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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05화 (105/119)

105화

수도의 라예르가 후작저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주인의 당부와 수행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리스 고드윈은 두려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이능력자였다.

그것만으로도 시중을 드는 게 버거운데,

“오랜만이군.”

고드윈 공작이 쳐들어오기까지!

초대받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들어온 거였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부모가 자기 아들 만나겠다는데 막아설 도리는 없으니까.

심지어 상대는 황실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황태자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고드윈 공작이었다.

‘그렇다 한들, 이 작자는 겁도 없나.’

고드윈 공작을 따라온 수행원은 해리스 고드윈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황궁의 초상화로만 보았던, 엘리아스 황녀와 똑 닮은 아름다운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해리스 고드윈이라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아니다.’

순간 눈이 마주친 수행인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뒷걸음질 치며 부정했다.

새까만, 밑바닥을 알 수 없는 어둠을 응시하는 듯한 두려움과 섬뜩함. 그런 것은 단순히 위압감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시선을 돌린 수행인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과 반대로, 고드윈 공작의 자줏빛 눈동자에는 이채가 돌았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물론 잘 지내지 못했겠지. 그 사실은 그가 제일 잘 알았다.

일부러 자극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으나, 마주한 아들은 놀라우리만치 조용했다.

당장에라도 분노를 터뜨리고 그를 공격하고도 남을 텐데도, 무엇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역시.’

고드윈 공작은 속으로 조소했다.

탈출까지 감행한 저 괴물이 어쩌면 난폭하게 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 괴물 새끼는 아직도 그에게 목줄이 메인 모양이었다.

그럴 만했다.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외면당하고 학대받은 채 자라온 아이들은 인정 욕구가 강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인정받고자 하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학대한 바로 그 부모였다.

‘어리석게도.’

고드윈 공작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가족들에게 인정 욕구가 미쳐 날뛰던 등신 새끼였으니까.

그러니, 제아무리 강력한 괴물이라 해도 어리고 무력했던 시절의 악몽에 저항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잘 지낸 모양이구나. 안색이 좋아.”

“…….”

해리스는 말없이 고드윈 공작을 응시했다. 단안경 속 휘어지는 눈가에 주름이 접히는 게 보였다.

그것 외에는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때와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박제된 짐승처럼.

‘너 같은 괴물이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기이한 기분이었다.

해리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고대해 왔었다.

무지하고 어렸던 시절에는 ‘왜 그랬냐’고 분노와 억울함을 토해내기 위해.

그리고 아득한 감금 세월 이후에는, 이유 따윈 필요 없으니 보자마자 죽이겠다고 악에 받쳐서.

그러나, 지금.

“뭐든 간에 잘 도착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집. 그 말을 담는 고드윈 공작은 다정한 아버지처럼 웃고 있었다.

“사촌들을 데리고 오느라 고생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의 가문에 폐를 끼쳐선 안 되지.”

과거, 어린 아들에게 손수 억제구를 달아주었던 때와 똑같은 미소를 띠며.

“네 진짜 집은 고드윈 공작저가 아니더냐? 소공작까지 되었으니, 이제 투정부리지 말고 돌아오거라.”

다감한 척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를 상처입히고자 하는 의지가 듬뿍 묻어 있었다.

“…….”

해리스 발치 아래 그림자가 불길하게 이지러졌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하나 남은 친부라고, 아직도 그에게 인정받고 애정을 갈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그 때문에 차마 복수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고드윈 공작에 대한 자신의 원한과 증오가 너무 사무치게 깊어서, 그를 죽여도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같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지, 어떻게 고문할 것인지, 무엇을 해야 자신이 겪은 고통의 절반이라도 느끼게 해줄 수 있을지를.

해리스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자신이 복수와 증오와 원한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가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결과적으로 친부에게 지배당하는 거나 다름없는, 인생을 시궁창으로 처박는 짓이라는 것도.

‘그래서 뭐?’

알고 있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그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용서하라고?

‘X까.’

지하 감옥에 갇히며, 그는 맹세했다. 아버지를 고통스럽게 찢어 죽이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하물며 인생이 시궁창에 처박는 정도는 별것도 아니었다.

그랬는데…….

“아니면, 두려우냐?”

고드윈 공작은 다정하던 얼굴 위에 조롱의 기색을 띠었다.

“그곳이 네 이능의 원천지라서, 아직 봉인에 풀려나지 못한 고대 마수에게 다시 사로잡혀 먹힐까 도망친 것이야?”

어렸던 자신이 보기만 해도 겁을 먹고 발발 떨었던, 그리고 자란 자신은 눈깔 뒤집히도록 분노하게 했던 표정.

놀라울 정도로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하긴, 네깟놈은…….”

“……신기하네.”

해리스는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신기했다. 더는 정신 나갈 정도로 두려워하지도, 증오에 미쳐 날뛰게 되지도 않는 자신이.

“혓바닥 나불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참 하찮군.”

“……네, 네놈이!”

고드윈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천륜을 거스르는 아들의 모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괴물 새끼가!’

해리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본능에 가깝게 반응하던 증오가 침착해지고, 반사적으로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으며, 원한과 비참함에 열 오르던 눈동자는 고요해졌다.

언제나 생각해 왔다.

고드윈 공작을 만나면 자신이 원한에 미쳐 버리리라고. 그에 대한 복수와 증오로 눈깔 뒤집혀 달려들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해리스는 깨달았다.

아버지는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걸.

물론 그는 여전히 친부를 증오했다. 복수심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더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도 좋다고 여기진 않았다.

자신의 오장육부를 갈아서라도 친부의 뼈와 살을 뜯고 피를 취하겠다는 악에 찬 절망이 작아지고, 증오를 오래 붙들어 생겨난 통증은 옅어졌다.

‘왜일까.’

담담한 기분으로 생각하던 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입매를 허물었다.

제이드.

‘공작이 되세요, 해리스 님.’

‘당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이들을 그보다 더 추락시키려면, 당신은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와서.

그 말대로였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선 해리스는 이제 고드윈 공작을 올려다보며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차분히 내려다보며 조소할 뿐.

“네놈이, 감히……!”

아들의 변화를 알아차린 고드윈 공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지팡이를 쥔 손이 당장에라도 그를 후려 팰 듯 힘이 들어갔으나.

“……커헉!”

어느덧 발치에서 기어 올라간 검은 힘이 고드윈 공작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옥죄였다.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이대로 잡아 죽여줄까.’

살의를 극도로 내려앉은 눈빛은 무덤덤하게까지 보였다.

‘아니.’

지금은 죽일 수 없다.

‘제이드는 해주석을 원해.’

그런데 고드윈 공작을 지금 죽여버리면 사태가 귀찮아진다.

물론 해리스는 증거 따위 남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문제는 고드윈 공작이 너무 공개적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점이었다.

‘수행인까지 붙여서.’

“힉, 히익……!”

고드윈 공작 뒤편에 선 수행원은 겁에 질린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고드윈 공작이 사라지면, 제일 먼저 자신이 의심받겠지.

‘그러면. 제이드에게 해주석을 가져다주는 데 차질이 생긴다.’

해리스는 힘을 풀었다.

“커헉, 컥……!”

힘에서 풀려난 고드윈 공작이 거칠게 헐떡였다. 떨리는 손은 지팡이를 간신히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해리스는 미미하게 놀라고 있었다.

이토록 간단한 일이었다니.

감옥에서 탈출하자마자 고드윈 공작을 찢어 죽이지 못해 눈이 벌겠던 자신이, 어느덧 때와 상황을 위해 이렇게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니.

‘그리고 그것이 이가 갈리듯 힘들지 않는다니.’

정말이지 이상했다.

제이드와 만난 것은 겨우 1년 남짓한 기한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 짧은 기간 동안, 제이드는 그의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버렸다.

‘……깨어났으려나.’

해리스가 고드윈 공작을 내쫓지 않고 굳이 만난 것에는. 제이드를 이 일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함도 있었다.

수도에 온 이상, 고드윈 공작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 걸로 보아, 얼굴 보는 것 이상의 목적은 없는 거 같은데.”

“너, 너……!”

싸늘하고 무정한 얼굴. 고드윈 공작은 멋대로 가버리려는 해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럼 알아서 꺼지시길.”

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히 건너편에 앉은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에 고드윈 공작의 눈이 들끓었다.

‘감히, 저 괴물 새끼가 나를 눈앞에 두고 저따위로 굴어?’

물론 고드윈 공작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지하 감옥을 부수고 나온 저 괴물은 멍청하고 어리던, 그리하여 자신에게 인정과 애정을 갈구하던 아들이 아닐 것이라고.

어쩌면 자신을 이대로 찢어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고드윈 공작은 일종의 실험을 한 거였다. 그 대가로 저울에 자신의 목숨마저 올려놓으면서.

상관없었다. 그의 목숨은 아주 오래전 주인이 거둬주지 않아 남겨진 쓸모없는 것에 불과했으니.

굳이 해리스를 찾아와 자극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불행히도 손목도 목숨도 온전했기에,

‘어째서?’

고드윈 공작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황녀의 신도가 된 뒤에야 자신에게 목줄을 건 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 괴물 새끼의 목줄을 쥔 것은 누구인가?

‘대체 누가……!’

비틀비틀 일어선 고드윈 공작이 제이드를 발견한 건 그때였다. 자줏빛 눈동자가 희번덕하게 빛났다.

‘……너구나.’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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