.

정보 길드의 수장인 카밀로는 길드를 오래 비울 수 없다며 나보다 먼저 수도로 출발했었다.

그리고 그동안 언노운 던전이니, 듀크의 박살 난 대가리니, 미친 용이니, 너무 큰 일들이 빵빵 터졌지. 그러고 보니 카밀로 보는 것도 이제 석 달 만인가?

“제가 보유하는 정보도 있었지만, 조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최근 마탑을 털었습니다.”

“…….”

우리 카밀로 언니, 엄청 화끈하시네요. 거기가 어디라고 털어?

‘생각해 보면 처음 만난 것도 카밀로가 나에 대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지.’

정보 앞에서 대담해지는 여자, 과연 정보 길드의 수장을 할 만하십니다.

“덕분에 마탑주가 통제 중인 1급 기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지요.”

우뚝, 급히 걷던 걸음을 멈춘 카밀로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요정, 그 고대 종족은 가이드의 원류(源流)입니다.”

* * *

“가이드의 원류?”

당황한 제이드는 카밀로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 설마 요정이 최초의 가이드란 말이에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카밀로는 손을 들어 ‘질문은 이따가’라고 비언어적 의사를 전달하며 말을 이었다.

“가이드와 관련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마탑주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유독 요정족 혼혈 사이에서 가이드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고 합니다.”

“……!”

그 말에 제이드가 떠올린 것은 에이드리안이었다. 대표적인 요정족 혼혈 가이드.

또한 이전 자신이 가짜로 몰리고 대체재들이라며 가이드들이 우르르 들어왔을 때, 그 미인들의 머리도 형형색색이었다.

‘요정족 혼혈 특징이, 미형에 체모의 색이 다채롭다는 거였지.’

이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마탑주는 얼마나 많은 실험을 해보았을까. 제이드는 문득 오싹해졌다.

“100%가 아닌 건, 이미 요정족 혈통이 인간 사이에도 많이 퍼졌기 때문이리라 추측하더군요.”

“……피가 많이 희석됐다?”

“네, 그렇게도 보았습니다. 이를테면 전승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그리고 카밀로는 덧붙였다.

요정의 힘이 인간에게 전승되며 가이드라는 존재로 나타났듯, 같은 고대 종족인 드래곤의 권능은 이능이라는 형태로 인간들에게 내려와 이능력자들이 탄생하게 된 것 같다고.

“하지만 드래곤과 달리, 이능력자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육신이 가진 한계로 인해 더욱 절실히 가이드를 필요로 하게 된 것 같다고…….”

“자, 잠깐.”

급하게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정리하지 못한 제이드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되물었다.

“요정이 가이드의 원류, 드래곤이 이능력자의 원천이라는 거잖아요. 그럼 드래곤도 이능력자가 가이드를 갈구하듯 요정을 필요로 했다는 거예요?”

“네, 정도는 다르지만 그랬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드래곤이라 해도 어린 해츨링 시절이나 알의 시기마저 완벽할 순 없었다.

육신의 껍질은 연약한데 보유하는 힘은 너무 강력하다. 그 부조화로 인해 해츨링들은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쉽게 다치거나 죽곤 했다.

“그래서, 요정들이 막 태어난 알이나 해츨링 곁에서 보모처럼 돌보아주며 불완전한 드래곤의 힘을 진정시켜 주었지요.”

카밀로가 제이드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마치 현재의 이능력자와 가이드의 관계처럼요.”

“……!”

제이드는 입을 벌렸다.

“그, 그러니까 요정은 드래곤 한정 가이드라고 보면 된다?”

“예.”

카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하지만 드래곤은 성장하면 제힘을 통제할 수 있어, 이능력자와 가이드처럼 분리 불가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과거의 연과 미래의 연을 생각해 요정족과 친우의 관계를 이어나갔다고도 하고요.”

드래곤이 자신의 레어에 초대받지 않고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요정족으로 한정하고, 레어의 보물도 나눠주며 요정이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제이드는 신음했다.

“히야…….”

머리가 복잡했다.

드래곤. 그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언노운 던전에서의 일이었다.

‘요정은 드래곤의 믿을 수 있는 벗이지.’

왜 그 말을 자주 하나 했네.

“다만 요정은 가이드처럼 이능력자들을 일방적으로 보조하는 역할만이 아닌, 해츨링을 보호하기 위한 공격 능력도 제법 강했다고 합니다. 주로 마법 계열이지만 무력치가 높은 요정도 있었다고…….”

“……!”

그래서 총을 잘 쏘았던 건가! 제이드는 딱딱 맞아떨어지는 설정에 속으로 감탄했다.

‘나, 정말 듀얼 코어 맞았구나.’

공격의 힘과 진정의 힘을 둘 다 타고난 존재. 다만 그 진정의 힘은 드래곤에 한정…….

‘흐음?’

문드러진 드래곤의 모습이 해리스의 이능, 공허와 비슷한 느낌이었지.

‘어쩌면 공허는, 드래곤들의 시체와 원념에서부터 태어난 거였을 지도 몰라.’

시기도 맞다. 드래곤이 멸종하고 난 뒤에야 공허라는 고대 마수가 나타났으니까.

‘그렇다면 해리스가 고대 마력을 보유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라 볼 수 있어.’

머릿속 퍼즐이 탁탁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 가정이 전부 맞아떨어진다면, 제대로 된 가이드가 아닌 내가 몇 번이고 해리스를 진정시켰던 것은 혹시…….

“안녕, 제이드.”

“!”

더 생각하기도 전, 허리가 붙들렸다.

고개를 들자 나타난 인영에 제이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태양에 그을린 짙은 피부, 윤기가 반들거리는 커다란 가슴 근육, 그를 강조하듯 황금의 장신구를 늘어뜨린 야성적인 적발의 미남이 눈앞에 있었다.

“아, 알루카스?!”

제이드가 정신 차렸을 땐 그의 말처럼 탄탄한 허벅지 위에 앉혀진 뒤였다. 올려다본 노란색 눈동자가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오랜만이야. 나 보고 싶었지?”

“이, 이게 무슨 짓……!”

만나야 한다는 사람이 알루카스였다니.

외도하는 기분에 제이드가 파드득 떨자, 알루카스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놓으며 속삭였다.

“난 보고 싶었는데.”

“…….”

제이드는 손바닥 아래 박동하는 두툼한 가슴 근육의 위용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일단 이건 보고 싶었던 것 같기도…….

* * *

가이드 길드는 어수선했다.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를 노린, 가이드 길드의 조작 사건과 황녀의 패악이 얽힌 희대의 막장 사태.

디뮈아드는 어리고 다른 사람은 지위가 부족하니 사실상 이를 정리할 사람은 해리스밖에 없었다.

‘성가셔 죽겠군.’

해리스는 짜증스럽게 상황을 진두지휘했다. 예상하던 일이었으나 불쾌한 건 여전했다.

‘개수작을 부릴 확률이 높겠죠. 건드린다면 해리스 님이 아니라 저일 거고.’

제가 제일 조빱이잖아요,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 제이드는 방긋 웃었다.

‘뭐, 일이 그렇게 되면 아예 가이드 길드를 먹어버립시다!’

‘먹어?’

‘네. 관련 인사들 잡아가고 빈자리에 저희 사람을 꽂는 거예요.’

‘우리 사람이라면.’

“여기가 가이드 길드……!”

해리스의 부름을 받고 온 아넬라와 네이트는 놀라 두리번거렸다.

진정제 포션의 개발을 한 그들은 가이드 길드와 이익 충돌로 인한 갈등을 겪고 있었으나, 이번 기회에 도리어 적의 본진에 잠입하게 된 셈이었다.

‘우리 사람이 아니라, 너의 사람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해리스는 제이드의 계획을 거들어주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가이드 길드에서는 더 이상 진정제 포션의 거래를 막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가이드 길드 내에서도 주요 고객으로 변모할 수도 있고.

즉, 제이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해리스의 적안은 가라앉아 있었다.

제이드가 오늘 미친 황녀 앞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고 총을 쏴 갈긴 것은 놀랍지 않았다.

이보다 더 쥐뿔도 없던 노예 시절에도 자신에게 개겼으며, 자신을 박대하던 선대 공작 앞에서도 하고 싶은 말 다 했다.

‘분명 그런 성정인데.’

어째서 그런 제이드가, 조작된 가이드 검사 앞에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창백해졌던 걸까.

무언가 찔리는 게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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