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이쯤 되니 제이드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진짜 가이드고 정말 가이딩을 했어도 F급으로 몰렸겠구나.’
F급이 뭔지는 제이드도 알았다. 폐급 가이드. 그러니까 진짜 가이드가 아니란 말이다.
‘문제는 그게 진실이라는 건데.’
놀랍게도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던 적들이 더 자신을 가이드라 믿었던 것이다.
이 무슨 모순인지.
제이드는 힐끗 시선을 돌려 해리스와 디뮈아드를 보았다.
“F급? 측정 불가……?”
디뮈아드는 제이드가 가짜 가이드라는 것에 황당한 기색이었고, 해리스는…….
‘무표정하네.’
제이드는 손가락을 웅크렸다. 얼굴이 읽히지 않았다.
‘일단 가짜 가이드라 판정이 나면, 이능력자 측에서도 제 가이드를 불신하지 않을 수 없어.’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라 해도, 의심의 싹이 틀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해리스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지.
“고드윈 소공작에겐 진짜 가이드가 필요하오!”
야, 너희 계속 팩트 폭력할래.
‘적 주제에 왜 계속 맞는 말만 하는 거야?’
제이드가 속으로 투덜거릴 무렵, 문이 달칵 열리며 다채로운 미인들이 줄줄이 이어 들어왔다.
“다행히 우리 가이드 길드에서는 대체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정말로 예상치 못했나? 제이드는 새삼 씁쓸해진 자신이 웃겼다.
‘잘 짠 계략이야.’
일단 자신부터 이게 함정이라는 것을 알아도 밟을 수밖에 없었다.
가이드는 이능력자에게 생명을 좌우하는 존재이니, 무언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어도 ‘혹시……?’ 하는 의심이 조금도 안 들 수는 없기 마련이다.
거기다 가이드 길드에서 보증하는 가이드들도 이렇게 준비해 놓기까지.
‘제 가이드를 100퍼 불신하지 않더라도, 시범 삼아 저 가이드들에게서 가이딩을 시도해 보는 게 일반적일 거야.’
그리고 그동안 나는 끌려간다.
제이드는 가이드들 뒤에 대기한, 억제구와 줄끈을 쥔 경호원들을 보며 상황 이해를 끝냈다.
완벽하게 모두를 속일 수 있는 계략이 아니었다.
하지만 약간의 허점이라도 생겨나면 통할 수밖에 없는 수작이었다. 완성도보다도 목적에 충실한 계획이니.
“황녀님? 어찌 여기……!”
“비켜라, 내 저 사기꾼의 얼굴을 봐야겠으니!”
“하지만, 엘티로사 황녀님. 여긴-”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몇몇 인영이 늘어났다. 호화롭게 차려입은 여인과 그녀를 말리는 건지 부추기는 건지 모를 시녀들.
‘여기에 엘티로사 황녀까지 끼얹어?’
물론 제이드는 엘티로사 황녀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시천귀>에서 에이드리안이 가진 가이드의 힘을 질투하고 멸시하는 1차원적인 악역으로 나왔었다.
그러나 사태를 파악했을 때는 이미 늦어, 경호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끌려가게 되는 건가?’
아니, 그럴 순 없어. 제이드가 각오하며 탈출구를 곁눈질하던 순간이었다.
“개지랄은 끝났나?”
나지막한 중저음의 목소리.
“보자 보자 하니 끝도 없군.”
해리스는 차갑게 조소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제이드는 물론 좌중 모두 당혹하여 굳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것 같았던 해리스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한기 어린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무슨……!”
“꺼져.”
그리고 그 분노가 향하는 곳은, 제이드를 끌고 가려 다가오던 경호집단이었다.
“……윽!”
그들은 제이드에게 닿기도 전에 목을 움켜쥐고 헐떡였다. 어느덧 그들 발치의 그림자에서 뻗어진 검은 마력이 촉수처럼 목을 옥죄고 있었던 것이다.
“꺄아아악-!”
상황을 파악한 길드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공작! 저자는 가짜요, F급- 아니, 측정 불가란 말이오! 진짜 가이드가 아니……!”
사람들은 해리스를 막아내려 했지만, 해리스는 그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S급이라고 뜬 자신의 측정 기계를 다시 손에 쥐었다.
“측정 불가라서, 가짜라고?”
해리스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마석을 쥔 손등에서 검은 핏줄이 돋아났다. 검은 힘이 미친 듯이 불어 넣어지는 게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쿠궁-!
여태껏 무수한 이능력자들을 측정한, 마탑주가 설계했다는 기계가 덜덜덜- 불안한 소리로 떨리며 연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측정 불가.]
-라는 결과를 내뱉고는 부서졌다.
“그렇다는군.”
제이드는 입을 쩍 벌렸다. 기계가 사망했어!
“측정 불가가 뜨면 가짜라니, 나도 이능력자가 아니겠어.”
아니,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제이드는 무심코 속으로 반박했지만, 말을 내뱉기도 전에 해리스에게 낚아채졌다.
“꿱.”
제이드의 신음을 들은 해리스는 위치를 조정하며 돌아섰다.
“진짜가 아니니 여기서 볼 일도 없겠지.”
“아, 아니……!”
초유의 사태에 다들 당황했다.
해리스 고드윈이 제 가이드를 아낀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가이드가 아니라는 말을 듣고 난 뒤에도, 저렇게 조금의 의심도 보이지 않고 실드 칠 줄은……!
‘나도 몰랐다!’
제이드조차 어안이 벙벙했다. 해리스 너 의심병자 아니었어?!
“멈추시오, 소공작!”
그나마 이성이 남아 있던, 황녀의 조종자 뉴리엔 백작 영애가 외쳤다.
“황녀 전하께서 계신 자리요.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막무가내로 행패를-!”
“막무가내 행패?”
제이드를 들고 가려던 해리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
해리스의 얼굴을 본 제이드는 알아차렸다. 여태까지 해리스는 극도로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으며, 사실은 개빡친 상태라는 것을.
“행패가 뭔지 알기는 하나?”
해리스가 붉게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빛이 있어 마땅히 존재하는 그림자가 순식간에 사람들의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아악……!”
“이, 이게 뭐야!”
“그웨엑-”
해리스의 이능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두려움에 창백해진 얼굴들이 덜덜 떨다가 쓰러져 구역질까지 하고 있었다.
‘뭐, 뭐지?’
제이드는 충격받았다.
물론 해리스의 이능 ‘공허’는 본질적으로 마수다 보니, 불길하고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힘이긴 했다.
‘하지만 고드윈 공작령 때보다 더 격한 반응인데?!’
왜지? 의문과 동시에 제이드의 눈이 커졌다.
‘설마 수도는 공허가 봉인된 본진, 마세권이라서?’
고드윈령과 달리 수도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허의 영향력에 은밀히 노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예민하게 반응한 걸 지도……!
“해, 해리스 님!”
뭐건 간에 해리스 막아야 했다. 대량 학살은 안 돼!
그러나 좌중을 노려보는 시뻘건 눈은 흉흉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안 들리는 거야.’
제이드는 둥지를 찾은 새처럼 해리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꼭 끌어안아 그를 흔들었다.
“진정하세요, 진짜 다 죽이면 안 돼!”
해주석, 해주석! 필사적으로 속삭이자 해리스의 적안이 천천히 아래를 응시했다.
포근하고 따스한 온기.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
해리스는 힘을 거두었다.
“허억-!”
“쿨럭, 커헉!”
“으, 으웨엑…….”
그러나 사람들이 정신 차리는 데에는 다소의 시간이 걸렸다. 공포의 분위기는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우, 우릴 정말로 죽일 생각이었단 말이야?!’
경악할 노릇이었다. 고드윈 소공작의 가이드를 뺏어가려 해놓고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겐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는 가이드잖아!’
가이딩을 원하는 이능력자들은 제아무리 난폭하고 포악하다 해도 가이딩을 받기 위해 성질 죽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본성부터 흉악한 이능력자들이 가이드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정도가 있었다.
‘설마 죽이겠어.’
총애받는 가이드를 내쫓는 계획을 실행한 것에는 은연중에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설사 들키더라도 진짜로 큰 손해를 보진 않겠지.’
‘아무리 분노하더라도 우린 가이드 길드니까, 이능력자가 참을 수밖에 없잖아?’
무의식적으로 내장한 갑질이자 폭거였다.
그러나 그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가이드 길드원들 공포에 덜덜 떨었다.
“이래도, 내 가이드가 가짜인가?”
진정한 해리스가 제이드를 품에 안고 살벌하게 묻자, 그들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들의 계획은 F급을 뜨게 하는 거였기에 ‘측정 불가’가 뜬 사태는 그들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보통이라면 진짜로 재검사를 해봐야 할 일이었지만,
‘설사 가짜라도 여기선 진짜라고 말해야 해.’
이제 와서 재검사하자고 주장할 용자는 여기 없었다.
그리고 일단 저 흉악한 S급 이능력자를 진정시킨 걸 보면 가이드가 확실했다!
‘아니, 가짜 맞아…….’
제이드는 짠내 나는 눈으로 저들을 보았다.
‘그래서 측정 불가가 뜬 거겠지.’
어떤 개수작도 부리지 않았다면 진짜로 들켰을 텐데.
도리어 저쪽에서 먼저 개수작 부려준 덕분에, 측정 불가 떠도 이 또한 개수작의 일부로 오해받게 되었다.
‘이걸 다행이라 봐야 하나.’
속으로 쓴웃음 짓던 제이드 디뮈아드에게 눈짓했다.
가이드 길드로 출발하기 전, 혹시 모를 사태로 해리스가 깽판 칠 것을 염려한 제이드는 디뮈아드에게 부탁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네 이능으로 수습해줘.’
해리스가 깽판 쳐도 그리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리안 남작.’
‘물론 거부감이 들겠지만-’
‘그대는 고드윈 소공작에 대한 신뢰가 없군.’
‘…….’
아니, 그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나 제이드는 부정하지 못했다. 우리 최애님, 정말로 사랑하지만 가만히 있을 거라곤 믿기 어렵거든.
‘그래서 해주기 싫다?’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확답하기엔-’
‘구해줬잖아! 목숨값을 빚졌으면서 이런 사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줘?’
‘…….’
아이러니했다.
해리스 고드윈은 측정 기계에서 제이드가 가짜라 떴어도 그녀를 믿었다.
그러나 정작 제이드는 해리스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불신했다.
‘하지만 그 불신은 옳았지.’
예측대로 깽판을 쳐버렸으니. 디뮈아드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