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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03화 (103/119)

103화

“자신도 조금 더 사랑하시고요.”

물론 제이드는 해리스가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흔한 말이잖아.’

자존감을 키우고, 나 자신을 사랑하라. 그것이 정신 건강과 행복의 첫 단계다.

너무 흔한 말이라서 약간 민망할 정도였다.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학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볼걸, 더 그럴싸한 말이 있을 텐데!

물론 제이드가 그렇게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광폭화는 정신이 망가졌을 때 일어나.’

폭주와 광폭화는 달랐다.

이능력자의 폭주는 위험하지만 단순했다. 이능력자가 이능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오염된 마력이 폭발하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즉, 이능력자 주변만 피하면 돼.’

그래서 이능력자가 폭주할 때 제일 먼저 하는 대처 방식이 감금이다.

제풀에 지칠 때까지 가둬두고 쓰러지면 그제야 가이딩을 시도하는 것이다. 폭주하는 와중에 가이딩하겠다고 다가갔다간 죽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광폭화는 마력이 문제가 아니지.’

이능 자체가 문제다.

본디 인간에게 허락된 힘이 아니라서인지, 이능이라는 미지의 힘은 그들이 담긴 그릇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각성하다가 죽는 이능력자들도 있다니까.’

정신이 약해진 순간, 이능에게 몸의 통제권을 빼앗겨 죽을 때까지 마력을 소모하다가 정말로 사망하는 것이다.

광폭화는 그것의 연장선이다.

알루카스로 예를 들자면, 그의 이성이 로그아웃된 상황에서 화염의 이능이 해킹해 들어와 멋대로 그의 마력과 육신을 사용해 버리는 상황이랄까.

‘실제로 에이드리안에게 구원받지 못한 1회차 알루카스는 그렇게 죽었고.’

사유는 정신 붕괴였다.

누이인 알레히드가 기어코 황실의 손아귀에 놀아나다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가 누이를 구하겠다고 황실의 개로 부려지던 동안에.

광폭화에 빠진 이능은 자신을 담은 그릇이 정신 차리길 바라지 않아 상대를 더욱 한계까지 몰고 간다.

해리스의 이능은 공허. 삼키고 삼켜도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는 고대 마수다.

‘자아가 있기에 광폭화가 일어나기 더 쉽지.’

그렇지 않아도 해리스는 성장 환경의 문제로 멘탈이 그리 튼튼하지 않은데 말이다.

건강한 정신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세계의 고등급 이능력자들은 다들 정신병 하나씩 가지고 있어서 패망 엔딩이 예약되어 있다.

‘그래서 가이드가 필요한 거지만…….’

무심코 에이드리안(돌멩이)를 쥐려던 제이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와 해리스를 가두었던 어둠이 조각처럼 깨지며, 본래의 던전이 드러났다.

무너진 드래곤의 신전.

그러나 그 거대한 신전은 새까만 파도에 삼켜지고 있었다.

반으로 갈라진 미친 드래곤의 원념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부서진 신상도 서서히 차오르는 파도에 가라앉고 있었다.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본래도 그리 천국 같진 않았는데 이젠 정말 나락까지 떨어졌다.

“……너를.”

그리고 그 모든 파도는 해리스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제이드는 입을 벌렸다.

해리스의 그림자와 발치에서, 자신이 보지 못한 등에서 뻗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하고 괴악한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믿고 싶어.”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

해리스의 붉은 홍채가 젖어 있었다.

‘해리스가, 울어……?’

제이드는 충격받았다. 아니, 우리 해리스 왜 울어!

그리고 그것은 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간절히 알길 바랐다. 제이드가 무엇을 바라는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녀를 묶어둘 수 있을지.

‘그런데, 네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나의 행복이라니.’

제이드는 가볍게 말했을지 몰라도, 듣는 사람에겐 질식할 정도의 무게였다. 충격이 벼락처럼 내리쳤다.

해리스는 이 던전에서 자신의 힘이, 이능이, 처음 각성한 날처럼 통제할 수 없이 갈기갈기 뻗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어떠한 제한도 압력도 받지 못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믿고 싶다고, 생각해.”

눈앞의 제이드 말고는.

“하지만…….”

해리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자신을 투명하게 마주해 오는 제이드의 눈동자를 바라볼 수 없었다.

두려웠다.

믿어보겠다 말했지만, 제이드가 자신에게 호감과 애정이 있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애정이라는 무형의 마음에만 의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자신이 마지막으로 애정이나 마음 따위에 기대었다 어떤 처지가 되었던가.

억제구를 차고, 마법사의 실험체가 되고, 마침내 지하 감옥의 괴물로 전락해 갇혀 지냈던 나날들.

더러운 쥐새끼처럼 언제나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던 과거는 치 떨리게 수치스러웠다.

한없이 굴욕적이던 그 세월을 자신의 삶에서 통째로 도려내고 싶었다.

그러나 과거의 두려움과 상처는 언제나 해리스의 발목을 잡아, 제이드를 계속해서 의심하고 경계하게 했다.

두려웠으니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면, 본모습과 속내를 알면…….

“……알면?”

맑게 울려오는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해리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알면, 어떻게 되는데요?”

제이드의 손이 자신의 흉측한, 검은 핏줄이 선 뺨을 어루만졌다.

푸른 눈이 다정히 그를 직시해 왔다.

던전을 가득 덮친 파도가 이제 그녀에게까지 물결치고 있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제이드는 피부로 이해했다. 이 언노운 던전이 사실상 최종 보스로 해리스를 택했다는 걸.

그런데도,

“해리스 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그가 걱정스럽고 마음이 아렸다.

그녀에겐 보였다. 어른의 껍데기를 아래의 어린아이가. 아직도 손목과 발목을 옥죄는 억제구에 벗어나지 못하고, 쇠창살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그가.

“괜찮아요.”

믿을 수 없어도. 제이드는 속삭였다.

“믿지 못해도, 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이드는 알았다. 해리스는 천성적으로 누군가를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걸.

배신의 대가를 너무 이르고 아프게 겪었으니까.

왜인지 울고 싶었다.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욱신거렸다.

‘내가 당신의 구원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게 마법 같은 힘이 있어서, 기적처럼 당신을 치유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더는 당신이 과거의 아픔에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괜찮아요, 해리스 님.”

제이드는 약간 쉬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내 몫이 아니지.’

나는 가이드가 아니니까. 어느덧 검은 파도가 그들의 가슴팍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질척이는 새까만 액체는 촉수처럼 사지에 달라붙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이드는 두 손으로 해리스의 얼굴을 쥐었다.

‘진짜가 아니라도, 지금 당신 곁에 있는 건 나니까.’

눈을 감은 제이드가 해리스에게 입을 맞추었다. 진정제를 입 안에 머금은 채.

처음도 아닌데 떨렸다.

입술과 입술이 겹쳐지며, 제이드는 소망했다. 그의 어둠을 모두 내가 삼킬 수 있기를.

“……!”

해리스의 적안은 아득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꼴은 여전히 추했다. 거기다 공작저 사람들 모두가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던 때보다도 더 흉악한 광경을 만들어낸 뒤였다.

그런데도, 너는 내게 입을 맞춘다.

어떤 꼴이라도 상관없다는 듯, 자신으로 대해주는 온기에 닿고 나서야 해리스는 깨달았다.

더는 상관없다고.

여전히 믿을 수 없고, 두렵고, 불안하더라도. 설사 정말로 제이드가 자신을 버리게 된다 해도,

그래도 자신은 제이드를 거부할 수 없다.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 끝이 전과 똑같은 파멸이라 해도.

떨리던 해리스의 눈꺼풀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듯 천천히 감겼다. 그는 온몸으로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검은 파도가 그들을 삼켰다.

* * *

그로부터 제이드가 깨어난 건 한참 뒤였다.

[축하드립니다! <무너진 신전에서 탈출하라> 퀘스트가 달성되었습니다.]

“……응?”

제이드는 열 오른 얼굴로 눈을 찌푸렸다.

‘퀘스트? 달성……?’

아, 제이드는 천천히 떠올렸다.

마지막 기억은 검은 파도에 갇혀 해리스에게 입을 맞추던 순간이었다.

‘진정제 포션을 먹였지.’

다량의 사심을 담아서. 제이드는 헤헷 웃었다. 그게 어떻게든 됐구나.

할 수 있는 게 그뿐이었다.

그 엄청나던 검은 파도를 흡성대법으로 다 흡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에이드리안의 파장 가이딩으로 해결될 단계는 한참 지났고, 남은 건 뭐 가짜 진정제인 자신과 진정제 포션뿐이었으니까.

‘뭐, 어떤 원리로 해결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던전은 나오긴 했구나, 해리스는 어떻게 됐지?

“제이드.”

더 생각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눈두덩이를 덮어왔다.

“더 자.”

서늘한 손길. 나지막한 목소리.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해리스.’

멀쩡해졌구나. 다행이야……. 제이드는 안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해리스는 그런 제이드를 바라보며 그녀를 토닥이고, 작게 자장가를 속삭였다.

그녀가 한때 자신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잘 자, 제이드.”

마차의 창문 바깥에 푸른 하늘이, 그리고 웅장한 성이 스쳐 지나갔다.

드디어 수도였다.

* * *

“……쿨럭!”

어둠 속, 시체처럼 뻗어 있던 몸이 피를 토하며 깨어났다.

듀크였다.

분신이 죽어 파괴되자 본신이 다시 깨어난 것이었다.

“커헉, 컥-!”

그러나 파괴된 분신이 전해온 것은 기억 말고도 더 있었다. 듀크는 살해당하는 고통에 벌레처럼 몸을 말며 죽도록 괴로워했지만,

“크, 하하하, 크하학-!!”

어느 순간부터 피로 붉어진 입술에서 나오는 것은 기침이 아닌 웃음이었다.

“하…… 좋아.”

희번덕한 눈이 미친놈처럼 번들거렸다.

죽음 중독.

그것이 듀크의 병명이었다. 죽이고 죽는 것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인지하고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중증의 정신병.

물론 희귀병이었다. 듀크 아인델타 외에는 병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듀크는 죽음으로 삶을 체감하는 광인이었다.

듀크는 인중을 붉게 적시는 코피를 거칠게 닦으며 처웃었다.

“제이드, 제이드…….”

극도의 고통으로 핏줄이 다 터져 벌겋게 변한 눈동자로, 듀크는 말했다.

“또 만나러 갈게.”

기다려.

히죽, 온통 피범벅이 된 얼굴이 웃었다.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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