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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04화 (104/119)

104화

“흐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허억, 헉. 왠지 개 미친놈이 나한테 달라붙은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엇, 제이드 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익숙한 목소리. 낯익은 얼굴들.

고드윈 공작성에서 따라온 하녀 언니들이었다.

우르르 다가와서 나를 살펴보던 하녀 언니들은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갑자기 던전에 빠지셔서 어찌나 걱정했는지!’ 하고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새처럼 지저귀는 목소리와 평탄한 얼굴. 그리고 더는 덜컹대지 않는 바닥에는 햇살이 잔잔히 내리쬐고 있었다.

‘……여긴 여로가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황궁?”

푸른 하늘 아래 상앗빛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웅장한 궁전이 시야 가득 비쳤다.

그래, 그 궁전이 창문 앞에서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일명 궁세권!

“허억.”

막 깨어나 멍한 머리가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수도엔 언제 도착한 거지? 게다가 이렇게 황궁과 가까운 곳이라면…….

“라예르가의 저택이지.”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문을 열고 들어선 레노르가 빙긋 웃었다.

“환영하오, 남작.”

왠지 한참 만에 보는 것 같은 얼굴에 나는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

“……레노르?”

“하하, 나를 알아보다니 정말 멀쩡해진 모양이오. 얼마 전만 해도…….”

“던전!”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던전에 휩쓸려 어디 다치진 않았어요?”

레노르는 내가 그렇게 말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이 커졌다.

사실, 우리는 예의 습격 건 이후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어쨌거나 레노르는 라예르가의 사람이고 나는 해리스의 사람이었으니까.

‘고드윈에서 아이린 공녀- 아니, 라예르가 후작 부인 다음으로 때린 것이 레노르지.’

그러나 레노르는 고드윈의 분노에도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최선을 다해 후처리를 도왔다.

후작 부인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었을 때도 라예르가와 조율했던 것도 그녀였다.

‘받아들일 수 없다, 레노르! 네 어머니가 그렇게 평생 고드윈에 갇혀 지낸다면-!’

‘아버지, 저희는 고드윈에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레노르는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던 가해자의 일원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도망치지 않고 책임을 졌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상황이 반대였다면 나도 레노르와 달리 행동하진 않을 거 같긴 해.’

해리스가 디뮈아드의 처지가 된다면, 나 또한 라예르가에 깽판을 쳐서라도 그를 보호하고 싶겠지.

‘응, 나라도 레노르 뒤통수 때린다.’

그래서인지 나는 레노르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그녀가 딱히 싫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레노르는 천천히, 어설프면서도 솔직한 얼굴로 답했다.

“무사하오. 던전이 우리까지 삼켜오진 않았소.”

“그렇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휴, 나는 안도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녀들도 별 탈 있어 보이지 않고…… 역시 이번 던전의 주된 피해자는 나였던 건가.’

하긴, 돌연 열린 균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게 나였으니까. 왠지 나만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는 것 같다 싶더니만!

“나도, 두 달 만에 깨어난 그대의 얼굴을 보게 되어 몹시 기쁘오.”

내 손가락을 쥔 레노르의 손은 단단했고, 나를 마주해 오는 시선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반가움이 따스하게 반짝였다.

한계가 있는 관계.

우리는 서로에게 절대적인 편이 되어줄 수 없다. 이전 같은 상황이 또 일어난다면, 나도 레노르도 상대보다는 자신에게 더 유리한 것을 선택하겠지.

그래도,

“저도요.”

나는 손을 마주 잡고 웃었다. 맞닿은 온기는 따뜻했고 지금 당장 눈앞의 진심은 다정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과거에 시한부 환자였던 나는 관계의 영속성을 크게 믿지 않았다.

곧 죽을지 모르는 희귀병 환자와 오랜 우정을 나눠줄 사람은 많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덕질에 미치게 되었지.’

나와 소통해 주지 않는 다른 차원의 인간들에게 빠져들게 되면서, 나는 지나가는 1회성 관계에도 진심을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비록 내일 우리가 다시 이렇게 웃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

“리안 남작.”

“편하게 제이드라고 부르세요. 저도 이름 막 불렀는데.”

“하하. 허락 고맙네, 제이드.”

우리에겐 오늘이 있으니까.

그렇게 레노르와 화기애애하던 순간이었다.

“누님, 왜 갑자기 사라진…….”

디뮈아드가 불쑥 나타난 것은.

빛나는 은발과 짙은 와인색 눈동자. 설탕 인형처럼 하얗고 섬세하게 생긴 미소년은 오늘도 아름답고 몹시도 멀쩡해 보였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헤헷 웃는데,

“……?!”

나를 보던 디뮈아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라? 갑자기 왜, 하고 묻기도 전에 소년은 자신의 손으로 눈을 가리며 외쳤다.

“옷, 옷 입어-!!”

“……!”

* * *

“입고 있었거든.”

“그건 네글리제야. 입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디뮈아드는 씨근덕거리며 외쳤다. 아직도 소년의 하얀 얼굴에는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아주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멀쩡한지 아닌지조차 물을 수 없는 처지.

그래서 누이의 핑계를 대고 찾아간 것도 있었다. 깨어났다는 소식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데 하필이면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마주쳐 버렸다.

막 깨어난 제이드는 땀이라도 흘린 건지 그렇지 않아도 실루엣이 잘 드러나는 하늘하늘한 네글리제가 달라붙어서…….

“윽.”

디뮈아드는 손가락으로 두 눈을 찌르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머릿속은 그가 어렴풋이 본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참나.”

다시 얼굴이 터질 듯 빨개진 디뮈아드와 반대로 제이드는 태연했다.

첫째로는 디뮈아드가 뭘 얼마나 보았는지 몰라서였고, 둘째로는 제 몸을 타인에게 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장기 입원 희귀병 환자였다고.’

말기엔 내 손으로 직접 씻지도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입고 왔잖아.”

디뮈아드가 비명을 지른 덕분에 하녀에게 빨래 당하고 온 제이드는 ‘자, 보세요’ 하고 말하듯 차려입은 드레스를 손짓했다.

그러나 정작 디뮈아드의 눈에 담긴 것은 막 목욕하고 나온 사람 특유의, 촉촉하게 발그레하면서도 나른한 얼굴이었다.

“…….”

디뮈아드는 열이 올라 고개를 푹 숙였지만, 제이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달?”

레노르가 전해온 근황 때문이었다.

“제가 두 달이나 깨어나지 못했다고요?”

“정확히는 한 달하고도 3주지만, 얼추 맞긴 하지.”

디뮈아드와 레노르를 포함한 해리스의 일행은 장거리 이동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했다.

‘마탑을 믿을 수 없으니까.’

게이트는 고대 문명의 흔적이었지만, 마탑주라면 거기에도 수작을 부려 디뮈아드를 납치할 위험이 있었다.

그리하여 마차와 말로 이동한 일행은 여정 기한을 두 달 정도 넉넉히 잡아 출발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던전 터졌으니까…… 이동 기한이 통으로 날아가 버린 거잖아?’

개꿀이다. 마차 타는 거 질렸는데 잘됐네. 속으로 희희낙락하던 제이드는 이어진 말에 흠칫했다.

“거기다 던전에서 나왔을 때 그대 상태가…… 영 좋지 않았지.”

온통 새까맣고 질척거리는 무언가에 뒤덮여 있었다고.

‘흐, 흡성대법 때문인가.’

던전에서 자신을 덮쳐왔던 검은 파도. 그것은 바닥없는 해리스의 마력과 이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마지막에 의식이 희미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저번에 해리스를 진정시켰을 때도 흡성대법을 사용했었지.’

그렇다면 이번에도?

기분 탓인지 체내 마력도 엄청 충만했다.

“고드윈 소공작이 계속 그대를 보여주지 않아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웠고…….”

“하, 하하. 보다시피 전 멀쩡해요! 그보다 수도에 도착했는데 다른 소식은 없나요?”

제 발 저린 제이드는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아, 몇 가지 있네. 바로…….”

“나쁜 소식과 성가신 소식. 크게 두 가지 있지.”

얼굴의 열기를 감춘 디뮈아드가 불쑥 끼어들었다.

“성가신 소식은, 가이드 길드에서 남작과 우리를 찾아왔다는 거야. 등록되지 않은 가이드와 이능력자를 황궁이 있는 수도에 함부로 입성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런…….”

제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확실히 불편한 일이었지만, 명분이 타당하다 보니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가이드 길드는 엘워드 황태자 쪽인데.’

엘워드 황태자.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가 숨겨진 S급 이능력자여서만은 아니었다.

‘에이드리안을 죽도록 굴린 인성 쓰레기 악당이었으니까.’

그 새끼가 에이드리안을 착취한 수준은 어지간한 19금 피폐 BL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아니, BL이라기에는 Boy만 있고 Love가 없었지.’

엘워드는 어떠한 악의나 비틀린 애정을 가지고 에이드리안을 괴롭힌 게 아니었다.

그저 에이드리안이 가진 가이드로서의 능력을 한계까지 시험했을 뿐.

‘그래서 더 무서웠지.’

자기 나름대로는 신념 있는 악당이라는 점이 가장 오싹하다.

황태자라는 무소불위한 지위에 숨겨둔 강력한 이능, 거기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사람 수십, 수백 명을 쏟아부을 수 있는 권력까지.

가이드 길드 건은, 그토록 무시무시한 엘워드가 보낸 초대장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수도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작업을 쳐놓다니.’

주도면밀하기까지 해. 이 미친 악당 새끼가……. 속으로 욕을 쏟아붓던 제이드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이게 겨우 ‘성가신’ 소식이라면.

“나쁜 소식은?”

대체 얼마나 끔찍한 일인 거지?

제이드의 질문에 레노르는 복잡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고드윈 공작이 찾아왔소.”

* * *

해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건너편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장례식이라도 치른 듯 새까만 상복. 그와 대비되는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단안경을 낀 자주색 눈동자.

“왔구나.”

고드윈 공작이 웃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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