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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102화 (102/119)

102화

기이하게도 해리스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둠에 숨겨진 얼굴은 평온하기까지 했다.

제이드가 화를 내고 있고 어쩌면 용서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알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안도감이 있었다.

이제 제이드는 도망치지 못한다.

‘계속, 이러고 싶었지.’

해리스는 담담히 인정했다. 계속 이렇게 제이드를 가둬두고 싶었다. 영원히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이 옳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일이 자신을 아버지와 똑같은 꼴로 만들리라는 것을 알아서.

‘이유는 다르지만.’

해리스 비소했다. 감금 생활이 사람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는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제이드가 손에 닿지 않는 느낌이 들 때마다 충동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가 이토록 동요한 것은 던전이 보여주었던 ‘미래’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계에서 버려지고 버리는 사람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욕망.’

상대에서 얻어낼 게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겪어도 곁을 떠나지 못한다.

반대로 어떤 것도 원하지 않거나,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버리기 전부터.

그에게 가문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고귀한 황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그녀의 남편이 될 자격을 얻을 방법.

그리고 자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황녀를 가족으로 묶어둘 수 있는 연결 고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로서의 가치는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사라졌고, 해리스에게 남아 있던 ‘고드윈 공작 가문의 후계자’라는 가치는 무의미했다.

고드윈 공작은 가문에 어떠한 애착도 욕망도 없었으니까.

불쾌하게도 해리스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도 고드윈 공작 가문이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공작이 되었을 때도 해리스는 무덤덤했다. 본디 자신의 것을 되찾았을 뿐인데 기뻐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초조해졌지.’

자꾸만 제이드가 자신에게서 도망칠 것 같아서.

불확실하던 의심은 던전에서의 ‘미래’를 통해 확신으로 변했다. 그것은 실체 없는 불안이 아니라 근거 있는 두려움이었다.

‘제이드는 언제나 나를 떠날 수 있어.’

내게 원하는 것이 없으니까.

물론 해주석을 바란다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구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해주석을 구한 뒤에는 어떻게 되지?

그 의문 뒤에 오는 공백이 해리스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해주석이라는 족쇄가 너를 내 곁에 묶어두지 못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더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면 되잖아, 해리스의 속마음이 속삭였다.

제이드가 요구하지 않아도, 욕망하고 원하는 것을 계속해서 가져다주면 네 곁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나도 알아.’

그러나 그는 제이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맛있는 음식이나 값비싼 의상, 온갖 금은보화로 둘러싸인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삶. 모두를 무릎 꿇리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권력.

그런 것들이라면 얼마든지 베풀 수 있었다. 자신이 해주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네가 원하나?’

그는 제이드가 좋아했던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이상한 통속 소설이나 달콤한 디저트, 비단으로 만든 드레스와 안락한 침실.

그러나 그것들은 제이드에게 있으면 좋고 없어도 상관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정말로 그런 것들에 죽고 못 살았다면, 자신과 함께 던전에 가겠다 고집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너는 무엇을 바라지?’

대체 무엇으로 너를 묶어둘 수 있을까. 답을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해리스 님!”

어둠을 가른 제이드가 빛처럼 등장한 것은.

* * *

‘하, 이젠 또 어쩌지.’

나는 눈을 감아도 떠도 바뀌지 않는 상황에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난 이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환자로 살아오며 이런 한도 끝도 없는 어둠에 적응해 버린 덕분이었다.

‘신약이나 수술로 의식이 날아갔을 때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때는 이토록 정신이 또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백지가 된 것도 아니었다.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무한한 암흑. 거기에 잠기지 않게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이를테면 해리스라든지.’

나의 최애가 언제 또 등장할까. 이번 에피소드에는 나올까?

그런 상상을 하면 어둠은 나만의 안락한 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이 어둠은 지금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해리스의 마음 한편에 늘 고여 있던 게 아닐까.’

그와 함께 떠오른 지하 감옥에서의 기억에, 나는 깨달았다.

던전이 행한 정신 공격은 해리스가 치유하지 못한 과거의 트라우마였으리라.

‘그거 치명타지.’

나야 해리스가 어딘가 곁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만, 어렸던 해리스는 철저히 혼자였을 것이다.

감금과 고독.

정신이 무너지고 미쳐버릴 법한 일이다. 단순히 고통스럽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큰일이다.’

나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해리스, 광폭화 상태구나!’

가이딩을 요구하다가 감금한 건 그래서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이래서 던전에서 무사히 나가라는 게 퀘스트였군.’

괴물을 죽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살아나가는 것부터 무리라서…….

‘하하, 망했네.’

언노운 던전에 듀크에 미친 드래곤, 거기에 광폭화한 해리스까지 나타났다.

극단적인 상황이 몰아치기를 반복하니 나도 슬슬 미쳐가는 기분이다.

‘진짜 이쯤 되면 온 세계가 나보고 뒤지라고 고사 지내는 거 아냐?’

흥, 내가 순순히 뒤질 줄 알고?

이쯤이면 오기다. 보란 듯이 탈출하고 말겠어!

“해리스 님. 내보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답이라도 해주세요.”

혼자는 싫단 말야. 내 중얼거림에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왜.”

듣고 있구나.

나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을 응시했다. 저기 어딘가에 해리스가 있다.

즉, 나만 감금한 게 아니다.

‘좋아, 약간 안심이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적어도 혼자 둔 건 아니니까. 나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더듬더듬 나아갔다. 그리고…….

“찾았다!”

나는 해리스를 붙들었다. 어둠 속 움찔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가라, 흡성대법!’

이 어둠을 삼켜봐!

술래잡기는 술래를 잡으면서 끝나고, 어둠은 주인을 찾으면서 부서지기 시작했다.

“해리스 님, 대체 왜……!”

이런 거냐고 물으려던 나는 말문을 잃었다.

* * *

“……해리스 님?”

해리스는 굳었다. 갑자기 제이드가 어둠을 깨뜨리고 나와서가 아니었다.

‘역겨워.’

투명한 제이드의 눈동자에 반사된 자신의 몰골 때문이었다.

하얀 피부 위에는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검은 핏줄이 돋아 있었고, 눈은 악귀처럼 시뻘겠다.

“……보지 마.”

해리스는 자신이 대단한 미남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타인의 미추에 무관심한 성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드가 자신의 외형에 깊이 심취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종종 자신을 멍하니 응시하다 뺨을 붉히곤 했으니까.

그나마 제이드가 자신에게서 ‘원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데.

“나를, 그렇게 보지 마.”

불안정한 목소리.

해리스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려던 순간이었다.

“아, 진짜!”

제이드가 두 팔을 잡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별로 안 이상하거든요? 잘생긴 얼굴 가리지 좀 마세요!”

안 그래도 멋대로 가둬서 화났는데 얼굴까지 가려? 가산점마저 없앨 셈이냐!

언제나처럼 제이드의 얼굴을 읽은 해리스는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풀이했다.

“……안 이상해?”

“네? 당연하죠.”

원판 불면의 법칙 모르냐? 해리스 급의 퇴폐미남은 검은 핏줄이 돋아도 할로윈 분장일 뿐이다.

“…….”

이번에도 제이드의 얼굴을 읽은 해리스는 얼이 빠졌다. 내 얼굴이 그렇게 좋다고?

반대로 해리스의 생각을 읽어내지 못한 제이드는 물었다.

“아니, 해리스 님은 왜 그렇게 자신에게 가혹하신 거예요?”

“……가혹해?”

“생각해 봐요.”

제이드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물었다.

“어떤 소년이 있어요. 죽을 듯 고통스러운 각성을 홀로 이겨낸 아이예요. 그런 애가 있으면 보통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별로라고 생각해요?”

“……아무 생각 안 해.”

해리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정직히 대답했다.

“그 새끼가 나랑 무슨 상관이야.”

“…….”

멘탈이 부서진 상황이라도 싸가지는 그대로구나.

‘그래, 그래야 내 해리스지.’

제이드는 대답을 듣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그렇게 힘겨운 각성을 이겨낸 아이가, 아버지에게 학대당하고 감옥에 수년간 갇혀버렸어요. 그런데도 기어이 탈출해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되찾았-”

“그만.”

이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 건지 깨달은 해리스가 제이드를 막았다.

“네가 있어서 탈출한 거잖아. 뭘 말하고 싶은진 알겠지만, 난…….”

“아뇨.”

제이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아니라도, 해리스 님은 언젠가 혼자 탈옥하셨을 거예요. 해리스 님은 본인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거든요?”

“…….”

해리스는 제이드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탈옥이 아니라, 자신이 대단하다고 믿는 그녀의 마음이.

“그러니까 자꾸 그렇게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제이드의 손이 자신의 흉한 뺨을 감쌌다. 그 온기에 해리스는 깨달았다.

‘네가 나를 버리면,’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겠지.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었던 그 어떤 고통보다도 괴로울 거야.

“……네가.”

해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제발 말해줘. 알려줘.

그게 무엇이든 줄게. 어떻게든 구해 올게.

너만 내 옆에 있다면, 네가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

“저요?”

갑자기? 갸웃거리던 제이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야 뭐, 해리스 님이 행복하시길 바라죠.”

제이드는 가볍게 말했다. 말에는 무게가 없었으니까.

그 말이 그에게 얼마나 무겁게 다가올 줄 모르고서.

가짜 진정제한테 집착하지 마세요, 흑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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